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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의 기둥서방이 되었다-109화 (109/192)

〈 109화 〉 마법병단 #5

* * *

“ 제 기대 때문에…? ”

“ 그야 그렇지 않겠소. 평소 대공을 은인처럼 생각하던 여아인데, 그런 대공이 기대한다 했으니 열심히 할 만도 하지. ”

제입으로 말하기 부끄럽기는 하나, 나름 은인이라면 은인이라 할 수 있기는 하다.

마탑과 별반 다르지는 않겠지만 연구비나 필요한 물자도 지원하고, 정령마법을 접하기 쉬운 환경에 살게 한 점도 있을 테니까.

다만 결과적으로는 이브가 내놓은 성과물과 교환한 셈이라 은혜를 베풀었다는 것보다 거래에 가깝다.

아마 마탑에서 인정받지 못했던 미세원소를 대충이나마 이해했다는 점이 크겠지.

“ 아무래도… 대화를 좀 해봐야겠네요. ”

관심을 받아 열심히 한다는 것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나, 그 관심이 무거운 짐이 되면 본인이 가장 힘들어진다.

나는 그 점을 확인하기 위해 이브와 단 둘이서 대화를 나눠 볼 생각을 굳혔다.

.

“ 휴식이라면… 오늘은 훈련이 없다는 말씀이시죠? ”

“ 네. 마법병단의 숙련도를 하루 빨리 올리는 것이 영지 입장에서도 좋지만, 너무 서두를 필요가 없으니까요. 지금 당장 전쟁 중이라 급히 병력이 필요한 상황도 아니고. ”

다크엘프 무리를 끌고 영지를 돌았던 다음날. 나는 이브가 살고 있는 오두막을 찾았다.

안내가 끝난 직후 오늘 하루는 쉬라고 전해 두었기에, 이브 또한 자기 집에 있었다.

이브의 집은 레드후드 용병단의 거처 바로 옆인지라, 이웃이기도 한 다크엘프 여성들과 짧게 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 그런… 가요? ”

“ 네. 그런 것이죠. 주말에 휴식을 제공하기는 해도, 이렇게 따로 쉬어야 할 때도 있지 않겠습니까. 아무튼……. ”

달그락. 나는 이브가 끓여 온 차를 찻잔에 내려놓으며 잠시 뜸을 들였다.

뜨거운 차를 반쯤 비워내고 나니 속이 확 풀리는 느낌이었다.

마치 국밥 한 그릇을 먹고 속이 든든한 것처럼.

“ 요즘 열심히 하신다고 하던데… 지치거나 다치신 곳은 없나요? 전투훈련이 익숙지 않으실 텐데. ”

“ 감사합니다. 배려해 주신 덕분에 몸 상태도 아주 좋아요. ”

“ 건강하시다니 다행입니다. ”

우물쭈물하는 모습이나, 어딘가 기죽은 기색은 여전하다.

다만, 여태껏 보지 못했던 초조한 기색이 어렴풋이 엿보였다.

다 타버린 장작 위로 피어오르는 여운 같은 연기만큼 희미하지만… 확실했다.

어제 오르커스가 아무렇지 않게 입에 담았던 노력.

순전히 본인의 의지로 다짐했다면 모를까, 본의 아니게 노력하라 압박을 준 이상 긴장을 풀어 줄 필요가 있어 보였다.

내가 끌어들인 사람이기도 하고, 중요한 인재이기도 하니.

“ 그래도, 너무 초조해 하시지는 마세요. 급히 서두르면 여러모로 꼬이기 마련이니까요. ”

“ …네? ”

이브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놀란 듯 물었다.

숨기고 있던 속내를 찔린 듯한 사람의 반응이었다.

물론 이브의 생각을 읽은 것이 아니다.

그저 오르커스의 발언과 이브의 기색을 보고 대충 찍었을 뿐이나, 놀랄 법도 했다.

“ 어떻게 알았냐는 반응이네요. ”

“ 네. 혹시 대공님께서는 마음을 읽는 수단이라도 가지고 계신 건가요? ”

“ 아뇨. 대충 찍었습니다. 이브의 기색이 평소와 달라 보여서요. ”

물론 적당한 근거가 있어 그를 바탕으로 했지만, 그를 알 리 없는 이브는 놀라워하는 기색을 보였다.

맥락 없이 갑작스레 이런 말을 꺼낸 것부터 기묘했으니까.

“ 정말… 찍으신 건가요? ”

“ 네. 제가 거짓을 말할 이유가 뭐가 있겠습니까. ”

“ 그렇겠죠. 대공께서 제게 거짓을 말할 이유가 하나도 없기는 하니까요. ”

결국, 이브도 어쩔 수 없이 납득하는 모양새였다.

의심한다 한들 답이 나오는 문제도 아니거니와, 굳이 신경을 곤두세울 만큼 중요한 일도 아니었기 때문이리라.

나는 조금이나마 조급한 기색을 푸는 이브를 보며,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되었다 판단해 입을 열었다.

“ 익숙지 않은 일을 하려면 시간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제가 이브에게 마법을 배운다고 하면… 그게 하루아침에 이루어질까요? 아마 마나를 다루는 것만 해도 몇날며칠을 잡아먹을 겁니다. ”

“ 네에. 아마도… 그렇지 않을까요? ”

다행히 내 말에 공감한다는 듯 이브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덕분에뒤를 이어 나갈 자신감을 얻었다.

“ 그렇죠. 뭐든 처음 하는 일에는 시간이 걸립니다. 재능이 몹시 뛰어난 인물조차 적응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지요. 물론 그 재능이 뛰어나면 뛰어날수록 습득하는 속도 또한 빠르겠지만, 세상에 그런 인물이 몇이나 있겠습니까? 당장 대륙 전체를 뒤져봐도 손에 꼽을 정도밖에 없을 겁니다. ”

또한, 일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실수하는 것 또한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미 익숙해진 사람들이 보면 그저 답답해 보일 뿐이겠지만, 정작 그들 또한 비슷한 길을 밟아 일이나 기술을 몸에 익혔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고, 대다수의 인간이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믿고 있었다.

물론, 가끔가다 뛰어난 재능만큼이나 보기 드문 부적응자가 나타나기 마련이지만… 이브가 그 정도로 이해력이 부족한 사람도 아니다.

오히려 복잡한 마법을 익히고, 자기만의 길을 걷고 있어 천재라 일컬을 만 했다.

나는 그런 속내를 숨김없이 전하며, 길게 뱉어내던 말을 끝맺기 위해 입을 열었다.

“ 천천히, 꼼꼼하게. 여태껏 이브가 해 오던 마법연구처럼, 그렇게 적응해 가시면 됩니다.

하지만… 사람을 다루는 일은 그 성질이 많이 다르니, 힘겨운 것도 당연하겠지요. ”

조직의 머리로서 움직이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는 내가 안다.

설령 일을 하지 않더라도 내가 머리라는 압박감 하나만으로도 어깨에 힘이 들어가며, 저도 모르게 긴장하기 마련이다.

즉, 개인에게 주어진 일을 능숙히 처리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분야라 할 수 있겠지.

더구나 무슨 일을 시작하더라도 어딘가에 이끄는 사람이 있기 마련일 텐데, 그런 요소가 없다면 힘에 겨운 것이 당연했다.

이를 신경 쓰지 못한 점은 분명한 내 잘못이었으니, 지금이라도 바로잡을 필요가 있었다.

“ 그러니, 죄송하다는 말씀과 함께…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싶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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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지휘를 가르치시겠다고요? ”

저녁 식사 이후.

크라우저 저택 집무실에서 탁자 하나를 사이에 두고, 두 여자가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하나는 저택의 주인 헬레나이며, 하나는 엘프 노예들을 점검하고 돌아 온 엘렌이었다.

“ 응. 지온의 부탁이라면 들어주는 게 당연하니까. ”

“ 그야 그렇죠. 대공님이 부탁하시는데 거절할 수는 없을 테니까요. ”

감히 대공의 부탁을 어찌 거절할 수 있겠는가.

다른 사람들이 듣는다면 무례하기 짝이 없다 할 만한 뉘앙스였다.

하물며 크라우저 공작가의 주인의 앞에서 할 말은 더욱 아니었다.

그럼에도 공작가의 주인 헬레나는 기분 나빠하는 기색 하나 없이, 오히려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두 여자에게 있어 진짜 상전은 지온이었기 때문이다.

평상시나, 침대 위에서나.

“ 아무튼, 그래서 이브 그린우드와 함께 군사훈련을 하게 됐어. 또 아버지의 신세를 지게 되겠지만… 크게 보면 나쁘지 않은 일이고. ”

꿀꺽. 헬레나가 손에 든 차를 한 모금 털어 넣은 뒤, 뜨거운 김을 뱉어내듯 숨을 길게 내뱉었다.

엘렌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 문득 뇌리를 스친 의문 하나를 입에 담았다.

“ 그런데, 공작님께서는 대공님과 그 마법사가 가까이 지내는 걸 꺼려하지 않으셨나요? 만에 하나의 가능성 때문에. ”

“ 네 말이 맞아. 지온과 가까이 지내다 보면 반해버릴 가능성이 높으니까. 그래도, 이번에는 괜찮을 것 같아. ”

달그락. 헬레나는 찻잔을 내려놓은 뒤지온에게도 이야기했던 조건을 이야기했다.

조건이란 지온의 요청을 들어주되, 그 대신 지온이 이곳 저택에 남아 서류작업을 도맡으라는 것이다.

“ 아! 그러면 대공님과 함께 지내는 시간을 줄일 수 있겠네요. ”

“ 그렇지. 내 말이 바로 그거야. ”

지온과 함께 하는 시간을 줄여 호감이 쌓일 여지를 최대한 줄이고 명분은 명분대로 챙긴다.

그 과정에서 이브에 대한 배려 따위는 없었지만 충분하다고 헬레나는 생각했다.

다만, 내심 이미 늦지 않았을까 하는 일말의 불안이 희미하게 피어올랐다.

만약… 만약 생각했던 일이 벌어졌다면, 경우에 따라 대응을 달리해야 할 수밖에 없다.

헬레나는 그리 결론 내렸다.

사소한 일로 부딪치기는 했으나 엘렌처럼 제 경우를 안다 장담할 수 없을 노릇이었으니.

“ 어쨌든, 모든 것은 이브 그린우드를 접하며 천천히 결론을 내릴 일이야. ”

한 남자를 향한 광기에 사로잡혀 있음에도, 그 애정을 나눈다는 것에 적응이 된 기묘한 상황.

그 상황이 헬레나에게 이성적인 판단을 하도록 만드는 발판이 되었다.

정작 장본인인 헬레나가 깨닫지는 못했으나, 저도 모르는 새 인관관계로 인한 환경 변화에 적응한 셈이다.

그렇게 엘렌과 잡담을 나누다 함께 침실로 향한 다음 날.

헬레나는 오늘따라 유난히 시큰거리는 허리를 주무르며 다크엘프 마을로 걸음을 옮겼다.

정확히는 말을 타고 갔기에 말머리를 돌렸다는 표현이 옳겠지.

“ 아…! 넘칠 것 같아……. ”

얼굴을 붉힌 채 소변을 참듯 힘을 넣은 아랫배를 손으로 쓸며, 헬레나는 몇 시간 전의 일을 떠올렸다.

지온의 위에 올라타 미친 듯이 허리를 흔들고, 결국 실신에 이르렀던 일이었다.

힘을 준 아랫배를 쓸어 넘기는 행위도 그와 깊은 연관이 있었다.

서로의 합의와 이해가 있어 아직까지 아이를 낳지는 않았으나, 준비만큼은 철저하다 못해 진절머리가 날 만큼 틈이 없었다.

지금도 그 증거가 헬레나의 아랫배, 정확히는 그 안쪽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정을 품고 일하면 그 존재감을 가까이 느낄 수 있어 좋다.

그렇기에 헬레나와 엘렌은 꼭 지온의 품에 안긴 뒤에 일을 하러 나섰다.

불안하던 정신을 안정시키는데도 큰 도움이 되었다.

어찌 보면, 무엇보다 확실한 사랑의 증거라 할 수 있었기에.

“ 공작…님? ”

헬레나가 마을에 다다르자, 한 발 먼저 도착해 마을 부지를 돌아다니던 이브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마침 마을 주변에 설치한 연계마법진을 점검하는 중이었기에, 이렇게 금방 헬레나와 만날 수 있었다.

영차. 헬레나는 가볍기 그지없는 몸짓으로 말에서 뛰어내린 뒤, 부드럽게 웃으며 이브에게 다가갔다.

“ 네. 안녕하세요. 이른 시간부터 부지런하시네요.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요? ”

“ 아, 아뇨. 그냥 마을 주변에 설치한 마법진이 훼손되지는 않았는지 확인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공작님께서 여기까진 어쩐 일로…? ”

이브가 아는 한, 영지 내를 자주 시찰하는 귀족은 무척 드물다.

정말 중요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은 이상 주위에서 오르는 보고를 듣고 판단하는 것이 대다수다.

가끔 놀이나 다른 귀족의 초대를 받고 나가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이와는 달랐다.

물론, 헬레나도 그 예외라 할 수 있지만… 지온에 비해서는 지극히 귀족적인 여성이라는 인상이었다.

그러니 놀랄 수밖에.

“ 후후. 너무 놀라지는 마세요. 오늘부터는 제가 이브와 함께 훈련을 할 테니까요. ”

“ 네, 네…? 공작님께서 직접… 하신다고요? ”

“ 그래요. 객관적으로 봐도 지온보다는 제가 군사 훈련 등에 적합하니까요. 교육을 받은 시간도 제가 더 많고요. ”

헬레나는 여전히 어안이 벙벙한 채 서 있는 이브를 향해 부드러운 투로 답을 주었다.

기사단 훈련을 비롯하여 어릴 때부터 공작으로서의 교육을 받아 온 자신감이 자연스레 묻어나오는 답이었다.

이브도 그를 느꼈는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헬레나의 말에 거짓 한 점 없음을 느꼈고, 강한 설득력을 느꼈기에.

“ 저야 영광이지만… 너무 과분한 배려에 몸 둘 바를 모르겠어요. ”

“ 아하하! 과분하다니요. 무척 말을 재미있게 할 줄 아시는 분이셨네요. 이래서 대화를 자주 나눠봐야 하나 봐요. ”

유난히 소극적인 투로 답하는 이브의 답이 재밌었는지, 헬레나가 즐겁다는 듯 제법 소리 높여 웃어댔다.

자칫 비웃는 것이 아닐까 싶을 만큼 반응이 컸지만, 결코 그럴 생각은 없었다.

헬레나는 그를 증명하려는 듯 이브의 어깨에 부드럽게 손을 얹은 뒤, 눈에 힘을 주었다.

“ 설령 배려라고 해도… 당신은 그만한 배려를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에요. 그러니 자신감을 가지고, 한 발 한 발 천천히 나가면 돼요. 알겠죠? ”

“ 네, 네엣! 감사… 합니다. ”

크라우저 공작령에 와서 몇 번이나 칭찬을 받아 봤지만, 아직까지 익숙해지질 않는다.

그 탓에 몸을 빳빳이 세우며 몹시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이브 그린우드가 그런 여자였기 때문에.

헬레나도 그를 아는지, 긴장을 풀어주려는 듯 이브의 어깨를 가볍게 쓸며 입술을 뗐다.

“ 좋아요. 그러면 우선… 아침부터 먹었는지 확인해 볼까요.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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