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의 기둥서방이 되었다-125화 (125/192)

〈 125화 〉 교국으로 #4

* * *

“ 마차를 사러 오셨다고요? ”

“ 음. 교국까지 다녀오려면 마차가 좋을 듯싶더군. 하지만 그 외에는 쓸 일이 없으니……. ”

“ 아. 우선 완전히 사들이는 식으로 대여를 하고 싶다는 뜻이군요. ”

제국의 항구에 내려 숙소를 구한 뒤, 나는 홀로 짐마차를 사러 시장에 와 있었다.

물론 혼자서 가겠다고 말하는 순간 세 여자가 기다렸다는 듯 기를 쓰고 말리긴 했었다.

그 탓에 잠깐 불몽둥이 찜질로 말을 듣게 만들어야만 했다.

밝은 오후임에도 약간 어지러움을 느끼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헬레나나, 엘렌, 그리고 이브까지.

길을 거닐고 있으면 자연스레 눈길을 끄는 여자들이라,이럴 때 만큼은 데리고 오지 않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되도록 조용히 거래를 마치기 위해서라도.

“ 으음… 제법 좋은 상회 출신이시기도 하니 믿지 못하는 건 아닙니다. 다만 그렇게 하실 경우 되파실 때는……. ”

나는 상인과 비용 문제로 대화를 주고받으며 합의점을 찾으려 애썼다.

어차피 교국과 이 도시 사이를 오고 갈 때나 쓸 뿐, 굳이 공작령까지 끌고 갈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번거롭기만 하다.

그렇기에 약간 손해를 보더라도 마차를 사들여 상인의 안심을 샀다.

긴 거리를 이동하다 오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고, 그 과정에서 마차를 잃어버릴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상인도 그를 잘 아는지, 대여에서 구입으로 말이 바뀌자마자 눈을 반짝였었다.

“ 알겠습니다. 이곳에 다시 들르실 때 마차의 파손 정도에 따라 금액의 변동이 있겠지만… 확실하게 사들이기로 하지요. ”

“ 잘 생각했소. ”

나는 상인과의 합의를 거친 뒤, 짐마차를 끌고 시장을 돌았다.

도로가 넓은 구역이라 그런지 마차 한 둘 정도 지나도 거슬리는 느낌이 없었다.

마차를 끄는 나나, 마차를 피해 걷는 사람들이나.

시장을 돌아다니는 이유는 별 거 없었다.

여기에서 교국으로 가려면 육로를 이용하면 되는데, 대략 이틀 정도 걸린다.

마차를 급히 몬다면 훨씬 더 빨라지겠지만 그럴 필요는 없어 보였다.

한시 바삐 축복을 받지 않으면 죽는 것도 아니니까.

“ 이걸로 주시오. 그 다음엔……. ”

마차를 끌고 야영에 필요한 장비나 텐트 부속품을 구하고, 주로 말린 먹을거리를 위주로 사들였다.

야채 같은 것은 내일 출발할 때 먹을 만큼만 사 가면 될 듯싶었다.

“ 후우. ”

슬슬 익숙해질 법도 하건만, 여전히 어깨에 힘깨나 준 것 같은 말투를 쓸 때 마다 신경이 곤두섰다.

평생이 가도 이럴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영 판단이 안 서는 탓이다.

나온 김에 챙길 것도 다 챙겼겠다, 숙소에 돌아가면 잠이나 잘까. 아니면 다른 짓을 할까.

나는 머릿속에 떠도는 생각 중 어느 것을 따라야할지 고민하며 조심스레 마차를 몰았다.

다행히 말들도 순한 놈들이라 별 탈 없이 앞을 향했다.

“ 부지런하시군요. ”

숙소 뒤쪽에 마련된 마구간에 마차를 놓고 말을 묶어놓던 중,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뒤를 돌아봤더니, 정말 평범한 차림의 남자 하나가 만면에 미소를 띤 채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분명 겉보기엔 평민처럼 보이나 눈빛이나 말투가 평민과는 아주 거리가 멀었다.

제법 뼈대 있는 집안, 예를 들면 어설프지 않은 귀족의 아래에서 일을 하는 사람만이 보이는 모습이었다.

“ 누구시오? ”

나는 여전히 입에 붙지 않는 말투를 최대한 자연스레 써 가며 물었다.

척 보기에 굳이 평민처럼 변장을 하고 온 사람처럼 보이는지라 긴장을 놓을 수가 없었다.

“ …실례했습니다. 저는 클로스 자작님의 밑에서 일하고 있는 밴틀리라고 합니다. ”

밴틀리라 이름 댄 수염 난 남자가 참 정중하게 허리 숙여 인사를 했다.

반듯한 자세와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연륜이 심상치 않았다.

마치 크라우저 저택에서 일하는 앤디를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 자작님의 밑에서? 그런 분이 내게는 무슨 볼일이십니까?? ”

나는 허리를 세우며 시선을 던지는 밴틀리를 향해 물음을 던졌다.

얼굴 한 번, 하물며 그 이름조차 모르는 귀족 밑에서 일하는 사람이 왜 찾아왔는지 이해를 못 할 노릇이었다.

다만 귀족이 불렀다 했으니 위축된 척 연기했다.

상인 신분으로 위장 중이니까.

그러나, 밴틀리는 이미 다 꿰뚫고 있다는 듯 여유로운 미소를 띠며 입을 열었다.

“ 자작님의 신분을 듣고 겁먹은 척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한 나라, 한 영지의 대공이시라면 그래서는 안 될 일이지요. ”

“ 그게 무슨……. ”

“ 허허. 은근히 장난스러운 면이 있으시군요. 지온 크라우저 대공님. ”

순간 너무 놀라 헛바람을 삼킬 뻔했으나, 억지로 태연한 척 하며 입을 다물었다.

언제부터 들켰는지는 몰라도, 내 이름을 콕 집어 말하는 걸 보니 잡아뗄 수도 없을 것 같았다.

더구나, 되도록 숨겨야 할 뿐이지 무슨 일이든 숨겨야 할 것도 아니었던지라, 어깨에 힘을 빼고 입을 열었다.

“ 언제부터 아셨습니까? ”

“ 대공이 배에서 내리실 때부터 알았습니다. 마주하는 영애들의 가슴에 불을 지핀다는 모습과, 그 곁을 따르는 여성분들이 아주 눈에 잘 들어오더군요. ”

“ 이런. 이럴 줄 알았다면 좀 더 신경을 쓸 걸 그랬습니다. ”

역시 변장을 해야 했던 걸까.

나는 때늦은 후회를 목구멍 아래로 삼키며 가벼운 한숨을 흘렸다.

최소한 시차를 두고 따로 내렸다면 의심의 눈길을 피해 볼 법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영애 이야기의 진위여부는 둘째 치더라도.

“ 그렇다 해서 용모를 너무 감추시면 반대로 눈에 띄기 마련이지요. ”

“ 그것도 그렇겠네요. 아무튼, 그 자작님의 밑에서 일하시는 분이 제게는 무슨 볼일이십니까? ”

“ 한 나라의 대공께서 모처럼 이곳에 오셨으니, 부족하나마 가볍게 대접이라도 하고 싶어 하십니다. 물론, 대공님이 허락하신다면. ”

그 상인 놈과 있었던 일이 퍼지지 않은 건지, 아니면 퍼져 있어도 별 상관없는 것인지는 모른다.

일개 상인의 일이라며 선을 긋고 넘어갈 수도 있을 테니까.

단지, 밴틀리의 우호적인 태도를 보니 썩 나쁜 의도로 초대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애초에 껄끄러움을 느끼고 있다면 사람을 보내 초대를 할 리도 없겠지.

나는 상대의 꿍꿍이도 알아낼 겸, 또 이곳 자작의 얼굴도 한 번 익혀볼 겸 알겠다는 뜻을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

“ 앤더슨 클로스 자작이라. 대체 무슨 생각일까? ”

해가 지기 시작하는 초저녁.

나는 옆에서 함께 걷는 헬레나의 말을 가만히 들으며 자작의 내성으로 향했다.

왕국의 귀족들이 중심지에 저택을 짓고 지낸다면, 이곳 제국의 귀족들은 저택 대신 자그마한 내성을 짓고 산다.

문화의 차이였다.

본래 귀족에게 초대받은 귀족이 걸어서 찾아가는 법은 드무나, 너무 눈에 띄지 않고 싶다는 이유로 걸어가기를 택했다.

그 덕에 밴틀리가 식은땀을 흘리며 당황해하기도 했었다.

고로 엘렌과 이브도 숙소에 남겨둔 채로 왔다.

밤에 먼저 안아주겠다는 약속 덕분이었다.

“ 글쎄. 보통 제국 귀족과 왕국 귀족은 만날 일이 잘 없잖아. 이참에 얼굴 구경이라도 하고 싶은 게 아닐까? ”

“ 혹시… 그 자작이라는 놈이 남색가인 건 아닐까? ”

“ 그건 아닐 거야. 부인이 둘에 아이가 다섯인데, 남색가라면 그럴 수가 없겠지. ”

남색가, 즉 게이라. 나는 헬레나의 엉뚱한 추리에 답하며 피식 웃었다.

정말로 게이라면 의무감에 몇 번 관계를 가질 법도 하겠지만, 굳이 부인을 둘이나 둘 이유도, 아이를 다섯이나 낳을 이유도 없었다.

기껏해야 한 부인에 하나씩, 총 둘. 혹은 후계의 안정감을 고려해 둘에 하나 정도로 만족했겠지.

다만, 만약 자작이 남자여자 물불 안 가리는 놈이라면… 그건 좀 고민을 해 봐야 할 문제일 것 같다.

나는 게이가 아니니까.

“ 다 왔네. 숙소랑 거리가 가까워서 그런가. ”

“ 안 그랬으면 걸어갈 생각도 못했겠지. 말을 타고 도로를 달려야 했을 거야. ”

이런저런 잡담을 주고받는 사이, 어느새 자작가의 울타리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철창으로 만들어진 정문은 어느 귀족 저택에서나 볼 법 했지만, 그 너머에 우뚝 선 탑 같은 내성이 참 이질적이었다.

끼이익. 마침 마당을 돌고 있던 하인 하나가 우리를 보더니, 부리나케 달려와 신분 확인도 않고 문을 열어주었다.

아무래도 밴틀리가 세세한 정보를 이곳 사람들에게 전부 뿌린 듯싶었다.

“ 어, 어서 오십시오. ”

하인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용케 허둥대지 않고 우리를 안내했다.

자작 밑에서 일하는 사람이라 그런가, 손님을 다루는 법이 자연스레 몸에 배인 모양이었다.

나는 헬레나의 손을 꼭 쥔 채 드디어 내성 안으로 들어섰다.

내부 구조는 귀족의 저택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면이 있었고, 그 중에서 가장 특이한 것이 성벽 곳곳에 뚫린 작은 구멍이었다.

“ 농성할 때 상대를 저격하려고 뚫어놓은 것 같아. 위치가 절묘해. ”

“ 응. 물자만 충분하면 제법 오래 버텨볼 만 하겠어. ”

낮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는 동안, 은근한 긴장감이 어깨를 묵직하게 만들었다.

만약 다른 제국 귀족들도 이런 내성에서 산다면성을 공략하는 데 어지간히 골치 아플 것이 분명했다.

새삼 내 옆을 지켜주는 여자가 얼마나 무서운지 느끼는 순간이었다.

만약 내가 없었다면 지금쯤 이런 내성 몇 개쯤은 박살내고도 남았을 테니까.

“ 죄송합니다. 제가 직접 모셨어야 했는데……. ”

안내를 받아 중층에 다다르자여러 하인들을 부리고 있던 밴틀리가 황급한 걸음으로 달려와 고개를 숙였다.

지금 입고 있는 복장이나 행동을 보니 집사임이 분명한데, 그 집사가 손님을 대접하지 못했다.

아마도, 그는 그런 상황에 죄송스러움을 느끼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 괜찮습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처음 보는 내성 구경을 하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몰랐습니다. ”

“ 으, 으음.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참. 자네는 그만 가 보게. 손님들은 내가 대접할 테니. ”

밴틀리는 우리를 안내하던 하인을 노련하게 일터로 보낸 뒤, 앞장서서 위층으로 올랐다.

제법 높고 넓은 원통형의 성이라 끝없이 올라야 하는 것이 약간 불편했을 뿐, 건강에는 참 좋을 것 같았다.

혹시, 제국의 귀족들은 그 효과를 노리고 성을 이렇게 만든 것이 아닐까? 계단 오르기는 건강에 좋다고 하니, 아예 가능성이 없다고 할 수도 없을 것 같았다.

똑똑.

“ 주인님. 손님 분들을 모시고 왔습니다. ”

“ 음. 모시게. ”

인기척이 드문 높은 층의 한 방에 다다르자, 밴틀리가 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문 안쪽에 있을 누군가가 제법 중후한 목소리를 내며 그에 답했다.

아마 미리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밴틀리는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문의 손잡이를 잡고, 우리가 통과할 수 있도록 조심스럽게 문을 열어주었다.

“ 들어가시죠. 곧 차를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

그는 가볍게 고개 숙여 인사를 마친 뒤, 아주 매끄러운 동작으로 자리를 떴다.

복도 구석으로 향하는 것을 보니, 아마 저쪽에 주방이 있는 듯싶었다.

이렇게 넓고 높은 성에 주방이 하나만 있을 리는 없을 테니.

“ 반갑습니다. 앤더슨 클로스입니다. 소테른 왕국의 크라우저 공작님과 대공님을 진심으로 환영하는 바입니다. ”

여럿이 둘러 앉아 식사를 하는 듯한 넓은 식탁.

그 가장 상석에 앉아 있던 남자가 몸을 일으키더니, 고개 숙여 인사를 건넸다.

목소리에 맞게 인상이나 태도 또한 제법 묵직했다.

“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헬레나 크라우저입니다. 제 남편은 아시고 계실 테니… 굳이 소개를 드릴 필요는 없겠지요. ”

헬레나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받자, 몸을 일으킨 앤더슨이 자리를 권했다.

당연히 상석에서 가장 가까운 자리라 생각했는데 상석 그 자체를 권했다.

내 기준에선 제법 진땀 흐르는 상황이었다.

“ 상석은 집의 주인이신 자작께서 앉으셔야죠. ”

“ 저와 같거나 급이 낮은 귀족이라면 그리 하겠지만… 아득히 높으신 공작님을 두고 상석에 앉을 수는 없겠지요. ”

“ 제가 부담이 되어 그래요. 부디 자리를 지켜 주세요. ”

헬레나 또한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진절머리를 낼 만큼 당황해했다.

그 탓에 생각지도 않은 미묘한 설전이 두 사람 사이를 오고 갔으나, 결국 헬레나의 승리로 끝이 났다.

얌전히 상석에 앉은 자작이 그 증거였다.

“ 그래요. 주인은 주인의 자리가 있고, 손님은 손님의 자리를 지켜야 자연스럽지요. 지온은 어떻게 생각해? ”

“ 옳은 말이야. ”

나는 헬레나의 뜻에 공감하며 자작의 옆에 자리를 깔고 앉았다. 자작을 가장 상석에 두고 나와 헬레나가 마주보는 구도였다.

음.

자작은 자리에 앉은 우리를 슥 훑으며 눈을 마주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 차를 마시고, 식사를 나누며 가벼운 환담을 나눈 뒤에 본론을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궁금하신 점은 많겠지만, 대접도 않고 이야기를 꺼내는 건 큰 실례일 것 같아 내린 결정입니다. 혹시 불편하시다면……. ”

“ 아뇨. 괜찮습니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

밥을 준다는 데 마다할 이유는 없지.

나는 말꼬리를 흐리는 자작을 향해 가볍게 웃으며 답했다.

설령 독을 탔다 하더라도 이브가 준 매직 아이템을 목에 걸고 있는 중이다.

그렇기에 나나 헬레나나 독으로 위험에 처하지는 않겠지.

그러니, 지금은 적당히 말을 맞추며 상황을 지켜보는 것이 옳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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