〈 126화 〉 교국으로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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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접 잘 받았습니다. 그러니 슬슬 우리를 초대하신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
저녁도 먹었고, 차도 마셨다.
그러니 슬슬 우리를 초대한 이유를 물어도 되겠다는 생각에 운을 뗐다.
앤더슨도 그리 생각했는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 예. 대륙에서도 몇 없는 마스터에 도달하신 분과 연을 쌓기 위해 초대를 했습니다. 좀처럼 없는 기회니까요. ”
“ 헬레나의 직위보다는 그 점에 중점을 두신 겁니까? ”
“ 그렇습니다. 다른 나라의 공작과 안면을 트는 것도 충분한 의미가 있겠지만 마스터와 연을 튼다는 것보다 앞서지는 않을 겁니다. ”
앤더슨은 미사여구 따위는 하나도 없이 담백하게, 정확한 요점만을 입에 담았다.
이리저리 빙빙 돌려 말하거나, 말을 꾸며 말하는 이들이 많은 귀족답지 않았다.
“ 마스터로서의 저와 연을 트고 싶다고 하셨지요. 정확히 무슨 뜻인지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
가만히 듣고만 있던 헬레나가 찻잔을 식탁 위에 내려놓으며 물었다.
어둠을 밝히는 샛노란 불빛 아래 비치는 눈빛이 차분하면서도 날카로운 느낌이었다.
칼집에서 튀어나오기 직전의 칼날 같기도 했다.
혹시 나만 이렇게 생각한 것이 아닐까 착각할 법도 했지만, 앤더슨도 그를 느낀 듯 어딘가 주춤거리는 기색을 보였다.
묵직하기 그지없어 보이는 남자라 한들 헬레나의 압박감은 이기기 어려운 것 같아 보였다.
“ …자세한 사정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만, 언젠가 큰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
“ 제가요? 소테른 왕국의 공작으로서 제국 정치에는 전혀 끼어들 생각이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생각하는 제가? ”
“ 공작님께서 그럴 생각이 없으셔도… 상황이 그렇게 만들 가능성이 아예 없지는 않다고 봅니다. ”
상황이라.
듣는 입장에서는 상당히 의미심장할 수밖에 없는 단어를 듣자 긴장감이 고조됨을 느꼈다.
분명 협박을 생각도, 그럴 수도 없음을 아는 눈치인데도 제법 도발적인 말을 꺼냈다.
그것도 오늘 처음 얼굴을 마주하는 제국 귀족이.
나는 그 점이 몹시 신경 쓰였고, 헬레나도 그렇게 생각하는 듯 미간을 곱게 찌푸렸다.
화가 난 것이 아니라, 어딘가 찝찝한 일을 접하면 종종 저런 표정을 짓고는 했다.
“ 그 자세한 상황이 뭔지는 말씀드릴 수 없다는 거죠? ”
“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연을 터 두면 서로에게 좋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때가 오지 않으면 좋겠지만… 앞일은 알 수 없는 법이니까요. ”
누군가 이 자작의 영지를 먹으려 드는 놈이 있는 건지, 아니면 제국에도 있을 파벌끼리 문제가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워낙 애매하게 말하는지라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말투에 묘한 확신이 깃들어 있어 내심 환장할 노릇이었다.
더구나, 나쁜 뜻이 있어서가 아님을 알 수 있기에 조금 강하게 나가기도 애매했다.
“ 하아……. 알겠습니다. 지금은 안면을 튼 것으로 만족하죠. 그 자세한 이야기라는 건 언젠가 들을 기회가 있을 것 같으니까요. ”
“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생각지도 못한 기회를 잡게 해 주신 점, 감사드립니다. 거기다……. ”
자작은 잠시 말꼬리를 흐리며, 헬레나를 향하던 시선을 내 쪽으로 돌렸다.
눈빛을 보니 내게도 할 말이 남은 듯한 눈치였다.
“ 무언가 하실 말씀이 남으셨습니까? ”
“ …아니요. 없습니다. ”
할 말은 있는 것 같은데 굳이 삼간다라.
아마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누군가의 심기를 크게 건드릴 것이 아닐까 싶다.
침음을 흘리며 억지로 침묵하는 자작을 보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오늘, 이렇게 초대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 저야말로… 초대에 응해주셔서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
억지로 캐묻는다 해서 대답할 위인도 아닌 것 같으니, 이쯤에서 인사를 하고 떠나가는 것이 옳아 보였다. 그렇기에, 헬레나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마지막 인사를 주고받았다.
앤더슨 클로스 자작.
마지막에 찝찝함을 남긴 채 우리를 배웅하는 남자의 이름을 되뇌며, 내성 밖으로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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찝찝하지만 의미 있는 만남을 거친 후.
나는 짐마차를 몰며 교국으로 향하고 있었다.
지금 속도라면, 아마 반나절 정도 안에 교국의 문을 두드릴 수 있을 듯싶었다.
교국 각지에 수도원과 신을 모시는 사제들이 있다고는 하나, 강한 축복을 받으려면 수도까지 가야만 했다.
결국, 교국에 도착하고도 며칠은 더 마차를 몰아야 한다는 뜻이다.
“ 제국 살림이 어려운가? ”
마차를 몰며 심심하던 중, 아무 의미 없이 말을 툭 던졌다.
어찌 보면 아무 의미 없는 혼잣말 같이 들릴 법도 했지만, 다행히 옆자리에 앉아 있던 헬레나가 한숨을 쉬며 답해 주었다.
엘렌과 이브는 내기에서 졌기에 당분간 짐칸 신세다.
“ 글쎄? 영토가 넓은 만큼 생산량도 많고, 전쟁도 없어서 재정적 부담은 없지 않을까. ”
“ 그런데 왜 도적이 세 차례나 튀어나온 걸까. ”
나는 짐칸에 고이 실어둔 무기들을 거론하며 한숨을 토해냈다.
무섭고 든든한 누나들이 버티고 있어 안전 문제는 없어도, 마차가 상하지 않도록 신경을 쓰느라 약간 피곤했던 탓이다.
“ 도적은 어느 시대, 어느 상황에도 있기 마련이잖아. 물론 나라가 혼란스럽고 어지러울수록 그 수가 많아지지만… 평화로운 시대라도 절대 없어지지는 않을 거야. ”
마치 병에 든 사람이나 사고를 당하는 사람이 꼭 하나씩은 생기듯, 도적 또한 그런 것일까.
뜬금없이 세상 이치에 대한 자그마한 깨달음을 얻은 것만 같았다.
“ 그래. 그렇겠지. ”
세 여자들이 가지고 있는 힘을 고려해 보면 여유롭기도 해서 도적들을 죽이진 않았다.
그저 무기를 빼앗고 엉덩이에 피멍이 들도록 두들겨 주었다.
남의 땅에서 피를 묻히는 것이 찝찝하기도 했고, 꼭 죽일 필요가 없는 사람을 죽이고 싶지도 않았으니까.
“ 참. 대공님. 이 땅에 간자를 보내실 생각이시라면서요? ”
적당히 무거운 이야기를 나누던 중, 짐칸에 앉아 있던 엘렌이 눈을 빛내며 한층 더 무거운 이야기를 꺼냈다.
어젯밤, 세 부인들을 양 팔에 낀 채 잠깐 내뱉었던 이야기였다.
이렇게만 말하면 내가 쓰레기 같지만… 아무튼.
“ 앤더슨 자작이 입에 담았던 말들이 너무 신경 쓰여서 그래. 아마 그 남자도 내심 그래주길 바라는 것 같기도 하고……. ”
“ 제국의 자작이요? ”
“ 내 생각은 그래. 아니라면 그렇게 찝찝한 여운을 던져줄 리가 없었을 테니까. ”
마스터와 안면을 트고 싶다는 말은 그 힘을 쓰고 싶다는 말과 거의 똑같은 뜻이다.
물론 평소에 미리미리 안면을 익혀 위험할 때 도움을 받고 싶다는 뜻도 있겠지만, 어쩐지 그것 뿐만은 아닌 눈치다.
좀 더 공격적인 상황에서 도움을 청하고 싶어 하는 것만 같았다.
마스터를 공격적인 상황에 쓴다.
전략적으로도 아주 합리적인 판단이 아닐 수 없으나, 제국에도 마스터는 있다.
큰 영토와 많은 인구가 덕분에 마스터가 나오기 쉬운 환경이기도 하니… 잊을 만하면 꼭 마스터 하나 정도는 배출하곤 했다.
“ 혹시 공작님과 그 제국의 마스터를 싸움 붙이고 싶어 하는 걸까요? ”
“ 그럴 가능성도 아예 없다고는 말 못하겠는데… 붙인다고 붙을 헬레나는 또 아니잖아. 마스터끼리 칼로 대화하는 건 국가 차원에서 말리니 이루기도 어렵고. ”
“ 아… 그렇겠네요. ”
강하기에 다루기 골치 아프기도 하지만, 동시에 국가 위신을 살려주는 것 또한 마스터다.
그렇기에 좋은 대우를 받는 것이 당연하기는 한데, 때로는 그 대우가 간섭이 되기도 한다.
되도록 마스터가 위험에 처하는 것을 피하도록 압박하는 것이 그 중 하나였다.
만에 하나 예상하지 못한 사고라도 나서 마스터를 잃기라도 하면 큰 손해가 난다.
덕분에 마스터는 무력을 상징하는 존재임과 동시에, 신줏단지 모시듯 고운 취급을 받는다는 모순과 함께 살아갔다.
그저, 마스터의 의지가 확고할 경우 크게 의미 없는 간섭이기는 하나… 대체로 그 간섭에 따라주는 편이긴 했다.
귀가 따가운 소리를 들어가면서 까지 고집을 부릴 상황이 잘 없는 덕이었다.
집착이 심한 헬레나가 유별날 뿐이지.
“ 아무튼, 남의 나라 돌아가는 사정까지 알고 싶지는 않았는데… 찝찝한 걸 그냥 넘기기도 그래. ”
“ 대공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저도 힘닿는 대로 도와드릴게요. 용병 시절에 제국 땅도 제법 돌아다닌 적이 있으니까. ”
엘렌은 솔선하여 나를 돕겠다고 말하자, 헬레나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이브는 한쪽 구석에서 풀이 죽은 채 가만히 쭈그려 앉아 있었다.
제법 풀이 죽은 기색이었다.
“ 괜찮아. 엘렌이 도와주지 않아도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그 대신 호위에 신경 써 줘. ”
“ 에이. 말 몇 마디 건네는 것 정도야 별 어려운 일도 아닌 걸요. 가는 길에 지도 정도만 구하면……. ”
“ 괜찮다니까. ”
노골적으로 점수를 따려는 여자와, 그를 막으려 하는 여자 사이에 불꽃이 튀었다.
엘렌은 히죽히죽 웃으면서도 틈을 노렸고, 헬레나는 여전히 거슬린다는 듯한 기색으로 눈을 날카롭게 치뜨고 있다.
아마, 이대로 가만히 놔두면 또 시끄럽게 싸울 지도 모른다.
그 경우엔 정신이 없기는 해도, 정신없는 만큼 시간 하나는 잘 간다.
하지만 그만큼 마음이 피곤하다.
“ 둘 다 그쯤 해 둬. 더 하면 엉덩이 때린다? ”
“ …어?! ”
본래 엉덩이를 때린다는 말을 들으면 흠칫하는 척이라도 할 법 한데,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 내게 다가왔다.
그것도 모자라 아이처럼 눈을 반짝이며 기대감에 넘치는 모습을 보였다.
그래. 다 내가 잘못이지.
잘못이긴 한데, 어쨌든 골치 아픈 일을 피해간 것 같아 다행이었다.
“ …일단 여관부터 잡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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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을 이용한 다양한 기적을 일으키는 인간.
게임에서는 주로 보조계열에 속하며 같은 파티에 속한 사람을 강화하거나 회복하는데 도움을 주는 직업.
그것이 내가 아는 판타지의 성직자였다.
이곳도 마법이나 마나라는 개념이 상식으로 퍼져 있는 세계이니만큼, 내가 아는 성직자 또한 존재했다.
단순히 종교를 파고드는 사람이 아니라 진짜 기적, 신성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신성력은 사람에 따라 다른데, 기사가 마나를 쌓는 것과 다르게 믿음이나 마음가짐의 영향이 크다고 한다.
“ 축복을 받으러 왔습니다. ”
그래서 우리는 교국의 수도에 위치한 대성당까지 발을 옮겨 한층 강한 축복을 얻고자 했다.
어차피 얻을 축복이라면 좀 더 강한 것이 좋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교국의 각 지방에도 축복을 내려주는 이들이 있긴 하지만, 수도에 사는 이들보다 그 정도가 약했다.
이러니 기왕 축복을 받을 거라면 수도에 가자는 생각을 하기 쉬우나, 막상 이곳을 찾는 이들이 많지는 않았다.
세속적인 목적으로 축복을 요구하러 왔기에 세속적인 대가, 즉 돈을 많이 내야 하는 탓이다.
단, 그렇다 해서 그 돈이 전부 윗분들의 호주머니로 들어가는 건 아니었다.
대륙 곳곳에 위치한 수도원을 유지하거나 어려운 사람을 돕기 위한 자선금으로 많이 활용된다고 한다.
내가 알던 성직자들과는 사뭇 다른, 진짜 성직자다운 모습이었다.
“ 그렇군요. 따라오시죠. ”
하얀 옷을 말끔히 차려입은 사제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한 발 먼저 성당 안으로 향했다.
그의 등 뒤를 따라 가보니 어딘가 빛이 바래 있으면서도 깔끔한 내부가 눈을 사로잡았다.
화려함도 있지만 단지 그 뿐만은 아니었다.
또한, 사제는 다크엘프인 엘렌을 성당 안에 들이고도 눈썹 하나 꿈틀대지 않았다.
단상에서 기다리고 있던 노인도 그러했으며, 그 주위를 지키는 두 명의 사제들도 그러했다.
다크엘프의 인식을 바꾸기 위한 일들이 빛을 발한 것일까.
아니면 원래부터 차별의식이 없는 것일까.
나로서는 잘 모르겠지만, 꺼리지 않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제법 호감이 갔다.
“ 어떤 이유로 축복을 받고자 하십니까? ”
“ 네. 올해 안에 아이를 가질 예정인지라, 그 아이가 무사히 태어날 수 있도록 하는 축복을 받고 싶습니다. ”
“ …아이는 소중한 법이지요. 그를 위해 여기까지 먼 걸음을 옮기신 것 같으니, 아주 훌륭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
사제를 대표해 물음을 던졌던 노인은 내 답이 만족스러웠는지, 인자한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덕분에 분위기가 한층 더 부드러워짐을 느낄 수 있었다.
남자 하나에 여자가 셋임에도 기묘하게 여기는 티도 안 냈으니까.
“ 여러분 사이에 이어진 인연의 끈이 질기고 튼튼한 것을 보니 서로가 서로를 아낌을 아주 잘 알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부정하다고 느낄지 모르겠지만… 화목함이 있어 부정하다고는 하기 어렵겠지요. ”
순간, 깜짝 놀란 나머지 헛바람을 삼킬 뻔했다.
눈앞의 노인이 마치 내 생각을 꿰뚫어 본 듯한 말을 중얼거렸기 때문이다.
“ 아…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
“ 허허. 별 말씀을요. 아무튼, 먼저 남성께 축복을 드려야 겠군요. 이름을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
“ 지온 크라우저입니다. 한 때는 알트람이었지요. ”
축복은 받는 사람의 이름을 읊으며 진행된다고 들었으니, 이름을 묻는 것이 당연했다.
그렇기에 나는 거짓 없이 내 이름을 입에 담았다.
“ 지온 크라우저라. 알겠습니다. 그럼……. ”
노인이 하얀 빛이 맴돌기 시작하는 손을 내 오른쪽 어깨에 얹었다.
햇빛과 뒤섞여 그런지 한층 더 눈이 부셔,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눈이 타들어갈 만큼 강렬하지는 않으나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 내 이름을 입에 담으며 천천히 기도문을 읊어 나가던 노인의 목소리가 갑자기 뚝 그쳤다.
감은 눈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던 빛도 약해져 있었다.
무슨 일일까.
호기심에 눈을 떠 보니, 눈동자가 흔들리는 노인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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