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화 〉 나는 여자가 있어요 #2
* * *
칭얼대는 아이를 달래듯 헬레나를 달래자 새근새근 숨소리를 내며 잠들었다.
덩치만 클 뿐 아기와 다를 바 없어 보이는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웃기기도 했다.
나는 그런 헬레나를 두 팔로 조심스레 안아들어 침실로 향했다.
어차피 할 일은 다 끝났으니, 이대로 여유롭게 남은 하루를 보내도 괜찮을 것 같았다.
“ 후우……. ”
헬레나를 침대에 조심스레 눕히자 자연스레 한숨이 흘러나왔다.
아직 환한 대낮이었음에도 밤낮 가리지 않고 일을 한 것 같은 피로감이 몰려온 탓이었다.
한 번 피로감을 느끼기 시작하니 점점 눈꺼풀이 무거워지고 있음을 느꼈고, 몸뚱이 또한 나른하기 그지없었다.
곧 가을이 다가오는 시기인데도 봄바람을 맞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마침 오늘 일도 마무리 지었겠다, 이대로 한 숨 돌려도 괜찮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한 순간 눈이 스르르 감기며, 온 몸이 졸음에 푹 잠기는 것을 느꼈다.
.
“ 그냥 던져본 것인데, 설마 정말로 오겠다는 답을 주다니. ”
여느 귀족파가 그러하듯 화려하고 고풍스럽게 치장된 방에서, 방의 주인이자 이 저택의 주인이기도 한 남자가 놀랍다는 듯 중얼거렸다.
남자의 이름은 브라운 하운드로, 백작이다. 특이사항으로 사냥개를 기르는 취미가 있는 남자였다.
어쨌든, 초대를 받아들인 이상 소홀히 대할 수는 없겠지.
브라운은 헬레나가 보낸 편지를 책상에 내려놓은 뒤, 손가락으로 그 위를 툭툭 두드렸다.
일개 백작의, 하물며 다른 파벌의 귀족이 보낸 초대장을 받아들일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보통 이런 파티라 함은 같은 파벌의 인간끼리 모여 친목을 다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파벌이 없다면 원하는 파벌에 들기 위해 초대를 하거나 초대를 받으려 애쓴다.
그것이 귀족의 사교장을 만드는 방법이다.
물론 국왕의 생일 같은 큰 명분이 있다면 파벌을 불문하고 모이기 마련이지만…….
“ …일이 터진 이상 어쩔 수 없지. ”
브라운은 자신에게 이런 지시를 내린 인간, 루크의 얼굴을 떠올리며 한숨 쉬었다.
귀족파에서 어느 정도 입김 좀 불 수 있는 위치라고는 하나, 결국은 귀족파의 일원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껄끄러운 상대를 초대할 생각 따위를 할 수도 없었다.
하물며 그 상대가 공작이라면 더더욱.
하지만 그가 속한 파벌의 수장, 루크가 그러기를 원했다.
그 자신이 직접 초대를 하는 것보다 브라운이 하는 편이 목적을 숨기기도 좋고, 파장이 적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하운드 입장에서는 따를 수밖에 없었다.
비록 상대가 자신보다 어린 애송이라고는 해도, 귀족파의 머리이자 공작이기에.
.
“ 하운드 백작령에는 개가 많대. ”
성씨가 하운드라 그런지 개와 관련이 깊나?
나는 집무실 소파에 앉아, 저녁으로 만든 베이컨 샌드위치를 씹으며 헬레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 개? 개를 즐겨 먹기라도 해? 아니면 다른 방식으로 이용하는 건가. ”
“ 브라운 하운드 백작이 사냥개를 기르는 취미가 있다고 해. 날짐승도 많은 환경이라 그런지 사냥을 즐기기 좋은 곳이라고 하더라. ”
이 대륙에서 사냥이란 누군가에게는 생존이자, 누군가에게는 놀이다.
그리고 브라운에게 있어선 놀이였을 뿐이겠지.
더해, 내가 살던 곳에서도 귀족들이 사냥을 즐겼다고 하니 썩 놀라울 일은 아니었다.
다만, 귀족이 직접 사냥개를 기른다고 하면 나름대로 노하우가 있을 터. 나로서는 그 노하우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인 일이지만, 알아서 나쁠 것은 없을 것 같았다.
“ 사냥개를 잘 기르나보네. 혹시 사육 방법 같은 걸 물어보면 가르쳐 줄까? ”
“ 으음… 육성법이 기밀로 정해진 건 아닌 것 같기는 한데, 내키지는 않을 지도 몰라. 아니, 분명히 꺼림칙하게 느낄 거야. 하운드 백작령의 사냥개는 영지전에도 써먹는다고 하니까. ”
사실 사냥개가 아니라 군견 역할도 수행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군견은 병사와 같으면서도 좀 더 특화된 역할을 할 수 있다.
그 육성법을 알아낸다는 건 영지 고유의 훈련법을 뜯어내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
그러니 꺼림칙하게 여기는 것도 당연하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당연히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을 드러냈다.
“ 그 정도로 알뜰하게 써먹는다면 알려줄 수 없을 만 하지. 그렇다고 억지를 부리면 국왕파가 귀족파를 압박하거나, 트집을 잡아 무슨 짓을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테고. ”
“ 응. 시커먼 속내를 알고 싶어 받아들였지만, 쓸데없이 시끄러워 질 일은 피하고 싶어. ”
“ 나도 그래. 그러니 직접 알아내는 건 그만두고, 압박도 안 하는 게 좋을 것 같네. ”
긁어 부스럼이 날 상황은 되도록 피하는 것이 옳았다.
그렇지 못할 경우 큰 손해를 볼 수 있는 걸 눈으로 볼 수 있었다.
당장 나를 납치하려다 실패한 엘프 놈들도 그 중 하나였다.
엘렌의 잠재적인 위험성 때문에 일을 저질렀다 종족 전체가 큰 손해를 짊어지는 실패를 하게 되었으니까.
“ 저기, 지온. ” “ 응? 왜 그래? ”
하지 말아야 할 짓을 정리하던 중, 헬레나가 뺨을 붉게 물들인 채 목소리를 냈다.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꼼지락 대는 것도 그렇고, 무언가 할 말이 있어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래서 자연스레 질문을 던졌더니, 생각도 못했던 질문이 날아왔다.
“ 나… 드레스 입을까? ”
드레스. 헬레나의 드레스라.
늘 기사들이 입고 다닐 법한 정복 차림만 고수하던 그녀가 처음으로 드레스라는 소리를 입에 담았다.
어릴 때나 결혼식 때를 빼면 늘 정복 차림으로 지내던 그녀가.
나는 내심 놀랍기 그지없다 생각하면서도, 겉으로는 최대한 부드럽게 웃으며 물었다.
“ 갑자기 왜? 무슨 일 있었어? ”
“ 아냐. 아무 일도 없었어. 그냥 늘 정복 차림이니까, 지온이 진작 질렸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
“ 그래서 드레스를 입어볼까 싶었어? ”
“ …응. 그렇잖아도 보통 영애들과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하고 있는데다, 손도 점점 거칠어져만 가니까… 드레스라도 입으면 조금 예뻐 보이지 않을까 싶어서. 거기다 명분 없이 즐기기 위한 연회니까……. ”
명분 없이 즐기는 연회이기에 더더욱, 한 눈이라도 팔 상황이 벌어질까 두려운 것일까.
하지만 정작 내가 한 눈을 팔면 언제 그랬냐는 듯 광기에 가득 찬 집착을 드러낼 텐데, 정말 새삼스럽기 그지없었다.
“ 이제 와서? 너무 새삼스럽네. ”
나는 헬레나의 손을 꽉 지며 헛웃음을 흘렸다.
지금도 훈련을 게을리 하지 않기에 점점 거칠어지는 손 때문에 풀이 죽은 듯 보였기 때문이다.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검을 쥐는 손이 거칠어지기 마련이니까.
“ 손은 거칠어져도, 헬레나는 여전히 매력적이야. ”
“ 정말…? ”
“ 그럼. 정말이지. ”
빈말이 아니라 진심이다.
헬레나도 그를 느꼈는지 풀 죽은 기색을 풀고 눈을 반짝였다.
아직 반 정도는 믿지 못하는 눈치지만, 그것마저 곧 사라질 것 같았다.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주는 편이 더욱 알기 쉽다.
나는 그 생각을 굳히며, 헬레나의 손을 잡았던 내 손을 매끄러운 허벅지 위로 가져다 댔다.
거친 운동을 하며 탄탄하게 조여진 탄력과 매끄러움이 느껴졌다.
“ 봐. 지금도 맛있다는 느낌이 느껴지잖아. ”
입꼬리를 슬쩍 비틀며 허벅지를 쓸자, 헬레나가 나지막한 신음과 함께 몸을 부르르 떨었다.
허벅지를 쓸어내리는 손가락 때문에 닭살이라도 돋은 모양이었다.
“ 내가… 맛있어? ”
“ 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을 만큼, 더 먹고 싶을 만큼 맛있어. ”
선을 지켜야 할 주종관계.또는 약혼자로 내정된 시절에도 꺼내서는 안 될 수위의 발언이지만, 지금은 다르다.
이미 결혼까지 하여 공식적인 부부관계가 된 마당에, 매일같이 침대에서 몸을 섞는 중이다.
그러니 수위가 높은 농담을 던져도, 귀족들이 말하는 천박한 이야기를 입에 담아도 괜찮았다.
헬레나라면 내가 어떤 처지였더라도 전부 받아들였겠지만, 환경이그러질 못했으니까.
“ 그리고, 내 욕심으로는 헬레나가 드레스를 안 입었으면 해. ”
“ 왜…? ”
“ 드레스를 입으면 그 맛있어 보이는 몸이 다 드러나니까. ”
증기사우나라도 들어온 듯 방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숨이 막힐 만큼 뜨거운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헬레나는 불안함 대신 기대감에 부풀어 오른 눈빛을 보였다. 아마 나도 마찬가지겠지.
더구나, 마침 저녁시간이라 거리낄 것도 없었다.
이대로 침실로 자리를 옮겨도 좋았고, 여기서 한 번 열을 식히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그러나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었기에 아주 조금 뒤로 미뤄야만 했다.
“ 어…? 왜 그만두세요? 시작하시면 저도 은근슬쩍 끼어들려고 했는데. ”
바로, 건너편에서 멀뚱멀뚱 우리를 바라보고 있던 엘렌의 위치를 정하는 일이었다.
“ 그 전에 할 일이 있어서. ”
“ 네? 또 무슨 할 일이 남았나요? 서류는 없는 것 같은데……. ”
갑자기 바뀐 분위기에 적응을 못 한 탓일까. 헬레나가 부끄러운 듯 내 품에 꼭 안겨들었다.
그와 반대로, 엘렌은 태연자약하게 집무실 책상과 내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고.
“ 엘렌의 공식적인 위치를 정하는 일이야. ”
“ 위치요? 대공님의 호위 말고 다른 게 필요하다는 말씀이세요? ”
“ 그렇기도 한데, 슬슬 공식적인 직함이 필요하다 싶어서. ”
엘렌의 내 호위이고, 지금도 용병단의 대장이다.
즉, 손님이자 내 신변을 지키는 여자로서 제법 괜찮은 대우를 받는 중이다.
다만, 그렇기에 엘렌의 처우가 명확하게 정해지지 않은 점도 있었다.
첩이라고는 하나 비공식적이며, 겉으로 내세울 수도 없다.
이는 헬레나와 엘렌의 약속이었다. 내가 참견해서는 안 될 약속.
결국 겉으로 드러나는 엘렌의 위치는 내 호위라는 것 하나 뿐인데, 지금 와서 보니 개선이 필요해 보였다.
문제는 거론하지 않는 이상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 그런가요…? 지금도 과할 정도로 충분한데. 아무튼, 저는 대공님이 말씀하시는 대로 따르겠습니다. 뭘 하면 될까요? ”
“ 별 건 아니고, 정식으로 기사 수훈을 하면 어떨까 싶어. 시간은 없으니 약식으로. ”
나는 주머니를 뒤져 금으로 만들어 진 배지 하나를 꺼냈다.
크라우저 가문의 문장이 새겨진, 기사라면 누구나 받게 되는 배지였다.
“ 기사? 제가요? ”
엘렌이 무덤덤하게 물었다.
기사가 되어 기뻐하기 보다는 그냥 주니까 하겠다는 느낌이 강한 기색이었다.
본인이 말한 대로 충분히 대우받고 있기에 보이는 모습인 것 같았다.
“ 응. 기사. ”
“ 어… 그냥 간단한 식만 치르면 되나요? ”
“ 그렇지. 아마 내일 아침에 간단히 치르게 될 거야. 나도 기사 임명권은 있으니 별 문제 없고, 헬레나도 반대는 안 할 거야. ”
끄덕. 헬레나는 여전히 내 품에 안긴 채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까지 어색함으로 인한 부끄러움이 가시질 않는 모양이다.
“ 알겠습니다. 대공님의 뜻이라면 당연히 따를게요. 다만, 왜 기사가 되어야 하는지는 알려 주실 수 있을 까요? ”
“ 하운드 백작령은 귀족파의 영역이야. 우리 때문에 다크엘프에 대한 태도를 바꿀 필요가 있을 국왕파와 연이 없는 곳이잖아. 그러니 내 호위역할을 가지고 시비를 걸지 모르니, 기사라는 대외적 신분을 방패로 쓰려고. ”
“ 아… 기사를 들먹이면 그나마 업신여기는 것이 줄어들지 모른다는 말씀이시죠? 저는 별 상관없지만…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
엘렌이 희미한 호선을 그리며 고개를 숙였다.
크게 티 나지는 않더라도내가 걱정해 주는 것이 기쁜 것 같았다.
덕분에 나도 신경 쓴 보람을 느꼈다.
“ 그런데, 기사라면 늘 검을 들고 다녀야 하나요? 저는 활이 더 편해서……. ”
그렇게 이야기가 마무리되나 싶었더니, 엉뚱한 질문이 들려왔다.
“ 보통 검을 쓰니까 검을 들고 다니지만 법으로 정해진 건 아니야. 더구나 엘렌은 활을 주로 쓰니 그럴 필요도 없지 않을까 싶어. 검을 쓰기는 하지만 보조무기지? ”
“ 네. 작은 단검을 들고 다니죠. 아무튼, 어색한 검을 들고 다닐 필요가 없어 다행이에요. ”
나는 가슴을 쓸어내리는 엘렌을 바라보며 내심 엉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함께 지난 시간이 썩 길지 않았기 때문인지, 새로운 일면을 엿본 듯한 느낌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