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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의 기둥서방이 되었다-115화 (115/192)

〈 115화 〉 보복 #4

* * *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름 크게 분풀이를 할 수 있었다.

멜로드 백작이 배후라 밝힌 상인은 제쳐두더라도 이번 청문회를 주도한 귀족들의 비리가 낱낱이 밝혀졌다.

우리 공작령은 클린경영을 밀고 나갔기에 괜찮았고, 엘프가 습격한 이유도 잘 얼버무려 무난하게 넘길 수 있었다.

이게 다 국왕이 내 요청을 받아들여 준 덕이다.

그 결과 재산은 재산대로 빼앗았고 기는 기대로 죽였다.

그러니 속이 후련해야 할 테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러질 못했다.

백작의 입에서 튀어나온 메르카토르 라는 놈 때문이다.

왜 제국의 상인이 왕국 귀족들 부추기며 우리를 몰아붙였는지.

또 그를 통해 어떤 이득을 얻으려 하는지를 생각하면 약간 답답했다.

“ 참… 면목이 없습니다. ”

한창 고민에 빠져 있던 중, 루크 킬리네어가 깊이 고개 숙여 사죄했다.

왕궁에서 떠날 준비를 하던 중 갑자기 찾아온 것도 놀라운데, 이렇게 고개를 숙이니 더 놀라웠다.

“ 공작님의 잘못은 아니지요. 그저 욕심에 눈이 먼 이들이 저지른 일이니까요. ”

나와 나란히 앉은 채 루크와 마주하던 헬레나가 눈을 감았다 뜨며 답했다.

그 말대로, 주모자가 아닌 이상 루크의 잘못은 아니었다.

같은 파벌에 속한 귀족이라고는 하나 철저히 옭아매기 어려을 터였다.

물론, 다른 귀족이 이와 같은 상황에 처했다면 다르게 생각하고 행동할 것도 같았다.

충분히 그럴 만한 일이기는 했으니.

“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내부 단속을 못한 제 잘못이 크니… 조만간 사죄의 뜻을 담은 위문품을 전하겠습니다. ”

“ 위문품을요? ”

“ 예. 어찌되었던 저와 가까이 지내던 귀족이 잘못했으니까요. 그에 맞게 성의를 보이고 싶습니다. ”

어찌 보면 귀족파로서 책임을 지겠다는 것 같기도 하다.

단지 그 뿐만이 아닌 것 같기도 하지만, 겉으로 내세우는 이유가 저러니 거절하기도 애매했다.

만약 필요 없다고 말한다면 아예 척을 지자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었다.

“ 알겠습니다. 공작께서 이렇게까지 말씀하시니… 계속 거절하는 것도 도의가 아니겠지요. 받아들이겠습니다. ”

“ 예. 다시 한 번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

루크는 다시 한 번 고개 숙여 미안하다는 말을 한 뒤, 느긋하게 객실을 떠났다.

분명 급해 보이는 모습이 아니었음에도 어딘가 조급함이 느껴지는 모양새였다.

제 할 말을 마치자마자 바로 떠나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루크가 물러나자마자 헬레나와 눈을 맞추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명분은 그럴싸한데, 그뿐만이 아니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질 않은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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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작님. 아무래도 너무 가혹한 결단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이렇게 되면 귀족파의 힘이 많이 약해질 텐데……. ”

“ 필요한 희생이었네. ”

킬리네어 공작령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

루크는 자신을 마주하며 걱정스러운 기색을 띠는 집사를 향해 덤덤한 투로 이야기했다.

“ 귀족은 귀족다워야 해. 그리고 귀족다운 귀족은 탐욕에 먹히는 것이 아니라, 탐욕을 다룰 줄 알아야 하는 법이지. ”

“ 즉, 그들은 귀족답지 못했다는 뜻이로군요. ”

“ 음. 더구나 고작 상인이 줄 이득에 정신이 팔려 공작을 공격하다니. 어리석은 것도 정도가 있어. ”

막상 큰 제물이 눈앞에 들어온다 생각하면 흔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그에 사로잡히지 않아야 진정한 귀족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이번청문회를 주도했던 놈들은 하나같이 졸속하기까지 하다고,루크는 생각했다.

“ 멍청한 놈들. 건드리지 말아야 할 것도 구분 못하는 안목으로 귀족이라니. 정말 한숨만 나올 지경이야. ”

“ 그래서 솎아내기를 하신 겁니까? ”

“ 넘지 말아야 할 선도 못 알아보는 놈들은 품어봐야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어. 오히려 해가 될 뿐이지. ”

루크는 진즉 크라우저 공작가를 몰아붙일 계략이 물밑에서 진행됨을 알았으나, 알고도 내버려 뒀다.

과연 몇 놈이나 엮일지 기대하기까지 했다.

지금 당장은 세력이 위축되겠지만,먼 미래를 보면 득이 될 일이라 생각했기에.

“ 크라우저. 그 일가는 되도록 적당한 거리를 두고 가만히 내버려두는 게 가장 좋아. ”

집사는 그 말을 들으며 가만히 침묵을 지켰다.

답을 하라고 던진 말이 아니라, 루크 자신에게 되새기듯 내뱉은 말임을 알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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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내버려 두기엔 마음에 걸리는데.

공작령에 돌아오고 나서 며칠.

나는 그 빌어먹을 상인 놈에게 한 방 먹여줄 방법이 없나 고민했다.

그로 인해 지나친 스트레스는 안 받았지만, 가만히 내버려 두기도 찝찝했다.

마치 이빨에 끼인 생선가시 같았다.

“ 지온? 왜 그래? ”

고민하는 기색이 심각해 보였던 탓일까.

옆을 지키고 있던 헬레나가 걱정스러운 듯이 물었다.

“ 아. 다름이 아니라, 그 상인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생각하고 있었어. ”

“ …그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메르카토르 말이지? ”

씹어 먹을 메르카토르.

그 이름을 이야기하는 헬레나의 목소리는 싸늘하기 그지없었고, 눈빛 또한 날카로웠다.

집착과 광기의 상징이기도 한 무저갱 같은 눈동자까지 세트로.

그러나. 내게 있어서는 일상과도 같았던지라 새삼 겁이 나지도 않았다.

저 눈빛이 내게 향했어도 침착했는데, 남에게 향하는 것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 그렇지. 놈이 배후라고는 들었는데, 정작 증거가 없어 물고 늘어지기가 뭣해. ”

내가 엘프들을 노예로 받아들인 직후.

제국상회는 그 진위를 파악하기 위해 물밑 작업을 시작했고, 그 결과가 바로 얼마 전에 벌어졌던 청문회였다.

내부 귀족들을 흔들어 필요한 정보를 얻어내기 위해.

그러나, 접촉만 했을 뿐 이렇다 할 증거를 남기질 않았다.

멜로드 전 백작놈의 이야기로는 제국상회의 머리를 상징하는 증표를 가진 심부름꾼이 찾아왔다고는 하는데, 그 뿐이다.

착수금을 준 정황도 없었다.

계약서를 써서 놈들 쪽에 맡겼다고는 하나 말아먹은 지 오래다.

아마 진즉 태워버렸겠지.

괜히 남겨뒀다 꼬리 잡힐 이유가 없으니까.

“ 대체 혀를 어떻게 굴렸으면 계약서를 가진 귀족들이 하나도 없을 수가 있지? ”

“ 제법 잘 나가는 장사치이니만큼 말솜씨 하나는 좋을 거야. 그래서 더 용서할 수 없지만……. ”

콰득! 무심코 힘을 세게 줬는지, 헬레나가 쥐고 있던 만년필의 허리가 반으로 꺾였다.

얼마나 세게 부러뜨렸는지 부러진 허리 끄트머리에서 파편이 후두두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 참 찝찝하기도 하지. ”

증거가 있다면 그를 바탕으로 어떻게 손을 써 볼 법 한데, 남긴 것이 없으니 꼬투리를 잡을 수도 없다.

더구나 왕국이 아닌 제국 사람이라 자칫 커다란 불씨를 낳을 가능성도 있었다.

분명 시비는 놈이 먼저 걸었지만, 손쓰기 어려운 답답한 상황.

나는 그에 답답함을 느끼며 한숨 쉬었으나,

“ 그럼… 이번에는 저희 쪽에서 몰래 찾아가서 몰래 쥐고 흔들면 되지 않을까요? 증거만 안 남기면 그만 아닐까요? ”

엘렌이 아무렇지 않게 던진 한 마디에 눈이 번쩍 뜨였다.

지금 증거가 없어 손을 쓰지 못하듯, 증거를 남기지 않고 보복하면 그만이었다.

들킬 가능성도 없잖아 있겠지만… 이대로 넘길 수만은 없었다.

먼저 때렸으면 쳐 맞을 생각도 해야 하는 법을 가르쳐 주고 싶었다.

“ 좋은 생각이긴 한데… 어떻게 들키지 않고 그놈 곁까지 가느냐가 문제야. ”

귀족의 얼굴은 그 영지 사람이나 같은 귀족 이외엔 모르는 사람이 많다.

현대처럼 인터넷으로 사진 검색이 되는 세상도 아니고, 먼 지방의 소식은 소문과 글에 의지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엘렌을 고용하러 갈 때도 위장이 쉬이 먹혀 들어갔었다.

다만, 대공이 된 지금은 그 때 보다 얼굴이 좀 더 팔렸을 터.

조금 더 주의해서 다가갈 필요가 있었다.

놈의 상회가 이끄는 상단을 습격하는 등의 재산피해를 입히는 건 도적 같으며, 또 너무 대대적이니까.

음. 나는 침음을 흘리며 고민했다.

떠나기 전, 우선 나와 연관성이 떨어지는 대외적 신분이 필요했다.

이건 단순한 여행자나 용병, 혹은 작은 규모로 거래하는 상인도 괜찮았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잘 풀리지는 알 수 없지만… 가능성은 있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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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어…!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

“ 못 들으셨다면 다시 한 번 말씀드려야겠네요. 킬리네어의 탐색관 신분을 빌려주십시오. ”

탐색관.

제법 여유 있는 귀족이라면 하나 둘 씩 가지고 있으며, 각지를 뒤지며 귀족의 마음에 들 만한 사치품을 살피고 사들이는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다.

그렇기에 예술에 관한 눈이 높거나 혀가 날카로워야 하는 일이었다.

진귀한 먹을거리를 찾아 진상하는 것 또한 사치 중 하나였으니까.

내 앞에 앉은 공작, 루크 킬리네어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물었다.

“ 대가는 필요 없으니 탐색관 신분을 빌려달라는 건… 어떤 의도입니까? ”

“ 제국까지 크게 의심받지 않고 접근 할 생각입니다. ”

“ 제국이라면… 설마 메르카토르에게! ”

루크는 제법 머리가 잘 돌아가는 인간답게 금방 내 생각을 읽고 깜짝 놀랐다.

더구나 메르카토르의 이름이 쉽게 나오는 걸 보면, 그 또한 이번 사건의 배후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걸 알면서도 숨긴 이유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 큰 의미는 없을 것 같았다.

그러니 관심을 끊어도 되겠지.

“ 예. 그놈도 우리 크라우저 공작가에서 이렇다 할 손을 쓸 수 없음을 알 겁니다. 증거를 안 남겼으니까요. ”

“ …그렇겠지요. 증언이 있었다고는 하나 시치미를 뚝 떼고 모른 척 하면 그만이겠지요. 오히려 죄를 뒤집어씌운다며 역으로 화를 낼 수도 있을 테고요. ”

“ 네. 하지만 이대로 가만히 넘기기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군요. 한 나라의 공작을 건드려놓고 얌전히 넘어갈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머리를 뜯어 고치기도 해야 하고요. ”

적당히 귀족의 자존심을 거론하자, 루크가 일리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귀족다움과 그 자존심을 중시하는 귀족파의 우두머리이니만큼, 본의 아니게 공감을 불러일으킨 모양이다.

“ 위험한 결심을 하셨군요. 하지만 이해는 합니다. ”

“ 감사합니다. 만약에 일이 실패하면 저희가 협박했다고 뒤집어 씌우셔도 됩니다. ”

“ 감사하게도 빠져나갈 구멍까지 친절하게 마련해 주시는군요. ”

하지만, 그럴 필요는 없다고 루크가 단호하게 답했다.

절로 고개를 갸웃거릴 정도로 단호하고, 묘하게 확신이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마주하는 사람으로서 자연스레 의문이 느껴질 정도였다.

“ 그 말씀은? ”

“ 제 감이지만… 실패는 안 할 것 같습니다. 그게 이유죠. 덧붙이자면, 빚을 갚는다는 의미도 있고요. ”

“ 빚이라 하심은… 로트와 엮인 일입니까? ”

루크 킬리네어는 로트의 계획을 역으로 이용했고, 그 과정에서 공작가와 미리 입을 맞춰 둔 전적이 있다.

그것이 빚이라면 빚이라 할 만하기는 한데, 생각보다 의리를 중시하는 성향이었던가.

“ 그것도 있지만, 저를 공작으로 지명한 일이 훨씬 크지요. 그 덕분에 생각지도 않았던 도전을 할 자격을 얻었고… 그 결과, 공작의 자리에 앉았으니까. ”

“ …그러십니까? ”

“ 예. 그 이유야 어찌되었던 간에, 제가 공작이 될 큰 발판을 주신 건 분명한 사실이죠 저로서는 참 감사한 일입니다. ”

나였으면 괜히 골치만 아프다 싶었겠지만, 야망이 있는 사람은 그를 다르게 받아들인 걸까.

아마 우리의 간섭이 없었다면 나중에라도 일을 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단순한 망상일지도 모르지만…….

“ 아무튼, 이렇게 은밀히 찾아오셨으니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겠지요. ”

짝짝.

루크가 가볍게 손뼉을 치자,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집사가 기다렸다는 듯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곤 그 귀에 대고 무언가를 속삭였다.

아무래도 내가 부탁한 것과 관련된 일을 시키는 눈치였다.

“ …예. 바로 서류를 준비해서 올리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

제법 나이 든 집사가 정중히 허리 숙여 인사를 하더니, 제법 날렵하게 집무실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잠깐의 시간이 흐른 뒤. 그는 자신이 말한 대로 서류가 들었을 법한 봉투 한 장을 가지고 와, 내 앞으로 내밀었다.

“ 킬리네어 공작가에 속한 탐색관의 신분증명서와 정보입니다. 한 번 훑어보시지요.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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