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3화 〉 인성에는 인성으로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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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들어라. 한 달. 한 달 안에 네놈들의 머리를 전부 끌고 와라. 그렇지 않을 경우에 어떤 일이 일어날 지는… 자네들이 잘 알겠지.
지옥을 뛰쳐나오면 또 다른 지옥이 기다리고 있다.
그럼에도 그 지옥으로 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머리, 즉 촌장들을 모아 가지 않을 경우 선전포고를 한 것으로 간주하여 전쟁을 일으키겠다.
엘프 척후들은 감옥에서 풀려나기 전 보았던 지온의 싸늘한 경고에 몸서리치며, 급히 그들의 숲으로 말을 몰았다.
호의가 아니라, 그들의 조급함을 더욱 몰아붙이는 채찍질인 셈이다.
척후들은 그를 잘 알기에 빨리, 조금이라도 더 빨리 달렸다.
마지막 지옥이 눈앞을 가로막고 서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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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촌장들이 모여 여기까지 오는 시간을 고려해 제법 넉넉하게 준 여유 기간이다.
엘렌이 말하기로는 엘프 마을은 총 서른으로, 그를 대표하는 촌장 또한 서른이다.
즉 한 마을에 한 명씩에 각 마을은 불규칙적으로 거리를 두고 있다고 한다.
이곳에서 오베론 마을, 혹은 가장 가까운 마을까지 도달하는 데 며칠.
그리고 소식을 들은 마을을 기점으로 전령을 파견해 놈들을 모으고, 또 모인 놈들이 여기까지 이르기까지 제법 시간이 걸릴 터였다.
나는 조금이라도 늦을시 전쟁을 일으키겠다고 엄포를 놓았으나, 부디 제 시간이 맞춰 들어와 주기를 바라고 있다.
깐프놈들 손에 죽을 뻔한 것을 생각하면 자연스레 열이 올랐음에도 그랬다.
이 세계에 와서 사람 목숨을 몇 번 끊은 적도 있었고, 엘프를 죽여 방패로 삼기도 했었다.
새삼스레 살인에 대한 죄책감 등을 느낄 때는 벗어난 지 오래였다.
아마 앞으로도 위험한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사람을, 혹은 그와 비슷한 아인종을 죽일 수도 있겠지.
그럼에도 유예를 주고 마무리하려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학살자가 되는 상황만큼은 최대한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이 세계에 환생한 근본적인 이유이기도 했다.
“ 후우……. ”
나는 칙칙한 생각을 끊고, 발코니에 새벽 공기를 마시며 기지개를 폈다.
엘프가 정신없이 움직이는 동안 요양에만 신경을 썼고, 덕분에 놈들을 보내고 일주 정도가 지났을 무렵 완치에 이를 수 있었다.
이 대륙의 의사라 할 수 있을 약사에게 완치 판정을 받은 이후쌓이고 쌓인 욕구를 해소하려 날뛰었다.
오늘도 눈을 까뒤집은 채 침대에서 경련하는 두 여자를 놔두고 나온 참이다.
그동안 올리비아나 용병들이 머무는 집에 감사를 표할 겸 선물을 했고, 새로 만들어진 옆집에 살게 된 이브에게도 위문품을 전했다.
아무것도 못 해 죄송하다며 풀죽은 모습이 너무 안쓰러웠던 탓이다.
그 후로도 밀린 업무의 처리나 헬레나의 훈련을 받으며 시간을 보냈고, 일과를 정상화하려 애썼다.
“ 윽! ”
나는 바람에 녹아드는 냄새에 미간을 찌푸리며 곧장 욕실로 향했다.
코를 찌르는 고약한 냄새를 얼른 처리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한 발 먼저 새벽에 때 아닌 목욕을 마쳤다.
“ 아, 아으으……. ”
샤워를 마치고 청바지나 티셔츠만큼 익숙해진 정장을 꺼내 입던 중, 침대에서 들려오는 신음소리에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누구랄 것 없이 기절했음에도 여운을 만끽하려는 듯 붉어진 얼굴.
또 미세하게 경련하는 몸이 참 인상적이었다.
씻기면 깨어날 테고, 그대로 내버려두기도 미안하다.
그래서 따뜻한 물에 적신 수건으로 조심스레 몸을 닦고, 다시 마른 수건을 이용해 물기를 닦아냈다.
여러모로 더럽혀진 이불은 세탁해서 치워두고, 새 이불을 꺼내 덮었다.
다행히 덮는 이불 위에서 일이 치러진지라 위만 갈면 되었다.
아직 어두우나 슬슬 동이 틀 때가 다가오고 있다.
아직 이 거대한 저택은 잠에 빠져 있지만, 조금 후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활기를 띠겠지.
“ 음? ”
홀로 저택 부지를 걸으며 시원한 공기를 만끽하던 중, 저택 밖이 묘하게 소란스러운 것을 느꼈다.
새벽녘이 거의 끝나가는 시점이라고는 하나 사람이 올 때는 아닐 텐데.
혹시 담이라도 넘는 것일까.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저택 대문으로 느긋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가까워질수록 잘 느껴지는 기척은 별 대수롭지 않은 수준이고, 몸도 괜찮은 수준이다.
또, 자랑할 것은 아니지만 도망치기도 용이한 곳이다.
엘프놈들의 공격에서 도망칠 때와 다르게 믿음직한 여자들이 바로 코앞에 있었으니까.
그러나 높은 저택 담을 넘으려다 눈이 마주친 남자는 내가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인물이었다.
“ 홀랜드? 거기서 뭐합니까? ”
멋들어진 턱수염을 기르고, 뒤로 넘긴 갈색 머리칼이 특징인 남자.
말투나 모습을 보면 얼핏 한량 같으나 평소 공작령의 군사를 책임지는 대장이기도 한 기사, 홀랜드였다.
“ 오, 대공님. 마침 잘 오셨습니다. ”
영차!
그는 기다렸다는 듯 높은 담장을 넘어, 아무 망설임 없이 아래로 뛰어내렸다.
그냥 뛰어내렸다가는 크게 다칠 수 있는 높이였다.
홀랜드가 익스퍼트 상급이었기에 별 탈 없이 멀쩡했을 뿐이지, 보통 사람은 엄두도 못 낼 짓이었다.
“ 마침 잘 오다니……. 이런 꼭두새벽부터 저택 담은 왜 넘으려 하신 겁니까? ”
“ 급한 일이 있어서 제가 직접 전령으로 달려왔지요. 저택 문은 아침이나 되어야 사람을 배치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도 아침까지 기다렸다 사람을 보낼까 했는데……. ”
“ 그냥 저지르고 보자는 식으로 왔나 보네요. ”
나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토해내며 고개를 젓다, 그 급한 일이 무엇인지 들어나 보자는 생각에 홀랜드를 보며 물었다.
“ 아무튼, 그 일이라는 게 뭡니까? ”
“ 전에 대공님을 습격했던 엘프 새끼들 있잖습니까. 그놈들이 무리를 이뤄서 왔습니다. ”
“ …네? ”
엘프 놈들이 왔다.
그 말을 듣는 순간 황당함에 어수선하던 감정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홀랜드도 그를 알았는지 유들유들한 태도를 거두고 제법 각을 갖춘 자세를 취했다.
그 또한 여태껏 벌어진 모든 일을 알고 있었을 테니까.
“ 쯧. 이런 새벽부터 오다니. 참 예의라고는 없는 놈들이군요. 다크엘프가 더럽다 경멸할 자격도 없을 것 같습니다. ”
소집 및 의견 논의에 참 많이 시간을 들인 것이야 이해할 만 했고, 얼마나 급했으면 이런 새벽에 찾아올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느냐가 문제였을 뿐이다.
그리고, 나는 그를 받아들이기 어려웠기에 자연스레 짜증이 솟아오름을 느꼈다.
만약 새벽 산책을 안했다면 홀랜드가 저택까지 쳐들어와 한바탕 난리가 났을 테고, 아주 기분 더러운 아침이 되었을 지도 모르니까.
“ …후우. 그래서, 그놈들은 어디에 있나요? ”
“ 남문으로 왔기에 그쪽 병영에 수용해 뒀고, 저는 소식을 들은 뒤에 곧장 이쪽으로 향했습니다. ”
“ 수는 몇이나 되던가요? ”
“ 보고로는 마흔이라고 합니다. ”
마흔이라. 족장이 서른이니 나머지 열은 족장의 호위 겸 수발을 드는 용으로 왔음이 분명했다.
사절단을 보내는 것이 아니니 그 규모가 작은 것이 당연하지만, 그럼에도 허영이라는 물이 완전히 빠지지는 않은 듯싶었다.
“ 알겠습니다. 당장 그쪽으로 가봐야겠네요. ”
“ 호위도 없이요? ”
홀랜드가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호위라도 데리고 가자 주장했지만, 구태여 그럴 필요가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나 홀로 그들을 상대하는 것이 마음도 편하고, 간단히 계산을 해봐도 크게 문제없을 것 같았다.
전에 습격했던 인기척 드문 농지 인근이라면 모를까, 지금 그들은 군사들이 득실대는 병영에 있다.
만에 하나 난리를 피우게 되면 사방을 둘러싼 군사들과 대치해야 될 상황에 놓이게 된다.
그들이 나를 또 납치하려 시도하기엔 몹시 불리한 환경이다.
또, 설령 그런 사항을 모두 감안하고 또 기습을 한다 하더라도 괜찮았다.
촌장이 보통 엘프보다 뛰어나다고는 하나 보통 엘프 수준이다.
그 능력을 높이 가정한다 해도 엘렌보다 못한 것은 엄연한 사실이었다.
엘프들이 왔다는 건 전쟁을 피하기 위함이겠으나, 만약의 상황을 고려해도 충분히 내뺄 수는 있었다.
“ 피곤해 잠든 엘렌을 깨우는 건 미안해서요. 간단한 쪽지를 써 놓을 테니, 잠시 저택 안으로 들렀다 가겠습니다. ”
나는 홀랜드와 함께 저택 집무실에 들어가 남문으로 가겠다는 쪽지를 남겼다.
쪽지는 잘 보이는 저택 정문에 더크로 꽂아두고, 말도 없이 곧장 남문을 향해 달려갔다.
마나를 이용하면 말보다 빨리 달릴 수 있어 시간을 아낄 수 있었다.
물론 계속해서 달리면 몹시 지치기에 긴 거리를 이동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공작령의 남문은 땀이 약간 흐를 즈음에 도착할 수 있을 거리였다.
결국 시간도 아끼고, 말을 끌고 가려다 소란스러워 질 상황도 피한 셈이다.
“ 대장님은 그렇다 치더라도 대공님까지 이른 시간에……. ”
남문 병영 입구에 다다르자 보초를 서고 있던 병사가 입을 쩍 벌린 채 중얼거렸다.
새벽부터 땀을 흘리며 달려왔으니 놀랄 만도 하지.
“ 엘프 놈들이 찾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왔습니다. 때 아닌 난리에 모두가 고생이 많네요. ”
본래 충분한 수면을 취하고 쉬었어야 할 시간이 엉망이 되었다.
병사들이 조를 이루어 내부 순찰을 하는 등 어수선하기 짝이 없는 분위기가 그를 여지없이 증명하고 있었다.
그에, 병사는 이것이 우리가 할 일이라며 단호히 답했다.
눈빛을 보니 진심임이 느껴지지만, 아마 진심이 아니라 하더라도 같은 답을 했을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이.
“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제 개인적인 일에 여러분까지 휘말리게 되어 고생하는 것은 사실이지요. 그러니 홀랜드, 남문 병사들 모두에게 닷새 정도 휴가를 챙겨주세요. ”
“ 휴, 휴가?! ”
휴가라는 말에 병사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놀라워했다.
어느 시대라도 포상휴가의 힘이 대단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모습이었다.
“ 이놈들은 땡 잡았군요. 알겠습니다. 기억해두고, 오늘 중에 조치하겠습니다. 일괄적으로 내보낼 수는 없겠지만……. ”
“ 그건 어쩔 수 없지요. 모든 병력이 빠져나가면 남문이 텅 비게 될 테니까요. ”
나는 피식 웃으며 말꼬리를 흐리는 홀랜드의 목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병사 전부를 한꺼번에 보낼 수는 없으니 당연한 결정이었다.
“ 그럼,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
더 이상 이야기할 것도 없었던지라 인사를 마친 뒤, 곧장 엘프가 기다린다던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우리 얼굴을 알아보고 안내를 하러 온 병사들이 한 둘이 아니었기에 길을 잃을 염려는 없었다.
하지만, 철창에 나란히 갇힌 채 기다리고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 놈들이 순순히 감옥에 갇히려 하던가요? ”
나는 감옥을 지키고 있던 병사에게 물었고, 병사는 그렇다며 아주 단호하게 답했다.
처음 그들은 협상을 하러 왔다며 제법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고는 하는데, 남문 책임자가 그를 지적하고 이 꼴로 만들었다고.
“ 대공을 기습하고 납치하려 했던 버러지들이 협상? 개도 코웃음을 칠 만큼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놈들은 죄인이며, 목을 내놓고 용서를 구걸해도 한참 모자랍니다. 그 점을 주지시켜 줬더니 얌전히 굴었습니다. ”
대공이 되고나서 여러 일을 해 온 것이 이런 식으로 돌아오는 걸까.
아니면 충성심이 그만큼 대단하다는 뜻일까.
나로서는 알 길이 없지만, 아무튼 엘프들을 몰아놓은 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칭찬할 만 했다.
“ 그래. 너희들이 각 마을의 촌장들인가 보구나. ”
나는 미리 마련되어 있던 의자에 앉아, 감옥에 앉은 엘프들을 쭉 훑어보며 운을 뗐다.
본래 엘프 마을의 촌장들이라면 대우를 받아야 할 테지만, 남문 책임자가 말했던 대로 그들은 죄인이다.
그러니 겸손해 할 필요도 없으며, 오히려 오만하고 강하게 나갈 생각으로 그들의 답을 기다렸다.
물론, 언제든 기습에 대응할 수 있도록 신경을 바짝 곤두세운 채.
“ 네. 저희가 각 마을의 대표입니다. ”
그리고, 약간의 기다림 끝에 무리 한 가운데 있던 여자가 무거운 침묵을 깨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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