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의 기둥서방이 되었다-111화 (111/192)

〈 111화 〉 마법병단 #7

* * *

“ 허억, 허억……. ”

저택 뒤편 연무장.

그곳에는 두 사람이 제법 대조적이 모습으로 서 있었다.

하나는 반쯤 무릎을 꿀은 채, 바닥에 꽂힌 반 토막이 난 검에 기대어 가쁜 숨을 몰아쉬는 랜들.

나머지 하나는 랜들 앞에 태연히 서 있는 헬레나였다.

“ 후우…! 그 사이에 또 벽 하나를 넘으신 겁니까? ”

랜들이 헬레나의 오른손, 정확히는 그 손에 쥐어진 검은 오러를 보며 식은땀을 흘렸다.

난생 처음 겪어보는 것일 테니 놀랄 만도 했다. 나 또한 그랬었으니까.

“ 벽이라 할 만큼 거창한 것은 아니에요. 그저 작은 깨달음 하나를 얻을 수 있었을 뿐이죠. ”

“ 겸손하시군요. 제 눈에는 도저히 작은 깨달음이라 보이지가 않습니다. 설마 오러만을 길게 뽑아 휘두르실 줄은……. ”

대뜸 헬레나가 검을 던져 혼란을 유도한 것부터, 검은 오러를 휘둘러 랜들의 검을 토막 낸 것 까지.

그야말로 의표를 찌르는 한 수가 아닐 수 없다며, 연무장을 에워싸던 기사단이 극찬을 아끼질 않았다.

“ 어쨌든, 좋은 검을 보고 배울 수 있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

랜들은 한쪽 무릎을 꿇은 채 헬레나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이 예의 있게 느껴지면서도, 한편으로는 갓 기사 서훈을 받는 병아리 기사를 보는 느낌이었다.

헬레나는 그것이 낯간지럽다는 듯 쑥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이다, 두 손으로 랜들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 아직 갈 길이 멀지만… 경에게 도움이 되었다니 기쁘네요. 중앙기사단이 강해지는 건, 그만큼 전하의 안위 또한 단단해 진다는 뜻이니까요. 참, 솔루스 경은 잘 지내시죠? ”

“ 물론입니다. 단장님께서는 늘 좋은 기회를 놓치는 것에 안타까워하시며……. ”

정작 국왕에 관심이 없음에도 충성심을 내비치는 것하며, 랜들의 비위를 맞추며 매끄럽게 대화를 이끌어가는 모습이 놀랍다.

이미 몇 번이나 보았음에도 새로웠다.

“ …다행이네요. 마음 같아서는 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만, 더 이상 질질 끌어서는 안 될 일이겠지요. ”

“ 예, 알겠습니다! ”

헬레나는 한동안 즐겁게 이야기를 주고받다, 언제 그랬냐는 듯 엄숙한 기색을 띠며 기사단을 부리기 시작했다.

주둔지 이동부터 막사로 쓸 텐트 설치 작업.

그 후에 검술 지도 및 훈련을 차질 없이 진행하기 위해서.

.

“ 좋아요. 일단 10분 휴식! ”

“ 예! ”

헬레나의 구령에 맞춰 우렁찬 대답소리가 주둔지 내에 쩌렁쩌렁 울렸다.

갑옷 차림의 기사들은 바닥에 주저앉아 더운 몸을 식혔고, 헬레나는 잡일을 돕기 위해 따라온 하인들을 시켜 물을 떠 오게 했다.

“ 고맙소. 마침 목이 말랐는데. ”

기사들은 하인들이 떠 온 물을 받을 때 마다 감사 인사를 전했다.

패악질을 부리거나 아니꼬운 듯 반응하는 이들은 한 사람도 없었다.

공작가의 하인이라 건드리기 곤란하다는 것도 있겠지만, 근본적으로 존중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 그나저나, 대공님이 참 부럽습니다. ”

기사들과 함께 둘러앉아 물을 마시던 중, 한 기사가 정말 부럽다는 기색을 띤 채 중얼거렸다.

나와 맨손격투 훈련을 하던 기사 중 한 사람이었다.

꿀꺽. 나는 하인이 건네 준 가죽 물통을 반쯤 비워낸 뒤,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 헬레나를 아내로 둔 것 때문에요? 그렇다면 부러우실 만도 한데……. ”

“ 아뇨. 그건 아닙니다. ”

기사는 정말 아니라는 듯 딱 잘라 부인했다.

장점을 가릴 만큼 집착의 그늘이 짙기는 해도, 헬레나 같이 수준 높은 여자가 드물다는 것은 그도 잘 알 터.

그런데도 이러는 것을 보니, 어지간히 헬레나가 무서웠나보다.

남자에 관한 소문이 워낙 흉흉한 탓이겠지.

“ 크, 크흠. 그러시군요. 그러면 무엇이 부러우신 건지…? ”

“ 공작님과 매일같이 훈련을 할 수 있는 상황, 그것이 부럽습니다. 실력을 키우기엔 최적의 조건 아닙니까. 대공님의 실력이나 센스가 모자라다는 뜻은 결코 아니지만, 그런 환경에서 실력이 안 느는 게 이상할 지경이니까요. ”

“ 아, 그런 뜻이었습니까? 분명 옳은 말씀이기는 하네요. ”

나는 눈치 볼 것 없다는 듯 피식 웃으며 시원스레 넘겼다.

듣기에 따라서는 상당히 무례하게 들릴 법도 했지만, 안면 튼 시간도 길다보니 서로에 대한 믿음과 지식이 있었던 덕이다.

더구나, 만약 서먹서먹한 사이었다면 애초에 이렇게 말을 걸지도 않았겠지.

“ 그나저나, 공작님은 날이 갈수록 강해지시니… 정말 두려울 지경입니다. 특히 연무장에서 부단장님을 상대로 사용하셨던 오러가 소름이 끼칠 정도더군요. ”

“ 자네도 그런가? 나도 그랬네. 아무리 마스터라고는 해도, 오러만 뽑아 휘두른다는 건 상상도 못한 일이었으니까? ”

“ 어디 그뿐이겠는가? 그 오러의 강도만 보아도……. ”

기사 한 사람이 물꼬를 틀자, 주위에 있던 다른 기사들도 기다렸다는 듯 한 마디씩 거들고 나섰다.

그러다보니 어느 새 시장바닥마냥 상당히 왁자지껄한 분위기가 되어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 이 분위기를 가라앉히러 오는 것 같은 랜들 쪽으로 다가갔다.

“ 랜들. 조용히 시키는 건 조금 있다가 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

“ 예? 아, 뭐… 대공께서 부탁하신다면 당연히 그러겠습니다만, 이유를 알 수 있겠습니까? ”

“ 영감이라는 건 그 순간에 잠깐 반짝이다 사라질 만큼 덧없지만, 자칫 인생을 바꿀 수 있을 만큼 큰일이기도 합니다. 제가 봤을 땐 지금 토론에 열을 올리는 기사들이 그 영감을 받는 중인 것 같고요. ”

훈련을 통해 얻어내는 것도 있지만 대화를 통해 얻어내는 것 또한 존재한다.

나는 그 점을 거론하며 조심스레 부탁을 했는데, 다행히도 쉬이 납득하는 기색을 보였다.

랜들 또한 은연중에 나와 같은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 일리가 있는 말씀이군요. 그럼, 조금 더 휴식하도록 두겠습니다. ”

“ 고마워요. 헬레나에게는 제가 말을 해 둘 테니, 랜들도 잠깐이나마 엉덩이 좀 붙이고 쉬세요. 기사단을 대표해서 오시긴 했지만… 이 자리의 책임자는 랜들 뿐만이 아니잖아요? ”

“ …으음.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랜들과 나는 각자 갈 길로 가기 위해 서로가 등을 돌렸다.

랜들은 기사들과 섞이기 위해, 나는 헬레나에게 다가가 휴식 시간을 조금 더 늘이기 위해서.

“ 그래? 그러지 뭐. ”

헬레나는 흔쾌히 내 부탁을 들어주었고, 그로 인해 20분 정도가 더 지나고 나서야 휴식을 끝냈다.

그 후로 이인 일조를 이루어 끊임없이 대련을 했고, 사람을 바꾸거나 조끼리 단체전을 치르기도 했다.

그렇게 1주일을 보냈다.

“ 첫 번째 훈련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겠습니다. 내일 하루는 휴식을 취하세요. 다음 날부터 또 다른 훈련에 들어갈 테니까요. ”

“ 훈련… 말입니까? ”

햇살이 새빨갛게 달아오를 무렵.

기사들 모두가 흙먼지를 뒤집어 쓴 상태로 가쁜 숨을 몰아쉬는 가운데, 그나마 멀쩡했던 랜들이 물었다.

왠지 모르겠지만 부단장이라는 직함에 어울리는 모습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네. 휴식을 취하신 다음 날부터는 좀 더 실전적인 훈련을 할 겁니다. ”

“ 그 실전적인 훈련이라는 것은…? ”

“ 우선 숲에서 엘프와 유격전을 벌인 뒤, 평지 전투, 조금 부족하지만 노예 마을에서 시가전을 벌일 예정입니다. ”

질문을 던진 랜들, 그리고 그를 시작으로 모든 기사들이 헉 소리를 냈다.

다른 종류의 전투는 그렇다 치더라도, 숲에서 엘프와 유격전을 벌인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일인지를 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러니 더더욱 훈련을 해야 하는 것이라고 헬레나가 덧붙였다.

그렇잖아도 불리하기 짝이 없는 상황을 경험 없이 맞이하면 속절없이 죽어나갈 것이라는 이유와 함께.

.

“ 후우, 후우……. ”

전투 당일.

노예들의 지휘관이자 마법병단의 장, 이브는 숨을 내쉬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아직 개간되지 않은 깊은 숲 곳곳에 엘프들이 포진한지 오래라, 명령만 떨어지면 신속히 공격할 수 있었다.

어지간히 긴장한 모양이다.

이번 전투의 부관으로 임명된 엘프 여자는 내심 그리 생각하면서도 애써 무덤덤한 표정을 유지했다.

생각 외로 쾌적한 노예 생활에 적응한지 오래라, 절로 눈치를 본 결과였다.

“ 시작하겠습니다. ”

톡톡. 이브가 목에 걸린 동그란 목걸이를 가볍게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

얼핏 보기엔 은빛의 동그란 원을 그리고 있을 뿐이라 밋밋하기 그지없어 보이겠지만, 실상은 달랐다.

이브가 몇날 며칠에 걸쳐 연구했던 마법진을 새긴 매직 아이템이기 때문이다.

아이템에 새겨진 마법은 천공의 눈으로, 마치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듯 넓은 시야를 얻게 해 주는 효과가 있다.

이브는 그 효과를 얻어 숲을 포함한 주변 일대를 훤히 꿰뚫어 보며 말했다.

“ 3소대는 왼편으로, 멀리 강을 건너 돌아가세요. 우회를 해서 후방을 노릴 겁니다. ”

“ 네. 전달하겠습니다. ”

“ 2소대는 둘로 갈라져 정면을 막으세요. 1,3분대를 그 축으로 하시고, 남은 2분대는 방어에 전념해 주세요. 1소대는 일단 후방을 맡다가, 2소대가 후퇴하면 견제를 통해 발 묶을 준비를 하시고요. ”

엘프는 바람의 정령을 통해 목소리를 실어이브가 내린 명령을 빠짐없이 앞쪽 전투부대에게 전달했다.

무전기가 없는 시대이기에, 엘프의 뛰어난 청력과 마법으로 그를 대신하도록 했다.

부관을 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었다.

“ 대략 삼십 미터 남았네요. 활을 시위에 겨누세요. ”

활은 오늘을 대비해 촉이 뭉텅한 것을 준비했으며, 견제를 위한 마법은 땅을 노리도록 했다.

어떤 훈련이던 부상 위험이 있기는 하나, 그를 최대한 줄이기 위함이었다.

이번 훈련은 섬멸전으로, 어느 한 쪽 진영이 전부 죽어야 끝난다.

정말로 죽는 것이 아니라 이번 훈련을 감독하는 헬레나가 가짜로 사망처리를 시키는 것이나, 긴장감만큼은 실전 못지않았다.

조심스레 정찰을 하는 기사단도, 엘프들도.

“ 공격. ”

때를 기다렸다는 듯, 이브가 냉랭한 말투로 전투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지시가 떨어지기 무섭게 정령마법을 깃들인 화살이 빗발쳤고, 그를 대비하던 기사단도 제법 격렬히 저항했다.

그들 또한 국왕을 호위하는 정예 기사들이었기 때문이다.

기사들이 오러 블레이드로 나무를 베어 쓰러뜨리고, 그 혼란을 노려 돌진했다.

쓰러지는 나무를 타고 엘프의 기척이 느껴지는 방향으로 쏜살같이 달렸다.

휴식을 받은 날, 랜들과 기사들이 나름대로 머리를 짜내 만든 전법이었다.

이 전법은 의외로 잘 먹혀 들어갔다.

엘프들의 무서움은 사각에서 정령마법과 소리 없이 날아오는 화살의 악몽인데, 그를 지지하는 발판들을 베어 균형을 무너뜨렸으니까.

하지만, 엘프들 또한 바보가 아니기에 대처가 빨랐다.

기사와 근거리에서 전투를 벌이면 열에 아홉은 지게 될 테니, 최대한 피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기사가 다가온다 싶으면 다음 나무로 훌쩍 건너갔고, 그 와중에도 화살과 마법을 쏘았다.

나무가 쓰러지고, 굉음과 함께흙먼지가 피어올랐다.

공작령의 사람 없는 숲은 그야말로 때 아닌 난장판을 겪었고, 그런 난리가 이틀 동안 계속되었다.

결국 숲 속 유격전의 승리는 엘프가 손에 쥐었지만, 기사단 또한 제법 잘 저항했기에 생각보다 많은 피해를 줄 수 있었다.

그 후, 하루를 통째로 쉬며 함께 여태껏 벌어졌던 전투 상황이나 전술 등을 토의하는 시간을 가졌고, 다음 날부터는 엘프들이 불리하게 여길 법한 보통 전투를 치렀다.

“ 돌진! 돌진하라! ”

평지전은 오로지 숫자가 많을수록 유리하며, 변수가 적다.

그러니 기사단이 원수를 갚겠다며 신나게 돌진하는 것도 그럭저럭 합리적인 수단이라 할 수 있었다.

엘프 군대는 수가 적으니까.

문제는, 엘프들이 사용하는 정령마법이 변수를 일으키기 충분하고도 남았다는 점이었다.

거기다 이브의 시야까지 더해져 예상치 못한 기습을 받는 경우도 있었다.

땅의 정령을 이용해 간단한 차폐물을 세우고, 진흙탕을 급조하여 조금이라도 속도를 줄임과 동시에, 흙탕물을 파도처럼 튀기게 하여 기사단의 시야를 가린다.

지키는 것보다 피하며 싸우는 것이 옳은 엘프 입장에서는 자연스레 쫓고 쫓기는 싸움이 되었다.

만약 이 끌고 당기기를 계속 유지했다면 엘프 측의 승리로 돌아갔겠지만, 결국 기사단의 승리를 쥐었다.

기습적인 쐐기 진형에 뚫려버린 것이 치명적이었다.

그야말로 기사단의 돌파력을 입증하는 순간이었다.

결국 숲에서 치른 유격전 외에는 엘프 측이 지기만 했으나 몹시 까다로웠다고, 기사단 모두가 입을 모아 말했다.

힘이나 경험이 조금 부족했다면 난전에 휘말려 냉정하지 못했을 거라고.

지온과 헬레나는 주최자로서 전투와 그 후에 내린 냉정한 평을 흐뭇하게 여기며, 엘프 노예를 관리하고 있던 이브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몇날며칠에 걸친 사투에 엘프 무리도 너덜너덜했지만, 다행히 크게 다친 이가 없었다.

그에 헬레나는 노예들을 칭찬하며, 집으로 돌아가는 날 들고 가라며 제법 많은 선물을 준비해 주었다.

사람끼리 쓰는 돈은 별 쓸모가 없어 값비싼 비단이나 와인 등, 그들이 좋아할 만한 것들 위주로.

“ 처음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훌륭했습니다. 정말 대단했어요. ”

두 부부는 풀이 죽어 죄송하다는 말만 뱉어내는 이브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으며, 어깨를 토닥이며 위로하기도 했다.

거기다 술까지 곁들인 결과 본의 아니게 이브의 눈물샘을 터뜨리기도 했다.

그 덕분일까. 다음 날 퉁퉁 부은 눈을 매만지던 이브의 표정이 제법 밝았음을, 두 사람은 볼 수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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