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7화 〉 개선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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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은 유달리 힘들었다.
헬레나 앞에서 내가 했던 말을 고스란히 따라하며 콧대를 높였고, 그에 질투를 느낀 헬레나가 목소리를 높이며 달라붙었다.
엘렌 입장에선 질투하라고 한 말은 아니었겠지만, 결과가 그랬다.
그래서 그를 수습하느라 몸을 썼고, 울며 반성할 때 까지 멈추지 않았다.
만약 즐기면서 하지 않았다면 훨씬 피곤했겠지.
“ 오늘도 여전하시군요. ”
피로를 털 겸 한 발 먼저 씻고 방 밖으로 나오자난처한 미소를 띤 앤디가 눈에 들어왔다.
아마 방 안에 울려퍼진 교성소리를 주워들은 것 같았다.
그렇지 않으면 난처한 기색을 띨 이유가 없었다.
이 이른 아침에.
“ 크흠! 죄송합니다. 너무 문란했지요? ”
“ 으, 으음. 제 입으로 말하기엔 너무 민감한 문제로군요. 그저, 후사 문제가 없어 보인다는 것이 참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
후사, 즉 귀족이나 왕족에게 있어 아이를 낳는 일은 중요한 일이며, 의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또한 어느 정도 많은 수를 낳기를 추천하고 있었다.
만에 하나 후계자에게 일이 터질 경우 그 다음 핏줄을 위로 올리기 위함이었다.
크라우저 공작가도 그러했으며, 지금은 미묘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킬리네어 공작가, 그 외의 귀족들 또한 그랬다.
자식 하나만을 낳아 기르는 예외도 있기는 하나 드물었다.
“ 후사라. 그렇지요. 후사도 꼭 해결해야 할 일이긴 하지요. ”
“ …혹여, 아직 내키질 않으십니까? ”
“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제 나이에 아이를 갖는 게 조금 이상하게 느껴지긴 합니다. 정작 아이를 품고 기르는 건 헬레나인데다, 벌려놓은 일도 있고요. ”
이 대륙의 기준으로 보아도 내 나이에 아이를 갖는 것은 무척 빠르다.
다만 헬레나를 기준으로 생각해보면 적당하다.
나이 차이가 여덟 정도다보니 이런 일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계획이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크게 떠벌리고 다니지는 않았으나 언제 시도할까 결론 내린지 오래였다.
“ 다만, 이미 생각해둔 바가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을 거예요. ”
“ 저, 그리고 하인들은 그저 공작님이나 대공님의 뜻에 따를 뿐이지요. 하지만… 생각해둔 바가 있으시다니 안심이 됩니다. ”
앤디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진심으로 안심한 듯한 모습을 보였다.
공작가에 대한 충성심이 강하다보니 후사 문제에도 관심을 두지 않을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그러니 그것에 대해 왈가왈부 할 것도 없고, 그저 지나가는 말로 여기면 그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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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부터 너희들은 인부들이 시키는 대로 움직여라. ”
터를 닦았으니, 이제는 집을 지을 차례였다.
나는 엘프들이 나무를 자르고 옮길 때부터 목재를 다듬도록 시켰고, 집짓기에 알맞게 가공했다.
엘프들도 죽은 나무나 숲의 생장을 방해하는 나무로 집을 짓는 이들인지라 건축기술이 없지는 않았다.
다만 이번에 온 노예들 중 집을 지을 줄 아는 이가 없었기에나무의 손질이나 공사만큼은 영지민의 손을 빌려야 했다.
정확히는 영지민들 중 집을 지을 줄 아는 목수들 위주로 모았다.
엘프들을 감독하고, 작업을 올바르게 진행하기 위해서.
“ 야야!! 너무 깊게 잘랐잖아! 목재 다 버리게 생겼네! ”
엘프라고 한들 결국 노예니 자유롭게 부려도 좋다.
다만 적당한 거리감을 둬라. 목수들은 미리 알려둔 내 지시에 맞춰 엘프들을 잘 부리고 있었다.
보통 영지민이라고는 하나 사람을 부려 본 경험이 있기 때문이리라.
“ 벌써 집을 지을 때가 되다니……. 참 빠르네요. ”
엘렌이 놀란 듯한 기색으로 중얼거렸다.
마법을 사용하다보니 그 작업 속도가 월등히 빨랐던 탓이다.
집짓는데 마법을 사용하는 모습을 처음 봤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 그러게. 참 빠르다. 오두막집뿐이라고는 해도 참 빨라. ”
“ 계속 기술을 배우다 보면 성벽까지 쌓아 올릴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자연과 숨 쉬는 엘프가 그럴 리는 없겠지만……. ”
“ 엘프들은 저 정도가 한계겠지. 또, 굳이 성벽을 쌓을 필요도 없어 보이고. ”
엘프에게 있어서는 숲이 곧 성이다.
숲을 통째로 태우거나 밀어버리지 못하면 가히 철벽에 가깝다고 할 수 있었다.
날다람쥐마냥 쏘다니며 마법과 화살을 비처럼 퍼부으면, 어지간해서 답이 없었다.
엘프와 전쟁을 하려면 숲을 밀어가며 하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으니까.
“ 저, 지온 님. 제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전보다 엘프들의 태도가 달라진 것 같지 않나요? ”
공사 현장을 지켜보고 있던 엘렌이, 문득 생각지도 못한 것을 입에 담았다.
내가 엘프에 관심이 전혀 없었던 탓이었을까.
“ 달라져…? ”
“ 네. 죽기 싫어 억지로 하던 느낌이 많이 옅어졌어요. 내 일이니까 해야지, 라는 당연함이 보이는 것 같아요. ”
“ 의무를 당연하게 짊어지는 것 같다라……. ”
무언가를 보고 느끼는 건 사람마다 다르다.
물론 엘프는 사람이 아니지만, 사람과 비슷하게 생각하고 행동한다.
그러니 아인종, 인간이라는 글자가 들어가는 종으로 분류되었다.
나는 새삼 그 사실을 떠올리며, 엘프들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엘렌처럼 꼼꼼하게, 훤히 보이지 않아도 괜찮았다.
기척을 줄이고 돌아다니며 가까이서 살피면 그만이었다.
조금 떨어진 이들은 마나를 사용해 시력을 올리면 되었고.
“ 신기하네. 내 눈에도 그렇게 보여. ”
엘렌이 말한 대로, 엘프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당연히 웃거나 몹시 의욕적이지는 않았으나, 싫다는 기색이 많이 줄어 있었다.
처음 엘프 놈들을 노예로 부릴 때보다 확연히 달랐다.
만약 이런 변화를 어느 엘프에게나 적용할 수 있다면 뭔가 바뀌는 게 있지 않을까.
무언가 실마리가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그 끝에, 집에 돌아가서 천천히 생각해 봐야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곳은 번잡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어 생각을 정리하기 어려웠다.
내가 집중력이 모자란 탓일 수도 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생각에 방해된다고 공사를 중지하거나 소리 하나 내지 말라 명령하는 건 너무 가혹하고 어처구니없었기에.
“ 이브도 열심히 하는구나. ”
“ 네. 일거리가 많아 피곤할 텐데도, 무척 즐거워 보이네요. ”
우리는 한쪽 구석에서 엘프 다섯과 함께 일하는 이브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성벽 주위에 적을 재우는 연동 마법진의 설치도 겸하고 있음에도 기운이 넘쳤다.
천생 마법사라는 뜻이겠지.
그녀는 석판에 강화 마법진을 우선 새기고, 그 반대편에 연동을 위한 마법진을 새겼다.
연동마법진을 설치할 때와 같은 요령이었다.
비용과 수고는 들지만 오래 쓸 수 있을 지속력을 우선한 결과였다.
“ 참. 슬슬 점심시간이 다 와 가니까, 한 번 돌아갔다 올까? ”
“ 아, 네. 좋은 생각이세요. ”
노예들에게 너무 과분한 배려가 아니냐 싶겠지만, 밥 먹을 때마저 높은 사람이 함께하면 체하기 마련이다.
내가 이 시대의 사고방식에 완전히 물들었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은 이상 배려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밥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려야 한다.
한번 숟가락을 들게 한 사람을 밥상에서 뜨게 하면 자연스레 열이 받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나도 많이 당해봤기에그 짓이 얼마나 분통 터지는지 잘 알았다.
예를 들면, 밥 먹을 때 상황을 걸어 아가리를 찢어버릴까 고민하게 한 그 당직사령 새끼처럼…….
“ 후우. ”
나도 모르게 열이 받았으니, 호흡을 고르며 재빨리 마음을 가라앉혔다.
이럴 때도 은근히 도움이 되는 강철멘탈 덕이다.
“ 지온 님? 무슨 걱정이라도 있으셨어요…? ”
“ 응? 아냐. 괜찮으니까 얼른 돌아가자. 오늘 점심은 전이라도 구워서 먹어보자. ”
그 뒤, 나는 점심 내내 헬레나를 무릎에 앉히고 밥을 먹느라 고생 아닌 고생을 했다.
요즘 들어 엘렌과 함께 다닐 때가 많다고 불만인지라, 이렇게라도 불만을 해소해 줘야 했다.
똑똑.
점심 식사 후 기름기를 씻어낼 겸 차를 마시며 시간을 보내던 중, 집무실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옷을 정갈하게 차려입은 하녀가 그 주인공이었다.
“ 환담 중에 실례합니다. ”
“ 괜찮습니다. 무슨 일로 오셨나요? ”
“ 큰 어르신이 대공님을 찾으십니다. 바쁘지 않다면 얼굴을 비춰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큰 어르신. 즉, 이스 크라우저가 날 찾는다라.
매일은 아니더라도 자주 식사자리를 함께 하고, 잡담도 나눌 때가 있어 관계가 썩 나쁘지 않기도 했다.
갑작스레 불린다 한들 이상할 것 하나 없었다.
지금도 입에 담기엔 어색하지만, 엄연한 장인어른이기도 했고.
“ 알겠습니다. 바로 찾아뵙죠. ”
“ 그럼,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
제 역할을 마친 하녀가 먼저 자리를 뜨자, 나도 뒤를 이어 몸을 일으켰다.
헬레나나 엘렌이 안타깝다는 듯 바라보았지만, 부른 사람이 사람인지라 불만을 토해내진 않았다.
이성을 잃기 직전이라면 아버지고 뭐고 없었을 테지만…….
“ 장인어른. 지온입니다. ”
“ 왔군. 들어오게. ”
똑똑. 이스의 집무실 문을 몇 번 두드리자, 안에서 들어오라는 말이 들어왔다.
나는 허락을 맡았기에 망설임 없이 문을 열고, 고개 숙여 인사를 올린 뒤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잘 꾸미긴 했으나 꼭 필요한 최소한의 물건들만 마련된 곳이었다.
그 탓에 어딘가 허전한 감도 없잖아 있었다.
“ 부름을 받자마자 바로 오다니. 재촉한 것 같아 미안하네. ”
“ 이스 님… 장인어른께서 죄송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마침 쉬던 중이었으니, 너무 마음 쓰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
“ 그렇다면 다행이로군. 자, 그쪽에 앉게나. ”
나는 이스가 권하는 자리에 앉았고, 이스 또한 가장 상석에 앉았다.
긴 소파가 아니라 의자 같은 소파였기에 앉기엔 더 좋았다.
쓸데없이 넓지 않아 몸에 딱 맞는 느낌이라서.
“ 그나저나, 사위는 아직도 장인어른이라는 말이 입에 붙질 않는가? 벌 써 일 년이 넘었는데. ”
“ 크흠.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헬레나의 아버지라기보다 공작가의 큰 어른이라는 느낌이 강해 그런 것 같습니다. 또, 제가 공작가를 모신 시간도 있고요. ”
“ 훗. 여전하군. ”
이스는 긴장을 풀 겸 시시한 농담을 주고받으며 대화의 포문을 열었다.
늘 냉철하고 농담이라고는 모를 사람 같았지만, 알고 보니 제법 말솜씨가 뛰어났다.
이래서 사람은 깊게 알고 봐야한다는 말이 있는 지도 모르겠다.
“ 공사는 잘 되어가고 있는가? ”
“ 네. 장인어른이나 헬레나가 배려해주신 덕분에 별 탈 없이 진행하고 있습니다. ”
“ 겸손이 너무 지나치군. 대공이 되었으면 좀 더 당당해져도 될 텐데. ”
“ 헬레나를 품에 안도록 허락해 주신 것만으로도 분에 넘치는지라… 자신감을 갖기가 어렵습니다. ”
별 영양가 없는 대화부터 공사 상황, 또 와인 생산을 포함한 영지 경영에 이르기까지.
이스와 많은 이야기를 들었고, 충고 또한 들었다.
그는 내가 벌이는 일에 반대하거나 적극적으로 개입하진 않았지만, 지켜야 할 선을 가르쳐주기도 했다.
나는 그런 충고를 감사히 받아들이며,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오래도록 공작을 해왔으며, 지금도 음지에서 많은 일을 거들어주시는 어른의 말씀이니까.
“ 그러고 보면, 나도 참 행운아로군. 헬레나가 저런 속병을 앓고 있는 줄도 몰랐고, 그 속병이 무척 위험했음에도… 자네 같은 사위가 들어와 이렇게 평화를 유지하고 있으니 말일세. ”
문득, 이스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대화의 주제도 상당히 무거웠다.
아마 지금부터 진짜 하고 싶은 말을 이야기하려는 기색이다.
적어도 내 생각은 그랬기에, 귀담아 듣겠다는 듯 자세를 바로잡았다.
“ 제게 너무 과분한 말씀입니다. 그저… 헬레나가 저를 잘 따라주는 게 행운일 뿐이죠. ”
“ 아니. 전혀 과분하지 않네. 오히려 사위가 아니었다면 헬레나가 제 역량을 발휘할 수도 없었을 게야. 저 광증을 가라앉히지 않고서야 어떤 일도 할 수 없을 테니까. ”
차마 그 광기가 대륙을 박살낸다고 말할 수는 없어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사실마냥 입에 담기도 그랬고,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일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 후로 잠깐의 침묵이 감돌았으나, 이스가 목소리를 내며 대화를 이끌어나갔다.
“ …아무튼, 사위가 그 아이와 맺어져 균형을 잘 잡아주어 정말 고맙게 생각하고 있네. 크라우저 공작가의 위기를 이리도 무난하게 넘길 수 있었던 것도 전부 사위 덕이야. ”
“ 부끄럽습니다. 제가 원인이 되어 공작가를 큰 혼란에 빠뜨린 적도 있었는데……. ”
“ 알버스 킬리네어와 엮였던 일 말인가? 그건 어쩔 수 없었겠지. 놈이 버릇을 잘못 들인 계집 하나가 분탕을 쳤으니까. ”
그 때 생각하면 지금도 답답하긴 하지.
나는 속으로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했다.
내 잘못도 크지만 어쩔 수 없이 아그네스를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이렇게 서두가 긴 것일까.
속으로 점점 의문이 피어오르는 가운데, 이스가 무거운 목소리로 물었다.
“ 더 이상 이야기를 끌기도 뭣하니 단도직입적으로 묻겠네. ”
헬레나는…아이를 만들 생각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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