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의 기둥서방이 되었다-113화 (113/192)

〈 113화 〉 보복 #2

* * *

“ 예? 영지전을 대비하라고요? ”

왕궁으로 향하기 하루 전날 밤.

나는 홀랜드와 이브를 불러 혹시 모를 상황에 대해 이야기했다.

영지전이 터질지 모르는 가능성은 그 중 하나였다.

홀랜드가 황당하다는 듯 입을 쩍 벌리며 묻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 그래요. 이유야 어찌되었던 우리 공작가에 시비를 건 놈들입니다. 그리고, 놈들은 전하의 안위를 위협하는 명분을 핑계 삼을 쓰레기일 뿐이지요. ”

“ 그야 그렇습니다만… 설마 미쳤다고 영지전까지 걸까요? ”

“ 저도 전쟁이 날 거라 생각하고 싶지는 않지만, 적어도 지금 상황이 정리될 때 까지는 주의를 기울이는 게 옳다고 생각합니다. ”

나는 이쯤에서 잠시 말을 끊은 뒤, 홀랜드의 옆에 앉아있던 이브를 향해 시선을 두며 말했다.

“ 이브. 제가 방금 말했던 대로,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그러니 홀랜드와 자주 연락을 취하시고, 유사시에 마법병단을 활용할 수 있도록 마음의 준비를 해 주세요. ”

“ 네. 알겠습니다. ”

“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만, 가능성일 뿐이니 너무 떠들썩하게 움직이지는 말아 주십시오. ”

그저 넋 놓고 있다 당하지만 말라는 뜻에서 이야기 했을 뿐, 우리가 먼저 요란하게 전쟁 준비를 하면 그것대로 그림이 이상하다. 정말로 군사를 일으키는 것처럼 보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계를 높이되 평소와 다름없이 행동하고, 세작을 좀 더 보내 이웃 영지 상황을 꼼꼼하게 파악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 홀랜드. 국왕파가 아닌 귀족 들 중, 저희 영지와 가장 가까운 자들이 누굽니까? ”

“ 같은 편 빼고요? 그러면 벨벳 남작과 보르드 남작이 있네요. 마침 둘 다 귀족파입니다. ”

생각해보면 꼭 구심점이 되는 귀족 영지를 중심으로 파벌이 뭉치는 것이 아니고, 지금처럼 파벌이 다른 귀족이 근처에 있을 수도 있었다.

홀랜드가 막힘없이 답했던 벨벳이나 보르드가 그 대표적인 예였고.

물론 그 또한 상대적으로 가까울 뿐 정말로 엎어지면 코 닿을 곳에 위치한 것이 아니라 너무 초조해 할 필요는 없었다. 다만 영지전, 혹은 그보다 규모가 큰 전쟁이 벌어질 경우… 두 귀족의 영지가 전진기지가 될 확률이 높겠지. 마침 항소를 올린 무리 중 하나이기도 하고.

“ 그 두 영지엔 세작을 좀 더 보내, 상황을 면밀하게 파악하도록 해 주세요. 적으로 돌아설 가능성이 높으니까요. ”

“ 예. 바로 조치하겠습니다. ”

어릴 때는 독을 먹고, 커서는 헬레나를 걸고 전투를 치르고, 이제는 전쟁이 터질 지도 모르는 상황이라.

왜 조금 느슨하게 지낸다 싶으면 이렇게 고삐를 조이는 일이 생기는 걸까. 참 궁금하면서도 환장할 노릇이다.

나는 굳은 표정으로 고개 숙이는 홀랜드와 이브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마지막으로 잘 부탁한다는 한 마디를 덧붙였다.

.

“ 괜찮겠지…? ”

그로부터 며칠. 청문회를 코앞에 둔 지금, 헬레나가 왕성의 객실 침대에 앉아 걱정스러운 듯이 물었다.

옆에 서있던 엘렌도 마찬가지라는 듯 자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야 만에 하나의 상황에도 몸을 뺄 여유가 있지만, 영지에 남은 이들은 지켜야 하는 입장이니까.

“ 괜찮을 거야. 장인어른도 계시고, 군사들도 있으니까. ”

나는 차분하게 헬레나를 달래며 청문회장으로 갈 준비를 했다.

잠시 여독을 풀라는 국왕의 배려 덕에 간단히 정보도 정리한데다, 이번 사건의 발단이 억지스러운 면이 있다.

충분히 이겨 낼 자신이 있었다.

“ 아니. 나도 우리 영지는 걱정 안 해. ”

“ 어? 그럼 뭐가 걱정이야? ”

영지 걱정이 아니라 다른 걱정이라.

내가 무심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헬레나가 광기에 번들거리는 눈빛을 띠었다.

소름이 돋을 만큼 날카로운 빛이었다.

“ 절제하고 참아야 하는 자리에서 사단을 낼 까봐… 그게 걱정이야. ”

사단을 낸다. 덤덤하게 숨이 턱 막힐 만큼 무거운 말이다.

청문회장에는 무기를 들고 갈 수 없다곤 하나, 헬레나에게 있어서는 아무 의미도 없는 제약이었다.

오러를 뽑아 휘두르면 그것이 곧 무기니까.

그럼에도 나는 불안하지도 않았고, 그저 편안한 마음으로 헬레나의 손을 감싸 쥐었다.

“ 내가 있는데 무슨 걱정이야. ”

“ …맞아. 지온이 있었지. ”

그러자, 헬레나가 굳었던 표정을 풀고 부드럽게 웃었다.

이렇게 손을 잡거나, 내가 말리는 한 알아서 자제한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기 때문인 듯싶었다.

그것이 헬레나 크라우저의 성질이라는 것도.

똑똑.

날 선 분위기가 제법 차분해졌을 무렵. 시기 좋게 우리를 데리러 온 시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청문회장으로 이동해야 한다는 말도 함께.

“ 엘렌. 우리는 청문회장으로 갈 테지만, 엘렌은 여기 남아서……. ”

“ 네. 퇴로는 머릿속에 그려두고 있을 테니, 걱정 마시고 다녀오세요.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에 하나를 대비해서요. ”

엘렌도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다 안다는 듯한 태도였으니, 더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에, 나는 헬레나의 손을 잡은 채 시종의 안내를 따라 청문회장으로 향했다.

청문회장은 왕성 홀로, 국왕을 알현할 때나 정사를 돌볼 때 쓰는 장소였다.

그곳에는 국왕 뿐 아니라, 이번 청문회를 요청한 귀족들이 좌우로 나란히 열을 이루고 있었다.

굴러가는 상황이 어지간히도 궁금했나보다.

나는 속으로 비아냥대며 헬레나와 함께 국왕 앞으로 다가가 고개를 숙였다.

“ 크라우저 공작과 그 대공은 고개를 들라. ”

우리는 엘빈 소테르의 엄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고 정면을 보았다.

눈을 부라리는, 혹은 그러는 척 하는 귀족들의 시선도, 평소보다 엄숙한 척 하는 국왕의 목소리도 크게 와 닿지를 않았다.

현실감을 못 느끼는 게 아니라 단단한 멘탈 덕이었다.

“ 예, 전하. ”

“ 이미 그대들도 이번 청문회를 연 이유를 알고 있을 테니, 구태여 그 사정을 새로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터. 그러니 바로 질문에 들어가도록 하겠네. ”

국왕은 잠시 숨을 고른 뒤, 별 의미 없어 보이는 질문으로 시작을 알렸다.

정말로 반란을 획책했느냐는 물음이었다.

“ 전하. 제 이름과 목숨에 맹세컨대, 결코 역심을 품고 옥좌를 도모할 생각 따위를 해 본 적도, 행동에 옮긴 적도 없습니다. ”

“ 그렇다면 그대의 영지에 모인 엘프 노예와 다크엘프를 모은 이유를 설명해야 할 것이다. ”

헬레나의 정형문적인 답변 후, 국왕이 곧장 본론에 들어갔다.

어찌 보면 가장 꼬투리 잡기 쉬운 일이었을 테니, 이렇게 빨리 나오는 것도 당연해 보였다.

더해, 국왕 본인도 은근히 궁금하다는 눈치처럼 보였다.

나는 헬레나와 잠시 눈을 맞춘 뒤, 국왕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 전하. 전하께서도 아시다시피, 다크엘프와 엘프의 관계는 좋지 않습니다. 저는 그런 바탕 아래, 다크엘프 용병으로 유명한 레드후드 용병단을 영입했었습니다. 바로 알버스 킬리네어와 결투 때문이었지요. ”

“ 으음……. 짐이 공증인으로 섰던 결투였지. ”

아그네스에게 뺨 맞고 돌아 온 것을 귀신같이 눈치 챈 헬레나가 광분했고, 자칫 공작끼리 정면충돌까지 번질 뻔 했었다.

그러다 결투를 벌였고, 결국 알버스 킬리네어는 귀족 직위 박탈 밑 수도원 살이라는 비참한 처지에 이르렀다.

이는 헬레나의 광기가 왕국에 전면적으로 드러난 계기이자 사건이었으며, 그를 모르는 이가 귀족 중에는 없을 정도였다.

그를 새삼 깨달았는지 국왕도, 곁을 지키던 귀족들도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 예, 그렇습니다. 저는 그 결투를 위해 용병단을 초청했고, 그 결과는 아시다시피 저희 크라우저 공작가의 승리로 끝을 맺었습니다. 하지만, 이로 인해 분란의 씨앗을 불러들이게 되었지요. ”

“ 음? 분란의 씨앗이라면……. ”

“ 공작가가 다크엘프를 대우했다. 이 사실이 엘프들의 자존심을 건드리게 된 겁니다. ”

나는 이쯤에서 미리 준비해 두었던 거짓말을 술술 내뱉었다.

예전 같았으면 청문회 자리에서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거짓말을 한다는 상상조차 못했을 텐데.

참 많이 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크엘프와 엘프는 성질이 다름에도 그 교육을 달리하지 않고, 오로지 다크엘프의 부족함만을 탓하는 풍조.

그로 인해 서로 간의 골이 더 깊어졌으며, 상대적으로 그 수가 극히 적은 다크엘프가 소외될 수밖에 없었던 역사의 흐름에 이르기까지.

내가 생각해도 참 장황한 거짓말이 아닐 수 없었으나, 사실이 제법 많이 섞여있었다.

동기만 거짓일 뿐, 나머지는 사실이었으니까.

“ 즉, 엘프들이 은밀히 권유했음에도 거절하자… 그대를 기습하였단 말인가? ”

“ 예. 저를 납치해서 다크엘프에게 주는 대우를 멈추라 협박할 생각이었다고 했습니다. 이는 엘프들의 장로들에게 들은 사항입니다. ”

“ 으음……. ”

국왕이 침음을 흘리며 고민하는 기색을 보인다.

아마도 이쯤에서 물릴지, 아니면 좀 더 몰아붙이는 척을 해야 할지를 눈앞에 둔 탓이 아닐까.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상황이 점점 끝나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더구나, 중간중간 던진 많은 질문에도 제법 적절히 답했으니…….

“ 거짓입니다! 대공은 지금 거짓을 말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고작 그 정도로 이유로 엘프가 전쟁을 치를지 모를 위험을 감수한다는 것이… 전혀 말이 안 됩니다! ”

그러나, 찬물을 끼얹은 분위기를 다시 달아오르게 하려는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힐끗 시선을 돌려보니 입에 침이 튀길 만큼 열을 올리는 멜로드 백작 놈이 보였다.

빌어먹을 귀족파 새끼 같으니.

그래. 맞는 말이긴 하다.

고작 그것 때문에 나를 납치해야겠다고 결단할 만큼 엘프들이 무모하지는 않지.

그런데,

“ 전하. 송구하오나, 제게 자유롭게 발언할 수 있는 권리를 잠시 주실 수 있겠습니까? ”

“ …음. 그렇게 하시오. ”

비록 죄가 확정될 듯 말 듯 위험한 상황이나, 아직까지 엄연한 대공이다.

그런 대공이 정중하게 청을 해 왔으니 국왕으로서 무시할 수 없는 것 또한 당연했다.

애초에 국왕 본인도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진행하는 청문회이기도 했고.

나는 국왕에게 고개 숙여 감사인사를 전한 뒤, 여전히 열이 바짝 오른 멜로드 놈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흥분할 정도는 아니나 제법 짜증이 나서 그런지, 내 미간이 찌푸려져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 멜로드 백작. ”

“ 뭐… 뭡니까! ”

최대한 묵직한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부르자, 놈이 말을 더듬으며 반응했다.

열 오른 모습은 여전하지만 어딘가 위축된 기색이 엿보였다.

“ 그렇게 열을 올려가며 우리를 밀어붙이는 걸 보면, 근거 하나 정도는 있을 것 같은데… 어디 한 번 말을 해 보시오. ”

“ 그, 근거라니! 크라우저 공작령에 머무는 엘프 노예! 다크엘프! 그에 관해 거짓 없이 고해야 할 것은 바로 대공이시오! 마법에 능한 종족을 모아 꿍꿍이를 부리고 있다는 정황이 잘 드러나지 않소이까! ”

“ 흠. 즉, 정황만으로 청문회를 여는 데 일조했다는 말인가? 너무 얄팍하기 그지없지 않나. ”

“ 정황이야말로 무엇보다 확실한 증거요! 이런 평화로운 시대에 갑작스레 군사력을 늘이는 행동이 어떤 의미겠소? 바로 군사를 일으켜 확실한 이득을 쥐기 위함이 아니오! 더구나, 대공이 속한 공작가가 그로 인한 이득을 얻으려면 전하께서 앉아계신 옥좌 이외에 또 무엇이 있소이까?! ”

얼핏 듣기엔 제법 그럴듯하기는 하다.

미리 모를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 혹은 이번 청문회를 통해 우리 행동을 주춤하게 하는 것 자체가 목적일 수도 있음이 느껴졌다.

이번 청문회를 무사히 넘긴다 해도 끝없이 의심받고 있음을 깨닫게 할 수 있을 테니.

그저 내 눈에는 헬레나가 질문세례를 요리조리 잘 빠져나간 나머지, 약이 바짝 오른 것처럼 보였지만…….

“ 이봐, 멜로드 백작. ”

“ 이, 이봐라니! 아무리 대공이시라도 이 무슨 무례를……. ”

나는 더 이상 화를 참지 못하겠다는 사람마냥 눈을 부릅뜨며 으르렁댔다.

반 존대도 치우고, 완전히 아랫사람을 하대하듯 오만한 태도를 보였다.

그에 멜로드 백작이 무례함을 지적하며 다시 열을 올렸으나,

“ 나는! 그들 때문에 목숨을 잃을 뻔했다! ”

쾅 소리가 날 정도로 바닥을 찍어 선명한 발자국과 수많은 실금을 남기자, 언제 그랬냐는 듯 입을 쏙 다물었다.

“ 엘프들의 기습 때문에 열흘 이상을 사경에서 헤엄쳤고, 요양을 거쳐 몸을 일으키기까지 한 달 이상이 걸렸단 말이다! 내 아내 헬레나와 동등한 위치를 가진 내가! ”

“ 그, 그것은……. ”

아마 이놈도 대화가 엉뚱한 방향으로 굴러가고 있음을 깨달았을 테지만, 그저 당황해 할 뿐 이렇다 할 반박조차 못했다.

내가 마나까지 끌어올려 화내는 척 하는 것도 있겠으나, 뒤에 서 있는 헬레나의 압박감이 훨씬 큰 덕이겠지.

나는 이 기세를 몰아 빌어먹을 놈을 더욱 강하게 몰아붙였다.

귀족의 가치를 오만할 정도로 높게 치는 귀족파 놈이니, 그들이 신봉하는 가치를 들고 나서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다크엘프는 다크엘프대로 동정과 엘프에 대한 견제를 위해.

엘프에 대한 처사는 적당한 관대함을 강조하며 은근슬쩍 변명하듯 덧붙였다.

그렇게 이야기를 전부 끝내자, 멜로드 놈은 죽음을 목전에 둔 인간마냥 벌벌 떨었다.

아마, 내가 화를 낼 때 마다 점점 강해져 가는 헬레나의 압박에 숨이라도 막힌 것이 아닐까.

하지만, 사건을 사건으로 덮어 얼버무리려는 계획은 아직 안 끝났다.

“ 그리고 감히 전하의, 더 나아가 나라의 재산을 착복하려 한 네놈이! 뻔뻔스럽게 전하의 앞에서 충성을 거론하는가!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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