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의 기둥서방이 되었다-112화 (112/192)

〈 112화 〉 보복 #1

* * *

옛날, 가을은 말이 살찌기 쉬운 계절이나 책 읽기 좋은 계절이라는 소리들이 간간히 들려오곤 했었다.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쓰지 않는 표현이 되었지만, 이런 말이 있었다는 것 자체는 어렴풋하게 떠오르곤 했다.

“ 하아……. ”

대륙의 가을은 구르기 좋은 계절이다.

나는 매년 찾아오는 가을을 맞이하며 그렇게 생각했다.

지금도 헬레나가 휘두르는 검을 죽어라 피하며, 주먹 한 번 꽂아보려다 녹초가 되었으니까.

나는 연무장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채 거칠어진 숨을 고르다,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헬레나와 눈을 맞추며 웃었다.

만일을 대비해 제 몸 하나 지킬 줄 알아야 한다는 이유로 제법 빡세게 몰아 붙인지 몇 년.

훈련이 끝날 때, 혹은 쉬는 시간이 찾아올 때 마다 불안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모습이 변하지를 않는다.

그래서 재미있었다.

“ 이번엔 뭐가 모자랐어? ”

이럴 때 어색함을 푸는 방법은 간단했다.

내가 먼저 옆자리를 탁탁 두드리며 질문을 던지면, 언제 그랬냐는 듯 쪼르르 달려와 곁에 앉아 입을 열기 때문이었다.

“ 균형이 너무 잡혀 있어서 움직임이 조금 딱딱했던 것 같아. ”

“ 균형이 너무 잡혀서? 그건 좋은 일 아닌가? ”

“ 물론 안정감 있는 자세가 싸움의 기본이 되는 건 맞지만… 그게 너무 지나치면 읽기가 쉬워. 균형 잡히지 못한, 불균형으로 주는 변화도 제법 쓸모 있다고 생각하거든. 물론 내 입장에서 말하는 거라 꼭 정답은 아니겠지만……. ”

헬레나는 자신 없는 듯 말꼬리를 흐렸지만, 내 입장에서 보면 충분하고도 넘쳤다.

소드마스터의 조언은 기사나 용병 같은 전투 직종에게 있어 천금과도 같은데, 그걸 매일같이 듣고 있다.

그야말로 어떤 기사가 말한 사치스러운 삶이라 할 수 있겠지.

“ 내 입장에서는 헬레나가 정답이야. 나름대로 큰 위기를 몇 번 넘길 수 있었던 것도, 전부 헬레나 덕인걸. ”

물론 알트람 자작가에서 배운 기술도 도움이 되었다.

그럼에도 헬레나와 겨루며 고쳐야 할 점을 듣는 것보다 못한 것이 사실이었다.

자작가가 준 가르침에 감사하기는 해도, 수준 차이가 너무 나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헬레나는 내 진심을 알았는지, 얼굴을 붉히며 배시시 웃었다. 한 결 무거운 짐을 덜어낸 듯 가벼워 보이는 모습이었다.

“ 참. 오늘은……. ”

엘렌이 잠시 자리를 비워 그런지, 헬레나가 몹시 즐거워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떠들어댔다.

이 모습만 보면 어디에 내놓아도 어색하지 않을 평범한 귀족 영애처럼 보였다.

나는 헬레나의 이야기를 들으며 적당히 맞장구를 치거나 가볍게 웃기도 했다.

대화를 이끌어가는 주체가 헬레나라 구태여 끼어들 필요도 없고, 적당히 귀담아 듣기만 해도 충분했다.

대화 내용이 대부분 연회에서 있었던 귀부인들의 허영심에 젖은 이야기였지만, 제법 재미가 있어 절로 몰두하게 되었다.

“ …그러고 보면, 엘렌을 시켜 기록하게 했던 은밀한 이야기들도 제법 재미있었는데. ”

“ 참. 그런 일도 있었지?”

국왕의 생일 축하 연회, 그리고 이번 하운드 백작 주최 연회에 이르기까지.

엘렌은 그런 자리에 참석하는 귀족들의 입방정을 귀담아 듣고 기록했었다.

그것도 내가 시켜서.

그렇게 기록한 물건은 보기 좋게 정리해서 구석에 처박아 뒀는데, 헬레나의 말을 듣고 나서야 떠올렸다.

지금도 쓸 데가 없어 먼지만 쌓이고 있는 물건이라 그런가보다.

“ 있었지. 아마 지금 같은 시간이 없었다면 계속해서 잊고 지냈을 거야. ”

“ 응. 나도 그래. ”

헬레나는 내 일 말고 관심이 없는 여자라남의 약점을 쥐고 흔드는 일엔 더욱 관심이 없었다.

내 주위를 둘러싼, 정확히는 나와 헬레나가 지내기 좋은 환경 정비까지는 관심을 두고 있지만, 딱 거기까지다.

그래서 크게 흥미 없다는 듯 심드렁하게 답한 듯싶었다.

하지만, 그런 물건이라도 만들어 두면 언젠가 쓸 데가 있다고 말하려는 듯 묘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 전하께서 나와 헬레나에게 소환장을 보내셨다고요? ”

간단히 샤워를 마치고 집무실로 돌아오자마자, 앤디가 한 장의 종이를 내밀며 당황해했다.

왕실 문장이 찍힌 붉은 밀랍으로 봉인된 봉투 겉면에 적힌 소환장이라는 문구 때문이었다.

“ 예. 대체 이게 무슨 영문인지……. ”

“ 뭐, 별 일이야 있을까요? 너무 긴장하지는 마세요. ”

나는 희미하게 불안한 기색을 띠는 앤디를 안심시켜 내보낸 뒤, 곧장 봉투를 뜯어 내용물을 뽑았다.

헬레나 또한 소환장이라는 글자가 몹시 신경 쓰였는지, 내 옆에 찰싹 붙어 긴장한 기색을 띠고 있었다.

─크라우저 공작, 그리고 그 대공 지온 크라우저. 우선 여러분에게는 미안하다는 말을 전하오. 나는 이 편지를 보내는 때에도, 또 편지가 도착했을 시기에도 그대들이 바치는 충성과 그 행동을 믿으며, 감사하고 있소.

소환장이라 하기에 첫줄부터 흉흉하고 신경 거슬리는 문장이 나올 줄 알았는데, 참 의외가 아닐 수 없었다.

소환장이라는 살벌한 문구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미사여구로 시작하는 문장이었으니까.

덕분에 이 편지를 보낸 국왕 엘빈 소테른이 여전히 호의적임을 알 수 있어, 차분해진 마음으로 다음 문장을 읽어 내려갔다.

원래부터 마음이 크게 흔들릴 만큼 당혹스럽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그러나, 일부 귀족들이 탄원서를 올리는 것은 물론 직접 찾아와 진위여부를 따져보아야 한다는 이들까지 생겼소. 내 마음 같아서는 가볍게 무시하고 넘어가고 싶었으나…….

국왕은 허수아비가 아니고, 중앙에 힘이 없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나라를 구성하는 많은 귀족들이 파벌을 막론하고 입을 모으면 무시할 수 없는 것 또한 현실이었다.

다행히 그 중에 국왕파 소속 귀족은 없는 듯 했으나, 중립파까지 섞인 것은 의외였다.

“ 중립파가 중립을 버리고, 귀족파와 손이라도 잡은 걸까? ”

“ 그럴 가능성도 부정은 못 하겠지만, 단순히 자기들이 불안해서 귀족파와 뭉친 점이 크다고 봐. 내 생각은 그래. ”

불안해서 그랬다라. 그렇다면 이해할 수는 있지.

나는 헬레나의 차분한 의견에 공감을 표하며, 편지를 끝까지 읽어 내려갔다.

결론적으로, 우리에게 진위를 따져야 한다는 여론이 너무 강해 손쓰기가 곤란하다는 내용이다.

평소라면 모를까, 왕실 전복 및 찬탈 의심이라는 거창하기 그지 없는 명분을 들고 나왔으니.

“ 그런데, 정작 킬리네어 공작가가 중재를 했다고? ”

신기한 것은 귀족파의 필두, 킬리네어 공작이 휘하 사람들을 다독이며 약하게나마 말리려 했다는 점이다.

말리는 척 하는 시누이처럼 은근히 부추긴 것도 아니거니와, 제법 진심이었다고.

“ 그것도 놀랍긴 하지만… 어떻게 공작가를 압박할 생각을 한 건지 모르겠어. 이렇게 강한 압박을 뒤집어씌우면 그 역풍 또한 결코 만만치 않음을 모르진 않을 텐데. ”

“ 나도 그렇게 생각은 하는데……. ”

왕국의 삼대 공작가에게 누명을 씌우겠다.

즉 정면에서 붙어보겠다는 행위가 얼마나 멍청한 짓인지 모르지는 않을 터.

그런데도 이런 것을 보니, 몇 가지 추측 정도는 할 수 있었다.

하나는 명분을 뒤집어 씌워 성공할 경우, 그로 얻을 수 있을 이득에 눈이 버렸다는 가정이다.

본래 사람은 적당한 각을 잴 줄 알지만, 욕심에 눈이 멀면 그럴 수가 없게 되기 때문이다.

만약 어느 상황에서나 침착하고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있다면 도박 중독자 같은 사람도, 실수를 하는 사람도 없을 테지.

두 번째는 단순히 미쳐서 이랬다는 가정이다.

아마 엘프 노예를 모으고, 다크엘프 마을을 만들고, 마법사 또한 맞이한 탓이 아닐까 싶다.

마법병단은 기밀에 부쳤기에 새어나갈 여지가 적지만, 이곳에 머무르기만 해도 들을 수 있는 정보는 많다.

아마 일을 저지른 놈들은 우리 쪽에 심은 간첩, 이 시대 말로 세작을 통해 여러 정보를 듣고 지레 겁을 먹은 것이 아닐까.

가능성은 낮지만 아니라고 딱 잘라 말하기가 어려웠다.

세 번째는… 뒷배다.

보통 이와 같은 조직적인 행동 뒤엔 뒷배가 있기 마련이라 배웠기에, 가장 그럴 듯한 가정이기도 했다.

그저 정작 모든 생각이 죄다 가정이라 쓸모가 없을 지도 모르지만, 간단히 이럴지 모른다 생각하고 가는 편이 좋을 듯싶다.

그냥 멍하니 가는 것보다 마음의 준비도 잘 될 테니.

하지만. 정작 급히 처리해야 할 문제는 따로 있었다.

“ 이, 빌어먹을 새끼들…… ”

“ 운 좋게 재산이나 물려받은 무능한 돼지 새끼들 주제에, 감히 누구를……. ”

어느새 쥐도 새도 모르게 집무실에 들어와 이를 가는 엘렌과, 결국 살기로 가득 찬 눈을 번뜩이며 소파 팔걸이를 손으로 으깨버리는 헬레나를 달래는 일이.

.

“ 덩치를 불리게 되면, 어쩔 수 없이 시기를 사고 견제를 받기 마련이지. ”

두 여자를 달래느라 진이 빠져버린 밤. 나는 책상 하나를 두고 이스와 마주 앉아 잔을 나누었다.

장소는 이스의 집무실이었고, 투명한 유리잔에 담긴 술은 다크엘프가 담근 와인이었다.

꿀꺽. 이스는 한 발 먼저 와인잔을 반쯤 비워낸 뒤, 숨을 길게 내뱉으며 입을 열었다.

“ 우리 선조들께서도 비슷한 일을 겪으셨었지. 별 볼일 없다 생각했던 놈이 점점 신분이 오르고 있다면… 도저히 좋아할 수가 없을 노릇일 테니까. ”

“ 하지만… 설마 공작가를 상대로 공세를 펼칠 줄은 몰랐습니다. ”

“ 머리로 알고 있어도 마음이 초조하면, 결국 마음을 따르는 것이 사람이라네. 그래서 합리적이지 못하고, 미련한 행동도 저지르곤 하지. 감정이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 주기도 하나, 그 반대로 이끌기도 하고. ”

맞는 말이다.

나는 이스를 따라 와인을 비운 뒤, 소리나지 않도록 잔을 천천히 내렸다.

입안에 맴도는 포도주의 향과 상쾌한 단맛이 참 예술적이었다. 끓어오른 화마저 빠르게 식힐 수 있을 정도였다.

“ 자네가 엘프들을 노예로 부릴 때도, 다크엘프를 모으겠다 말을 꺼냈을 때도 나는 말리지 않았네. 그저 그들과 영지의 균형을 고려해 그 숫자를 조절하라는 말만 했을 뿐이었지. 물론, 다크엘프는 그 수가 적어 조절하고 말 것도 없었네만……. ”

“ 네. 옳으신 말씀이라 지금도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

“ 사람 참 쑥스럽게 하는군. 아무튼, 그렇게 규모를 줄인다 한들 덩치를 불리는 일임에는 틀림없지. 그래서… 언젠가는 이런 일이 생길 거라 생각 못한 것도 아니었어. ”

그러나.

잠시 말을 끊었던 이스는, 여전히 차분하기 그지없는 기색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어찌 보면 넋두리를 하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 정도는 쉬이 알 수 있었다.

목소리에 힘이 있었기에.

“ 하지만, 굳이 그놈들의 눈치를 볼 필요가 있나? 나, 헬레나, 그리고 자네 또한 크라우저 공작가의 일원인 것을. ”

크라우저라는 이름에 커다란 자부심을 가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는 답이다.

나는 그것을 당연하다 여기며 고개를 끄덕였고, 속으로도 이스와 같은 생각을 했다.

그들이 쌓아온 역사나 생각이 대단하기는 했으니까.

“ 놈들이 무슨 말을 지껄여대던,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 흐려지지도 않아. 그저 전하의 눈을 가리기에 잠시 흐리게 보일 뿐, 사실 얼룩 하나 묻지 않았지. 그러니 당당하게 행동하면 돼. 위기가 있으면 극복하면 그만이고, 도전한다면 철저하게 박살낼 뿐이지. ”

순간, 이스의 눈빛이 아주 섬뜩하게 번뜩였다.

평소 냉랭하다 느껴질 만큼 침착하고 조용하던, 친아들의 죽음을 선고한 상황에서도 차분했던 남자가 맞나 싶을 정도로 섬뜩했다.

등줄기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그래도…이해가 간다.

케인을 처형했을 때엔 헬레나라는 후계자가 있었고, 결국 집안싸움이었기에 쉽게 수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전혀 달랐다.

영문 모를 꿍꿍이를 감춘 귀족들이 소환장을 보내도록 국왕을 압박하고, 청문회가 열리면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아 공작가를 공격하려 할 것이 빤히 보이는 상황이다.

으르렁 댈 수밖에.

“ 옳으신 말씀입니다. 조용히 지내고 있던 우리를 건드린 것은 저들이니…그 대가를 치르게 해야지요. ”

나는 이스의 말에 공감을 표하며, 깍지 낀 손에 힘을 꽉 주었다.

예나 지금이나 말 안 듣는 개에게는 몽둥이가 약이듯, 가만히 있던 사람을 건드린 이상 대가를 치르게 해야 했다.

이스의 강경함을 접하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 저 또한 공작가의 일원으로서 일하고, 그 결실이 썩 나쁘진 않으나… 예나 지금이나 욕심은 없습니다. 헬레나와 함께하며, 마찰 없이 살다 갈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으니까요. 하지만……. ”

꽈악! 나는 손등에 핏줄이 도드라질 정도로 손에 힘을 주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아마 다른 사람이 본다면 누구 하나 묻어버리고 싶어 안달 난 조폭처럼 보일지도 모르지.

다만, 이스는 그런 모습이 마음에 들었는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 제 능력으로 가능할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결코 손 놓고 있지 않으리라는 것 하나만큼은 약속드리겠습니다. ”

“ …음. 그거면 됐네. ”

나는 이스에게 약속을 한 뒤, 깍지를 풀고 와인잔을 들었다.

안에 든 남은 와인을 단숨에 입 안으로 털어 넣기 위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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