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화 〉 인성에는 인성으로 #2
* * *
빌어먹을 깐프놈들.
나는 빈혈로 인한 어지러움을 느끼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피를 많이 흘려 기절하기 직전 그놈들을 죽이지 말라 했으니 아직 숨은 붙어 있을 것이라 믿었다.
“ 어, 깼어? ”’
익숙하면서도 낯선, 평소에 듣던 목소리가 아니었다.
엘렌도, 헬레나도 아닌 올리비아의 목소리였다.
목소리에 담긴 태연한 기색과 낯빛은 둘째 치더라도, 왜 내 옆에 자리 잡고 앉아 있는 것일까.
“ 으음…? 왜 올리비아가 침실에서 앉아 있어요? ”
“ 어… 그야 땡땡이치는 중이라서. ”
“ 다른 분들이 알면 별로 좋아하진 않을 것 같은데… 아닌가요? 한창 바쁠 시기일 텐데. ”
“ 네 곁을 지켜달라는 엘렌의 부탁을 듣고 온 거야. 요즘 너를 떼놓고 다닐 만큼 바빠서 그런가봐. ”
올리비아는 늘 그렇듯 능글맞기 그지없는 투로 답했다.
당당하게 땡땡이친다 말하는 것이 어이없기는 해도 일이 그렇다 하니 넘어갈 수밖에.
근본을 거슬러 올라가면 내가 다친 것이 원인이니까.
“ 방금 바쁘다고 말씀하셨는데, 뭘 하느라 바쁜 건가요? ”
바쁜 일. 소규모라고는 하나 연에 없던 엘프들이 기습 했으니 한바탕 난리가 날 만도 했다.
그 난리의 뒤처리를 한다 생각하면 바쁜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갔지만, 올리비아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답이 예상과 너무 달랐다.
“ 고문하느라 바쁘대. 내 친구지만 정말 무섭더라. ”
“ 고문… 이라고요? ”
“ 배후를 캐내려고 고문을 하나본데, 며칠이 지나도 그렇다 할 만한 수확이 없다고 하더라. ”
정보를 캐내기 위한 고문이라. 제법 끔찍하기는 해도 이해는 갔다.
사실 썩 내키지 않는 것이 본심이나 남 말할 처지가 못 되기에, 입을 다물고 적당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 참. 며칠이나 지났죠? ”
“ 대충 기절하고 나서 나흘 정도 지났어. 아무튼 이제 멀쩡한 것 같으니, 소식을 전하는 대로 곧바로 돌아갈게. ”
올리비아는 더 이상 할 일이 없다는 듯 미련 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본래 저택에서 사는 사람이 아니었으니 곧장 돌아간다 해도 뭐라 할 사람도 없었다.
오히려 해야 할 일을 생각해보면 빨리 돌아가는 것이 옳았다.
그러니, 그 전에 뇌리를 스친 의문 하나를 풀고 넘어가고 싶었다.
“ 가시기 전에 묻고 싶은 게 하나 있는데, 괜찮을까요? ”
“ 묻고 싶은 거? 뭔데? ”
갑작스레 발목을 잡혀 반사적으로 짜증낼 만도 했건만, 올리비아는 그런 기색 하나 없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 엘프를 고문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올리비아도 엘프잖아요. 뭔가 꺼림칙하다거나 그런 느낌은 안 드시나요? ”
“ 꺼림직? 전혀. 인간도 같은 인간을 고문하잖아. 엘프도 그거랑 별 다를 바 없어. 엘프라고는 해도 동질감을 느끼는 것도 아니고. 더구나 다크엘프 입장에서 보면 오히려 잘 됐다 생각하기도 해. 나만 그런 걸지도 모르지만. ”
나는 피식 웃은 뒤 손을 흔들며 사라지는 올리비아의 등을 눈으로 쫓으며 생각해보고,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깜빡 잊고 있었지만 다크엘프는 본래 핍박받던 존재이며, 그 시작이 엘프임을 고려해보면 원수가 따로 없었으리라.
당장 피가 섞인 혈육도 큰 갈등이 빚어지면 등을 돌리고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된다.
이는 여느 세상, 또는 여느 시대를 막론하고 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해서 엘프를 동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나를 죽일 생각은 없었겠지만 결과적으로 죽을 지경까지 몰아간 놈들이니만큼 매운 맛을 보아도 좋다고 생각하고 있다.
다만, 저도 모르게 열이 오른 나머지 죽이지나 말기를 바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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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온, 괜찮아?! ”
“ 대공님…! ”
올리비아가 떠나고 얼마 안 되어, 헬레나와 엘렌이 호들갑을 떨며 침실로 들이닥쳤다.
쥐 죽은 듯 고요하던 분위기가 난잡하지 그지없어 또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평소라면 그냥 그러려니 싶어 넘어갔을지도 모르나, 아직 몸이 덜 회복되었다 호소하는 것만 같았다.
“ 괜찮아. 신경써줘서 고마워. ”
나는 그들에게 감사하며 내 옆자리를 손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왼편과 오른편, 각기 다른 쪽에서 뛰어들 듯 내 품에 안겨왔다.
다행히 몸을 완전히 던지지 않았던지라 내 몸이 완충재가 되는 일은 없었다.
“ 이렇게 수척해져서는… 어쩌면 좋아? ”
“ 밥 먹고 마저 쉬면 괜찮아 질 거야. 너무 걱정 마. ”
우선 자연스레 뺨에 손을 얹거나, 몸을 더듬거리며 안쓰러운 눈빛을 보이는 둘을 위로하느라 제법 시간을 들였다.
경상과 중상 사이의 상처를 입고 기절했으니 애가 탈만도 했다.
그렇게 위로를 건네며 분위기가 제법 가라앉았을 때 즈음, 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입에 담았다.
“ 올리비아에게 들었어. 고문을 하고 있다며? ”
“ 응. 하고 있어. 감히 건드리지 말아야 할 사람을 건드렸으니 그 대가를 치러야지. ”
“ 뭔가 알아낸 건 있어? ”
“ 아직 없어. 지온이 깨어날 때 까지 고통만 줬거든. 그 빌어먹을 놈들이 무얼 잘못했는지 깨닫게 해 주는 게 우선이라서. ”
하지만 너무 고통스러운 나머지 정보를 불고 싶어 안달이 난 상황이라고, 왼편에 누워 있던 엘렌이 슬그머니 헬레나를 거들었다.
그녀 또한 적극적으로 고문에 참여하는 중이었기에 동질감이라도 생긴 모양이다.
빛이 없는 눈동자에, 고문으로 생긴 동질감이라.
참 끔찍하기는 하다.
“ 그렇지만 이제 지온이 일어났으니… 슬슬 정보를 캐내도 괜찮을지도 모르겠어. 아니면 그 전에 지온도 고문 한 번 해 볼래? ”
“ 어? 아냐. 나는 괜찮아. 그보다 엘프가 쓸데없는 짓을 벌이기 전에 움직여야지. ”
나는 좀 더 쉬는 것이 좋지 않겠냐는 만류를 정중히 사양하며 사람을 불렀다.
오늘은 시간이 늦어 사람을 부리기도 미안했으니, 내일 아침이 되면 엘프들을 끌고 와 달라는 명령을 했다.
부탁이라고는 해도 받아들이는 입장에서 보면 그저 부드러운 느낌의 명령일 테니까.
“ 참. 저녁은 부드러운 것으로 준비해 줘요. ”
나흘 내리 굶었으니 갑작스레 호화로운 음식을 먹으면 위가 놀란다.
그러니 하인이 떠나기 전, 수프나 리조또 등 부드러운 음식을 차리도록 했다.
배가 힘차게 꼬르륵 소리를 내는 꼴을 보면 기름진 것이라도 가볍게 먹을 법 했지만, 탈이 나면 나만 손해였다.
저녁을 먹고, 한시름 덜어놓은 듯 편안한 기색을 보이는 둘과 이야기를 나누다 잠에 들었다.
그 전에 아직 상처가 완전히 아물지 않아 씻을 수는 없어 몸을 닦아야 했는데, 두 여자가 솔선하여 참 정성스럽게 닦아주었다.
그에 내 몸을 돌보던 하인은 깜빡 놀라 제 할 일을 공작님께 미룰 수 없다며 무척 당황했으나, 생글생글 웃으며 압박을 가한 탓에 어쩔 수 없이 물러나고야 말았다.
귀찮은 일을 시키지 않게 되어 다행이었다.
단지 그 과정이 조금 찝찝했을 뿐.
“ 살살……. ”
잠을 너무 오래 잔 탓일까. 새벽녘이 되자 절로 눈을 뜨고 말았다.
날개라도 달린 듯 너무 가벼운 눈꺼풀이 어색했지만 그것도 잠시.
양옆에서 잠든 두 여자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레 일어나, 발코니로 걸음을 옮겼다.
슬슬 싸늘해지기 시작한 공기가 코로 스며들고, 피부를 훑고 지났다.
해처럼 눈부신 달빛이 내리쬐었어도 뜨겁지는 않았다.
나는 옷을 차분히 풀어헤친 뒤 붕대마저 조심스레 풀어헤쳤다.
어차피 아침이 되면 약초를 바르고 새 것으로 갈 테니, 지금 벗는다 해서 큰 지장은 없을 것 같았다.
암살자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 음……. ”
피부를 매만져보니 매끈함과는 다른 울퉁불퉁한 감촉이 느껴졌다.아물기 시작한 상처자국이었다.
고작 열여섯 몸에 옅은 화상자국과 상처가 제법 많은 몸뚱이가 눈에 들어왔다.
참 어처구니가 없을 지경이다.
분명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부족함 없이 살았고, 보통 사람에 비해 위험과 거리가 먼 삶을 살았을 텐데도 이랬다.
그것은 심히 위험한 고비를 몇 번 겪었다는 뜻이었으나, 우습게도 그를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조금 싹텄다.
내가 이만큼 고비를 겪고도 살아있다.좀 대단한 것 같지 않느냐.
마치 아이가 제 상처를 자랑하는 것만 같은 감정이 우스웠다.
그것이 부질없을 깨닫고 금방 녹아 없어진 것이 참 다행이었다.
“ 사람을 부를까? ”
상처가 벌어지지 않도록 천천히 몸을 풀던 중, 헬레나의 목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언제라도 남자를 유혹할 수 있도록 얇은 잠옷을 걸친 채였다.
보는 사람이 없어 망정이지, 참 뭐라 표현하기가 묘한 모습이었다.
그나저나, 사람이라.
아마도 내가 깨어났으니 지금 당장이라도 엘프 놈들을 부르라는 뜻이겠지.
그에 나는 고개를 저으며, 의자 등받이에 걸쳐놓았던 옷을 주섬주섬 주워 입었다.
어지간히 급한 일도 아닌데 굳이 이 새벽부터 피곤한 하인들을 움직이게 하고 싶지 않았다.
“ 그러지 마. 급한 일이 아니니까. ”
“ 내 입장에서는 급한데도…? ”
헬레나는 항상 내가 엮이는 사고에 극단적인 모습을 보인다.
처음 적응하기 전까지는 무섭지는 않아도 꺼림칙했는데, 요즘 들어서는 귀엽게 보이기만 했다.
사람의 적응력이라는 것이 이래서 무섭다고 새삼 느꼈다.
“ 잠시 얘기 좀 할까? ”
나는 등 뒤에 서있던 헬레나에게 다가가 망설임 없이 허리를 끌어안았다.
여전히 한 팔에 들어올 만큼 잘록하면서도 탄탄한 허리였다.
헬레나는 내 품에 안기자마자 얼굴을 붉히며 몽롱한 눈빛을 띠었다.
불과 몇 초 전 까지 초점 없는 눈동자를 보였던 것이 맞나 싶을 만큼 급격한 감정 변화였다.
사정 모르는 사람이 보면 조울증이라도 걸렸나 착각할 것 같았다.
“ 하아──. ”
먼저 의자에 앉은 뒤 허벅지에 올라앉도록 하자, 헬레나가 기다렸다는 듯 내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뜨거운 숨을 토해냈다.
상처를 입었다고는 하나 이 정도는 괜찮았다.
숨결이 가슴을 간질이는 감촉이나, 허벅지에서 느껴지는 부드럽고 탄탄한 무게감을 즐길 수 있어 참 좋기도 했고.
“ 헬레나. 그렇게 엘프가 미워? ”
“ 미워. ”
대화의 운을 뗄 겸 부드러운 투로 묻자, 헬레나가 고개를 치켜들며 단호하게 답했다.
날 선 기세가 많이 죽은 덕에 제법 말투가 부드럽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 나도 썩 좋지는 않아. 하지만 헬레나의 손에 묻히지 않아도 될 피가 흥건히 묻는 게 더 싫어. ”
“ 지온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지만… 나는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는걸. ”
“ 물론 나도 그래. 하지만 피를 묻히는 것보다 다른 방향으로 죗값을 치르게 하고 싶은데… 안 될까? ”
나는 헬레나의 허리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며 탄력 있는 일자복근이 선명할 배에 손을 얹었다.
그 상태로 마사지를 하듯 살살 문지르며, 은근슬쩍 배꼽 아랫부분을 살짝 누르기도 했다.
“ 아! 으으응……. ”
늘 안쪽에서 두드린 탓에 저도 모르게 개발된 곳을 자극하자 신음을 흘렸다.
사람을 설득하는 데 있어 영 바람직한 방법은 아니지만, 이것만큼 빠르고 효과적인 수단도 잘 없었다.
사람은 저도 모르는 사이 편한 방향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려 한다는 말을 들어본 것 같은데, 정말 그런 것 같았다.
제법 즐겁게 느껴진다는 점이 묘하게 찝찝했지만…….
“ 부탁해. 헬레나. ”
“ 으으읏…! ”
귀에 입술을 가까이 가져다대며 속삭이자. 헬레네가 기다렸다는 듯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물론 몸을 떤 사람은 헬레나로, 가쁜 숨을 내쉬며 나른하다는 듯 내게 몸을 기댔다.
허벅지가 묘하게 뜨끈해지기도 했으니 불 보듯 뻔한 일을 겪는 중이겠지.
“ 우선 엘프를 심문하자. 그 다음 구체적인 방안을 정하고 싶어. 괜찮지? ”
“ 갠… 차나……. ”
헬레나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혀 짧은 소리로 답했다.
두려움과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소드마스터가 이렇게 쉽다는 것을 사람들이 안다면 과연 무슨 반응을 보일까?
그런 궁금증이 한 순간 뇌리를 스쳤지만, 사실 그 답을 알고 싶지는 않았다.
나도 사람인지라 몸에 좋고 보기 좋은 것은 되도록 홀로 독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 고마워. 사랑해, 헬레나. ”
나는 여자를 다루는 데 능숙한 놈처럼 속삭이며, 헬레나의 부드러운 뺨에 입을 맞췄다.
좀 천박하기는 하지만, 매일 물고 빨고 하다 보니 스킨십에 망설임이 없어진 결과였다.
아마 죽기 전의 내가 이 꼴을 본다면 이딴 건 무협이 아니라고 외쳤을 것 같다.
“ 나도, 나도 사랑해애…! ”
다만 약발이 너무 좋았던 탓일까.
꼭 달라붙어 온 몸을 부비는 헬레나를 진정시키느라 애를 써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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