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화 〉 인성에는 인성으로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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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년은… 혹시? ”
“ 처음 뵙겠습니다. 에일렌 오베론입니다. ”
잘 익은 벼와 닮은 머리색을 가진 여자가 고개를 숙였다.
엘프이기에 겉모습이 아름다운 것은 당연했고, 한 무리의 수장다운 기품이 느껴졌다.
자존심 강한 색채가 유난히 옅게 느껴지는 것도 신기했다.
“ 오베론이라. 그래. 네가 바로 그 잘난 회의를 주선하여 나를 건드려 보려던 년이었구나. ”
“ 예. 대공의 말씀하신 대로, 제가 대회의를 소집했습니다. ”
오로지 홀로 일으킨 일은 아니라 하나 주동자임에는 틀림없다.
에일렌은 그 점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차분하게 답했다.
때에 따라 충분히 격노를 사고도 남았을 발언이었음에도.
나는 그 점을 나름대로 높이 평가하며, 여전히 화가 났음을 드러내기 위해 최대한 눈을 깔았다.
“ 지금 당장 목이 날아가도 당연했을 소리를 잘도 지껄이는구나. ”
“ 목이 날아갔다면 진즉 날아갔겠죠. 하지만, 당신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목숨 대신 원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겠지요? ”
“ 흠. 나를 납치하겠다는 멍청한 생각을 떠올린 머리라고는 믿기 어려운 이해력이구나. 아니면, 너 같이 덜떨어진 년이라도 이해하기 쉽도록 했으니 당연한 반응인가. ”
움찔. 내 도발과 폄하에 자존심이 상한 듯 에일렌의 눈가가 움찔거렸다.
지극히 엘프다운 반응이었으나 제법 표정 수습이 빨랐다.
언제 그랬냐는 듯 침착한 얼굴로 고개 숙여 내 비위를 맞추기도 했다.
본래 성정이 침착한 편이기 때문이었을까.
목숨을 구걸할 수밖에 없는 처지이기에 가능한 모습일까.
어느 쪽이든, 혹은 둘 다라 해도 내가 주도권을 쥐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처럼 보였다.
“ 어찌 되었던 네놈들의 계획은 실패했고, 나는 여전히 이곳에 있다. 그 탓에 제법 상처를 다스리느라 시간이 걸렸고, 그 이전에는 목숨이 위험했었지. ”
“ 알고… 있습니다. ”
“ 정말 알고 있는 것이 맞나? 그저 상황이 불리해지니 어떻게든 모면할 생각만 그득한 것이 아니고? ”
피식 웃으며 무리의 자존심을 깎아내리자, 몇몇이 노골적으로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아직 그 정도가 미약하기는 하나 불편하다는 느낌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 왜? 아니꼬운가? 정녕 한 나라의 대공을 납치하고도 얌전히 넘어가길 바라고 있었나? 정말 우스울 정도로 오만하기가 찍어 없는 놈들이구나. 나와 눈을 마주한 순간부터 벌벌 떨며 목숨을 구걸해도 시원치 않을 상황인데도. ”
“ 아닙니다. 저희가 죽을죄를 지었고, 변명할 여지가 없다는 것 또한 잘 압니다. ”
죽을죄를 사람, 아니 엘프 치고는 너무 무덤덤하기 짝이 없다.
마음 한 구석에서 촌장급인 우리가 전부 왔으니 죽이지는 않겠지, 라고 안이하게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 그래. 잘 아는구나. 죽을죄를 지었지. 그러니 너희 모두 목을 내놓거라. 지금 당장. ”
“ 뭐, 뭐라고요…? ”
나른하게 등을 기댄 채 목을 내놓으라는 허패이자 강수를 두자 격한 반응이 일어났다.
입을 꾹 다문 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엘프들 모두가 웅성대기 시작했다.
소란의 중심에 있는 에일렌 또한 당혹스러워하기는 매한가지였다.
목을 내놓아라. 즉, 죽어라.
사형선고를 듣고 덤덤할 수 있는 인간이 과연 몇이냐 있겠냐마는, 이들의 반응이 너무도 격했다.
마치 당연히 죽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던 경범죄자가 사형 선고라도 받은 것만 같았다.
“ 우리를! 우리를 살려주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그것이 아니라면 왜 촌장들을 모이라 한 것입니까! ”
엘프 하나가 역성을 내며 내게 외쳤다.
겉으로는 죄다 젊은 청년같이 보여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웠으나, 말투나 모습을 보니 촌장 중 하나임이 틀림없어 보였다.
무리의 대다수가 촌장이니 그럴 수밖에.
“ 네놈들은 나를 입맛대로 다루기 위해 납치하고, 공격까지 서슴지 않았어! 그 죄는 너희들 엘프 전부의 목숨으로 받아내도 시원치 않다! 그럼에도 종족 전체를 몰살하지 않고, 그 책임자의 목숨으로 끝내주겠다 말하는 것이야! ”
쾅! 마나로 강화한 다리로 땅을 내려찍자 바닥에 금이 가고, 큰 울림이 감옥 전체를 진동케 했다.
진동 자체는 미약했지만 깊게 패인 바닥과 떨림이 제법 효과가 있어 보였다.
어느 새, 소란스럽던 엘프 놈들이 다시 입을 다물었기에.
“ 아니면, 지금 당장 전쟁이라도 치르겠느냐? 그리 하겠다면 내 특별히 너희를 풀어주어 마을로 보내주마. ”
미리 엘렌이나 용병단을 대기시켜 두었다면 모르겠으나, 나나 몇 없는 기사들로 저들을 상대하기엔 부족했다.
그런 상황에서 당장 전쟁을 치르기 시작하면 많은 사람들이 허무하게 죽을 테니, 마을로 보내주겠다는 여지를 두었다.
살 구멍을 뚫어두면 전쟁 준비를 하기 위해 마을로 떠날 지도 모른다 생각했다.
다만, 궁지에 몰린 엘프놈들이 미쳐서 날뛰기 시작하면… 최대한 신속하게 움직여 가능한 피해를 줄일 수밖에 없다 생각했다.
“ 그, 그것은…! ”
“ 이것도 싫으냐? 그러면 대체 네놈들 은 뭘 하러 여기까지 온 것이냐! 목을 내놓을 각오도 없다! 전쟁을 치르기도 싫다! 대체 어린 아이와 네놈들이 다를 것이 무엇이냐! ”
목숨만 살려주신다면 뭐든 하겠습니다.
그 말을 이끌어내기 위해 화를 내는 척 하며 한 번 더 발을 굴렸다.
바닥이 깊게 패이고, 그에 따라 갈 곳 잃은 흙먼지가 사방으로 튀었다.
그에 소리를 지른 엘프도 한껏 움츠러들었고, 다른 엘프들 또한 기가 죽은 채 고개를 푹 숙였다.
제법 허세가 잘 먹혀들어가고 있다는 증거였다.
침묵은 엘프 모두에게 퍼져 입을 떼기 어려운 분위기를 만들었다. 모두가 벙어리가 된 것만 같았다.
“ …주십시오. ”
한동안 계속되던 침묵을 여자의 목소리가 깨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너무 미약해 잘못 들었나 싶었지만, 분명 여자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일부러 못들은 척 고개를 갸웃거리며 코웃음 쳤다.
“ 음? 누군가 말을 꺼낸 것 같은데, 잘못 들었나? ”
“ …살려, 주십시오. 무엇이든 할 테니, 제발……. ”
이번에는 두려움을 곱씹는 듯한 목소리가 확실히, 감옥 안에 있는 누구라도 들을 수 있을 만큼 또렷하게 들렸다.
목소리를 낸 장본인은 이들의 실질적인 우두머리로 보이는 에일렌이었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나는 주먹을 꽉 쥔 채 엉덩이라도 흔들고 싶은 심정을 숨기며 여유롭게 물었다.
“ 오호. 무엇이든 하겠다? 하지만 그것이 온전히 네년 혼자서 정할 수 있을 일인가? 네년이 왕이라면 모를까, 결국 한 마을의 촌장일 뿐이지 않은가. ”
“ 다른 촌장들도… 아마 그렇게 생각할 겁니다. 안 그렇습니까? ”
나뿐만 아니라 너희들도 같은 마음이 아니냐.
에일렌이 좌중을 돌아보며 그런 의도를 담은 의문을 던지자, 가만히 듣고 있던 엘프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을 대신했다.
“ 보시다시피… 다들 저와 생각이 같은 모양입니다. ”
“ 그래. 그런 모양이군. 살려주겠다면 뭐든 하겠다라……. ”
드디어, 드디어 삥 뜯을 때가 다가오고 있다.
그런 생각이 뇌리에 떠오르자 웃음이 절로 나올 정도였으나, 어떻게든 입꼬리를 뒤틀어 표정을 바꿨다.
순진하게 기뻐하는 모습보다 이렇게 하는 편이 훨씬 압박감을 줄 수 있을 것 같아서.
“ 기뻐하거라. 네놈들이 그 정도 각오를 보였으니 숨 돌릴 시간 정도는 주마. 새벽부터 네놈들과 상대하느라 피곤하기도 하니, 내 답은 내일 주도록 하마. ”
그러니, 그 때까지 뭐든지 하겠다는 각오를 확실히 다져놓도록 해라.
나는 그 말을 남긴 채 홀랜드와 함께 감옥을 나왔다.
“ 와. 설마 대공님이 그렇게 나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말투도 그렇고 완전 다른 사람 같던데요? ”
홀랜드가 말을 끌고 병영을 나오기 무섭게 입을 놀려댔다.
어지간히도 입이 근질거렸나보다.
“ 화가 난 탓도 있지만, 그 이상으로 오만한 귀족임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
나도 굳었던 어깨와 긴장을 풀 겸 가벼운 기색으로 답했다.
저 한 마디 끌어내려고 낚시질을 해서 그런지 조금 졸렸지만 쓰러질 정도는 아니었다.
“ 얕보이지 않기 위해서요? ”
“ 네. 더해, 위압감도 주고요. 홀랜드나 다른 분들을 대할 때처럼 말하면 긴장감이 별로 없어 보이잖아요. ”
“ 확실히… 좀 오싹했습니다. ”
홀랜드 같은 기사가 오싹할 정도라.
내가 신분상 위라고는 하나 립서비스가 너무 심하다.
무심코 피식 웃지 않을 수 없을 만큼 노골적이라 우스울 지경이었다.
“ 군사대장이시면서 너무 아부가 지나치신 거 아니에요? 부인 모르게 용돈이라도 챙겨 드릴까요? ”
“ 어? 저 농담으로 한 말 아닙니다? 물론 포상을 주신다면 감사하게 넙죽 받아먹겠지만, 정말로 진심이에요. ”
“ 아, 예에……. ”
우리는 동 트기 시작한 하늘 아래, 때 아닌 농담을 주고받으며 각자 갈 길을 갔다.
그는 서문으로, 나는 저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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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가 일찍 끝난 덕일까.
크라우저 저택은 여전히 고요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동이 트는 걸 보면 곧 사람들이 하나 둘 깨어날 지도 모르겠지만, 시간을 참 잘 맞춘 듯싶었다.
“ 지온. ”
“ 대공님. ”
그렇게 생각했는데, 침실에서 두 여자가 팔짱을 낀 채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코끝을 희미하게 자극하는 향유 향이나 좀 더 말끔해진 모양새를 보니 목욕을 한 모양이었다.
마치 늦게까지 술 퍼마시다 이제 들어 온 남편 같은 상황 같았는데, 이상하게도 당황스럽지는 않았다.
“ 다녀왔어. ”
본래 이런 상황에서 여자에게 손을 대면 쌍심지를 켜고 화내는 것이 보통이다.
적어도 내가 보거나 들은 소식에서는 그랬다.
그러나 내가 처한 현실은 그와 달랐고, 또 그렇다 하더라도 대처 할 자신이 있었다.
나는 피곤한 기색을 드러낸 채, 스스럼없이 두 여자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그야말로 방탕한 졸부가 따로 없을 모습이었다.
“ 앗……. ”
“ 걱정시켜서 미안해. 하지만 지금은 피곤하니까… 일단 같이 자 주면 안 될까? ”
당황해하는 둘을 품에 안은 채 애원하듯 속삭이자 기다렸다는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어찌 보면 화내는 사람에게 반대로 더 크게 화를 내서 곤란하게 만드는 것과 비슷했다.
“ 아, 응! 얼른 침대로 가자. 아, 옷부터 갈아입어야지. ”
“ 공작님은 기다리고 계세요. 제가 갈아입혀 드릴 테니까. ”
그렇게 되면 반대로 맞불을 놓는 상황이 되어 소란이 더 커질 위험도 있었지만, 다행히 일이 잘 풀렸다.
언제 그랬냐는 듯 내 팔을 잡아끌며, 누가 더 적극적으로 돌보나 경쟁하는 듯했다.
덕분에 나는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뒤 두 여자를 끼고 침대에 올라, 느긋하게 쉴 수 있었다.
“ 아. 좋다……. ”
부드러운 몸을 죽부인마냥 안고 있으니 피로가 싹 가시는 기분이다.
잠을 자지 않아도 될 만큼 활기가 도는 것이 느껴졌다.
몸이 젊어 그런지 반응도 참 빨랐다.
자연스럽게 팔에 힘이 들어가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 으응……. 지온이 지금 왔다는 건 그 빌어먹을 새끼들과 얘기가 다 끝난 거야? ”
헬레나가 달콤한 신음을 흘린 뒤, 언제 그랬냐는 듯 칼날처럼 날카로운 기색을 띠며 물었다.
변화가 너무 급격해 이중인격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 내가 남긴 쪽지를 읽었구나? ”
“ 응. 얼마 안 됐어. 지온이 없다는 걸 알고 급히 채비를 해서 나가려는데, 정문에 남긴 쪽지를 봤거든. 그래서 기다렸어. ”
“ 그랬구나. ”
나는 그럴 수 있다며 고개를 끄덕인 뒤 헬레나의 물음에 답했다.
뭐든지 하겠다는 깐프놈들의 말을 오늘 하루 곱씹은 뒤, 내일 답을 주겠다고.
“ 대공님은 무엇을 요구하실 생각이세요? 물론 그 죄를 생각하면 종족 전체가 노예가 되어도 시원찮겠지만……. ”
품에 안겨 가슴팍에 뺨을 비비던 엘렌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뺨을 비비는 움직임이 냄새로 마킹하는 개와 꼭 닮았다 느꼈는데, 충분히 만족한 모양이었다.
다만, 그에 자극받은 헬레나가 아차 싶었는지 엘렌과 똑같은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 엘프를 노예로 삼기는 조금 그렇고……. ”
나는 강아지를 쓰다듬듯 헬레나의 허리 부근을 매만지며 말꼬리를 흐렸다.
아직 피로가 완전히 가시지 않아 그런지 모르겠지만, 뇌가 생각하기를 거부하고 있어 좋은 것이 떠오르질 않았다.
물론 좋은 것을 만지며 즐기는 중이기는 하지만 분야가 달랐다.
그러니,
“ 우선, 한 숨 자고 생각하고 싶어. ”
결론은 자고 나서 내리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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