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4화 〉 보복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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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들의 부정이 그들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는 하나, 증거가 없기로는 나와 마찬가지다.
즉, 나 또한 정황만으로 한 사람을 몰아붙이는 행동을 한 셈이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구라와 구라가 부딪치는 꼴이었으나, 그 묘사가 자세하면 제법 그럴싸해 보인다.
더구나 구석에 몰리는 상대가 당황하고 있다면 더더욱.
“ 전하. 이렇게 된 이상, 저와 멜로드 백작 양 측에 중립적인 조사단을 파견하시지요. 어느 쪽이 보다 순수한 지를 분명히 밝혀보는 것도 좋은 선택이라 사료됩니다. ”
분위기가 거의 내 쪽으로 흐를 때 쯤, 더한 쐐기를 박았다.
반란 의심은 의심일 뿐이며, 우리 영지엔 그와 관련된 증거가 무엇 하나 없었다.
애초에 반란을 꾸민 일이 없으니 당연했다.
하지만 백작놈은 달랐다.
횡령 및 배임 의혹. 겉으로 보기엔 누명을 씌우는 것같이 보일지 몰라도, 이는 엄연히 놈의 입에서 흘러나온 사실이다.
그러니 조사단을 파견해 털어보는 순간 그럴 듯한 먼지가 나올 것이 분명했다.
놈도 그걸 아는지 말수가 줄어들고 식은땀을 흘렸다.
마치 죄를 짓고 여기저기 도망 다니는 범죄자와 같은 모습이었다.
“ 음. 대공의 말도 일리가 있소. 내 칼리우드 공작께 요청해 당장 조사단을 꾸리고 파견하도록 할 테니, 그동안 두 사람은 이 왕궁에서 지내도록 하시오. 그리고, 이곳에 자리한 모든 이들도 남아주길 바라오. 그대들이 이 청문회를 요청했으니, 당연히 그 결과 또한 지켜봐야 하지 않겠소? ”
설마 청문회 당사자가 조사단을 파견하자고 등을 떠밀 줄 몰랐는지, 모든 귀족들이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개중에는 잘못 생각했다며, 일을 소란스럽게 키워서는 안 된다고 은근한 투로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왕의 결정은 단호했고, 결국 중립파의 머리이자 가장 중립적인 남자가 직접 조사단을 꾸리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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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으음……. ”
다행히 한 고비를 넘겼고, 엘렌을 이용해 도주를 할 필요도 없어졌다.
걱정이 너무 지나친 나머지 호들갑을 떨었다는 것을 새삼 느끼는 순간이었다.
나는 왕성 객실 침대에 누운 채, 곤히 잠든 헬레나와 엘렌의 허리에 두르고 있던 팔을 풀었다.
해마다 찾아오는 방이라 그런지 낯설지도 않았고, 이제는 별장과도 같은 느낌이라 제법 편안했다.
아직 어둠이 짙게 내리깔린 새벽.
동이 트려면 조금 더 시간이 걸리며, 사람이 눈뜨기엔 당연히 이른 때였다.
다시 말하면 몰래 움직이기 딱 좋은 시간이라는 뜻이다.
“ 엘렌. ”
“ …네. 부르셨어요? ”
길고 날렵한 선을 귀에 입술을 대고 속삭이자 엘렌이 기다렸다는 듯 답했다.
헬레나는 청문에 답을 하느라 많이 피곤할 테니 가만히 재워둘 생각이었다.
더해, 앞으로 벌어질 상황에서는 헬레나보다 엘렌이 약간이나마 침착하게 행동할 수 있었고.
“ 가자. ”
“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저희들을 안아주시고 얼마 지나지도 않으셨는데. ”
“ 괜찮아. 몸은 약간 늘어지는데, 정신은 개운해. 욕구를 풀어서 머리는 개운해. ”
나와 엘렌은 땀과 기타 등등으로 범벅이 된 몸을 가볍게 씻고, 옷을 갈아입은 뒤 방을 나섰다.
우리를 비롯해 왕궁에 남은 귀족들 모두가 사실상 연금된 상태였으며, 그를 증명하듯 통제 또한 철저했다.
아마 조사단이 영지에 다다를 동안 소식조차 들을 수 없겠지.
그렇기에, 몰래 만남의 시간을 갖기 딱 좋은 시기가 아닐 수 없었다.
스윽. 벨벳 남작이 잠든 객실 창문은 잠그지 않았는지 아주 부드럽게 열렸다.
놈이 머무는 객실 위치는 미리 알고, 엘렌의 마법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마 마법이 없었다면 벽을 기어오르거나 문을 따야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처럼 왕궁 하인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
아무튼, 참 잘도 잔다.
아니면 걱정에 머리를 싸매다 지쳐 잠든 것일까.
나로서는 잘 모를 일이지만, 자는 놈을 깨운다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불침번 교대를 한답시고 새벽녘에 잠을 깰 때, 얼마나 짜증났던지…….
“ 아. ”
나는 과거에 함몰되던 생각에서 벗어나 조심스레 벨벳 남작 곁으로 다가갔다.
제법 괜찮게 생긴 얼굴이 보이는 순간 품에서 더크를 꺼내고, 빈 손으로 남자의 입을 틀어막았다.
“ 우, 우웁?! ”
제법 감이 예민한 사람이었던 것일까.
내가 입으로 손을 틀어막자마자 눈을 번쩍 뜨며 격하게 신음하기 시작했다.
다 큰 남자라 그런지 저항하는 폼과 힘이 제법이었다.
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칼은 아주 좋은 대화수단이 된다.
“ 조용히. 저항하지 말고, 가만히 있도록. 너를 죽일 생각이면 진즉에 죽였을 테니. ”
“ 우, 우우우!! ”
남작이 아주 잘 볼 수 있도록 달빛을 받아 번뜩이는 칼날을 눈앞에 들이밀자, 남작이 기겁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만 더 고개를 크게 끄덕였으면 알아서 칼날에 찔릴 뻔 했는데, 다행히 그런 사태는 피해갈 수 있었다.
“ 좋다. 이제 네 입을 가린 손을 풀 텐데, 만약 경고를 잊으면… 너는 살지언정, 네 영지는 살아나지 못할 거다. 명심하도록. ”
나는 마지막 경고까지 알뜰하게 남긴 뒤, 입을 가린 손과 눈에 겨누던 칼을 물렸다.
“ 후우, 후우…! 대공. 갑자기 이게 무슨 짓입니까?! ”
남작은 약속대로 소리는 지르지 않았으나 무척 화가 난 표정으로 악을 써댔다.
본래 큰 목소리와 함께 어우러져야 좀 위협적일 텐데, 작은 목소리로 저러는 걸 보니 안쓰러울 뿐이었다.
“ 내가 왜 이러느냐, 그 말인가? 누가 우리를 몰아붙이라 시켰느냐, 그걸 알고 싶어서. ”
“ 그, 그게 무슨……. ”
“ 내가 비록 어린 나이에 운 좋게 대공이라는 직위에 오르긴 했지만… 그렇다 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병신으로 보였나? ”
나는 남작의 몸뚱이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은 채, 더크 손잡이를 놈의 턱에 대며 웃었다.
어린놈이라서 무시당하는 거야 하루 이틀 일도 아니거니와, 멘탈의 보정 덕에 예전만큼 열이 오르지도 않았다.
덕분에 이 와중에도 차분하게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고, 부족한 지능을 쥐어짜낼 여유를 얻을 수도 있었다.
“ 벼, 병신이라니. 저는 결코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습니다. ”
당황해하던 놈의 말투가 무척 공손하게 바뀌었다.
조금 전까지 얕보는 기색이 느껴지는 반 존대에서 진심이 느껴지는 존댓말을 썼다.
이래서 폭군들이 주먹을 애용하는구나 싶었다.
부작용은 있을지언정 일을 시원시원하게 처리 할 수 있었을 테니.
“ 그래. 믿어주마. 아무튼, 내 질문에 답하도록. 누가 시켰나? ”
“ 시… 시키다니요. 제가 공에 눈이 뒤집혀 대공과 공작가를 모함했다는 것은 맞습니다만, 사주를 받은 적은 결코……. ”
“ 끝까지 거짓을 말할 셈인가? ”
스윽. 나는 더크의 날 부분이 남작의 턱을 겨누도록 돌린 뒤,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눈매도 최대한 날카롭게 가다듬었다.
확신을 갖고 화를 내고 있음을 느끼게 하기 위해.
“ 헙…! ”
“ 네놈은 최소한의 이익을 계산할 줄 아는 놈이다. 이걸 풀어서 말해보자면… 어떤 일을 할 때 치러야 할 손해와 대가, 그로 인해 손에 쥘 이득의 무게를 잴 줄 안다는 소리다. ”
공작가를 공격하고 얻을 이익이 매력적이라 하더라도, 공작가를 공격하며 치러야 할 대가가 얼마나 큰지는 쉽게 상상이 갈 터였다.
그런데도 남작은 이득을 빌미로 눈이 멀었다는 이야기만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나로서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 그것, 은……. ”
“ 제대로 말해. 킬리네어가 시켰는가? 만약 그렇다면 다시 한 번 그 집안을 뒤집어 놓아야……. ”
“ 아, 아닙니다! 공작님께서는 이번 일과 아무런 관련이 없으십니다! ”
다급하게 아무런 관련이 없다 외치는 남작.
나는 그 얼굴에 담긴 진심을 읽고, 더욱 머리가 복잡해짐을 느꼈다.
루크 킬리네어가 배후라라는 가능성을 원래부터 낮게 치기는 했으나, 이렇게 확실한 답을 들을 줄은 몰랐다.
하지만, 그래서 더 혼란스러웠다.
귀족파에 속한 남작이, 정말로 눈이 멀어 대척점에 있을 국왕파의 수장에게 시비를 걸 생각을 한 걸까.
사람이 꼭 이성적으로 판단하며 사는 것도 아니고, 욕심이 그 등을 크게 떠민다는 것도 알지만…….
나는 좀 더 확실한 답을 듣기 위해 남작의 목젖에 더크 끝을 살짝 들이댔다.
그 탓에 피 한 방울이 더크의 칼끝을 타고 흘렀다. 남작도 그를 느꼈는지 약간 인상을 찌푸렸다.
아마 칼날 때문에 따가움을 느낀 탓이리라.
“ 다시 한 번 묻겠다. 배후가 누구냐. 만약 네놈이 밝히지 않는다면 이번 일에 연루된 모든 놈들을 털어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그 끝을 알아내고 말 것이다. ”
“ 으, 으으…! ”
진심이 느껴지도록 더크 손잡이를 으스러져라 꽉 쥐며, 고개를 슬쩍 앞으로 내밀었다.
덕분에 겁에 질린 남작의 표정과, 끝없이 흔들리는 눈동자가 아주 잘 보였다.
“ 셋을 주마. 만약 이 셋이 지나도 답이 없다면, 그 때엔… 네놈의 모든 것을 짓밟아 버리마. ”
셋, 둘……. 나는 천천히 숫자를 세며 남작을 몰아붙였다.
가히 절벽 끝에 서서 떨어지기 직전과 같은 상태라 볼 수 있었다.
남작도 그를 느꼈는지 숫자가 줄어들수록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몸을 사시나무 떨 듯 떨어댔다.
마치, 오한에 걸린 병자 같았다.
“ 하나……. ”
“ 자, 잠깐만! ”
칼을 치우고 침대 아래로 내려가려는 순간, 남작이 급히 소리쳤다.
얼마나 급했는지 조용히 하라던 내 말조차 잊어버린 듯한 눈치였다.
그래도, 내 발목을 묶은 걸 보면 나름대로 할 말이 있나 보다.
나는 놈의 배를 다시 깔고 앉으며 얼른 말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말하기 쉽도록 더크를 겨누지는 않았다.
“ 말하도록. 조곤조곤하게. ”
“ 사, 상인. 상인이 우리에게 사주를 했습니다. 크라우저 공작령에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의 뿌리를 알아 오라고. ”
“ 상인? 우리? 우리라면 이번 청문회를 열도록 압박한 스무 놈들 일 테지. 그런데, 상인이라……. ”
배후가 상인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탓에 머리가 멍했다.
마치 망치로 뒤통수가 깨지도록 얻어맞은 듯한 얼얼함이 느껴졌다.
가만히 사태를 지켜보고만 있던 엘렌도 마찬가지라는 듯, 입을 제법 크게 벌린 채 굳어 있었다.
나는 이 와중에도 고민하는 척 침음소리를 내다, 정신이 돌아오고 나서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
불과 몇 초도 되지 않았음에도 영원과 같은 흐름을 겪다 온 것 같았다.
“ 상인? 지금 상인 따위가 귀족의 배후라 말했나? 고작 장사치의 세치 혀에 농락당해 이런 멍청한 짓을 벌였다고? ”
“ …그 상인이 제국의 으뜸이라면 어쩌시겠습니까? ”
상인의 으뜸.
혹시 대륙 곳곳을 돌며 이문을 모으고, 그 유통망이 가장 넓기로 소문난 상회의 주인을 말하는 건가.
나는 혹시나 싶은 마음에 물었다.
“ 네놈이 말하는 상인이 혹, 메르카토르 상회의 주인이냐? ”
“ …그렇소. 그 남자의 얼굴을 본 적은 없지만, 상회의 주인만이 들고 다닌다는 증표를 가진 심부름꾼울 보내 왔소이다. ”
아마 그 주인이 제국상회의 주인, 레너드 메르카토르겠지.
나는 뜬금없이 저 이름이 왜 튀어나오는지 부터가 의문이었으나, 태연한 척 질문을 이어나갔다.
시시콜콜한 일까지 다 따지고 든다 한들, 온전히 기억하지 못할 것 같아서.
“ …그래. 제국상회라면 네놈들 눈이 돌아갈 만큼 큰 이익을 줄 수 있겠지. 내 구태여 그것까지 묻지는 않겠다. 어찌 되었던 놈과 거래를 해서 우리 공작가를 몰아넣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니까. ”
하지만. 나는 잠시 말을 끊은 뒤,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은 화를 억지로 억누르는 듯한 표정을 연기했다.
연기 생활도 몇 년을 하다 보니 제법 모양새가 그럴 듯 했다.
“ 우리를 몰아넣은 대가는 치러야 할 거다. 특히 이는 나라를 팔아넘기는 매국과 별 다를 바 없으니까. ”
“ 그, 그 말씀은 설마……. ”
“ 이번 사건의 주모자는 전부 한 차례 고통을 겪은 뒤, 귀족 신분을 박탈당할 거다. 그 뒤 각지의 수도원으로 보내 평생을 썩게 할 것이다. 재산의 반은 압수하여 국고로 환속하고, 일부는 우리를 위한 배상금으로 쓰이겠지. 다만, 네놈들의 작위는 그 아들들에게 물려 줄 계획이다. 전하께서 내 청을 들어주실 때나 가능한 얘기겠지만……. ”
나는 조사단이 결과를 가져오는 기일에 맞춰 국왕에게 부탁을 할 생각을 굳히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방을 나서기 전, 침대에 누운 남작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 내 미리 경고하마. 만약 조사단이 성과를 들고 오지 못했을 경우, 네놈이 직접 전하께 이번 일의 경위를 말씀드려야 할 것이다. 만약 이를 어길 시… 네놈을 비롯해, 이번 일에 가담한 놈들의 가문 전체가 사라질 각오를 하도록. 나머지 놈들에게는 네가 일러 두어라. ”
힘은 줄어들겠지만 가문을 보존하느냐. 아니면 끝까지 버티다 죄다 잃을 것이냐.
그 말을 마지막으로, 엘렌과 함께 발코니 아래로 몸을 훌쩍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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