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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의 기둥서방이 되었다-98화 (98/192)

〈 98화 〉 개선 #3

* * *

언제부터 후사 문제를 생각했을까.

예전부터였을까, 아니면 최근 들어 갑자기 그런 생각이 난 것일까.

아니면 내게 넌지시 후사 문제를 물었던 앤디가 언질이라도 준 결과였을까.

이스의 머릿속을 들여다볼 수 없으니 알 수 없을 노릇이었다.

그저, 그가 던진 질문이 상당히 정곡을 찌르는 것 하나만큼은 알 수 있었다.

부부관계에서 주도권을 쥔 사람이 나였음을 알았어도, 구태여 헬레나를 주어로 삼아 물었다.

보통 이런 상황에서 보면 내가 아이를 만들 생각이 없느냐 물어야 할 텐데도 그랬다.

“ 대답을 드리기 전에 한 가지만 묻고 싶습니다. 앤디가 언질이라도 넣었나요? ”

“ 음. 이른 아침에 있었던 대화를 들려줬네. ”

우리는 가족이기에 서로에 대한 믿음이 있었고, 앤디 또한 넓게 보면 가족이기에 내가 해코지를 하지 않으리라 믿는 눈치였다.

아니라면 갑자기 생각이 났다 등 얼마든지 그럴 듯한 변명을 붙여 넘어갔겠지.

나는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

반드시 비밀에 붙여달라는 부탁도 하지 않았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

“ 그렇군요. 그러면 저도 장인어른이 던진 질문의 답을 드려야겠지요. ”

그가 무엇을 걱정하는 지 이해는 간다.

그렇잖아도 나에 대한 집착이 심상찮은 헬레나이니, 혹여 아이에게까지 그런 감정을 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 물론 아이는 낳을 겁니다. 하지만 제가 기다려달라고, 나중으로 미루자고 했지요. ”

내가 나중에 만들자 한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그러니 태연하기 그지없는 기색으로 답했다.

“ 기다려 달라고? ”

“ 헬레나의 나이를 살펴보면 시기가 적절하게 무르익었음을 저도 압니다. 또 하루 빨리 후사를 낳아 기반을 든든히 하고 싶다는 마음도 압니다. 하지만, 제가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아직 열여섯 밖에 되지 않은 애송이니까요. ”

이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성실하게 답했다.

가장 큰 이유는 아버지가 될 마음의 준비가 덜 되었다는 것이며, 더해 둘 만의 시간을 좀 더 누리고 싶다는 이유도 덧붙였다.

이는 헬레나도 달게 받아들인 부분이었다.

“ 정말… 그게 다인가? 그 아이, 헬레나가 혹여 자신이 낳을 아이에게……. ”

“ 헬레나의 광증이 크다고는 하나 그 정도는 아닙니다. ”

헬레나가 자기 아이에게마저 질투한다.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기에 이스가 당황하며 말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하지만, 헬레나는 당연히 나와 아이를 만들 것이라고 결론내린 지 오래였다.

“ 그러니, 너무 걱정 마십시오. 제 고집 탓에 일이 미뤄지기는 하겠지만, 반대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반기고 있지요. ”

“ 그런가……. 알겠네. ”

나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고개를 숙인 뒤, 이스의 허락을 받아 방을 나왔다.

문을 나서기 전 어렴풋이 안도하는 기색을 보며, 나 또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말을 해서 다행이다.

말을 하지 말아서 다행이다.

두 가지 모순된 생각이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며 지난 일을 떠올리게 했다.

예전 바르칸 백작령에서 첫 경험을 치른 이후, 크라우저 저택에 돌아와 두 번째 정사를 치른 뒤였다.

첫 경험 때에는 나도 정신이 없어 말 한 마디 꺼낼 겨를이 없었지만, 두 번째 부터는 여유가 있었다.

어느 정도 여운에 적응한 덕이었다.

당시 나는 아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물었었고, 헬레나는 그에 눈을 반짝이며 지금이라도 낳고 싶다고 답했었다.

여기서 대화가 끝났다면 그냥 그러려니 싶었을 테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뒤가 있었다.

스스로가 배 아파 낳고, 또 기르기에 사랑할 아이가 아니라, 오로지 내 정이 섞였기에 소중히 대한다.

그것이 헬레나의 뜻이었다.

얼핏 들어보면 거기서 거기인가 싶었다.

남편을 사랑하고, 그 피를 이은 아이를 사랑한다는 것에 큰 문제는 없어 보였다.

나와 함께 만들어 낸 아이라 그런지 질투하는 기색도 없었다.

그러나, 그 모습이 아이에 대한 관점이 확연히 달랐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저 내 손길이 닿았기에, 함께 해야 한다고는 하나 내가 만들었다는 사실 때문에 애착을 보였다.

그것은 지금도 우리의 방에 소중하게 보관되어, 매일같이 한 쪽 구석을 지키고 있는 웨딩드레스를 보는 눈길과 하등 다르지 않았었다.

즉, 아이는 헬레나에게 있어 내가 만든 선물, 달리 말하면 물건 취급을 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지금도 그 생각을 그대로 품은 채 아이를 낳고 길렀다면 참 뭐라 표현하기 힘든 상황에 처했을 테지만…….

“ 후우. ”

열심히 조교하고 또 조교해서 생각을 조금이나마 바꾼 지금이기에, 크게 걱정할 것은 없어 보였다.

.

“ 노예들을 주기적으로 바꾸란 말씀이십니까? ”

크라우저 저택 집무실.

내 명령을 받고 찾아 온 에일렌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촌장이니만큼 다크엘프 역사에 관해 아는 것도 있을 것 같아 초청했다.

겸사겸사 명령도 내리고.

“ 음. 앞으로 두 달에 한 번 노예들을 바꾸겠네. 그리고 한 마을당 둘 씩 보내던 것에 하나를 더 추가하도록. ”

한 마을에 엘프가 얼마나 사는지는 모르나, 한 명 늘어난다고 해서 크게 해 될 것도 없었다.

더구나 마법을 주로 사용하고 장수하는 이들이기에 제한도 없었다.

꼭 건장한 남자나 여자만을 데려오라는 제한 말이다.

“ 예. 따를 수밖에 없겠지요. 하지만 왜 그러시는지 여쭤 봐도 괜찮겠습니까? ”

노예 수에 관해서는 크게 불만이 없으나, 노예 교환에 관해서는 몹시 궁금한 눈치였다.

노예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 굳이 번거롭게 교환을 하려는 의도를 알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다.

“ 네놈들 엘프 전체가 죄 값을 치러야하지 않겠느냐. 여기 온 이들만 노예로 쓰면 그게 불가능하니 말이다. ”

“ …그렇군요. ”

모든 마을마다 매번 다른 엘프를 보내 값을 치르게 하고, 만약 한 번씩 다 노예가 되었다면 순서가 되돌아간다.

에일렌은 내 적당한 명분과 그로 인해 처하게 될 상황을 계산하는 듯 고민에 빠졌다.

소위 눈알 굴리는 소리가 잘 들리는 모습이었다.

“ 알겠습니다. 그러면 날에 맞춰 노예를 보내겠습니다. ”

“ 좋다. 그러면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지. ”

“ 아… 다크엘프의 역사에 대한 것이던가요. ”

엘렌은 자리를 뜨려다 말고 아차 싶었는지, 다시 소파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이 깐프에게 보낸 편지에 다크엘프 역사에 관해 알아보라 했었으니 간단한 조사라도 했을 것 같았다.

“ 왜 다크엘프의 역사에 흥미를 가지시는지는 알 만 합니다만… 참 적극적이시네요. ”

“ 왜, 불만인가? ”

나는 보란 듯이 옆자리에 앉아 있던 엘렌의 허리에 팔을 두르며, 아주 비열하게 보이도록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에 엘렌의 뺨이 붉게 물들고, 지켜보고 있던 헬레나와 에일렌의 눈빛에 싸늘함이 서렸다.

한 쪽은 질투, 다른 한 쪽은 경멸의 감정이 엿보였다.

좀 살만해 졌다 싶으니 고개가 점점 뻣뻣해지다니.

새삼 깐프놈들의 기가 얼마나 센지 알 수 있었다.

“ 아, 아뇨.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

그러나 목소리를 깔고 노려보자 겁에 질린 채 고개를 숙였다.

정령과 교감을 끊어버리는 등 다양하게 고통 받은 것을 떠올린 듯 했다.

“ 부디…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

“ 그러지. 지금 중요한 건 네년이 조사해 온 엘프의 역사를 듣는 일이니. ”

“ …네. 바로 말씀드리겠습니다. ”

에일렌은 고개를 들고 자세를 바로잡은 뒤 입을 열었다.

엘프끼리 결혼하여 낳는 아이는 당연히 엘프이나, 간혹 잿빛 피부의 엘프가 태어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그게 바로 다크엘프이며, 달이 뜨는 밤에 떠도는 마나의 영향을 짙게 받을 경우 태어나기 쉽다고 한다.

달의 마나라.

마치 양기나 음기를 나누는 것과 비슷한 것 같아 묘하게 흥미로웠다.

“ 다크엘프는 그 수가 적고, 드물게 태어납니다만… 꾸준합니다. 마치 그렇게 정해지기라도 한 듯, 가늘고 긴 명맥을 유지하고 있지요. ”

그리고, 내가 가장 알고 싶었던 부분에 대한 설명이 흘러나왔다.

태어난 다크엘프는 호전성이 강하고, 그렇기에 성질이 다른 엘프들과 마찰을 일으키기 쉽다.

콧대가 높으나 자기네들끼리 숲속에서 무리지어 살기 때문일까.

깐프 놈들의 높은 콧대가 자존심 싸움으로 번지는 일은 드물다고 하더라.

하지만 다크엘프는 아니었고, 그로 인해 크고 작은 난리를 일으켰다.

비교적 조용한 엘프 사회에 적응하는 힘이 모자라고, 반항을 자주 하다 싸움까지 번지는 일이 많았다.

그 구체적 사례가 엘프의 역사서에 제법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즉, 다크엘프는 분란을 일으키는 존재이기에 오물 취급까지 받았다는 뜻이다.

엘프 사회에서의 이단아.

그것이 다크엘프지만, 내가 보기엔 단순히 다른 성향에 따른 교육법이 없어 그런 것이 아닐까 싶었다.

이 콧대 높은 놈들은 자기들의 교육과 원칙을 바꿀 필요가 있다 생각지 못하는 것 같았으니까.

조용한 놈에게는 조용한 대로, 화내기 쉬운 놈은 화내기 쉬운 대로 어르는 방법이 다르다.

그걸 모르기에 이 꼴이 났겠지.

“ 애초에… 아닙니다. ”

에일렌은 불만스러운 듯한 기색으로 입을 열려다 다물었다.

꼴을 보니 저도 모르게 신경 건드리는 말을 토해내기 직전이었으리라.

“ 그래. 수고했다. 물러나 보도록. ”

대충 그렇게 된 이유를 알았으니 더 들을 말도 없어 에일렌을 밖으로 보냈다.

본래라면 하룻밤 정도 재우고 아침에 출발하도록 했을 테지만, 깐프를 배려하고 싶지는 않았다.

스스로를 합리화하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지금 이 상황만으로도 충분히 배려하고 있다 생각했기에.

“ 호전적이라. 엘렌이 생각해도 그래? ”

깐프가 사라졌으니 굳이 거만한 척 어깨에 힘 줄 필요가 없다.

그러니 표정을 풀고 평소처럼 말을 건넸다.

“ …으음. 그런 것 같기도 해요. 무엇보다 숲에 있던 시절엔 이미 다크엘프는 오물이다, 라는 생각이 널리 퍼진 지 오래였고… 그것 때문에 더 답답해서 짜증도 많이 났네요. 겉으로 드러낼 수는 없었지만……. ”

“ 겉으로 드러내기엔 쪽수로도 밀리니 어쩔 수 없었겠지. 그랬다가는 경멸 뿐 아니라 직접 손을 쓸 지도 모르니까……. ”

“ 네. 지온 님이 말씀하신 대로에요. ”

다행히 내 생각이 틀리진 않은 모양이다.

엘렌도 어두운 과거를 떠올리는 것 치고는 무덤덤하기 그지없었다.

안 좋은 일을 떠올리면 나이에 상관없이 우울해 질 법도 한데…….

“ 그래도 제 운이 좋아 이렇게 즐겁게 지내고 있으니… 정말 행복해요. ”

아무래도 지금이 행복해서 그런지, 엘렌이 무척 밝게 웃었다.

새삼스레 다 죽어가는 사람 하나를 구한 것 같아 뿌듯했다.

“ 그래. 다행이야. ”

나는 엘렌의 어깨를 쓸어주며 가볍게 위로한 뒤, 헬레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로 인해 째진 눈을 하고 있던 헬레나가 화들짝 놀랐다.

갑자기 눈을 돌렸으니 그럴 수도 있겠지.

“ 헬레나. ”

“ 어, 어어? 왜 그래? 뭐든 말해줘. ”

“ 이곳에 다크엘프 전부를 이주시키는 건 어떻게 생각해? ”

질문이 날아들자, 당황하여 말을 더듬던 헬레나의 눈빛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내가 꺼낸 말이 크다면 클 수 있을 문제이기에 진중하게 생각하는 모습이었다.

“ 단순히 동정하기 때문만은 아니야. 노예를 이용해 돈 들이지 않고 개발이 가능한 지금이기에 할 만해 보인다는 이유도 있어. ”

“ 그래. 다크엘프는 대략 백 이십. 그 수를 성 안에 한꺼번에 받아들이기도 애매하니, 지금이 적기라고 생각할 만도 해. 우리 영지가 다크엘프에 대한 시선이 우호적이라고는 해도… 백이 넘으니까. ”

헬레나가 말한 것이 틀리지 않아,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 또 다른 이유는? ”

“ 다크엘프도 엘프야. 그런 이들을 우리 영지에 받아들이면 영지 군사력이 크게 강화 될 거라고 생각해. 겸사겸사 대비도 하면 좋고. ”

먼 미래, 내가 죽으면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지 알 수가 없다.

그 때를 대비해 다크엘프를 영지에 받아들이고 싶었다.

헬레나도 내 말이 일리가 있다 여기는지 제법 진지하게 고민하는 기색이었다.

그렇게 잠시 불편하지 않은 침묵이 감돌다, 헬레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 어찌 보면 마법병단을 꾸리겠다는 것처럼 보이고… 위험을 대비한답시고 움직이다 견제 대상이 될 수도 있겠지. 솔직히… 득이 많을지 실이 많을지 잘 모르겠어. ”

“ 나도 그래. ”

“ 하지만……. ”

하지만, 알 수 없으니 내 말에 전적으로 따르겠다.

헬레나는 그리 말하며, 어딘가 달관한 듯한 미소를 지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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