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화 〉 인성에는 인성으로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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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침을 해결하자마자 엘프가 잡혀 있다는 병영으로 향했다.
아직 말을 타거나 걸을 만큼 안정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마차를 이용했다.
아물기 시작한 상처가 다시 터지기라도 하면 큰일이라는 호들갑이 아직도 귀를 울릴 지경이었다.
“ 공작님에 대공님까지, 이렇게 이른 아침부터 찾아오시다니…! ”
병영 입구 검문소에 이르자, 검문을 담당하던 병사가 깜짝 놀라 중얼거렸다.
본래 병영을 잘 찾지도 않는 사람이 아침부터 떼를 이루어 왔으니 놀랄 만도 했다.
나는 마차 창문 밖으로 고개를 슬그머니 내밀며 사과의 말을 건넸다.
움직이지 않을 수 없었다고는 하나 고요했어야 할 병영을 아침부터 들쑤시게 되었으니까.
“ 아침부터 소란을 피워 미안합니다. 몸을 좀 움직이게 되고 보니, 저를 기습했던 엘프 놈들을 두 눈으로 꼭 보고 싶어 좀이 쑤셔서요. ”
“ 아, 아닙니다! 그 망할 놈들 때문에 큰 고초를 겪으셨으니 당연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
“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지나가도 될까요? ”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채 길을 터주는 병사에게 손을 흔들고, 병영 안으로 들어섰다.
잠시 후, 천천히 앞을 향하던 마차가 고문실이 설치되어 있는 건물 앞에서 멈춰 섰다.
감옥도 겸하고 있어 그런지 제법 단단해 보이는데다 그 넓이도 제법이었다.
“ 대공님. 제가 옮겨 드릴 테니 안심하고 몸을 맡겨 주세요. ”
“ 나도 안아서 옮겨줄 테니 안심하고 내려. ”
재빨리 마차에서 내려 두 팔 벌리는 두 여자를 만류하고, 그 대신 가벼운 부축을 받으며 아래로 내려섰다.
이렇게 수발을 들어야 할 정도로 중상이 아니었음에도 지극정성이 따로 없었다.
“ 어서 오십시오. 오늘은 대공님께서도 함께 오셨군요. ”
건물 안으로 발을 들이자 교도관 역할을 하는 병사가 고개 숙여 인사를 건넸다.
헬레나가 매일같이 들러 그런지, 긴장한 기색이 조금 느껴짐에도 제법 여유가 있는 모습이었다.
아무리 높은 계급의 인간이라도 자주 보면 덤덤해진다는 것이겠지.
“ 예. 몸이 조금 괜찮아져서 들렀습니다. 그 빌어먹을 깐… 아니, 엘프 놈들은 안에 있나요? ”
“ 있습니다. 특이사항으로는 곧 고문을 받을 생각에 벌벌 떨고 있습니다. ”
벌벌 떨고 있다라.
그 말을 들으니 아주 약간 동정심을 느끼긴 했으나, 아주 약간 뿐이었다.
내심 통쾌하단 생각이 훨씬 강했으니까.
“ 아… 그렇군요. 끼니는 제때, 넉넉히 먹였나요? ”
“ 공작님의 지시가 있었기에 잘 먹이고 있습니다. 엘렌 님의 조언을 얻어 구성한 메뉴라 가리는 기색도 없었습니다. ”
공작가의 손님이자 내 호위를 담당하는 엘렌의 위치는 생각보다 제법 높다.
다크엘프를 더럽게 보기만 했던 예전이라면 모를까, 그 풍조가 사라지고 나서부터는 나름 제대로 된 대접을 받고 있었다.
물론 공작령 내에서 한정된 이야기이나, 엘렌은 그것만으로도 분에 넘친다는 듯 고개를 숙이곤 했다.
또 대우를 안 할 수도 없는 것이, 헬레나와 맞수를 겨룰 수 있다는 소문이 제법 퍼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 썩 좋은 곳은 아닙니다만, 부디 원하는 만큼 머물다 가시길 바랍니다. ”
병사는 나를 배려한다는 듯 한쪽 구석에 놓인 의자 세 개를 품에 안고 오더니, 곧장 고개를 숙이며 자리를 비켰다.
나가달라는 요청이 없음에도 이런 것을 보니 제법 분위기를 잘 읽는 사람 같았다.
“ 열둘이나 있어? 제법 쪽수가 많네. ”
나는 철창 근처로 의자를 당겨 앉으며 감탄했다.
마법과 화살이 끊임없이 날아오기에 제법 쪽수가 있으리라 생각은 했지만, 설마 열이 넘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몸 이곳저곳에 감긴 붕대는 덤으로.
“ 처음부터 무력정찰을 할 생각을 했나 봅니다. ”
왼편에 앉은 엘렌이 경멸어린 눈초리로 철창 안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무력이 필요한 정찰행위를 했기에 무력정찰이라 한 것 같은데, 제법 그럴듯하게 들렸다.
“ 거기다 공포에 질려서 그런지, 저렇게 구석에 박혀 있더라. 고작 하루만에. ”
헬레나는 내 오른편에 앉은 뒤 싸늘한 투로 내뱉었다.
마음 같아서는 딱 달라붙고 싶어 안절부절 못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아마 엘프 놈들의 앞이라 자제하는 눈치였다. 엘렌도 마찬가지였고.
“ 너희들, 얼른 이쪽으로 와. ”
헬레나가 마나를 담아 소리를 내자, 구석에 틀어박혀 움찔대던 엘프들이 일제히 등을 돌렸다.
웅크린 채 덜덜 떠는 것도 그렇고, 그늘과 두려움에 무너지는 표정이 참 불쌍해 보일 지경이었다.
내 곁을 지키는 두 여자가 어지간히 몰아붙인 모양이었다.
“ 마, 말할게요! 말할 테니까 제발 살려주세요! ”
철컹! 그들은 헬레나의 얼굴을 보자마자 조건반사적으로 철창에 달라붙었다.
지금 당장 탈출하지 못하면 목숨이 끊어질 것 마냥 간절하기 그지없는 눈빛이었다.
목소리도 그에 맞게 다급한 색이 짙었고, 철창을 무너뜨리려는 듯 격렬하게 흔들기도 했다.
그 탓에 너무 시끄러워 저도 모르게 미간을 살짝 찌푸렸으나, 이것이 실수 아닌 실수가 되었다.
“ 이 짐승만도 못한 새끼들! 당장 멈추지 못해! ”
내가 상처 때문에 아파하는 줄 알았는지,혹은 소리가 거슬린다는 생각을 읽었는지는 모르나, 미간을 구겼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어지간히 화가 난 듯 소리를 질렀다.
마나를 담아 외치니 사자후가 따로 없을 지경이었다.
놀라운 것은 정작 이 큰 소리가 정작 나나 엘렌의 귀에 쩌렁쩌렁 울리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아마 소리를 지르는 와중에도 방향을 조절한 것이 분명했다.
아니라면 이 신기한 현상을 설명할 수가 없었다.
“ 히이익! ”
그에, 엘프들이 즉각 철창을 잡은 손을 떼며 잔뜩 움츠렸다.
숲의 백성이자 그에 자부심을 갖고 사는 모습과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었다.
물론 헬레나의 서슬 퍼런 기세가 두렵기는 할 테지만, 그 정도가 너무 심했다.
PTSD…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라도 앓는 듯 했다.
아무튼, 헬레나 덕에 겨우 분위기가 차분해졌다.
나는 그에 감사하듯 헬레나의 등을 가볍게 쓸어주었다.
“ 우선 안심해라. 오늘은 고문 대신 너희들이 바라 마지않던 물음을 던질 테니. ”
정보보다 울분을 풀기 위해 고문을 실행했다는 사실을 당사자에게 들어 알고 있었기에, 우선 엘프를 안심시켰다.
놈들은 고문을 하지 않는다 말하기 무섭게 기뻐하는 얼굴을 보였다. 당근의 약발이 아주 좋기는 한 모양이다.
나는 내 기준에서 가장 왼편에 붙어 있던 놈을 가리키며 오만한 말투를 구사했다.
여럿이 자기가 말하겠다고 입을 모으는 것도 여간 시끄러운 일이 아닐 테니까.
“ 여럿이 입을 모으면 시끄럽기만 할 테지. 그러니 네놈이 답해라. 알겠느냐? ”
“ 네, 네…! 뭐든, 뭐든지 하겠습니다! ”
절박함을 보니 간이든 쓸개든 뭐든 내 줄 기세다.
아마 엘프 마을의 기밀정보나 샛길을 물어도 친절히 알려주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 좋아. 그러면 첫 질문을 던지마. 네놈들을 보낸 배후가 누구냐? ”
“ 에… 엘프 마을, 아니… 엘프족입니다! ”
“ 네놈들이 엘프이니 엘프가 보냈으리라는 생각은 쉬이 할 수 있겠지. 그딴 걸 묻는 게 아님은 네놈이 잘 알 터. 명확하게 답해라. ”
“ 그, 그게…! 아! 엘프족, 엘프족 전체가 입을 모아 내린 결론입니다! ”
사람으로 따지면 왕국 전체가 입을 모아 작당모의를 했다는 뜻이다.
참 놀랍기도 하지.
어느 한 마을에서 보냈다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법 싶었으나 그러지도 못했다.
겉으로는 미간을 구기며 언짢은 척 했으나 속으로는 몹시 놀라는 중이었다.
“ 네놈들은 따로 여러 마을을 이루어 흩어져 산다고 들었다. 그런 놈들이 한데 모여 입을 모았다 그 말이지? ”
“ 그렇습니다! 오베론의 촌장 에일렌 오베론이 대회의를 소집해 이번 일을 하도록 주도했습니다! ”
오베론 마을은 유산이 있는 곳이자, 엘렌이 다녀온 마을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나와 연이 아예 없다고는 말 못할지 모르나, 서로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사이다.
“ 에일렌이라. 이름을 들어보니 계집 같다만… 맞느냐? ”
“ 마, 맞습니다! 에일렌 오베론은 여자입니다! ”
“ 그렇군. 그런데 그 에일렌이라는 계집이 왜 나를 잡으려 주도한 것이냐? 그 계집은 나를 건드렸다 어떤 일이 일어날 지도 예상 못할 만큼 멍청한가? ”
동기를 물음과 동시에 촌장을 한껏 깎아내리며 경멸했으나, 이들은 전혀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오히려 은연중에 에일렌을 원망하는 듯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놈들도 있었다.
그럴 수도 있지.
“ 우, 우선 그… 귀족님을 노린 것은 다름이 아니라, 거기 옆에 있는 다크엘프의 고삐를 쥐기 위함이었습니다. ”
“ 엘렌의…? 무엇 때문에? ”
“ 유산의 힘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
놈은 떨고 있음에도 제법 또렷하게, 또 간단하게 답했다.
유산을 얻은 엘렌을 휘두르고 싶었고, 온전한 힘으로서는 불가능하니 나를 이용하려는 생각이라.
제법 이치에 맞는 작전이기는 했다.
엘렌은 내게 집착하고, 사랑받기 위해 목숨까지 걸었다.
그 일을 엘프들이 알았다면 상대적으로 만만한 나를 건드려 볼 생각도 했을 것 같았다.
일이 잘 풀린다면 큰 이익을 얻을 수 있을 터였다.
그저, 결과가 이 모양이라 죄다 말아먹었을 뿐.
“ 고삐를 쥐려는 이유가 무엇이었느냐? 엘렌을 휘둘러 이익을 얻으려 했기 때문이냐? ”
“ 아, 아닙니다. 대회의는 유산을 얻은 다크엘프가 인간 남자에게 반한 채 곁을 지키면, 언젠가 인간의 탐욕에 따라 그 힘을 엘프에게 휘두를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습니다. ”
“ 호오. 그것 참 재미있는 생각이로군. 또 그럴 듯하게 들리기도 해. ”
자연재해를 마음대로 다룰 수 있다는 것은 참 위험한 일이다.
특히 이런 시대라면 깐프 놈들이 말한 대로 제 욕심에 따라 전쟁을 일으키고, 확실한 승리를 얻어 대륙을 착취하고 다닐 가능성도 있었다.
아마 누구나 한 번쯤은 그렇게 생각하겠지.
더구나 놈들은 내 성향이 어떤지, 또 내 목표가 무엇인지 모른다.
그러니 나중에 벌어질 지도 모를 위협에 미리미리 대비하고자 하는 생각 자체가 그리 틀리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당한 입장에서 보면 역겹고 머리에 오른 열이 터질 만큼 짜증나기 그지없을 뿐이지.
“ 그런데 말일세, 결국 이렇게 실패했지 않은가? 덕분에 나는 죽을 뻔 했으며, 지금도 요양 중일세. 움직일 정도는 되었다고 하나 아직 운동에 무리가 있어… 내 일과도 제대로 즐기질 못하는 신세지. ”
나는 엘렌의 허리에 팔을 두르며 최대한 싸늘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를 냈다.
덕분에 뺨이 붉게 달아오른 채 좋아하는 엘렌과, 그를 질투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헬레나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야말로 극과 극을 체험하는 것만 같았다.
꿀꺽.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엘프가 마른 침을 삼키며 물었다.
“ 일과라 하심은…? ”
“ 네놈들이 알 바 아니지. 그리고 신경 쓸 여유도 없지 않겠나? 내 몸이 괜찮아지는 대로 네놈들이 걱정하던 명분대로 나서볼까 하거든. 참 재미있겠어. ”
엘렌을 보란 듯이 끌어안은 것도 그렇고, 그 반응을 즐기며 입꼬리를 비트는 것도 나름대로 계산하고 지른 행동이다.
나는 이런 사람이고, 내 심기를 건드렸으니 그 대가를 거대한 피로 치르라는 협박이기도 했고.
엘프 놈도 그를 깨달았는지 몹시 당황해하며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 그, 그것은…! ”
“ 아. 더 이상의 정보는 필요 없네. 엘프의 마을은 엘렌이 알고 있고, 나는 그 근처로 대가를 받으러 갈 생각이거든. 네놈들이 두려워하는 엘렌의 힘으로 마을 전체를 물바다 아래에 가라앉히거나, 태풍으로 쓸어버리는 것도 좋겠어. ”
감히 한 나라의 대공을 건드렸으면 그 대가를 치러야지. 그런 의도를 담아 이야기하자 엘프들의 낯빛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대가를 목숨으로 치르게 할 생각은 없지만, 이렇게 함으로써 좀 더 두려움을 느끼라는 뜻이었다.
“ 제, 제발 마을만은 무사히…! ”
마음이 놓이자 욕심이 늘어난 것일까.
목숨만 살려 달라, 혹은 고문만 하지 말아달라던 엘프의 입에서 마을이라는 단어가 흘러나왔다.
그만큼 마을이 소중하거나, 혹은 여유가 생긴 덕이겠지.
“ 무사히? 지금 그 가증스러운 입에서 무사히, 라고 했는가? ”
나는 미약하지만 마나를 있는 대로 끌어올려 한껏 화가 났음을 드러냈다.
물론 이 또한 연기였지만, 제법 분위기가 험악하게 돌아가는 탓인지 제대로 겁에 질린 기색이 역력했다.
그것까진 좋았는데, 정작 내 옆에 앉아 있던 헬레나와 엘렌 또한 서슬 퍼런 시선을 거두고 겁먹은 얼굴을 했다.
덕분에 새삼 연기를 해도 괜찮지 않았을까 하는 망상이 잠깐 뇌리를 스쳤다.
“ 한 나라의 대공을 건드리고도 자비를 바라다니?! 참으로 가증스럽기 그지없구나!! ”
지금 당장 전쟁이라도 불사할 듯 고함을 내지르며 엘프를 위협하다, 천천히 호흡하며 화를 가라앉히는 척 했다.
“ 후우──. 생각해 보면, 네놈 따위가 부탁을 해도 그를 지키게 할 위치는 아니지. 한낱 척후에 불과한 놈이 무엇을 하겠느냐. ”
나는 슬슬 떡밥을 뿌려보자는 생각을 하며, 깐프 놈들에게 여지를 줄 생각으로 말했다.
“ 그러니 네놈들의 머리를 전부 끌고 오너라. 단 한 명도 예외 없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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