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화 〉 인성에는 인성으로 #1
* * *
“ 으음……. ”
농지가 펼치진 지구와 공작령에서 발달한 지역의 경계쯤에서, 엘렌은 발을 동동 구르며 초조한 기색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 장소에서 만나기로 한 지온을 기다리고 있으나 아직 나타날 기미가 없었다.
약속을 지키지 않는 분이 아닐 텐데,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엘렌이 초조해하며 어떤 일이라도 생긴 것이 아닐까 걱정하는 중, 몹시 거슬리는 느낌을 받고 눈을 날카롭게 치떴다.
정령의 냄새가 난다.
엘렌은 가장 꼭대기이자 자연현상의 부분을 반영하는 정령과 계약한 후, 그에 대해 더욱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었다.
사람의 기척이나 위험을 감지하는 육감 자체도 늘었지만 정령을 감지하는 범위는 그보다 훨씬 넓었다.
그녀는 바람을 타고 흐르는 묘한 느낌에 털이 쭈뼛 서는 것을 느끼며 앞을 향해 달렸다.
잠자코 기다리기만 하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불안한 직감이 열심히 등을 떠밀었다.
마치 지면 위로 미끄러지는 것만 같다.
어느새 엘렌의 발은 땅과 살짝 거리를 두고 있어, 정말로 미끄러지는 것처럼 보였다.
바람을 타고 낮게 날고 있어 그런 착각을 느끼게 하는 모습이었다.
“ 대, 대공님…! ”
귀를 시끄럽게 하는 정령의 공격들도, 한 남자가 짊어지고 있던 걸레짝 같은 시체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지금 엘렌의 눈에는 군데군데 찢어지고 데여 만신창이가 된 한 남자만이 비치고 있을 뿐이었다.
그 남자, 지온은 엘렌을 마주하기 무섭게 피를 한 움큼 토해내며 무릎을 꿇었다.
“ 쿨럭! 겨우, 살겠… 네. ”
“ 이, 이를 어떻게 하지?! 우선 다, 다… 당장 저택으로 가서…! ”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약속했던 곳보다 더 앞쪽에서 엘렌을 만날 수 있었다.
지온은 그 행운에 감사하며, 후들거리는 팔로 짊어지던 시체를 힘겹게 내동댕이쳤다.
엘프의 공격으로 인해 살점 곳곳이 깎인 모습이 잔혹하기 그지없는 고깃덩이였다.
엘렌은 황급히 지온의 곁으로 다가와 무릎을 꿇고 그를 부축하기 위해 양 팔을 뻗었다.
양 팔로 안아들어 옮기려는 생각이었다.
이대로 도망치면 살 수는 있다.
하지만 그랬다간 얼마 없는 시체만 남길 뿐 심문의 기회조차 날아가 버릴 것이 분명했다.
피를 많이 흘려 의식이 몽롱한 와중에도 그 생각이 지온의 뇌리를 스쳤다.
그렇기에 자신을 끌어안으며 당황해하는 엘렌의 손에 피로 얼룩진 손을 얹으며, 차분히 입을 열었다.
“ 괜찮… 아. 죽지는 않을 거야. 그보다… 숲에 있는 엘프부터 잡아 줘. ”
“ 하지만…! ”
“ 부탁… 할게. 절대 안 죽을 테니까, 우선 잡아서… 죽이지는 말고……. ”
제 할 말을 전부 끝내지도 못한 채 바닥 위로 쓰러지는 지온을 보며, 엘렌의 눈빛이 스산한 빛을 띠었다.
자기 목숨보다 소중한 주인이 명령을 내린 이상 반드시 따를 생각이었다.
지온의 몸은 너덜너덜했지만 의외로 호흡이 고르고, 그의 몸에 얼룩진 피들도 온전히 그의 것만은 아니다.
그가 방패 대용으로 사용했을 엘프의 시체에서 쏟아져 나온 피가 훨씬 더 많음을 경험으로 알 수 있었다.
제법 심하기는 하나 어떻게든 중상을 피한 눈치였다.
“ …네. 잡아서, 꼭 대공님 앞에 대령하겠습니다. ”
위협이 있을 것을 알았고 다 합의한 사항이라고는 하나, 막상 이 참상을 마주하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엘렌은 이 와중에도 눈치 없이 날아오는 마법의 무리를 슥 쳐다보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놈들이나직접 죽이지 말라는 지온의 말이 우선이었다.
“ 좆같은 새끼들. 안 죽고 넘어가는 걸 감사하게 여겨야 될 거다. ”
엘렌은 분노를 억지로 찍어 누르는 듯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며 손을 옆으로 뻗었다.
마나를 끌어올려 정령을 부르고, 불려 온 정령은 재해를 일으켰다.
하늘마저 찌를 법한 커다란 덩치로 감싸 안은 모든 것을 뿌리 뽑고,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거칠다 못해 미쳐버렸다는 말이 어울리는 바람.
본래 위를 향해 돌고 돌았어야 할 거대한 폭풍이 위가 아닌 옆을 향해 아가리를 쩍 벌렸다.
“ 이게 무슨…?! 아아악!! ”
소나기 같은 포탄세례에나 들려 올 법한 거대한 굉음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숲의 나무들이 우지끈 소리를 내며 도미노처럼 무너져 내렸고, 멀찍이 떨어져 있던 나무들은 제발 살려 달라 애원하는 사람처럼 정신없이 가지를 흔들었다.
은근슬쩍 섞인 엘프들의 비명소리는 덤이었다.
아비규환.
이 단어만큼 현 상황을 잘 표현하는 단어는 아마 없으리라.
하나같이 기괴하게 꺾이거나 허리부터 찢어져 날아간 나무들,
피를 흘리며 그 사이사이에 깔린 채 신음하는 엘프들.
하늘로 날리는 짙은 흙먼지 구름까지.
그 단 한 순간에 만들어낸 당사자, 엘렌은 그저 싸늘한 눈빛으로 주인을 해친 들개들을 보고 있었다.
너무도 화가 나서 도리여 차갑게 가라앉은 상태였다.
◎◎◎
“ …그래? 지온이 죽이지 말라고 그랬단 말이지? ”
까드득, 하고 이빨 가는 섬뜩한 소리가 크라우저 공작의 침실에서 울렸다.
손아귀에 피가 나도록 검을 꽉 쥔 채 이를 갈던 장본인, 헬레나는 미쳐 날뛰려다 말고 호흡을 가라앉히며 물었다.
“ 네. 대공님께서 쓰러지시기 직전까지 부탁하신 말씀이었어요. ”
“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당장 머리통에 칼날을 꽂아 찢어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
헬레나가 뜨거운 숨을 토해내며, 몹시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미간을 구겼다.
깊은 잠에 빠진 지온이 바로 옆에 있기에 소란을 피울 수도 없었다.
고로 한숨을 푹푹 내쉬는 것으로 열을 식힐 수밖에 없었다.
“ 내 고집이 지온의 말보다 앞설 수는 없겠지. 어쨌든, 그 빌어먹을 새끼들은 지금 어디에 있어? ”
“ 서쪽 병영에 있는 감옥에 가둬뒀습니다. ”
“ 서쪽에? 아무리 중상이라곤 해도 엘프잖아. 보통 병사들로 지킬 수는 없을 텐데? ”
“ 염려하실 일은 벌어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
엘렌은 헬레나가 우려한 것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자신 있게 답했다.
사용할 일이 없기에 스스로도 잘 몰랐던 기술 때문이었다.
헬레나는 그 낌새를 읽고 차분하게 물었다.
“ 무슨 짓을 했구나. ”
“ 네. 그 대역죄인들이 정령을 부를 수 없도록 조치했습니다. 강제로 교감을 끊어서요. ”
“ 교감이 정령을 불러내기 위한 상한선의 척도 같은 거라고 했던가? 그걸 끊었다는 말은……. ”
“ 무슨 짓을 해도 정령을 부를 수 없다는 뜻이죠. ”
정령의 정점과 계약했다는 뜻은, 곧 그 권위를 이용할 수 있다는 뜻도 되었다.
엘렌의 뜻은 정령계가 아닌 현실에서 정점과 같은 권위와 힘을 가지게 되며, 하위 정령은 그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를 깨달은 것이 불과 몇 시간 전이기는 하지만, 앞으로도 유용하게 쓸 수 있을 기술이라고 엘렌이 말했다.
“ 좋아. 크게 문제없겠네. 몸은 망가져서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할 테고, 정령을 다루어 발악을 하지도 못할 테니까. ”
“ 네. 그러니 대공의 몸이 낫고 일어나실 때 까지 심문을 하면 어떨까요? ”
“ 심문…? ”
헬레나가 말꼬리를 흘리며 고개를 잠시 갸웃거리다, 곧 엘렌의 눈을 마주보며 손뼉을 탁 쳤다.
사람이 깜짝 놀랄 만큼 크지는 않았으나 제법 경쾌한 소리였다.
“ 그렇지. 지온의 말은 죽이지 말고 살려두라는 것이지, 귀빈마냥 가만히 놔두라는 말이 아니었잖아. ”
“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놈들이 감히 누구를 건드리려 했는지 똑똑히 깨닫게 해 주어야 해요. ”
보통 심문이라 함은 정보를 캐내기 위해, 혹은 죄를 시인하도록 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루어진다.
하지만 두 여자는 곤히 잠들어 있는 지온을 사이에 둔 채 그들을 고통스럽게 할 생각만을 하고 있었다.
정보보다 고통. 제 분수를 깨닫게 하는 것으로도 모자라며, 죽여 달라고 애원하더라도 고통을 준다.
그렇게 해야만 가슴에 쌓인 울분이 조금이나마 해소될 것 같다며 의견을 모았다.
“ 놈들의 동기는 대충 짐작이 가지만… 그래도 확실한 답을 들어야겠지. 또 배후도 알아내야 할 테고. ”
“ 그렇지요. 이 모든 것이 일을 확실하고 깔끔히 매듭짓기 위함이니까요. ”
두 여자는 정보 수집을 핑계 삼아 고문할 생각에 눈을 빛내며,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저택을 나섰다.
◎◎◎
“ 끄, 끄으으으…!! ”
과거, 누군가 말했었다.
속 시원하도록 상대를 패고 싶다면 끝없이 힐을 걸고 치라고.
치고 치료하고, 치고 치료하고, 또 치고 치료한다.
그렇게 하면 상대가 죽을 걱정 없이 신명나도록 두들겨 팰 수 있으며, 끝없이 이어지는 폭력에 대한 공포를 뼛속 깊이 심을 수도 있었다.
헬레나는 그를 실현하려는 듯 다크엘프와 함께 살아가는 이브에게 부탁해 회복마법을 위한 아이템을 만들도록 부탁했다.
아무리 복수에 미쳐 있다고는 하나 고문 현장에 들일 수 없다는 상식적인 판단 때문이었다.
시간이 지나며 열이 식은 덕일까.
지온이 일어났다면 그리 말할 지도 모르나, 유감스럽게도 열이 식은 것은 아니었다.
어느 정도 이성을 찾기는 했으나 고문의 현장을 온전히 즐기기 위함이라는 광기 섞인 이유가 더 컸다.
“ 불거야? 아니, 말하지 마. 제발 말하지 마. ”
“ 아, 아닙니다! 말하겠습니다! 말할 테니까 제발… 끄으아아아!! ”
의자와 뜨끈한 불이 피어오르는 난로, 그리고 등 뒤로 감옥이 있는 고문실.
헬레나는 그곳에서 스스로 자초지종을 토해내려는 엘프의 입을 억지로 틀어막았다.
불에 달군 칼을 어깨에 쑤셔 박음으로써.
“ 세 번 말하는데, 아직은 말하지 마. 아직 한참 부족하니까. ”
엘렌은 옆방에서 바람을 통해 고문 대상의 호흡을 막는 고문을 하고 있었다.
물론 헬레나처럼 바람을 휘감은 화살을 쑤셔 넣을 때도 종종 있었다.
“ 지온이 너희들의 빌어 처먹을 공격을 받고 쓰러진 지 이틀이야. 이틀이라고. ”
“ 끄.으으으……. ”
“ 몸 상태가 점점 좋아지고는 있지만, 아직 완전히 회복하려면 좀 더 시간이 필요해. 유감스럽게도 우리 영지의 마법사는 치유 마법에 문외한이라……. ”
“ 으아아아악!! ”
깊게 찔러 넣은 날을 꾹꾹 눌러 돌리기 무섭게 거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너무도 고통스러워 목을 긁는 소리가 생생하게 들려 올 정도였고, 비명을 하도 많이 질러댄 탓에 점점 쉰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 아파? 그럼 더 아파. 감히 내 지온을 건드리고도 목이 달아나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다행으로 여기고. ”
“ 제, 제바… 제발 그마… 끄아아아아!! ”
헬레나는 귀를 울리는 절규에도 아랑곳 않고 검을 한 바퀴 돌렸다.
칼날이 어깨 안 속살을 자르고 훑는 촉감을 생생히 느꼈음에도 그랬다.
무저갱 같은 눈빛도, 덤덤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도.
파삭, 하고 숯 부서지는 소리가 퍼지고, 고통에서 해방된 엘프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헬레나가 난로에 칼을 꽃아 넣었기에 그 동안은 쉴 수 있으리라. 그런 생각이 엘프의 뇌리를 스쳤다.
더해, 추가적인 고문을 할 생각이 없다는 듯 약사를 부르기도 했다.
엘프 입장에서는 참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 최대한 치료해 주세요. 당장 내일까지 깨끗이 낫게 하라는 터무니없는 명령도, 그로 인한 불이익도 없을 겁니다. ”
“ 아, 예에……. ”
굳게 닫힌 문을 열고 온 약사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보따리를 손에 쥔 채 의자에 축 늘어진 엘프의 곁으로 다가갔다.
헬레나는 그를 곁눈질로 바라보다, 곧 흥미가 떨어진 듯 고문실을 나섰다.
“ 어떠셨어요? ”
기다렸던 것일까.
헬레나는 방에서 나오기 무섭게 말을 걸어오는 목소리의 주인, 엘렌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한숨 쉬었다.
“ 부족해. 당장 목을 찢어버리듯 잘라버리고 싶어. ”
“ 저도 그래요. 하지만 이렇게라도 대공님이 당하신 고통을 돌려줄 수 있으니, 조금은 화가 풀리는 것 같기도 해요. ”
조금씩 화를 푼다.
나도 그렇다고, 헬레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을 표했다.
“ 그나저나, 호위가 이렇게 자주 자리를 비워도 괜찮아? 네 울분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곁을 지키는 게 좋을 것 같은데. ”
“ 어머. 대공님과 둘이서 붙어 있는 걸 탐탁지 않게 여기시지 않으셨어요? ”
“ 지온의 안전이 걸린 사항이니까 예외야. ”
“ 걱정하지 마세요. 올리비아에게 잠시 자리를 지켜달라고 부탁했으니까요. ”
한창 제 일에 바쁜 동료를 끌어들이는 것이 미안했으나, 정작 그 장본인이 호위를 명분으로 땡땡이를 칠 수 있다며 몹시 기뻐했다.
엘렌은 그를 통해 인간이나 엘프나 비슷하다고 생각하며 실소를 머금었다.
“ 좋아. 지온이 안전하다면 불만 없어. 제법 꼼꼼하게 일을 처리했네. ”
“ 감사합니다. ”
헬레나는 고개 숙여 인사는 엘렌의 어깨에 부드럽게 손을 얹으며, 눈빛으로 이 건물의 대문을 가리켰다.
“ 그럼, 오늘은 이쯤 하고 돌아가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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