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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의 기둥서방이 되었다-101화 (101/192)

〈 101화 〉 나는 여자가 있어요 #3

* * *

약식으로 엘렌을 기사로 임명한 후, 우리는 하운드 백작령으로 가는 마차에 올랐었다.

도착하기까지는 사흘 정도 걸렸고, 영지에서 영지를 거치며 적당한 숙소에 머무르곤 했다.

“ 정복을 처음 입어서 그런지… 뭔가 어색하네요. ”

하운드 백작 저택을 코앞에 둔 때.

맞은편에 앉아있던 엘렌이 덜컹거리는 소리만 들려오던 마차 안에서 어색하다는 표정을 하며 말했다.

헬레나의 옷과 꼭 닮은 검은색 정복의 촉감에 적응하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 어색할 만도 하지. 그래도 곧 적응 될 거야. ”

“ 네. 감사합니다. ”

감사할 것까지야.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엘렌의 어깨를 두드리다, 엘렌 옆에서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는 헬레나를 살폈다.

말이 없다 해서 언짢은 기색은 아니었고,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모습이었다.

아마 하운드 백작이 무슨 생각을 갖고 우리를 초대했는지를 깊이 생각하는 것 같았다.

직접 부딪혀보며 알아내자는 결론을 내리긴 했지만, 막상 목적지를 눈앞에 두자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 많이 신경 쓰이지? ”

“ 응. ”

헬레나는 가만히 고민에 빠져 있던 와중에도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으면 반응이 한 박자 늦을 만도 한데, 전혀 그런 기색이 없었다.

그래서 대단했고, 무섭기도 했다.

“ 그런데 신경 쓰이는 건 하운드 백작이 아냐. 지온이 했던 말 때문에 그래. ”

“ 내가 했던 말? ”

“ 응. 꼭 검을 휘둘러야만 기사가 아니라는 말. 그 말이 묘하게 계속 마음에 걸려. ”

기억이 난다.

반드시 검을 휘두르고 오러를 일으킬 수 있어야만 기사가 아니고, 그저 검을 쥐고 사는 자들이 기사가 되는 일이 많은 것 뿐이라는 말을 꺼냈었다.

그런데 그 말이 거슬렸던 것일까.

“ 혹시… 많이 거슬렸어? ”

“ 거슬려? 그럴 리가. 나는 지온이 무슨 말을 하던, 무슨 행동을 하던 전혀 거슬린다고 생각 안 해. 전부 옳으니까. 하지만……. ”

나는 덤덤하게 맹목적인 믿음을 거론하는 헬레나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겁기 짝이 없는 믿음이야 하루 이틀이 아닌지라 그러려니 해도, 확실한 답을 듣지 못한 탓이었다.

“ 하지만…? ”

“ 뭔가 떠오를 듯 말 듯 한, 혹은 조금만 손을 뻗으면 닿을 듯 말 듯한 느낌이라… 그게 계속 신경 쓰여. ”

잡힐 듯 말 듯한 무언가라.

혹시 무협지에서 나오던 깨달음의 순간을 목전에 두기라도 한 것일까.

만약 이 생각이 정답이라면 더 이상 쓸데없이 말을 걸어서는 없을 노릇이었다.

자칫 잘못하다 좋은 기회를 영영 놓칠 수도 있었기에.

“ 알았어. 생각이 다 정리되면 말해 줘. ”

“ …고마워. ”

헬레나는 심드렁한 반응을 보이다다시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그에 엘렌이 놀란 듯 눈을 휘둥그레 뜨며 입술을 떼려 했으나, 내 검지로 입술을 막아 소리 내지 못하도록 했다.

본래 가만히 앉아 좌선이라도 하며 마음을 다스려야 옳을지 모르지만, 아직까지는 괜찮아 보인다.

갑자기 기혈이 뒤틀리거나 심마 같은 것에 빠져 망가질 기색도 없었다.

그저 가만히 기다리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

잘 꾸며진 정원에 연못까지.

마치 국립공원을 떠올리게 하는 마당을 보며 내심 감탄하다, 왕궁 연회장과 닮은 방을 보고 한 번 더 놀랐다.

귀족파 대부분이 사치스럽게 생활한다는 말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상상 이상이었다.

아는 것과 직접 보는 것의 차이가 얼마나 큰 지를 새삼 느끼는 순간이기도 했다.

더욱이 어디서든 금세 밀회를 즐길 수 있을 샛길도 많았다.

참 노골적인 구조가 아닐 수 없었다.

“ 잘 꾸미긴 했네. ”

“ 그러게 말이에요. ”

나와 엘렌이 짝을 맞추어 잡담을 나누는 동안에도 헬레나의 입술은 굳게 닫혀 있었다.

기분이 나쁘거나 큰 일이 터졌기 때문이 아니라, 마차 안에서 이야기했던 일 때문이었다.

하지만 하운드 저택 안에서 걸어 다니는 인간들이 그를 알 리 없으니, 간단한 변명을 입에 담고 다녀야 할 것 같았다.

“ 환영합니다. 헬레나 크라우저 공작님. 그리고 지온 크라우저 대공님. ”

“ 그래, 수고가 많네요. 엘렌, 그러면 나중에 봐. ”

“ 알겠습니다. ”

나는 엘렌을 먼저 보내고, 연회장 정문에 서 있는 집사에게 손을 흔든 뒤에야 안으로 들어섰다.

저택 정문을 밟기 전부터 모든 무기를 맡아야 한다는 규칙에 따라 무기를 반납해서 그런가, 가슴 쪽이 유난히 허전했다.

늘 더크를 품고 다녔으니까.

연회장은 이미 많은 사람들로 채워져 있었다.

그 대부분이 귀족파의 면면이라는 건 말할 것도 없지만, 중립파도 간간히 섞여 있었다.

당연히 국왕파는 없었다. 우리를 제외하면.

“ 어머나. 크라우저 공작님. ”

적당히 외진 곳에 자리를 잡기 무섭게 시선이 쏠렸다.

국왕파의 필두 귀족이 찾아 왔으니 그럴 만도 했다.

나라도 다른 공작이 왔다는 말을 들으면 시선이 자연스레 향할 것이 분명했다.

지금 다가온 이 여성처럼 넉살 좋게 친한 척 하지는 못했을 지라도.

“ 으음. 죄송합니다. 지금 헬레나가 한창 검에 대한 고민에 빠져 있는 중이라… 인사를 받아들이기 힘들어서요. ”

하급 귀족의 인사 따위는 시원하게 무시해도 그만이지만, 그랬다간 분위기를 흐릴 가능성이 컸다.

그것은 무난한 분위기 속에서 흘러가는 상황을 파악하고 싶은 내게 달갑지 않은 미래였다.

그러니 내가 대신 나서서 간단히 변명을 했다.

헬레나가 소드마스터이기에 더할 나위 없을 정도였다.

“ 어머나! 그런데도 이렇게 몸소 걸음을 옮기시다니……. ”

“ 모처럼 받은 초대를 거절할 수도 없어 이렇게 대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부디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 아아, 그렇군요. 아쉽지만 인사는 다음에 올려야겠네요. 그럼,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

귀족 여자, 정확히는 하운드 백작부인이 가볍게 고개를 숙인 뒤 물러났다. 헬레나와의 대화만이 목적이었는지 등을 돌리는 데도 미련이 느껴지질 않았다.

“ 하하! 이렇게 제 초대에 응해주셔서 다들 감사합니다! ”

한 쪽 구석에서 이 저택의 주인 브라운 하운드가 호탕하게 웃으며 손님들을 맞이하고 돌아다녔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눈앞에 차려진 화려한 만찬에도 좀처럼 손이 가질 않았다.

묘하게 밥맛 떨어지는 모습이라 그런 것일까.

아무튼, 브라운이 사방을 돌며 친목을 다지는 와중에도 우리에게 다가오는 사람이 없었다.

두려워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국왕파와 게속 이야기를 나누는 게 눈치 보이는 탓인지는 모른다.

그저, 마나를 끌어올려 귀를 기울여보니… 참 가관이 따로 없었다.

─저기, 저 애가 대공이라면서요? 귀엽기는 하네. 크라우저 공작은 저렇게 생긴 아이를 좋아하나 봐요.

─그러게 말이에요. 본래 영지 하나 없는 자작의 장남이라고 하던데, 참 운도 좋지.

─다들, 그 소문 몰라요? 어려서 그런지 정력도 엄청 좋아서… 거의 일주일을 침대에서 보낼 수 있다던 소문요.

─아아…! 세르반 남작령에서 퍼진 그 소문 말이죠? 사실인지는 모르지만… 만약 진짜라면 되게 맛있겠다. 한 번 맛이나 볼까?

자기 딴에는 안들리나 싶겠지만, 아주 잘 들린다.

나름대로 우아한 귀족 부인이라고 한들, 결국은 아줌마라는 것일까.

입을 모아 떠들어대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몹시 노골적이었다.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 들었다면 진즉 불같이 화를 낼 지도 모를 일이었다.

내 험담을 참지 못하는 헬레나도 포함해서.

“ 오오! 대공님! 이렇게 와 주셔서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

마침내 자기 면면들 챙기기가 끝났는지, 브라운이 눈을 반짝이며 내 곁으로 다가왔다.

“ 가장 먼저 인사를 올렸어야 했는데… 제 눈이 어두워 잘 보이질 않았습니다.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

“ 예. 괜찮습니다. ”

어차피 남의 집 마당이기도 하고, 죽을죄를 지었다는 듯 고개 숙이는 모습을 보니 몰아붙이기도 애매했다.

그러니 적당히 사과를 받아주는 선에서 마무리했다.

“ 참. 공작께서는 검을 고찰하시느라 정신이 없으시다 하시던데… 맞습니까? ”

더해, 헬레나의 상태를 듣고 오지 않고서야 꺼낼 수 없을 질문을 던졌다. 아무래도 자기 사람을 챙기다 들은 모양이었다.

“ 예. 그래서 제가 곁을 지키고 있습니다. 집중이 깨지면 싫어할 것이 분명하고, 국가적으로도 큰 손해가 날지도 모르니까요. ”

“ 옳습니다 그리고 아주 훌륭하십니다. 소테른의 검을 막는다는 건 반역죄에 해당할 테니까요. 이렇게 발걸음을 옮겨주신 것만으로도 몸 둘 바를 지경입니다. ”

브라운은 아주 열성적인 충신인 것 마냥 과장스러운 예시까지 들었다.

헬레나에게 직접 아부를 할 수 없어 아쉽겠지만, 나와 대화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하는 기색이었다.

나도 표면상 공작과 급이 같은 대공이니까.

“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

“ 아무렴요. ”

그 후로도 별 중요하지 않은, 적당히 한 귀로 듣고 흘릴 잡담으로 시간을 때웠다.

요즘 귀부인들이 어떠니, 유행이 어쩌니 하는 이야기였다.

귀족들 사이에선 심미안의 수준도 중요하다보니 자연스레 그와 같은 이야기가 오고갔다.

물론 내 심미안은 평범한 사람 수준이라 적당히 말만 맞춰 줄 뿐이었다.

아마 보통 귀족이라면 진즉 눈치를 채고 꼽이라도 줄 정도였다.

아마도 내가 공작의 기둥서방이 아니었다면 진즉 그랬겠지.

“ 하하.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대화가 잘 통하는 분이시군요. 저는 어리신 나이에 엄격한 공작님과 혼인을 맺은 분이기에 훨씬 고지식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만……. ”

“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직 갈 길이 먼 애송이는 맞지요. ”

“ 애송이라니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충분히 크라우저 공작가의 대공이 되실 만한 그릇이세요. ”

아부를 하며 껄껄대고 있음에도 그 눈빛이 무척 날카로웠다.

나름 귀족파 중에서도 상위에 속한 일가라 그런지 연기에 아주 능숙해 보였다.

덕분에 아주 소름이 끼칠 지경이었다.

“ 그러고 보면, 엘프들의 공격을 역이용해 큰 이득을 거두신 것도 대공의 수완이라 들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냉정하게 대처하실 수 있었는지… 정말 놀라울 따름이에요. 만약 제가 대공님과 같은 나이에 그런 일을 겪었다면 그와 같은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을 겁니다. ”

“ 오. 엘프에 관한 이야기가 여기까지 퍼졌나요? ”

“ 물론이지요. 아마 왕국 전체가 알고 있을 겁니다. 크라우저 공작가의 대들보가 기습받았다는 건 그만큼 큰일이니까요. ”

나를 아부하며 은근슬쩍 정보를 캐내려 하나?

엘프를 어떻게 잡았는지, 혹은 그를 이용해 어떤 구체적인 이득을 얻고 있는지, 아주 상세하게 알고 싶어 하는 기색이었다.

본인을 위해서일까. 아니면 누군가의 사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떠보는 것인가.

어느 쪽이든 간에 떠본다는 사실에 큰 변함은 없어 보였다.

“ 그저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아시다시피 헬레나가 마스터이기도 하고, 다크엘프 용병도 있으니까요. 그를 가지고 압박을 하니 잘 먹혀 들더군요. ”

“ 아… 그랬지요. 제가 용병을 깜빡 했었습니다. ”

그저 두루뭉술하게, 또 소드마스터 덕이라는 점을 부각하며 이야기했다.

엘렌이 유산을 가졌다는 사실은 알릴 필요도 없었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자연재해를 다룰 수 있다 알려지면 크게 골치 아파질 일이 많을 테니까.

브라운의 떨떠름해 하는 기색을 보면 원하던 답을 못 들은 것 같지만, 굳이 기분을 풀어 줄 필요도 없었다.

“ 참. 그나저나 하운드 백작님의 입장에서는 크라우저 공작이 무척 껄끄러우실 텐데, 어떻게 초대하실 생각을 하셨죠? ”

“ …예? ”

여태껏 질문에 답만 하다, 반대로 질문 한 번을 던지자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캐물으리라 생각 못한 탓일지도 모르겠다.

“ 아시다시피 우리 공작가는 하운드 백작님과 큰 연관이 있는 킬리네어 공작가와 묘한 관계에 있지 않습니까. 더해, 전대 킬리네어 공작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잘 아실 테고요. ”

“ 그렇긴… 합니다만……. ”

“ 예. 잘 아시는 것이 당연하시겠지요. 당시 헬레나는 공작 직을 내려놓고 노예가 될지 모를 아주 위험한 상황이었으니까요. 더구나 지금은 죽고 없는 알버스 킬리네어가 그 원인이었으니……. ”

킬리네어와 빚었던 마찰을 꺼내들자 점점 당황하는 기색이 커져갔다.

전체적으로 보면 그 정도가 미미한 수준이지만, 분명 당황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었다.

나름대로 귀족 짬밥을 먹고 자란 성과가 아닐까 생각했다.

나는 이쯤에서 더욱 강하게 흔들어보자 생각하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이듯 물었다.

“ 그런데도, 그를 따르시는 백작님이 저희를 따로 초대하실 생각을 했다는 게 참 신기해서요. 혹여… 킬리네어 공작님의 그늘에서 벗어날 생각을 하고 계십니까?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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