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의 기둥서방이 되었다-119화 (119/192)

〈 119화 〉 마법사의 순정 #2

* * *

왜 그가 데려오는 여자는 하나같이 골칫덩이일까.

헬레나는 눈앞에서 쭈뼛거리며 눈치를 보는 소녀, 이브를 바라보며 일부러 감정 없는 표정을 지었다.

최대한 마음을 비워 차분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한 여자만 바라보기 질려 후처를 만드는 것이 귀족의 생리이기는 하나, 지온 크라우저는 그런 것도 아니라 신기했다.

그런데도 그가 데려온 엘렌이나 이브, 두 여자 모두가 똑같은 남자를 마음에 품게 되었다.

더구나 그 여자들이 현재 영지에 있어 없어서는 안 될 인물이 되었기에 쉬이 내칠 수도 없었다.

헬레나가 가장 답답하게 느끼는 점이 바로 이것이다.

물론 자기 품에서 그 남자를 빼앗으려 한다면 무슨 일이 있더라도 막았을 터였다.

죽여서라도 그리 했을 터였다.

하지만 이 여자들은 영악하게도 뺏는 것이 아닌 허락을 구했다. 영악하게도.

“ 하아──. ”

헬레나는 영주로서의 판단력이 아직 남아있음을 원망하며 숨을 토해냈다.

곁에서 돌봐주는 남자가 없었다면 진즉 미쳐 돌아버렸을 테지만, 그렇지 못했기에 여전히 남아 있는 이성을.

“ 오늘 부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

일단 복잡한 것은 복잡한 대로 내버려두고, 할 일은 마쳐야 한다.

헬레나는 이브의 속내를 확실히 캐내기 위해 거침없이 질문을 던졌다.

남자로서 좋아하냐, 아니냐.

실로 간단하기 그지없는 질문이었으나, 듣는 입장에서는 몹시 답하기 곤란한 질문이었다.

그 답이 명쾌히 정해져 있음에도 목구멍에 걸린 가시마냥 토해내기가 어려웠다.

“ …죄송합니다. ”

죄송하다. 얼핏 들어보기엔 질문에 대한 답 같지 않은 한 마디다.

하지만 헬레나에게, 혹은 답을 듣는 입장에 있는 이에게 있어서는 확실한 답이 되었다.

죄송하다는 말은 곧 마음에 품었다는 답과 똑같은 말이었으니까.

“ 그래요. 그렇다 이거죠. ”

“ 목을 내놓으라 하시면… 내놓겠습니다. 제 분수에 넘치는 분을 마음에 품고 말았으니까요. ”

“ 목. 목이라……. ”

이브는 이리 될 줄 알고 있었다는 듯 덤덤하게 답한 뒤, 고개를 숙였다.

올리비아가 찾아와 질문을 할 때부터 일이 심상치 않게 돌아간다는 것을 알았고, 지온을 끔찍이 아끼는 공작의 귀에 이 이야기가 들어가면 어떻게 될지도 알았다.

그럼에도 이브는 도망치지 않고 공작령에 남아 있기로 정했다.

이유야 어찌되었던, 이브 그린우드라는 마법사의 가치를 인정한 여자의 결정이라면 달게 받아들일 생각이었기에.

헬레나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더 이상 그의 곁에 여자가 꼬이는 걸 용납할 수 없다면 단칼에 목을 자르면 그만이었음에도 망설였다.

귀족의 연회에서 홀리 하운드와 같은 여자가 아니라, 지온이 직접 데려온 인재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물론 그 이유 하나만으로 이브를 인재라 인정할 만큼 헬레나가 어설프지는 않다.

헬레나 자신의 눈에 찰 만큼 뛰어났기에 병단의 지휘권을 맡기는 것도 허락했고, 연구비와 재료도 넉넉히 지원했다.

그렇게 투자하여 여러 가지 성과를 일궈냈으며, 앞으로도 일궈 낼 가능성이 높았다.

분명 올리비아가 보고한 대로 순종적이다.

엘렌처럼 다 부숴버리겠다 협박했던 모습과 비교가 안 될 만큼.

더해, 이브는 헬레나 또한 지온과 비슷할 만큼 무겁게 여기고 있다.

이 이야기가 헬레나의 손에 칼이 들리는 것을 막는 가장 큰 이유였다.

아무리 헬레나라 한들 재주가 뛰어나며, 자기 좋다고 모시는 사람을 쉬이 해칠 수는 없었던 노릇이다.

“ 일단, 목은 보류하겠어요. ”

차라리 엘렌처럼 지온 알트람의 사랑에만 눈에 멀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게 아니라 문제다.

헬레나는 여전히 불안한 듯 눈동자를 굴리는 이브를 바라보다, 이마에 손을 얹었다.

“ 그 말씀은…? ”

“ 당신이 지온을 마음에 품은 건 괘씸하지만… 그 경우가 달라 쉬이 결정을 내리기가 어렵네요. 나중에 다시 부를 테니까, 오늘은 우선 돌아가요. ”

우선 고개를 갸웃거리는 이브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헬레나가 지금 내릴 수 있는 최선의 결정이었다.

.

“ 첩이 생기면 어떻겠냐고? ”

헬레나는 요 며칠 여자들끼리 할 이야기가 있다며 따로 자리를 가지곤 했다.

아마 첩이 생기면 어떻겠냐는 질문도 그 일 때문이겠지만, 참 뜬금없는 질문이 아닐 수 없었다.

“ 응. 물론 엘렌도 첩이기는 하지만… 첩을 여럿 거느리는 놈들도 많잖아. 지온은 그걸 어떻게 생각하는가 싶어서. ”

“ 그야 귀족들이 그걸 자연스럽게 여기니까, 나도 그럴 수 있겠거니 생각은 하지. ”

“ 첩을 더 들일 생각은 없어? 만일… 내가 용서한다는 전제 하에. ”

헬레나가 불안한 듯 눈을 흘기며 물었다.

정작 꺼내기조차 꺼림칙해 하고 있음이 분명한데도질문에 대한 답을 들어야 직성이 풀릴 것이라는 기색이다.

제법 심각한 일이 있었나보다.

아니면 남자로서의 의견이 필요했다거나.

아무튼, 내 답은 정해져 있었기에 별 망설임 없이 입을 열었다.

“ 전혀 필요 없어. 엘렌을 첩으로 들인 입장에서 말하기가 좀 그렇긴 한데, 진심이야. ”

“ 그럼… 엘렌도 억지로 안아주는 거야? ”

“ 헬레나가 듣기 불편한 답일 테지만… 내가 억지로 안는 것으로 보여? ”

애초에 고삐만 쥐고 있으면 그만이라 생각했었고, 엘렌이 폭주하지만 않았어도 그 생각이 변하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그저 흐름이 영 이상했기에 엘렌이 유산을 얻었고, 그로 인해 두 여자를 끼고 살게 되었을 뿐이다.

다만, 그렇다 해서 결코 억지로 이런 생활을 이어가는 것은 아니다.

나도 남자인지라 하양과 검정의 대조를 즐기며 더 흥분하니까.

“ 그건… 아니지. ”

헬레나도 그걸 아는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게 집착하는 입장에서는 듣기 꺼림칙한 답이었을 터. 하지만 나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

대충 넘기려 했다간 예의도 아니거니와, 더 수상쩍게 여겼을 테니.

“ 아무튼, 엘렌이 첩으로 들어와서 행복하긴 한데… 그렇다 해서 첩을 더 원한다는 건 아니야.

만약 엘렌을 꼭 첩으로 삼을 필요가 없는 상황이었다면, 굳이 첩으로 들이질 않았겠지. ”

엘렌이 들으면 상처를 받을 지도 모르나, 이게 내 진심이다.

이미 헬레나 같은 여자를 품에 안은 것만으로도 꿈같은 상황인데 뭘 더 바랄 것 까지도 없었다.

세 여자가 대륙을 말아먹는 꼴을 막는 것이 가장 큰 목적이니까.

“ …다행이야. 정말로. ”

사람이 진심을 다해 말해도 전해지지 않는 경우가 있긴 한데, 다행히 이번에는 잘 전해진 듯싶었다.

긴장감을 덜어낸 듯 한결 편해진 헬레나의 표정과 자신의 가슴팍을 쓸어 넘기는 손짓이 그 증거였다.

헬레나는 그렇게 안심에서 오는 여운을 만끽하다천천히 눈을 떴다.

차분히 가라앉은 기색을 보니드디어 본론으로 들어갈 모양이다.

“ 요 며칠 올리비아나 엘렌 등을 불러 얘기한 건 알고 있지? ” “ 알지. ”

“ 거기서… 이브가 지온을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어제 이브를 불러들인 것도 그 때문이고. ”

어쩐지.

늘 좋아하는 교접도 삼가고 꼭 안아달라는 말만 하더니, 다 그 때문이었나.

이제야 헬레나가 왜 그랬는지 알 것 같았다.

헬레나 입장에서는 마음이 답답할 테니.

“ 이브가? 왜? ”

“ 그건… 내 입으로 말하기 싫어. ”

왜 정녕 너만 그걸 모르느냐는 식으로 입술을 삐죽이기에 더 물을 수가 없었다.

내가 눈치가 빠른 편은 아니지만, 더럽게 눈치 없는 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아플 것 같아서.

“ 아무튼, 그래서 처리를 할지 말지 고민했었어. 어제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

“ 처리라면… 죽이겠다고? ”

나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물었다.

엘렌처럼 양패구상이 될 경우도 아니니만큼 진즉 일을 내고도 남았을 텐데, 그걸 참았기 때문이다.

“ 응. 그런데… 지온이 필요해서 데려온 사람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

내가 필요해서 데려왔다.

즉 내 수고를 헛되게 하지 않기 위해 죽였다는 뜻도 되었으나, 분명 그 이유 하나만으로 살려 두지는 않았을 것 같다.

아마 지금부터 말하려는 말이 가장 큰 이유겠지.

내가 숨을 죽이고 기다리자, 무겁게 닫혀 있던 헬레나의 입술이 열렸다.

“ 지온을 포함한 공작가가 좋다고, 그렇게 말해서… 쉬이 손대기가 어려웠어. ”

이브의 집착은 다른 사람들과 결이 조금 다르다.

나는 그 사실을 진즉부터 알고 있었지만, 헬레나는 이제 막 알아냈기에 몹시 혼란스러워 하는 기색이었다.

한 남자에 대한 집착과 그 남자가 몸담은 울타리에 대한 집착이 다르다는 것을 접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더구나, 아직 이브는 헬레나나 엘렌 같은 어두운 집착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혼란스러울 만하다.

“ 그래서… 어떻게 하면 좋을지 묻고 싶은 거야? ”

“ 응. 이런 결정은 나 혼자서도 충분히 내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도저히 답이 안 나와. ”

그래서 내 답이 필요하다는 건가. 나는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끄덕이며, 어떤 답을 내놓아야 좋을지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헬레나가 어떤 여자인지 되짚어 보기로 했다.

헬레나 크라우저는 부담감을 잘 느끼나 성실하고, 의무를 무겁게 여길 줄 안다.

그래서 홀로 지내다 그 의무감에 짓눌려 맛이 가 버린 성격이 되었고, 대륙을 휩쓰는 전쟁을 일으켰다.

물론 지금 현실이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그 성격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니다.

자유에 대한 집착이 나에 대한 집착으로 바뀌기는 했으나 여전히 성실했다.

흔히들 생각하는 집착 짙은 여자와 결이 다른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그렇지 못했다면 엘렌이 첩 자리를 내달라고 했을 때 전부 박살나고 말았을 것이다.

미쳐있음에도 어느 정도 주위를 볼 줄 아는 여자.

이것이 헬레나를 한 마디로 표현하기에 딱 어울리는 문장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나는 헬레나를 믿고 이렇게 이야기했다.

“ 헬레나가 죽여야겠다고 생각한다면 그렇게 해. ”

.

죽여도 좋다.

지온이 그렇게 허락한 이상, 당장 방해물을 치우자.

놀랍게도 이런 생각이 들기는커녕, 나를 믿는다는 그 한 마디가 가슴이 아릴 정도로 무겁게 느껴졌다.

믿음을 받는 것이 기쁘기는 하나, 그렇기에 배신 할 수 없었다.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리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로 인해 지온이 보일 반응을 생각하면 가슴이 짓눌리는 것만 같았다.

그 여자를 사랑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도, 그로 인해 지금 같은 사랑이 조금이라도 식는다면… 내가 견디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다른 눈으로 보기엔 티끌 같은 변화라 할지라도, 내겐 하늘이 뒤집힐 정도로 큰일이기에.

“ 후우, 후우……. ”

냉정하게, 차분하게 판단해야 한다.

욕심을 부리면 지금 당장은 좋을지 모르나, 그 뿐이다.

긴 생애 동안 맛보기엔 너무 짧은 행복이다.

엘렌도 그를 알기에 선을 지키는 것이리라.

오래 산만큼 나보다 더 절실하게 느낄 수밖에 없을 테니.

홀리 하운드나 가끔 지온에게 달라붙으려 하던 암컷들을 쫓아낼 때와 경우가 다르다.

나 스스로도 미쳐 있음을 잘 알지만, 죽여도 될 암컷과 그렇지 못한 암컷 정도는 구분할 줄 알았다.

바라지도 않았던, 부담스럽기만 했던 교육의 힘 덕택에.

한 번 양보할 수 있었으니, 두 번도 가능하다.

하지만, 부디 이번 양보가 마지막이 되기를 간절히 바랬다.

만약, 앞으로 적절한 인재를 데려 올 일이 생긴다면 지온이 아니라 내가 직접 손을 뻗을 생각도 굳혔다.

지온은 가만히 있어도 암컷이 꼬일 만큼 매력이 있으니까, 이브를 데려올 때와 같은 일이 생겨서는 안 될 일이다.

“ 만약 내가 허락지 않는다면 어쩌실 생각이시죠? ”

“ 평생… 이렇게 같은 땅에 머무르게 해 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요. 제게 큰 은혜를 베풀어 주신 공작님을 배신 할 수도 없고, 하고 싶지도 않으니까요. 믿기 어려우시다면 마나의 맹세로 증명하겠습니다. ”

해가 저물어가는 오후.

이브 그린우드의 나무집에서 그 주인과 마주앉아있던 나는, 질문에 대한 답을 듣고 완전히 결심을 굳혔다.

직접 이곳까지 걸음을 옮긴 보람이 있음을 느끼기도 했다.

정을 주지 않아도… 곁에만 머물러도 좋다.

그것도 마법사가 중요한 약속을 할 때 거론한다는 마나의 약속까지 들고 나왔으니 믿을 수밖에 없었다.

내 눈에도 한 소녀의 진심이 보이고 있었으니까.

이브 그린우드는 울타리를 중요히 여긴다.

나는 지온의 입술에서 흘러나왔던 그 말을 떠올리며, 무겁게 닫힌 입술을 억지로 벌렸다.

아마 해야 함을 알고 있음에도 표현하기 어려웠던 탓이리라.

그러나.

결국 무겁게 닫혀 있던 입술을 들어올렸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