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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의 기둥서방이 되었다-116화 (116/192)

〈 116화 〉 보복 #5

* * *

“ 안 돼. 절대 혼자는 못 보내. ”

킬리네어 공작에게서 탐색관 리스트를 받아 온 직후, 헬레나의 반대에 직면했다.

새빨갛게 들끓었던 피가 식자 본래의 차분한 모습을 되찾은 듯, 절로 수긍할만한 논리로 무장한 반대였다.

생각해보면 일리도 있고, 너무 성급한 것 같기도 했다. 전과 입장이 바뀐 상황에서 전과 같이 행동할 수 없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상인 놈에게 접근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놈은 엘프가 싸움을 건 이유를 대해 자세히 알고 싶어 했다.

그 말은 즉, 이대로 두면 엘렌이 유산을 얻었다는 정보까지 알게 될 거라는 뜻이었다.

다르게 말하면 조용히 살다 가려는 내 인생에 크나큰 장애물이 될 수도 있었다.

“ …미안해. ”

그럼에도, 결국 헬레나의 고집을 꺾을 생각이 전혀 떠오르질 않았기에 미안하다는 한 마디를 꺼내고야 말았다.

구구절절 옳은 것도 있지만, 내 걱정을 하는 마음을 짓밟기도 미안했기 때문이다.

그렇다 해서 헬레나나 엘렌을 데리고 가기엔 너무 눈에 띌 테니.

“ 이해해 줘서 고마워. 그리고… 나 미워하면 안 돼? ”

헬레나는 내 의지를 꺾은 것이 못내 미안했던지 불안한 기색으로 눈을 흘겼다.

나는 그에 고개를 저으며, 헬레나의 허리에 팔을 둘러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이럴 때는 말보다 행동으로 보이는 편이 훨씬 편하고 효과적이었다.

“ 안 미워해. 어쩔 수 없이 포기는 해야겠지만, 다 나를 걱정해서 한 말이고……. ”

“ 어? 나는 포기하라고 말은 안 했는데? ”

“ 뭐? ”

조용히 다녀오려던 나를 말렸으니 다 포기한 것이 아니었나?

나는 영문 모를 한 마디에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다행히 헬레나의 입술에서 친절한 설명이 흘러나왔다.

“ 책임감이 있는 건 지온의 좋은 점이지만… 너무 혼자 짊어질 것 없어. 공작가의 힘은 이럴 때 이용하라고 있는 걸. ”

“ 공작가의 힘이라면… 대대적으로 움직이겠다는 뜻이야? ”

“ 응. 그래도 공작가의 힘이라 할 정도로 거창한 짓은 안 하려고. 몰래 움직여야 좋으니까. 아무튼, 이야기가 나온 김에……. ”

헬레나는 갑자기 말을 끊더니,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던 하인 하나를 불러 이렇게 이야기했다.

“ 앤디에게 전해서 암살자 길드에 속한 인간을 몰래 데려오도록 해. 권한이 높은 인간일수록 좋아. ”

암살자 길드.

내가 그들과 처음 연을 트게 된 계기는 케인이 주도한 암살 때문이다.

당시 어렸던 나는 멋모르고 막사에서 쿠키를 구운 뒤 맛을 보았는데, 하필 그 반죽에 독이 들어가 있었다.

덕분에 나는 질긴 좀비의 육체를 가지고 어떻게든 버텼지만, 솔직히 오장육부가 뒤틀렸던 그 때의 경험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었다.

뇌를 꺼내 송곳으로 찌르는 것만 같은 날카로운 느낌이 너무 강했기 때문이다.

아마 치매에 걸려도 그것만은 잊지 않겠지.

아무튼, 그렇기에 여러모로 썩 좋은 관계는 아니었으나… 설마 헬레나의 입에서 그들을 이용하자는 이야기가 나올 줄은 몰랐다.

“ 알겠습니다. ”

명령을 들은 하인이 잠깐 낯빛을 굳혔으나, 곧 정신을 차린 듯 예의를 갖춘 뒤 집무실을 나갔다.

잠시 다크엘프 마을로 간 엘렌이 이 소식을 알면 제법 놀랄 테지만, 지금의 나만큼 놀랍지는 않을 것 같았다.

.

“ 오, 오랜만에 뵙겠습니… 다? ”

그 후로 며칠이 흐른 어느 늦은 밤.

이전에 루크와 입을 맞출 당시 엮였던 암살자 길드의 지부장이 직접 발을 들였다.

아는 얼굴이 찾아와 그런지 묘하게 반가운 느낌이 들었다.

그것이 설령 암살자라 할 지라도.

“ 네. 오랜만이네요. ”

헬레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권했다.

그와 처음 마주 했을 때는 적대감에 휩싸여 몹시 날카로운 기색이었는데, 오늘은 보통 사람을 대하듯 친절하고 부드러웠다.

지부장은 그 모습이 낯설었는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넓은 소파에 자리했다.

“ 오… 좋은 소파를 쓰시네요. 겉보기엔 소박한 감도 있지만 무척 좋은 품질입니다. 마치 내실이 강한 크라우저 공작령 같습니다. ”

“ 칭찬해 주셔서 고마워요. 늦은 시간이라 차 한 잔 밖에 내 드릴 수 없어, 대접이 소홀하지만……. ”

“ 어휴, 무슨 말씀을! 대공님께서 직접 우려주신 차를 마시는 데, 이만한 사치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

지부장은 호들갑스러운 몸짓을 보이며 차를 홀짝였다.

표정이 썩 나쁘지 않은 걸로 보아 최소한 무난한 맛이라 느끼는 모양이었다.

대접한 입장에서 보면 다행이라 할 수 있었다.

맛이 없어 찡그리는 것보다 훨씬 나았으니까.

“ 후우! 잘 마셨습니다. 그런데, 저를 은밀히 보자고 하신 이유는… 역시 저희 본업과 관련한 일입니까? ”

“ 아뇨. 저는 사람을 죽이려면 제 손으로 죽이지, 암살자 길드의 손을 빌리고 싶진 않아요. ”

지부장은 그 말을 듣기 무섭게 어깨를 움츠리며 굳은 표정을 지었다.

익숙한 나조차도 가슴이 서늘할 정도였으니, 익숙지 않은 그가 어떤 마음일지 충분히 상상이 갔다.

“ 그, 그러시군요. 과연 책임감이 느껴지시는 말입니다. ”

책임감이라. 지부장은 그 와중에도 제법 혀를 잘 놀리며 어색한 분위기를 풀어보려 애썼다.

헬레나도 그 정성이 갸륵하다 느꼈는지, 짤막하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했다.

“ 그런데, 암살이 아니라면 저희 길드를 부르신 이유가… 혹시? ”

“ 지부장이 짐작하신 대로, 미행을 시키고자 함이에요. ”

“ 아. 그랬군요. 저희가 암살자 길드는 맞지만, 미행도 잘 하는 편이죠. 좋은 선택입니다. ”

암살을 하려면 상대가 어디에 있는지, 주위 지형은 어떤지.

또 그 주위에 사람이 몇몇 있는지 등등… 여러 조건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를 알아내기 위해선 그 상대의 곁을 살피는 미행 기술이 필요했다.

즉, 암살자는 직업 특성상 미행도 잘 한다는 뜻이다.

“ 알겠습니다. 누구를 미행해서, 어떤 정보를 알아내길 원하십니까? ”

“ 아마… 이 영지에 머무는 엘프에 관해 여러모로 알아보는 이들이 있을 거에요. 그들을 찾아 뿌리를 캐내 주세요. ”

“ 어… 무척 죄송한 말씀이지만 너무 추상적이군요. 거기다 미행은 저희 길드의 특기가 맞습니다만, 미행 대상을 찾아내는 건 다른 문제라서……. ”

“ 음. 그렇군요. 메르카토르, 제국상회와 끈이 있을 인간이라는 단서가 있다면 어떤가요? ”

“ 제국상회 말씀이십니까? 제가 할 말은 아니겠지만, 참 골치 아픈 놈들과 엮이신 것 같네요. ”

내 말이 바로 그 말이다.

나는 지부장에 말에 공감한 나머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헬레나의 옆에 앉아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탓일지도 모르겠다.

“ 네. 놈들은 엘프에 관한 것을 무척 알고 싶어 하는 것 같더군요. 그러니 분명 움직일 것이라 생각해요. ”

“ 아하. 대놓고 제국상회의 간판을 걸고 들어오면 눈에 띌 테니, 연이 있는 다른 상단이나 위장을 할 것이란 뜻이군요. ”

“ 말씀하신 대로에요. ”

헬레나는 지부장의 의견에 공감을 내비치며, 옆에 놓아두었던 크고 묵직한 돈주머니를 테이블에 툭 하고 내려놓았다.

크기가 크기인지라 소리 또한 묵직하기 그지없었다.

“ 이것은…? ”

“ 착수금이에요. 여러모로 신경 쓸 것이 많으실 테니 우선 받으시죠. ”

“ 저야 감사합니다만… 착수금을 이렇게 주십니까? ”

“ 네. 일이 제법 길어질 지도 모르니까요. 더해, 제가 원하던 상황이 되었을 경우… 섭섭지 않게 보수를 챙겨 드리겠습니다. ”

지부장은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테이블에 놓인 돈주머니에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도중에 손을 잡거나 돈주머니를 빼돌리는 일은 없어, 그의 손은 순조롭게 돈주머니의 매듭을 잡을 수 있었다.

그리곤, 돈주머니를 자기 앞으로 끌어들여 매듭을 풀었다.

안에 든 액수가 정확히 얼마나 들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 저, 전부 금화라고?! ”

은화가 제법 섞였을 법도 하지만, 그 모두가 금화다.

그렇잖아도 돈이 많은 공작가의 공작인데, 돈도 별로 쓰지 않다보니 통이 클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 사정을 알지만, 지부장은 모른다.

그러니, 저토록 입을 쩍 벌린 채 놀라워하고 있겠지.

“ 이, 이정도면 특급에 해당하는 보수일 텐데 그걸 착수금으로…! ”

“ 어떠신가요? 받아들이시겠어요? ”

“ 물론! 받아들이지요! ”

금화에 눈이 뒤집힌 지부장은 단호하게 외치며,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의뢰를 받으며 먹고 사는 이들이라 그런가, 거대한 액수 앞에서 맥을 못 추는 모습이었다.

이 남자만 그럴 것일 수도 있겠지만…….

“ 맡겨 주십시오! ”

아무튼, 가슴을 탕탕 치며 의욕에 찬 모습을 보며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정보, 정보를 긁어 와라!

헬레나의 미행명령이 떨어진 후.

암살자 길드는 때 아닌 정보 수집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본래 암살을 위해 정보 수집을 아예 안 하던 것은 아니었으나, 본업이 아니었던지라 내부가 제법 떠들썩했다.

물론 수없이 펼쳐진 지부 전체가 한 사람의 의뢰를 위해 움직이는 일은 없어도, 지부장의 요청을 받아 정보를 보내주기 바빴다.

같은 암살자 길드이기 때문에 협업을 할 때도 종종 있어 어색한 일은 아니었다.

“ 음. 아주 좋군. ”

지부장은 사방에서 긁어 온 서류더미를 흐뭇한 눈빛으로 응시했다.

특별히 헬레나의 허락을 받아 크라우저 공작령에 임시 지부를 세워 그런지, 생생한 정보를 얻기에도 유리했다.

“ 엘프에 관해 묻는 놈들은 몇이나 추렸어? ”

“ 얼핏 지나가듯 묻는 놈이 서른. 그 중에서 좀 더 면밀히 묻는 놈이 열 넷 정도 있었습니다. ”

“ 음. 그놈들을 중심으로 사람을 붙여야 할 테지만……. ”

지부장은 사방에서 긁어 온 정보를 펼치며, 우선 뒤를 밟는 인간들을 전부 불러들이도록 명령했다.

미행의 끈이 끊어질 것을 우려해 교대 인원을 보내서.

잠시 후.

방에 모인 제법 많은 수의 암살자들을 슥 훑으며, 지부장이 입을 열었다.

“ 너희들이 감시한 놈들 중여기에 적힌 인물상세와 특징이 맞는 놈들이 있었냐? ”

미행에 전념하던 암살자들은 탁자에 어지러이 놓인 보고서를 집어 들었다.

상세한 인물 묘사와 나이, 그 외의 특징 등이 제법 상세히 적혀 있어 알기 쉽다는 느낌이 강했다.

그들이 자신에 손이 들린 보고서를 돌려 보며 보고 들은 것과 대조하기를 잠시.

몇몇 인간이 종이를 집은 손을 위로 들어올리며 말했다.

“ 이 종이에 적힌 놈과, 저희가 미행하던 놈의 묘사가 일치합니다. ”

“ 일곱이라? 제법 많이도 보냈군. 아무튼 잘 됐어. ”

지부장은 나머지 서류를 곱게 정리한 뒤, 암살자 무리가 손에 쥔 일곱 보고서를 쭉 훑으며 말했다.

“ 지금부터 저 일곱 놈을 집중적으로 미행해. 범위를 좁혔으니 굳이 더 넓게 조사할 필요는 없다. ”

“ 알겠습니다. ”

“ 지금 미행하고 있는 놈들에게도 알려. 어차피 놈들이 하는 일은 같으니까 이 정도만 해도 충분하다. ”

암살자들 또한 지부장의 판단이 옳다 판단했기에 두말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암살 실력만 가지고는 지부장 자리에 오룰 수 없는 만큼, 그 판단력을 믿었다.

후우. 지부장은 방에 모인 암살자들을 전부 보내버린 뒤, 의자 등받이에 늘어지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의욕 넘치게 시작한 것은 좋지만 범위를 좁히는 일부터 피곤했던 탓이다.

그럼에도 지금까지는 긴장감으로 피로를 잊었으나, 그 끝이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한 순간 어깨가 축 늘어지고 말았다.

“ 아이고, 지친다……. ”

지부장은 의자에 늘어진 채, 왜 헬레나가 이번 일을 지시했는지 생각했다.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자세한 사정을 묻지 않았으나, 궁금한 것은 어쩔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또한 사람이기에.

그 상인 놈들이 왜 엘프에 관한 정보를 캐내려 하는 것일까.

단순히 호기심 때문일까, 아니면 뒷심이 있다 생각한 것일까.

“ 에이 씨! 괜히 호기심이 생겨서 대가리만 아프네. ”

여러 가설을 생각해 보아도, 이렇다 할 만 한 명쾌한 답이 나오질 않는다.

지부장은 그에 짜증을 내며 머리를 깨끗하게 비우려 애썼다.

결국 헛짓거리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며칠 뒤.

지부장은 해가 저문 밤, 크라우저 저택을 찾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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