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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의 기둥서방이 되었다-99화 (99/192)

〈 99화 〉 나는 여자가 있어요 #1

* * *

“ 아니, 촌장을 내가 하라고요? ”

집무실 소파에 앉아있던 올리비아가 황당하다는 듯 물었다.

내가 앞으로 올지 모를 다크엘프 무리를 관리해 달라 부탁을 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 네. 올리비아가 가장 적임이라고 생각해서 이렇게 부탁드리는 겁니다. 다크엘프인 점이나, 성격도 그렇고요. ”

“ 잘 봐주는 건 고맙지만… 여기서 일을 더 늘이는 건 좀 그런데. ”

“ 그럼 농사일에서 빼드릴게요. 지금 당장 결정된 건 아니라 바쁘시지는 않겠지만……. ”

“ 농사 열외가 가능하다고? 그럼 하죠. ”

올리비아는 몸 쓰는 노동이 싫었는지 흔쾌히 받아들였다.

식물을 가꾸고 와인을 만드는 행위가 싫어서가 아니라, 뺄 수 있으면 뺀다는 게으름에 의한 선택이었다.

올리비아 본인이 직접 그렇게 말했다.

그저 내 입장에서는 그것도 괜찮다 생각했고, 올리비아가 새 역할을 맡아준다는 것에 감사했다.

일이 잘 풀리면 새로 온 다크엘프를 이용해 농사를 지을 수 있을 테니.

“ 고마워요. 지금은 노예들을 시켜 마을을 만드는 와중이지만, 때가 되면 잘 부탁드립니다. ”

“ 예에. 걱정 마세요. 그럼, 저 먼저 일어나 봐도 될까요? ”

“ 그러시죠. ”

나는 할 말이 끝나자마자 시원하게 떠나는 올리비아를 배웅하며 피식 웃었다.

능글맞은 성격이나 시원스러운 성격만 보아도 저만큼 어울리는 재능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담감을 느끼지 않는 대담한 모습도 좋았다.

“ 촌장은 이걸로 해결했고, 다음은 뭐 없나? ”

벌려놓은 일이 커서 그런지 저절로 서류더미를 뒤지며 일거리를 찾았다.

그러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다는 헬레나의 말을 듣고 나서야 제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분명 처음에는 위험하다싶은 셋만 어떻게 잘 묶어서 조용히 살기만을 바랬는데, 어쩌다 일하는 노예가 된 것일까.

내가 생각해도 참 영문 모를 일이 아닐 수 없었다.

“ 괜찮아? 너무 무리하지 마. ”

“ 고마워. 나도 모르게 벌려놓은 일이 많아서 그만……. 미안한데, 잠깐 좀 누워 있을게. ”

나는 엄살을 부릴 겸 집무실의 빈 소파로 다가가 몸을 누였다.

이제야 정신적 피로가 쌓였음을 느꼈는지, 몸이 물 먹은 것 마냥 무거웠다.

잘못이라고는 생각지 않지만 괜히 시작했나 싶은 생각이 잠깐 뇌리를 스쳤다.

“ 엘렌은 감독하러 갔지? ”

“ 응. 지온이 노예 놈들을 감독하라고 보냈었지. 너무 바빠서 잊어버렸어? ”

“ 아니. 다행히 그 정도로 정신없지는 않았나봐. ”

나는 서류더미에 발이 묶여 갈 수가 없다.

그러니 엘렌 혼자라도 보내 그곳에 있는 인부들의 안전을 보호 하려 했다.

패전병인 엘프 놈들이 온순해졌다고는 하나 온전히 믿기 어려웠던 탓이다.

엘렌도 그런 내 생각을 알기에 홀로 공사장 터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나와 함께 가지 못해 안타까워했지만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

“ 이제 얼마 안 남았어. 지금 일이 매듭지어지면 무척 여유로워 질 거야. ”

어느새 머리맡에 다가온 헬레나가 내 머리를 들어 본인의 허벅지에 얹었다.

부드럽고 탄탄한 근육이 뒤통수에 닿자 한층 더 늘어지는 것 같았다.

훈련을 통해 크고 꽉 조여진 허벅지라서 가능한 느낌이 좋았다.

“ 헬레나가 그렇게 말하면 틀림없겠지. ”

“ 그래. 거기다 급한 불도 다 껐고, 나머지는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조율하면 돼. ”

그때그때 필요한 물자를 보충하고, 일이 잘 흘러가는지 확인만 하면 된다.

아직 할 일이 남았다고는 하나 사실상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기에, 너무 넋 놓지만 않으면 될 것 같았다.

“ 공작님, 실례합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

똑똑. 보통 소식을 전하러 오는 하인이 아닌, 관리직인 앤디가 직접 문을 두드렸다.

어지간한 일이 아니고서야 직접 찾아 올 일이 드문 사람인데, 무슨 일일까.

“ 들어와요. ”

헬레나가 답했으니 이러고 있을 수는 없지.

나는 앤디를 맞기 위해 천천히 몸을 일으키려다, 내 가슴을 누르는 헬레나의 손길에 꼼짝 없이 누워있어야 했다.

“ 실례합니다. 쉬고 계신 중에 제가 방해가 된 모양이군요. 조금 있다가 다시 찾아뵐까요? ”

인사를 마친 앤디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은근히 입꼬리를 들어 올리는 것도 그렇고, 묘한 것을 상상한 모양이다.

다만 우리가 워낙 문란하게 지낸지 오래되었기에 달게 받아들일 뿐이었다.

“ 아뇨. 그냥 이렇게 있었으니 크게 신경 쓰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그보다 무슨 일로? ”

“ 예. 다름이 아니라……. ”

앤디는 품속에서 편지 한 장을 꺼내 내밀었다.

가문의 문양이 새겨진 붉은 밀랍으로 밀봉된 새하얀 편지였다.

헬레나는 그것을 받아들이더니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 이건… 어디 가문이었죠? ”

“ 하운드 백작가의 문장입니다, 공작님. ”

알면서 물은 것일까, 아니면 정말 몰라서 물은 것일까.

어느 쪽이든 간에 귀족파 세력 중 하나인 하운드를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것만은 분명했다.

오히려 무시하는 듯한 기색마저 느껴졌다.

“ 아. 그래. 하운드였죠. 그런데 그 일가에서 내게 무슨 일로 편지를 보낸 걸까요? 중립파도 아닌 일가일 텐데. ”

“ 저도 자세한 내용을 읽지 못해 감히 말씀드릴 수는 없겠습니다만… 말투를 보니 초대장 같더군요. ”

“ 초대? 초대라. ”

초대라. 귀족들의 사교 파티는 계절을 가리지 않으니, 언제든 초대장이 날아 올 수도 있다.

나도 그 정도는 알지만 왜 껄끄러운 귀족파에서 편지를 보냈는지 모를 일이었다.

아니면, 초대장이 그 초대가 아니라 저승길로 보내주겠다는 초대장일까.

“ 고마워요. 어떤 내용이 적혔는지는 직접 읽어봐야 알 것 같네요. ”

“ 예. 그럼, 저는 먼저 물러나 보겠습니다. ”

헬레나는 앤디가 고개 숙여 집무실을 떠나기 무섭게 편지봉투를 뜯었다.

호기심이 생긴 김에 얼른 확인해 보고 싶어 하는 기색이었다.

나 또한 그 내용이 궁금했기에 헬레나에게 소리 내어 읽어 달라고 부탁했다.

“ 우선, 이렇게 편지로 안부를 여쭈는 무례를 용서해 주시길 바랍니다. 저는 브라운 하운드 백작으로……. ”

나는 헬레나의 목소리를 들으며 눈을 스르르 감았다.

이렇게 함으로써 목소리에 좀 더 편안히 귀를 기울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용은 간단했다. 곧 며칠에 걸쳐 파티를 열 예정이니 그곳에 와서 자리를 빛내 달라는 내용이었다.

다만 그 와중에 섞인 미사여구가 너무 많아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쓸데없이 꼬아 놓은 수능 영어 지문을 보는 느낌이었다.

물론 성적이 별로 좋지는 않았지만, 그 때만 생각해도 절로 한숨이 나왔다.

“ 귀족파 놈이 국왕파에게 권유라……. ”

얼핏 급 낮은 귀족이 급 높은 귀족에게 편지를 보내는 것이 무례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파티 초대는 예외였다.

급을 철저히 나누면 제대로 된 교류가 이루어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내 생각은 그랬고, 대륙 사람들도 그리 생각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아예 대립 관계에 있는 파벌의 수장을 초대한다는 건 예외 중에서도 예외다.

그렇기에 영문 모를 노릇이었다.

“ 아무리 그래도 뻔한 암살 시도는 아니겠고. 줄을 갈아타려는 생각일까? ”

루크 킬리네어가 권력을 잡고 제법 내부 수습을 잘 했다고는 하나 어수선함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은 모양이다.

더구나 그로 인해 손해도 보았으니, 이참에 파벌을 갈아탈 생각에 이른 것일까.

내가 그런 생각을 담아 묻자, 헬레나가 고개를 저으며 부정적인 의견을 내놓았다.

아주 조심스레.

“ 그러기엔 킬리네어 공작의 눈치가 보일 것 같아. 하운드 영지가 킬리네어 쪽에서 멀다고는 해도 너무 무모해. 귀족파가 아예 망해버린 것도 아니니까. ”

“ 그것도 그래. 조금 밀렸다 해서 파를 갈아 탈 놈이라면 결국 어느 파벌에서도 환영받지 못하겠지. 심지어 느슨하기 짝이 없는 중립 파벌도 이건 좀 아니다 싶을 것 같기도 하고. ”

칼리우드 공작을 중심으로 뭉친 중립파는 그 연결이 몹시 느슨하다.

중립을 표명하는 만큼 자기네들끼리도 중립을 고수하는 기묘함을 가진 무리들이었다.

연결이 느슨하다는 것도 다 그 때문이었다.

“ 설마… 루크 또 그 놈이야? ”

문득, 킬리네어의 수장 루크의 얼굴이 뇌리를 스쳤다.

우리와 묘하게 친분을 유지하고 싶어 하는 놈의 사주를 받았다면 이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 루크 킬리네어? 그럴 수도 있겠지. 오히려 그놈이 시켰다는 게 훨씬 설득력이 있을 것 같아. ”

“ 자기가 나서도 될 걸, 굳이 아랫사람을 시킨 이유가 뭘까? ”

“ 체면. 아니면 수장끼리 서로 만나 생길 파장을 고려했거나. 그 외에 이유도 있겠지만, 내가 어떻게 알겠어? ”

헬레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시원스럽게 답했다.

그 말대로다.우리가 루크의 속내를 어떻게 알겠는가.

거기다 루크가 시켰다는 확실한 정황도 없으니, 지금 나누는 대화도 전부 가설에 지나지 않았다.

결국, 이야기하면 할수록 점점 답 없는 수렁에 빠져 들 뿐이다.

“ 지온. 난 더 이상 생각하는 거 그만둘래. 중요한 건 이 초대를 받아들이느냐 마느냐 하는 거니까. ”

꿍꿍이가 있든 없던, 결국 받느냐 아니냐로 결정될 문제다.

그런 점에서 볼 때 헬레나의 답이 명쾌하고도 옳았다.

“ 그 말이 맞지. 그러면 어떻게 할래? 받을래? ”

“ 나는 받고 싶어. 거절하면 왜 초대했는지 영영 알 수 없을 것 같아. 물론 지온이 싫다면 당장 없던 일로 해 버릴 테지만. ”

“ 나는 괜찮으니까 헬레나가 가고 싶다면 그렇게 해. ”

호기심보다 내 감정이 우선이었지만, 그렇기에 나 또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궁금해서라도 한 번쯤 가보고 싶은 것이 보통 사람 심리였다.

또, 머리도 식힐 겸 멀리 바람 쐬러 나가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 알았어. 곧장 가겠다는 답을 써서 보낼게. ”

내가 고개를 슬쩍 들어주자, 헬레나가 조심스레 책상으로 다가가 급히 펜을 놀리기 시작했다.

종이가 너무 허전하지 않도록 적당한 미사여구를 곁들인 허락의 편지였다.

그동안 나는 몸을 일으켜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재빠르게 편지를 다 쓴 뒤, 헬레나는 하인을 불러 편지를 전달하도록 했다.

받는 사람은 당연히 하운드 백작이었다.

“ 그러고 보니, 이렇게 귀족이 주최하는 연회에 가는 건 처음 아냐? ”

“ 어… 그렇지? ”

헬레나는 편지를 다 쓰기 무섭게 내 옆으로 다가와 고개를 끄덕였다.

국왕 생일 파티나 가 봤지, 이렇게 귀족 주도의 연회에 가 보는 것은 처음이다.

그래서 약간 설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 참. 국왕의 생일 때는 당연히 선물을 챙겨 갔잖아. 귀족 연회 때도 그렇게 해야 해? ”

“ 전혀 그럴 필요 없어. 더구나 나는 공작이고, 지온은 대공이잖아. 괜히 잘 보이겠답시고 선물까지 들고 갈 필요가 어디 있겠어? 허리를 굽히더라도 하운드 쪽이 그래야 해. 우리가 초대에 응한 것만으로도 충분한 선물일 거야. ”

보통 처음 가는 집을 방문하면 간단한 선물 정도를 챙길 법도 했지만, 귀족 사회는 뭔가 다르다고 새삼 느꼈다.

신분차를 언급하면서도 오만한 기색이 전혀 없는 헬레나의 말도 설득력 있게 들렸다.

그저 당연한 사실을 입에 담는 느낌이었다.

“ 보통 거절하기 쉬우니까? ”

“ 아무래도 그렇지. 굳이 눈치 볼 것 없이 피곤하다, 한 마디만 써서 거절하면 그만인걸. ”

공작이 피곤하다는데 백작이 어쩌겠느냐. 맞는 말이었다.

젠 체 하려는 생각은 없지만, 이 나라의 삼대 공작이 백작의 눈치를 볼 필요가 전혀 없었다.

오히려 그랬다가 위신이 깎일 위험이 더 컸다.

예의는 차리더라도 굽실거리지는 않는다.

새삼 그 선을 지키는 것이 참 어렵다고 느꼈다.

새삼 귀족이라는 게 참 어렵네. 헬레나의 시종으로 있을 때가 좋았어. ”

“ …어? ”

대공이 되고나서 골치 아픈 일이 참 많다.

그런 생각에서 무심코 혼잣말을 중얼거리다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내 말에 반응해 을 사시나무 떨 듯 떨기 시작하는 헬레나 때문이었다.

“ 그게… 무슨 말이야? 혹시… 혹시 내가 싫어진 거야? ”

딸깍, 하고 버튼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발작버튼 눌리는 소리가.

사람이 살다보면 실수 할 수도 있지.

나는 속으로 가볍게 한숨을 내쉰 뒤, 피식 웃으며 헬레나를 품에 끌어안았다.

자칫 심각한 큰 불이 될 수 있을 순간이나 초기에 진압하면 그만이었다.

“ 전혀. 시종 때는 머리 쓸 일 없이 헬레나 옆에 꼭 붙어 있으면 됐잖아. 그 때가 새삼 그립더라. 그래도……. ”

슥. 헬레나의 몸 곳곳을 어루만지고, 꼭 쥐어짜내듯 손에 움켜쥐자 몸의 떨림이 멎었다.

정확히는 몸 전체의 떨림이 멎었을 뿐, 허리만은 여전히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 그 때랑 같았으면, 오늘처럼 이렇게 헬레나를 품을 수는 없었겠지. ”

“ 아, 지온……. ”

목소리의 불안이 가라앉고, 그 대신 기대감에 들뜬 눈동자가 나를 응시했다.

나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원하는 대로 해 줄 겸 내 욕구를 풀기 위해 손을 뻗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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