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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의 기둥서방이 되었다-96화 (96/192)

〈 96화 〉 개선 #1

* * *

깐프 놈들은 식물의 대가다.

사람들도 각자의 노하우를 갖고 농사를 짓거나 식물을 기르기도 하지만 비할 바가 못 되었다.

엘렌을 비롯한 다크엘프가 그러하듯, 적당히 손만 대도 수확량이나 성장 속도에서 확연한 차이가 났다.

“ 각 마을에서 둘씩 차출해, 엘프 육십을 데리고 왔습니다. 모두 연무장에서 대기하고 있습니다. ”

오늘부터 노예로 살게 될 엘프를 끌고 온 대표, 에일렌이 집무실에서 고개를 숙였다.

마을이 서른 정도라 그런지 한 곳에서 한둘만 뽑아도 대량의 노예가 손쉽게 손에 들어왔다.

“ 그래. 물러나도록. ”

에일렌이 곧장 고개를 숙여 물러나자, 나는 탁자를 두드리며 생각을 정리했다.

엘프 노예. 특산물 강탈. 다크엘프의 처우 개선.

이번에 얻은 이익은 이 셋이다.

노예들은 성 바깥에서 먹고 재울 생각이다.

먹을 것은 엘프 마을에서 주기적으로 보급하도록 했으며, 약간 정도는 영지 내에서 부담할 생각이었다.

노예의 수도 그렇고, 식량도 그렇고… 승자의 권리를 너무 남용하면 역풍을 맞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 결과가 내가 피하고 싶어 했던 피바다가 될 수도 있었고, 또 내가 죽은 이후의 침공이 될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당연한 권리를 사용한다 해도 선이라는 것이 필요하다 생각했다.

설령 엘프놈들의 잘못이라 하더라도.

나는 놈들의 얼굴을 보러 가고자 엘렌을 데리고 집무실을 나섰다.

물론 헬레나가 자기도 따라 나서겠다며 응석을 부렸지만 잘 해결했다.

어떻게 해결했는지는 말 못하지만, 어쨌든.

엘렌은 그 행위가 무척 부럽다는 듯 애타는 눈으로 바라보았으나 같이 다니는 걸로 만족하라 말했다.

“ 장관이기는 하네. ”

연무장에 줄 지어 선 엘프 무리를 보니 절로 감탄이 나왔다.

하나같이 시체 같은 기색을 띠고 있음에도 그랬다.

강제로 끌려와 노동을 하게 생겼으니 표정이 좋지 않을 만도 했다. 그러나 할 일은 해야 했다.

치명적인 선을 넘지 않도록 주의할 생각이기는 해도, 결코 눈치를 본다는 뜻은 아니었으니까.

“ 네놈들도 일이 어떻게 흘러갔는지는 이미 알 거라 생각한다. ”

엘프의 대회의를 열었고, 그 회의에서 결정된 안건이 실패로 돌아가 이 꼴이 되었다.

같은 엘프인 그들이 모를 수야 없겠지만 지금 상황을 다시 명심하라는 의미로 운을 뗐다.

나라 잃은 표정. 지금 내 말을 듣고 있는 엘프들의 낯빛을 설명하기에 이것보다 좋은 표현이 없을 것 같다.

“ 그래. 이제부터 북쪽을 개간하여 마을 터를 만드는 것이 네놈들의 역할이다.즉, 앞으로는 우리 공작가에서 세운 계획에 따라 움직여야 된다는 뜻이다. 알겠느냐? ”

당연하게도 답은 없었다. 그저 고개를 푹 떨굴 뿐이었다.

그에 엘렌이 으르렁대며 엘프를 위협하려 했으나 그러지 못하도록 막았다.

억지로 충성스러운 척 하면 받는 쪽이나, 하는 쪽이나 어이없을 뿐일 테니.

“ 알아들은 모양이니, 우선 북쪽으로 이동한다. 다들 따라와라. ”

나는 엘프들을 끌고 곧장 북문으로 향했다.

우선 그곳에서 개척을 하고, 이후 상황에 따라 다른 쪽을 넓힐지 말지 고민할 생각이었다.

전쟁이 일어날 때를 생각해 보면, 숲을 너무 깎아내지 않는 편이 좋을 테니까.

.

“ 우선, 네놈들은 여기서 지내게 될 것이다. ”

많은 짐수레의 행렬. 짐칸에 실린 텐트를 비롯한 여러 생활물자에 이르기까지.

노예로 끌려 온 엘프들은 그에 당황해하며 주위를 둘러보기 바빴다.

그들은 북문으로 나와 숲을, 정확히는 숲에 적당한 공터를 만들었다.

숲을 가꾸기 위해서가 아니라, 욕심을 위해 스스로 나무를 자르고 그를 옮긴다는 불행한 일을 해야만 했다.

그렇기에 그들의 표정은 자연스레 어두웠으며, 속으로는 분노가 들끓었다.

관대하기는 하나 이렇게 노예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든 대회의도, 그 불씨를 제공한 에일렌도.

그들은 특히 에일렌에 대한 원망이 강했다.

차라리 그 여자가 가만히 입 다물고 있었다면 이런 일은 없었다.

더해, 엘프 전체가 빚을 나눠질 필요도 없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구두 밑창이 달아 헤지고, 옷이 넝마가 되어 겨우겨우 목숨을 연명하는 노예.

그것이 그들이 상상하고, 또 이 세상에서 당연하게 여겨지는 가혹한 노동 노예의 최후였다.

그러나. 그들의 상상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 매직 아이템…? ”

“ 뭘 그리 놀라나. 최근 들어 날씨가 추워지며, 또한 숲은 그 영향을 더 쉽게 받지. 그를 위한 조치다. ”

우선 거처로 세운 대형 텐트에 온도 조절용 매직 아이템을 놓았다.

엘프들은 그를 보며 기만이라도 하며 즐기려는 것일까 생각했다.

하지만, 이를 시작으로 나무로 만든 침대,

단출하지만 옷을 걸 가구까지 놓는 걸 보며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제일 장난치기 쉬운 식사도 세 끼 꼬박꼬박 나왔다.

그것도 엘프들이 즐겨 먹는 채식 위주로.

“ 이게… 노예? ”

한 엘프가 어안이 벙벙하여 눈을 끔뻑이다, 끓어오르는 의문을 참지 못한 채 감독관인 지온에게 다가가 물었다.

일이 다 끝난 뒤, 그가 떠나가려는 것을 급히 붙잡은 식이었다.

“ 무슨 일이냐? ”

“ 어째서 노예에게 이렇게 잘해 주는 겁니까? ”

노예에게 잘해준다.

지온은 그 말을 듣고 내심 손뼉을 탁 쳤다.

대륙에서 노예에게 이렇게 하는 누군가가 없다는 걸 깨달은 덕이었다.

“ 잘해 줘? 멍청한 소리 집어 치우거라. 이 정도는 기본이지 않느냐. ”

일은 제법 혹독하게 굴리는 편이나그 외에는 제법 대우받는 기묘한 상황.

그것을 당연히 여기는 대공.

질문을 던진 엘프는 단호하게 답한 뒤 떠나는 남자의 등을 가만히 보고 섰다.

그렇게 해야만 할 것 같은 생각 때문이었다.

그 후에도 엘프들은 정령마법을 써서 숲을 개척했기에 그 속도가 월등히 빨랐다.

그 결과가 제법 넓다고 해 줄만한 땅덩어리를 만들어냈다.

다만, 쓰러진 나무를 빠르게 옮길 수 없었기에 이 정도였다.

만약 나무를 옮기는 것마저 빨랐다면 훨씬 더 일을 빨리 진행했겠지.

“ …음. 그래서 개척지에 마법진을 깔아 방어력을 높이고 싶은데, 가능할까? ”

“ 도시에 마법진이요? 해 본 적은 없지만… 재밌을 것 같아요! ”

그러던 어느 날. 노예의 주인은 한 소녀를 데리고 왔다.

목덜미에 닿을 갈색 머리칼을 찰랑이며 검은 로브를 걸친 이브였다.

노예의 주인, 지온은 그녀를 부려 최소한의 방어능력을 마련할 생각이었다.

정확히는 기습적인 난리가 날 시 도망칠 시간을 벌거나, 전시에는 혼란을 줘 진군을 조금이라도 막고자 했다.

“ 올리비아를 비롯한 용병단은 바쁘죠? 그러니 이곳 엘프들의 마법을 이용해도 좋아요. ”

“ 감사합니다! ”

밝은 표정도 그렇고, 처음 영지에 방문했을 때와 무척 다르다.

지온은 그 변화를 기꺼워하며, 엘프들을 모이게 한 뒤 이브의 요구에 따르도록 명령했다.

이브가 엘프를 데리고 간다 해도 한 둘 정도로, 작업에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었다.

개간하고, 땅을 고르고, 지온 알트람의 연설을 듣고, 때로는 마법사에게 끌려가 정령마법을 시연한다.

일은 제법 고되나 생각했던 것만큼 가혹한 환경은 아니다.

그렇게 엘프들은 노예 생활에 점점 익숙해지며, 타성에 젖어갔다.

.

휴일 없이 아침부터 밤까지 굴리다보니 일이 참 빨랐다.

이미 마을 하나 정도는 너끈히 들어설 터를 바라보다 무심코 피식 웃었다.

일의 효율성보다 벌을 주기 위해 나무 또한 엘프들의 손으로 옮기게 했음에도 이렇다니.

마법은 역시 대단했다.

“ 음… 어디서부터 집을 지을까. ”

나는 이브와 함께 공터를 돌며 어느 위치에 집을 지을지 정했다.

이곳 공터에 환각을 보여주는 마법진을 깔기 위해서 필요한 일이었다.

집을 마구잡이로 짓다 보면 선을 그려야 할 곳에 장애물이 생길 수도 있었으니까.

이미 대략적인 스케치를 끝낸 이브를 따르게 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집의 터를 정할 때 괜찮은지 아닌지 검증받기 위해서.

“ 여기는 안 될 것 같아요. ”

“ 음. 그렇군요. ”

나는 터를 표시하려던 중, 이브의 퇴짜를 맞고 지팡이를 거뒀다.

새삼 데리고 오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둘만 대화하고 있기에 불만스러울 법한 엘렌도 조용하고, 여러모로 집중하기 좋았다.

터를 정하는 오늘은 노예들을 쉬게 했다.

내일부터는 벤 나무를 이용해 집을 지어야 할 테니, 한 숨 돌리라는 뜻이었다.

공사를 지휘하고 시간이 지나다보니 열이 완전히 빠진 탓일까.

아니라면, 애초부터 강철멘탈 덕에 별 생각이 없었던 것일까.

“ 땅에 마법진을 새기면 얼마나 갈 것 같나요? ”

“ 어… 아무래도 오래는 못 갈 것 같아요. 비가 오는 등 흙먼지가 쌓일 일이 생기면……. ”

“ …그런가요. 그렇겠지요. ”

혹여나 싶어 물어봤지만 예상했던 답변이 고스란히 들려왔다.

석판 같은 것에 새기고, 경도를 강화하거나 코팅을 해서 마법진을 보호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말도.

“ 터의 형태와 크기로 보면 당연히 크고 작은 마법진끼리 연동하도록 해야 할 거예요. 제대로 효과를 보려면 위치도 그만큼 중요하고요. 계산을 해 보니……. ”

이브가 자기만의 세계에 푹 빠져 중얼거리는 동안나와 엘렌이 얌전히 그 뒤를 따랐다.

마법이론이나 식에 관해서는 자세히 설명할수록 알아듣기 힘들었기에 한 귀로 흘릴 뿐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머리가 너무 복잡해질 것이 뻔해서.

그 후로 한 시간이 지나서야 이브가 제정신을 차리고 급히 고개를 숙였다. 너무 자기 이야기만 해서 무례를 끼친 것이 아닐까 걱정했다. 물론 이야기를 들으며 어질어질했지만 무례라 생각하지 않았기에, 적당히 웃으며 집으로 보냈다.

나는 물어볼 것이 있었기에 엘렌을 끌고, 쉬고 있을 엘프 노예들을 모았다.

함께 성으로 들어가지 않은 것은 이 때문이었다.

“ 내 궁금한 것이 있어 불렀다. 다크엘프를 왜 배척했는지에 대해서. ”

다크엘프가 혐오의 대상이라는 건 알지만, 정작 그 뿌리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잘 모른다.

이 대륙으로 오기 전에는 썩 필요한 지식도 아니라 생각했다.

그래서 힙노스에게 물어볼 생각도 못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혐오 받는 다크엘프가 내 여자이기에 이유를 알고 싶었다.

마침 시기와 상황이 잘 맞물린 덕에 생긴 기회였다.

전에 물어봤지만 당사자인 엘렌도 그저 다크엘프라서 이 꼴이다, 라고 답했었다.

더해, 괴로웠기에 본인이 직접 알아보지도 못했다고 한다.

“ 왜라 물어보시면… 저희도 잘 모르겠습니다. ”

지친 몸을 이끌고 들어오면, 공작가의 은혜에 감사하라는 말을 듣고 잠든다.

그런 생활이 계속되다보니 깐프 놈들이 제법 우호적인 모습을 보였다.

듣기로는 제법 할 만한 노예 생활에 익숙해진 탓이라더라.

또, 같은 말을 반복해서 듣다보니 어느 정도 먹혀든 것일지도 몰랐다.

다만, 그 와중에도 엘프들은 눈치를 볼 뿐 제대로 된 이유를 말하진 못했다.

아마 그들 또한 그냥 그렇다고 교육을 받은 탓일지도 모르겠다.

마침 피부색도 달라 이질적이었으니, 그런 무지성 교육이 더욱 효과를 발한 것이겠지.

“ 다른 엘프들도 같은 생각이냐? ”

“ 예. 죄송합니다. ”

순순히 죄송하다는 말도 할 줄 알고.다 컸다, 다 컸어.

겉으로는 태연하게 대처했지만 속으로는 무척 놀라고 있었다.

아무튼, 제법 연배 있는 이놈들이 모른다면 엘프 역사에 관해 잘 아는 사람을 불러 조사해봐야 했다.

같은 종족이라고 한들 모든 역사를 꿰고 있는 존재가 별로 없는 것이 당연했다.

역사적인 큰 사건이 아닌 이상 더더욱.

“ 그래. 알았다. 이만 물러가 쉬도록. ”

내가 축객령을 내리자 엘프들이 제 텐트를 향해 우르르 흩어졌다.

이젠 집과도 다름없어 제법 편히 쉬는 듯 했다.

간혹 텐트를 스치며 들려오는 목소리를 들어보면 그런 생각이 들었다.

“ 지온 님……. ”

짐마차를 몰며 슬슬 어둑어둑해지는 길을 가고 있을 무렵.

엘렌이 떨리는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 응? 왜 그래? ”

“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셔도 되는데… 어째서 하지 않아도 될 수고를 들이시는 건가요? ”

수고로움이라.

다크엘프가 혐오 받기 시작한 이유를 알아내기 위해, 또 그를 고치기 위한 첫 걸음으로 깐프 놈들을 교육하는 것을 말하는 걸까.

나로서는 고생이라 생각하지 않지만 엘렌의 눈에는 다른 모양이다.

그렇기에, 나는 지나가는 투로 답했다.

“ 과정이 어찌되었던… 지금 엘렌은 내 여자잖아. 내 여자 욕하는 소리를 계속 넘어갈 수만은 없어서 그래.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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