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화 〉 인성에는 인성으로 #6
* * *
나는 때 아닌 늦잠을 자고 나서야 집무실 소파에 엉덩이를 붙였다.
가장 상석에는 두말할 것 없이 헬레나가 앉아 있었고, 나와 엘렌이 서로 마주보는 형식이었다.
오늘은 제법 심각한 이야기를 나눌 생각이었기에 형식부터 남달랐다.
“ …자기 전에 간단히 말해서 다들 알 테니까, 같은 말은 안 할게. 얼마나 뜯어내면 좋을까? ”
“ 목숨이죠. ”
둘은 기다렸다는 듯 입을 모아 말했다.
목숨 말고 다른 것으로 값을 받아내겠다는 계획을 잊어버린 것만 같았다.
아마 머리가 텅 빌 만큼 크게 화를 내고 있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내게 위로받은 후에도, 여전히.
그럼에도 한숨이 터져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어, 길게 숨을 내뿜으며 고개를 저었다.
“ 목은 빼고 얘기해 줘. 이득을 볼 만한 걸로. ”
“ 그러면 자치권을 몰수하고, 전부 노예로 삼아야지. ”
“ 조공을 올리게 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엘프끼리 사용하는 약초 같은 것도 아낌없이 긁어내고요. ”
인간이나 물건의 약탈은 나도 생각했던 것들인지라 참 친숙하게 들려왔다.
특히 지금 같은 시대라면 더욱 야만적으로 뜯어낼 법도 했다. 다소 과장되게 말하면 승전국이 패전국을 상대로 삥을 뜯기 위한 상황이니까.
“ 엘프 노예와 물품을 걷자는 거구나. 좋은 생각이긴 해. ”
마을에 남은 엘프들이 그를 받아들일지는 둘째 치더라도, 생각 자체는 썩 나쁘지 않아 보였다.
정도는 조절해야겠지만 양의 차이일 뿐, 조건에 차이를 두고 싶지는 않았다.
현재 잡혀있는 촌장들이 받아들이느냐 마느냐.
또 받아들인다 하면 마을에 남은 엘프들이 받아 들이냐 마느냐.
우리의 뜻을 받아들이게 하려면 이 관문 두 개를 거쳐야 했다.
만약 어느 관문에서 흐름이 막힌다면 그 때에는 정말로 전쟁이다.
내가 내민 조건을 못해 힘으로 반대하여 뒤집었다는 것은, 곧 나를 기습한 일 따위는 모른다고 뻔뻔하게 억지 쓰는 것과 같다고 생각했다.
또, 설령 우두머리를 뒤집었다 한들 내 억울함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었다.
우두머리의 결정은 곧 조직의 결정이라고 생각하기에.
“ 좋아. 지금 당장 촌장 놈들을 여기로 끌고 오라고 할게. ”
약탈도 약탈하려는 곳의 환경을 잘 알아야 하는 법이다.
나는 그런 의미에서 사람을 불러, 곧장 에일렌을 이 저택으로 데려오도록 명령했다.
촌장들 가운데서도 제법 중요한 머리로 보였으니 아는 것도 많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 지온. 그 빌어먹을 년이 제대로 답을 할까…? ”
헬레네가 깍지를 낀 손을 꼼지락대며 믿음이 안 간다는 듯한 기색을 띠었다.
나를 납치해 고삐를 잡겠다는 생각을 할 정도이니, 우리 앞에서 태연하게 거짓을 말할 수도 있다.
헬레나는 그 점을 지적했다.
나도 그 점은 일리 있다 생각하기에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으리라는 건 너무 좋게만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 나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오히려 거짓을 말하다 들통 나면 나쁘지 않을 지도 몰라. ”
“ 또 꼬투리를 잡아서 뜯을 만큼 뜯겠다는 생각이구나? ”
“ 그렇지. ”
그를 위해서는 현지 조사가 필요하겠지만,더 많이 얻어내려면 그 정도 시간은 들일 생각이었다.
물론 눈에 띄지 말아야 하며, 파견하는 조사원에게 줄 보상도 필요하리라.
엘렌이 엘프 생태계를 잘 알았다면 이렇게 공을 들일 필요도 없을 테지만…….
.
“ 부르셨습니까. ”
느긋하게 차 한 잔 마신 후 잡담을 하고 있을 무렵. 촌장 대표 에일렌이 집무실에 발을 들였다.
손목에는 무거운 족쇄를 차고 있었는데, 마법을 쓰면 별 소용없을 것 같은 구속이었다.
다만, 여기에는 엘렌이 떡하니 버티고 있어 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마법을 쓰지 못하는 에일렌은 보통 여자보다 조금 나은 수준일 테니까.
“ 그래. 잘 왔다. 내 묻고 싶은 게 있어 불렀으니, 우선 거기 앉아라. ”
“ 알겠습니다. ”
에일렌은 고개를 숙인 뒤 내가 가리키는 자리에 앉았다.
조금 전 까지 엘렌이 앉아 있던 넓은 소파였다.
삼대 일.
나는 헬레나와 엘렌을 양쪽에 낀 채, 나른하게 소파에 등을 기대며 입을 열었다.
“ 내 말을 돌릴 이유도 없으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마. 네놈들의 마을, 그리고 다른 엘프 마을에서 기르는 것은 뭐가 있느냐? ”
엘프도 나름대로 경제를 이루고 살고 있다.
제법 폐쇄적이기에 외부와 거래를 할 때면 물물교환 형식이 되고는 하지만, 그만큼의 가치가 있다고 엘렌이 말했다.
실제로 같은 약초라도 엘프가 기른 것이 약효가 훨씬 좋다는 말도 들었다.
“ 각 마을에서… 기르는 것이요? ”
에일렌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왜 그것을 묻느냐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내 생각이지만, 정말 모르는 것이 아니라 모르는 척 하는 것만 같았다.
그 정도로 눈치 없는 여자처럼 보이지는 않았으니까.
“ 가증스럽게 이해 못하는 척 하지 말고, 거짓으로 말하지도 마라. 엘렌. ”
“ 네. ”
상대가 거짓말을 못 하게 하려면 그럴 여유를 없애는 것도 한 방법이다.
적어도 그렇게 생각한 나는 엘렌을 불러, 에일렌이 정령을 부르지 못하도록 연결을 끊어버렸다.
미리 상의한 대로.
“ 윽…! 방금 그건 대체? ”
에일렌이 따끔거리는 정전기에 손이 닿은 듯한 모습을 보이며 당황해했다.
마법이라 하기에는 마나가 흔들리는 기척도 없었고, 그런 상황에서 피부가 따끔거렸을 테니 저럴 만도 했다.
“ 걸레짝이 된 척후병들의 보고를 못 들었느냐? 못 들었다면 알려주마. 네년이 정령을 불러낼 수 없도록 교감을 끊었다. ”
“ 뭐라고요?! ”
정령은 엘프와 평생을 함께 하는 동반자다. 달리 말하면 숨 쉬는 것만큼 당연한 일이다.
그런 정령마법을 갑자기, 하물며 더럽게 여기던 다크엘프가 쓸 수 없게 만든 상황이다.
소리가 높아지는 것도 당연했다.
비단 침착하던 에일렌이라도 예외가 못 되는 것처럼.
나는 그 모습이 고소하다는 듯 입꼬리를 비틀며 비웃었다.
“ 유산이 참 좋기는 하더군. 이렇게 너희 잘난 엘프의 콧대를 꺾을 수도 있고. 아무튼, 네년이 수작질을 부리지 말라는 뜻에서 한 조치이다. 알아들었느냐? ”
“ …알겠, 습니다. ”
콧대가 꺾이자 입술을 꽉 깨물기도 하는 에일렌.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정말 고소했다.
마치 입에 참기름이라도 털어 넣은 느낌이다.
그 뒤로는 대화가 제법 매끄럽게 진행되었다.
본래 중급에서 상급정령까지 다룰 수 있을 힘이 사라졌으니, 그 상실감이 클 터였다.
그를 메우기 위해서라도 내 질문에 성실하게 답하고 있었다.
적어도 내 눈으로 보기엔 그랬다.
“ 좋구나. 앞으로는 매년, 너희들의 그 약초를 바치거라. 총생산량을 상세히 기록한 보고서를 보고 양을 정해야겠구나. ”
“ …예. ”
조직 전체를 압박하는 것보다 그 행동을 담당하는 머리 하나만 압박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에일렌의 고분고분하기 그지없는 태도가 그 말을 떠올리게 했다.
내가 생각해도 참 얍삽하지만 정당한 대가를 받는 셈이다.
“ 나머지는 연무장에서 말을 꺼내야겠구나. 장소를 옮기지. ”
노예 징집을 포함한 요구 전부를 전하려면 촌장들을 모으는 편이 낫다.
그래서 나는 하인들을 시켜 촌장 무리를 연무장에 데려다 놓도록 했다.
정보를 얻을 만큼 얻은 뒤 그들에게 갈 생각으로.
“ 엘프를 노예로?! ”
내가 노예라는 말을 꺼내기 무섭게 촌장들이 발작했다.
비록 그들이 패배자라고는 하나 노예를 보내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이니 그럴 법 했다.
기껏해야 돈 좀 뜯기고 말겠지, 라고 생각했을 지도 모르고.
또, 크게 보면 엘프 전체가 크라우저 공작가에 굴복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을 테니까.
“ 왜? 내키지 않는가? 그렇다면 싫다고, 안 된다고 하거라. 그 순간 협상은 결렬 될 테니까. ”
노예라고 한들 종족 전체를 노예로 만들 생각은 없었다.
결국 놈들을 먹여 살리는 데 크라우저의 돈이 들어갈 테니까.
물론 그만큼 가혹하게 굴리면 될 지도 모르지만, 어딘가 내키질 않았다.
“ 그, 그것은……. ”
만일을 대비해 이곳에 모인 깐프놈들의 교감을 전부 끊어 둔 상태다.
힘으로 대항하려 해도 할 수가 없으니, 쩔쩔매며 말꼬리를 흐리는 것이 최대한의 저항이겠지.
기사처럼 마나를 사용한다면 모를까, 놈들은 정령마법에 특화되어 있으니까.
“ 나는 꾸물대는 것을 아주 싫어한다. 다만 강제로 찍어 누르는 것도 좋아하지 않지. 그러니 10분, 생각할 시간을 주마. 논의를 해도 좋고, 혼자 끙끙 앓으며 생각해도 좋다. 그 안에 결정해라. ”
다만, 결정을 내리지 않을 시 전쟁을 치르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겠다.
내가 그렇게 엄포를 놓은 뒤 입을 다물자, 촌장들이 알아서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인간에게 노예가 되는 굴욕까지 감수하며 살아야하냐. 우리가 싸우면 저항도 못하고 지푸라기처럼 죽는다.
나는 시장바닥마냥 시끌벅적해진 연무장을 바라보며 속으로 피식 웃었다.
“ 어떻게 할 것 같아? ”
옆에 앉아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던 헬레나가 물었다.
말로 싸우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으려니 심심했던 모양이다.
“ 나는 받아들일 것 같은데. 헬레나는 어떻게 생각해? ”
“ 나도 그렇게 생각해. 시키는 대로 하는 것만이 사는 길이잖아. 적어도 내가 봤을 땐 그래. ”
엘렌이 없다면 모를까, 내 옆에 버젓이 자리하고 있는 이상 엘프가 이길 확률은 거의 없다고 봐야했다.
자존심이 생존본능보다 훨씬 높다고 하면 다른 길을 택할 지도 모르나, 그렇지 않다면 살 길을 고르겠지.
“ 그나저나, 노예를 받아들이면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
뿌듯하다는 듯 등을 꼿꼿이 세우고 있던 엘렌이 은근슬쩍 질문을 던졌다.
이번 압박을 가능하게 한 공로자이자 내 여자의 물음이다. 당연히 답을 줄 생각이다.
“ 음… 인근 숲을 적당히 개간해서 영지를 넓혀볼까 생각하고 있어. 토지사업은 많은 힘이 들어 영지민을 동원하기 어려우니까, 마침 잘 됐다 싶어. ”
“ 영지를 넓히면… 해야 할 공사가 많죠? ”
“ 많지. 하지만 밥만 먹여주면 될 노예들을 쓰니 괜찮지 않을까. ”
유해물질을 퍼트리는 것도 아니라 적극적으로 개간해 볼 법도 하지만, 나무를 너무 잘라내도 좋지 않다는 말을 들어 본 적 있었다.
그러니 계획을 짜서 느긋하게 진행 할 생각이었다.
우리는 시끄러운 가운데 한가로이,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10분.
약속한 시간이 되자, 나는 헬레나의 귀에 속삭이며 마무리를 지어 달라고 부탁했다.
여태껏 내가 주도하기는 했어도, 공작이 마무리하는 편이 그림이 좋을 것 같았다.
더해, 열이 올라 시간 가는 줄도 모르는 놈들을 억누르기 쉬웠으니까.
“ 약속한 시간이 다 되었다!! ”
잠시 얼굴을 붉힌 헬레나가 언제 그랬냐는 듯 위엄 있는 목소리를 힘껏 내질렀다.
마나가 담긴 목소리라 그런지 쩌렁쩌렁했다. 자칫 저택이 흔들리는 것이 아닐까 착각할 정도였다.
위엄 뿐 아니라 위협을 느낀 탓인지, 우리를 향해 시선을 던지는 촌장들이 겁에 질려 있었다.
마스터가 던지는 목소리와 살기를 마주하고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언제든 불러낼 수 있었던 든든한 정령도 못 쓰는 상황이고.
“ 수용이냐, 거부냐! 네놈들이 정한 답을 내놓아라! ”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
나는 그 기로에 선 이들이 부디 살아남는 방향을 고르길 바랐다.
전쟁을 고르겠다면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손에 피를 묻힐 각오를 했지만, 피비린내 나는 상황을 피하고 싶었다.
피에 미친놈도 아니니까.
“ 저, 저희는……. ”
아직 결론이 나오지 않은 탓일까.
답을 내려는 촌장들의 목소리가 여전히 떨렸다.
겁에 질렸을 뿐만이 아니라, 뚜렷한 답이 나오지 않아 망설이는 기색이었다.
엄포를 놓긴 했는데, 어쩔 수 없이 번복해야 할까.
그런 생각이 뇌리를 스치는 가운데, 그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 또한 내 입을 다물게 했다.
내가 망설이는 것을 깐프들이 알아챈다면 정말로 손을 써야 했다.
저희는. 엘프 촌장들은 미리 입을 맞추기라도 한 듯 그 말만을 우물거렸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그 탓에 화가 점점 치밀어 올라, 꺼림칙함을 누르고 당장 목을 꺾어버릴까 싶은 생각이 등을 떠밀었다.
멘탈 덕분에 극단적인 상태까지 치닫진 않더라도, 불쾌하기는 매한가지였다.
헬레나와 엘렌 또한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듯 째진 눈을 한 채 팔짱을 꼈다.
나보다 훨씬 극단적인 이들이니만큼 당장 일을 저질러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그러나, 점점 험악해지는 분위기를 놈들이 읽기라도 한 것일까.
“ 귀족님의 명령을… 따르겠습니다.”
짜증날 정도로 뜸을 들이던 끝에, 결국 항복을 선언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