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3화 〉 교국으로 #2
* * *
바르칸 백작령이라.
빚을 지워 둔 것도 있고, 같은 국왕파이기도 하기에 썩 거북하지만은 않은 곳이다.
물론 백작 측에서는 우리를 거북하게 여길 수도 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애초부터 크라우저 공작령은 바르칸 백작을 포함한 국왕파의 머리였기에.
“ 바다로 나가보는 건 처음이라… 정말 괜찮을까요? ”
이브는 바다로 나갈 생각을 하자 다소 불안한 모양이었다.
내륙에서 태어나 내륙에서만 살아나왔으니 그럴 만도 했다.
마법사로서 마탑에 박히거나, 우리 영지에 박혀 연구만 하던 인생이었으니까.
“ 처음 배를 타면 멀미 때문에 고생할 수도 있지만… 그 외엔 괜찮을 거야. ”
“ 정말요? ”
“ 그럼. 어제도 말했지만 날씨도 나쁘지 않고, 해양에는 몬스터도 없으니까. ”
헬레나는 불안에 떠는 이브를 부드러운 말투로 달래며 웃었다.
척 보아도 말과 표정에서 여유가 느껴지는 것이, 이브가 조금이라도 빨리 불안을 떨쳐낼 수 있도록 애쓰는 모양새였다.
덕분에 이브도 한결 불안이 가신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어도 미약한 정도였다.
이게 흔히들 말하는 정실의 품격일까.
나는 전과 다르게 첩에 해당하는 두 여자를 잘 어우르는 헬레나를 보며 대견함을 느꼈다.
지금도 침대에서 내보이는 질투는 여전하지만, 그 외에는 대인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장 지금 대화를 이끌어가는 모습만 보아도 그 차이를 알 수 있었다.
“ 와아…! 귀부인들이 걸치는 드레스가 그렇게 비싼 건가요? ”
“ 비싸지. 대부분의 귀족은 치장에 돈을 많이 들이거든. 계급이 높을수록 비싼 소재를 사용해 아름다운 드레스를 만드는 건 귀부인들 사이에서 일반적인 일이야. ”
“ 어? 그렇지만 공작님께서는 늘 기사단에서 애용하는 정복만 입으시잖아요. ”
“ 나는 귀부인이 아니라 공작이기도 하고, 검을 쥐고 사는 사람이기도 하니까. 무엇보다도……. ”
헬레나가 갑자기 대화를 끊고, 나를 향해 야릇하기 그지없는 시선을 보냈다.
눈을 가늘게 뜨는 모양새나 살짝 붉어진 뺨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아마도 반쯤 장난이겠지.
엘렌도 그를 눈치 챈 듯 눈을 감은 채 고개만 끄덕였다.
이 마차 안에서는 오로지 이브만이 왜 저런 표정을 짓는지 알 수 없다는 듯한 기색을 띠고 있었다.
“ 내 살결을 보이고 싶은 사람은 한 사람 뿐이거든. 물론 드레스보다 편해서 입는다는 이유도 있지만… 요즘은 그 이유가 가장 커. ”
“ 아……. ”
스윽. 헬레나가 자기 허벅지를 손으로 쓸며 뜨거운 숨을 흘렸다.
이브는 그 의미를 모르는지 답을 듣고 만족해 할 뿐이었다.
아마 저것이 유혹이라 이해하는 건 발랑 까진 셋뿐이리라.
끼익.
내가 유혹을 받을지 말지 고민하던 중, 마차가 소리를 내며 천천히 멈춰 섰다.
보통 이럴 때는 무슨 일이 생겼나 생각하기 쉽겠지만, 시간이나 위치로 보았을 때 야영을 하려는 것 같았다.
“ 공작님. 오늘은 이쯤에서 야영을 할까 하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
마차 문을 똑똑 두드린 뒤 얼굴을 내민 브라운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석양이 희미한 여운처럼 타오르고 있어, 곧 저녁이 될 것 같은 시간이다.
지금부터 야영 준비를 하고 여독을 조금이라도 푸는 것이 좋았다.
“ 우리도 도울게요. 브라운은 마차를 모느라 피곤할 테니, 잠깐 쉬고 있어요. ”
“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공작님이 일손을 거드는 것도 문제인데. 저 같은 놈이 감히 넋 놓고 구경만 하라는 건 안 될 일입니다! ”
브라운은 한 발 먼저 마차에서 내리는 헬레나를 보며 질색을 했다.
하인 된 입장에선 주인이 일하도록 내버려두는 것도 불편한데, 하물며 그걸 손가락 빨며 지켜보라 말하면 저럴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어찌 보면 그냥 죽으라는 말과 비슷할 만큼 부담을 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도 헬레나의 뜻에 동의했다. 브라운은 좀 쉴 필요가 있었다.
예전이라면 모를까, 지금은 나를 포함해 일손도 넷이다.
굳이 신경을 곤두세우며 마차를 끌고 온 브라운까지 거들게 할 필요가 없었다.
“ 브라운. 헬레나의 말 대로 하세요. ”
“ 아니, 대공님까지 이 무슨……. ”
나는 마차에서 내려 브라운의 어깨를 두드려 주고는, 헬레나의 뒤를 따라 짐칸에서 제법 굵직한 지지대와 텐트의 기반이 되는 천을 꺼냈다.
어느새 엘렌이나 이브도 마차에서 내려 야영 준비를 돕고 있었다.
여러 영지를 이동하는 사람은 야영에 익숙해질 수밖에 없으며, 귀족이라 해도 그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오히려 나고 자란 영지를 떠날 일이 잘 없는 보통 사람보다 훨씬 익숙했다.
영지와 영지 사이엔 길밖에 없었으니까.
물론 그 귀족들 대부분은 우리처럼 텐트를 설치하는 등 일손을 거들진 않는다.
그들 입장에서는 지켜보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 지온. 여기 좀 밟아 줘. ”
“ 아, 그래. ”
나는 헬레나의 지시에 따라 텐트의 끈이 묶인 핀의 머리를 꾹 밟았다.
보통 메마른 땅에 지지대를 설치하거나 핀을 박으려면 간단한 망치질 정도는 해야 했지만, 부드러운 흙에 파묻히듯 쑥쑥 들어갔다.
오러를 담아 밟았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잠깐의 시간을 들인 끝에, 마차 바로 옆에 작은 텐트 하나와 큰 텐트 하나를 만들었다.
아직 해가 제자리에 있는 것을 보면 시간도 얼마 걸리지 않은 모양이다.
“ 이 사실이 큰 어르신께 알려지면 경을 치실 텐데……. ”
“ 알려질 일이 없는데 무슨 걱정이세요? 그리고 아버지라면 이 정도로 화내지도 않으세요. ”
헬레나는 피식 웃으며 브라운을 달래곤, 허리춤의 검을 뽑아들었다.
얼핏 말과 행동이 들어맞지 않는 모습이라 기겁할 법도 했다.
그러나 브라운을 베기 위해 검을 뽑은 것은 아니었다.
그저 오늘 쓸 땔감을 마련하기 위함이었다.
보통 검으로 나무를 벤다는 미친 발상은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된다.
아무리 명검이라 한들 단칼에 나무를 벨 수는 없기 때문이다.
막 자라기 시작한 앙상한 가지 같은 나무줄기라면 모를까, 통나무는 못 벤다. 날이 나가거나 검이 부러질 확률이 높았다.
다만, 검에 오러를 씌워 휘두르면 상식과 다른 광경을 낳을 수 있었다.
헬레나는 가볍게, 바람이 뺨을 스치듯 빠르게 오러 소드를 휘둘러 깔끔한 흠집을 냈다.
단순히 날의 길이가 짧기에 단숨에 벨 수 없었을 뿐, 검이 스쳐간 자리를 아주 깨끗이 도려냈다.
그렇게 두어 번 검을 휘두르자, 나무가 쿵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 엘렌. 이 나무들 좀 옮겨 줘. 이브는 힘이 없으니… 나무가 모이면 불을 붙여주고. ”
통나무를 채썰기 하듯 토막 내던 헬레나가 명령을 내리자, 두 여자가 기다렸다는 듯 지시에 따랐다.
물론 나 또한 나무를 옮기며 손의 부담을 덜어주려 했다.
가만히 지켜만 봐도 되었으나 찝찝함이 등을 떠민 탓이다.
엘렌은 시킨 대로 반듯하게 잘린 장작을 반듯한 모양새로 쌓았고, 이브가 마법으로 불을 붙였다.
본래 불을 붙이느라 제법 고생을 해야 했던 시간을 생각하면 장족의 발전이 아닐 수 없었다. 이게 다 위대한 마법의 은총 덕택이다.
덕분에 불 앞에 앉아 한가로이 잡담을 나누고, 텐트에 들어가 쉬는 시간이 늘었다.
불침번은 마법으로 대체했기에 괜찮았다.
잠을 자려는 와중 텐트의 공간이 썩 넉넉하지는 않아 자연스레 몸을 붙여야 했고, 그 과정에서 이런저런 일이 있기는 했다.
어떻게든 잘 달래 재우기는 했지만 참 피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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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서 오십시오. ”
다음 날 이른 오후.
나와 헬레나는 바르칸 백작령에 도착하자마자 백작을 찾아 인사를 나눴다.
놀라지 말라는 뜻에서 미리 방문 의사를 밝히긴 했지만, 직접 인사를 나누기도 해야 했다.
달랑 편지 한 장 보낸 뒤에 휙 떠나면 무시당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심어 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물론, 직접 찾아와 부담을 주는 것 보다 나을 수 있다는 생각도 있지만… 이렇게 하는 편이 체면 세워주기가 좋을 듯싶었다.
“ 네. 오랜만에 뵙네요. 갑작스레 연락을 하고 왔으니 당혹스러울 법도 하셨을 텐데……. ”
“ 무슨 말씀을. 공작님이라시면 언제든 환영합니다. ”
헬레나와 백작이 바르칸 저택 홀에서 반갑게 손을 잡으며 인사를 동안, 눈으로 저택을 훑어보고 있었다.
전에 들렀을 때와 크게 변한 것이 없는 것 같았다.
대를 이어 지내는 저택이니 당연한 일이겠지.
“ 대공께서도 잘 오셨습니다. ”
“ 네. 환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내게로 향하는 손을 맞잡으며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결혼식에도, 그 후에도 몇 번 봤었으나 이 저택에 들르는 건 참 오랜만이다.
그러니 묘한 반가움이 느껴질 수밖에.
바르칸 백작도 그리 생각하는 듯, 평소보다 좀 더 들뜬 기색을 보였다.
자기 집이라서 그럴 수도 있고, 아니면 나와 같은 생각을 했을 수도 있었을 것 같다.
“ 교국으로 가신다고 하셨지요? ”
“ 예. 교국 근처에 있는 제국의 항구에 내리고, 거기에서 마차를 빌린 뒤 교국으로 갈까 합니다. ”
“ 그렇군요. 교국이라… 저도 아내의 회임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들렸던 기억이 납니다. 그 당시엔 바쁜 일이 겹쳐 참 정신이 없었지요. ”
백작이 아련한 눈빛을 띠며 미소 지었다.
묘하게 초점이 몽롱한 눈이, 마치 보이지 않는 과거를 눈으로 쫓는 것만 같았다.
또 생각지도 않은 대화로 시간을 끌기도 했지만, 썩 나쁘진 않았다.
얼핏 듣는 사람 입장에선 피곤하기만 할 뿐 아무 관심도 못 가질 법 해 보여도, 은근히 흘러 들어오는 정보가 제법 쏠쏠했다.
“ …아 참! 이거 실례했습니다. 옛 추억을 입에 담으면 이래서 문제에요. 즐겁긴 하지만 저도 모르게 정도를 지나치게 되니까. ”
“ 괜찮습니다. 오히려, 생각지도 못한 백작님의 옛 이야기가 아주 재미있었습니다. ”
“ 허허.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참 다행입니다. ”
백작은 무안한 듯 헛기침을 하며 목청을 가다듬다,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아직 부끄러움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듯 얼굴도 살짝 붉고, 미소도 약간 어색한 감이 있었다.
“ 으흠! 아무튼, 제국으로 항구가 목적지라면 이틀 후에 출항하는 배가 있습니다. 그걸 타고 가시면 될 것 같군요. ”
“ 이틀 뒤에요? 생각보다 빠르네요. ”
“ 뭐, 정작 발달된 항구가 따로 있어 대공께서 목표로 삼으신 곳은 왕래가 조금 뜸하긴 합니다만…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뜸할 뿐이지요. 왕래하는 빈도 자체는 제법 됩니다. ”
“ 그렇군요. 하지만, 그걸 고려해도 시기 자체를 제법 잘 잡은 것 같습니다. 운이 좋았네요. ”
최소 일주일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는데 이틀이라.
생각보다 빨리 다녀올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마음이 제법 편해졌다.
“ 만나 뵙게 되어 즐거웠습니다. 그럼, 우리는 이만 물러날까 합니다. ”
“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희 저택에서 머무르시지 않고요? ”
“ 우리가 있으면 백작께서도 불편하실 겁니다. 저희가 전하를 집에 뫼시고 머무르는 것과 비슷한 경우일 텐데, 집에서는 마음이 편하셔야지요. ”
나는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한 백작을 조심스레 달랬다.
전에 저택에 들렀을 때는 귀족 아가씨와 그 종자였으나, 지금은 엄연한 공작과 대공이다.
그 때의 헬레나도 사실상 공작이었다고는 하나, 진짜 공작위를 물려받기 전이다.
지금과 사뭇 무게감이 다를 터였다.
그러니 백작의 집에서 머무르는 것보단 정체를 숨기고 적당한 숙소를 잡는 것이 맞았다.
적어도 내 생각은 그랬고, 헬레나도 그에 공감했으니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 아니. 절대 그렇지가 않습니다. 오히려 대공이나 공작님을 바깥에서 재우면 그게 더 곤란한……. ”
“ 배려해 주시는 건 감사합니다만… 배를 잡아주시는 일에도 신세를 졌는데, 더 이상 폐를 끼치면 마음이 무겁습니다. 대신이라고 하긴 뭣하나, 떠나기 전에 한 번 더 들르겠습니다. ”
“ 으음……. ”
급 높은 귀족을 직접 모시는 것이 당연한 세상이라고는 하나불편함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니다.
설령 백작에게 있어 영광스러운 일이라 하더라도 평소보다 신경을 더 쓸 것이 분명했고, 결국 피로가 쌓이고 말겠지.
지금이야 제 도리를 다하지 못해 불편하다 생각은 하겠지만, 결국 잠시 뿐이다.
우리가 머무름으로써 생기는 스트레스를 겪는 것보다야 나을 것 같았다.
다만 백작의 생각을 알 수 없어 내 잣대로 결론 내렸을 뿐이나, 나쁜 선택은 아니라 확신했다.
“ 하는 수 없지요. 대공의 뜻이 그러하다면 그를 존중하겠습니다. 아마 공작님께서도 같은 생각이시겠죠? ”
“ 그야 물론이죠. ”
헬레나는 고급 저택을 등지고 보통 여관을 잡는다는 소리에도 웃으며 답했다.
본래 소탈한 면이 있고, 긴 야외훈련도 소화하며 살아 온 덕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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