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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의 기둥서방이 되었다-89화 (89/192)

〈 89화 〉 깐프의 습격 #5

* * *

공기가 떨리기 시작하자 온몸의 털이 쭈뼛 서는 것만 같았다.

분명 신경 거슬리는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 또 몇 명인지 알 수는 없었다.

헬레나나 엘렌이라면 모를까 나로서는 감도 오지 않았다.

다만나를 노리고 왔다는 것 하나만큼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대단한 수준은 아니더라도 나 또한 마나를 이용할 수 있었기에.

“ 여러분도 영지의 중요한 재산이니 부디 몸 조심 하세요.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

나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대화를 끝낸 뒤, 곧장 등을 돌려 저택으로 향했다.

제법 외진 곳이라 저들이 덮치기에도 좋았고, 무엇보다 영지 민들이 휘말릴 여지를 조금이라도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사람이 아예 없지는 않았으니까.

논밭에서 멀어지고, 사람에게서도 멀어져 홀로 거닐었다.

모습이 보이지 않아도 나를 향하는 시선이 점점 날카로워짐을 느낄 수 있었다.

“ 음……. ”

한 번 붙어볼까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그래서는 안 되었다.

곧 엘렌과 만날 때가 다가오고 있어 그쪽으로 향하는 것이 훨씬 안전했다.

내가 떡밥이라.

아마 저 간자들은 처음부터 나를 노리고 온 것이 분명했고, 그 이유도 대충 짐작이 갔다.

홀로 다수를 너끈히 상대할 만한 괴물들을 노리는 것보단 내가 훨씬 편해 보였겠지.

예전 같았으면 내가 만만하냐고 화를 낼 법도 같았는데, 그저 내심 그럴 수 있다고 순순히 납득하고 있었다.

아마 살다보니 보통 사람이 가질 만한 오기도 많이 죽은 것이 아닐까 싶다.

“ 후우. ”

짧게 한숨을 내쉰 직후, 나는 헬레나와 겨룰 때처럼 단숨에 마나를 끌어올렸다.

그러자 바늘로 찔리는 듯한 따끔한 느낌이 피부를 자극했다.

갑자기 이상한 행동을 보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아마 적잖게 당황스럽기도 할 테지.

나는 그 틈을 노리듯 땅이 움푹 들어갈 만큼 다리에 힘을 꽉 주어, 그대로 저택 방향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 눈치챘나?! 잡아! ”

희미하지만 다급한 목소리로 외치는 소리가 분명히 들렸다.

공기 뿐 아니라 농지 너머에 있던 나무들도 가지를 흔들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가지를 밟고 거리를 좁혀오는 수수께끼의 범인들 때문임이 분명했다.

그들은 대각선으로, 나는 직선으로 내달렸다.

평행을 이루어 달리면 놓치지는 않을지언정 잡을 수는 없었기에 이러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앞을 달리는 와중에도 수시로 뒤를 살폈기에 알 수 있었다.

추격자들이 쫓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고, 메아리 같던 외침도 제법 또렷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그만큼 가까워졌다는 뜻이었다.

“ 쏴! ”

쏴.

당연하지만 보통 먼 거리를 공격할 때 쓰는 구호다.

이 세계에서 원거리 공격은 활과 마법 혹은 투석기를 포함한 공성무기 뿐이나, 이 경우 공성무기는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추격전에 공성무기를 끌고 오는 미친놈은 없을 테고, 설령 들고 왔다 하더라도 민첩함이 몹시 떨어지니 비효율적이었다.

즉, 화살이 바람을 휘감으며 날아오는 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 엘프구나…! ”

나는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정확히 내 발꿈치를 향해 날아오는 화살을 피하려 땅을 한 바퀴 굴렀다.

다행히 턱 끝까지 뒤쫓아 왔던 화살은 땅에 박혔지만 그 진동이 심상치가 않았다.

단순한 화살이 아니었다.

바람을 휘감아 관통하는 힘과 속도를 올린 저격은 엘렌과 그 용병들이, 더 나아가 엘프들이 애용하는 방식이었다.

살이 떨릴 만큼 위협적이기는 하나그렇기 때문에 색채가 두드러져 정체를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기라도 한 듯 한층 더 격해진 화살비를 우수수 쏟아내기 시작했다.

벼룩마냥 나무와 나무 사이를 뛰며 정확히 쏘는 것도 놀라울 지경인데, 화살 하나하나가 정확히 나를 노리고 있어 정말 소름끼쳤다.

시발!

나는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욕을 속으로 삼키며, 어떻게든 화살을 피해 내달렸다.

바닥을 구른 탓에 흙먼지가 잔뜩 묻었어도 화살비를 피하고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화살에 다리라도 뚫리는 순간 끝이라고 봐야했다.

바닥을 구르고, 때로는 바닥을 딛고 뛰어올라 공중을 돌기도 했다.

달리는 속도가 그들의 상상보다 빨랐던 탓인지 저격에도 난항을 겪는 눈치였다.

어느 새 후방에서 모습을 드러내 내달리는 꼴을 보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마 나무를 오가는 것만으로는 제대로 속도를 낼 수 없었기에 내린 조치 같았다.

뾰족한 귀에 하나같이 아름다운 용모.

손에 쥔 화살과 정령마법이 발산하는 특유의 흐름까지.

생긴 것은 아름답지만 오만함이 은연중에 배어나오는 종족엘프가 분명했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 봐도 열이면 열, 그들을 엘프라 말하겠지.

다크엘프가 아닌 보통 엘프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지만 그것에 놀라워 할 틈도 없이 달렸다.

그들은 기사처럼 마나를 이용해 육체를 강화하지는 못하는 듯 했으나 정령의 은총을 받아 강한 힘을 자랑했다.

엘프는 바람을 휘감으며 달렸으나 다행히 엘렌보다 빠르지도, 하늘을 나는 기상천외한 짓도 하지 못했다.

단순하게 보면 달리기가 빨라졌을 뿐이었다.

그러니 거리를 크게 벌리지는 못할지라도 당장 따라잡힐 일은 없어 보였다.

문제는 이놈들이 달리기만 하지 않는다는 점이며, 숲 쪽 방향에서 이어지는 추격도 여전했다.

“ 쯧. ”

점점 숨통을 조이는 상황이 영 달갑지 않았기에, 나는 혀를 차며 품속에 있던 더크를 꺼내 들었다.

이렇게까지 나를 잡으려 하는 걸 보면 어지간히 큰일을 노리는 것이 분명했다.

그렇기에 더욱 잡혀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상황이 바뀌었기에 한 판 붙게 되면 승산이 없으리라는 생각도 바꿀 수밖에 없었다.

도박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판단했다.

그 도박이 설령 누군가의 목숨을 끊기 위한 것이라 하더라도.

“ 커헉?! ”

쐐액. 공기를 찢고 곧게 날아간 더크가 엘프의 목젖을 정확히 꿰뚫었다.

그들이 바람을 휘감고 있다고는 하나 오러 블레이드를 막아낼 수 있을 만큼 농도 짙은 것은 아니었나보다.

나로서는 참 다행이었다.

“ 근접전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나보군! 다들 날아오는 암기를 조심해라! ”

뒤쪽의 엘프 둘이 쓰러지기 무섭게 모두가 외쳤다.

아직 남아있는 엘프가 정확히 몇인지는 알 수 없지만 후방의 압박이 훨씬 덜해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다섯이 셋으로 줄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은 동료의 시체도 거둘 생각이 없다는 듯 나를 쫓기에 바빴다.

도중에 빠져나가는 기척도 없었다.

시체를 수습하기 위해 한두 명 정도는 빠질 것이라 생각했는데, 완전히 빗나간 생각이었다.

셋, 셋이라.

나는 여전히 뒤꽁무니를 쫓아오는 엘프를 보며 고민했다.

정령마법을 다루고 활을 다루는 데 능숙한 이들이기는 하나, 그렇기에 칼이나 주먹을 섞는 근접전에는 약할 것만 같았다.

큰 오산일 수도 있지만 아직 갈 길이 멀었다.

뛰어서 10분은 더 가야만 했다.

평소라면 모를까, 이런 위급상황에서 10분은 평시의 1시간, 또는 그 이상에 견줄 수 있을 만큼 큰 시간이다.

지금까지는 잘 피하고 있지만 이 행운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장담할 수는 없었다.

화살뿐 아니라 불과 돌덩어리, 물로 이루어진 포탄이 날아올 때 마다 그 생각은 더욱 강해졌다.

엘렌의 것보다 크기가 작다고는 하나 제법 촘촘한 탄막을 이루는 탓에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었다.

“ 윽! ”

작은 불덩이가 발치에서 폭발하는 순간 어쩔 수 없이 휘청거리며 균형을 잃었다.

억지로 자세를 수습하려다 발목이 삐면 안 될 것 같아 흐름을 탄 결과였다.

덕분에 발목은 지켰지만 그 대가가 제법 컸다.

후방에서 따라붙던 놈들이 이때다 싶어 더욱 속도를 높였고, 숲 쪽에서 화살을 쏘던 무리도 앞길을 막아버리려는 듯 마법을 퍼붓기 시작했다.

사실상 포위된 셈이었다.

앞에서는 마법이, 뒤에서는 화살을 시위에 겨누고 달려오는 엘프.

옛날 말로 표현하자면 진퇴양난이었다.

“ 후우……. ”

지금까지 도망친 것만 해도 잘 한 거지.

여기서 괜히 발악한답시고 날뛰다 실수로 죽기라도 하면 더 위험한 상황에 놓인다.

그러니 항복해서 가능성을 열어놓자.

보통 위급하고 궁지에 몰려 손도 쓰기 어려울 법한 상황에서 그리 생각하기 쉽겠지만, 아직 포기할 때가 아니었다.

이렇게 된 이상 잔혹하더라도 나부터 살고 보자는, 사람 특유의 이기적인 본능과 냉정함이 고개를 쳐들었다.

나는 숫돌에 칼날을 갈 듯 눈을 가늘게 뜨며, 탄막이 가로막는 앞이 아닌 추격조가 다가오는 방향으로 몸을 던졌다.

“ 저게 무슨…! 헉! ”

시위를 떠난 활 쪽으로 내달리는 것은 미친 짓이다.

대놓고 나를 쏘아 죽여 달라는 것과 같았으니 자살이라도 하려는가 싶었겠지.

그러나 내 행동은 자살과는 거리가 멀었고, 하물며 포기와는 더더욱 연이 없었다.

화살이 날아오는 궤도를 예측해 쳐내는 짓은 불가능해도 최대한 몸을 바깥으로 뺄 수는 있었다.

그 과정에서 팔과 다리의 바깥부분이 거친 바람과 화살촉에 찢어져 격통이 엄습했으나 견딜 만 했다.

독을 마실 때 느꼈던 내장이 뒤틀리는 고통보다 훨씬 덜했고, 관절이나 근육이 완전히 꿰뚫린 것도 아니라 움직일 수도 있었다.

엘프들은 그에 당황하면서도 급히 다음 화살을 준비하려 했으나, 이번에는 내가 한 발 빨랐다.

순수한 마법만을 이용하여 견제할 틈도 없이, 있는 힘껏 달려가 놈들 중 하나의 목에 칼을 꽂아 넣었기에.

“ 끄, 끄르르…! ”

내 기준에서 가장 왼쪽에 있던 놈은 목덜미에 칼이 꽂히자 거품처럼 끓는 피를 토해냈다.

날과 피의 거품이 기도를 가로막았는지 말 한마디 제대로 꺼내지 못했다.

나는 그대로 숨이 끊어진 것을 확인하며 남은 두 놈을 노려봤다.

몹시 당황하여 주춤대기를 바랐으나 대처가 몹시 빨랐다.

경악이 고스란히 배어나오는 표정을 한 채, 곧장 바람과 물을 쏘아댔다.

칼날은 사람의 피부를 벨 수는 있지만 절단에 이르지 못할 것 같았고, 물방울의 포탄은 매서우나 몸이 산산조각 날 정도는 아니었다.

즉, 내가 죽인 엘프놈을 방패로 삼아 돌진한다한들 피해를 줄 수 없다는 뜻이었다.

“ 시체를 방패로 삼다니?! 이런 악마 같은 행위를 저지를 수 있단 말인…! ”

양손방패를 다루듯 시체 목덜미의 옷깃과 허리춤을 잡고 돌진해, 헛바람을 삼키던 엘프의 배를 꿰뚫었다.

정확히는 거리를 좁힌 순간 오른손에 오러를 씌운 더크를 쥐고있는 힘껏 시체에 박아 넣은 결과였다.

그 결과 내 팔은 소시지를 꽂는 데 쓰는 꼬지 같은 꼴이 되었고, 피와 내장의 축축하고도 무거운 감촉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 어, 어찌… 이, 이런……. ”

나는 왼손을 뻗어 시체 너머로 피를 토하는 엘프의 목덜미를 잡아 뜯었다.

마치 짐승이 이빨로 물어뜯은 것 같은 깊게 파인 흉한 상처에서 피가 솟구쳤다.

시체를 관통한 팔을 뽑아내자 피로 흥건한 소매가 모습을 드러냈다.

살점은 팔을 뽑는 과정에서 밀려났는지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더 역할 수 있었을 광경이 없어진 것 같아 때 아닌 안도감을 느꼈다.

이것으로 한 놈.

나는 너덜너덜했으나 여전히 쓸모가 있을 법한 시체방패를 밀어버리듯 던졌다.

당연히 목표는 마법을 날리다 말고 굳어져버린 나머지 한 놈이었다.

놈은 갑작스레 날아오는 시체에 헛바람을 삼켰다.

배가 뻥 뚫려 바람구멍이 보이는 시체가 피를 튀기며 날아오니 놀랄 만도 했다.

나라도 지금 같은 상황이 아니었다면 당황했겠지.

그러나 지금은 더 큰 위기를 피하느냐 마느냐 하는 중요한 분기점이었고, 그 분기점을 온건하게 지나가는 일은 내 목숨보다 더 중요했다.

여기서 잘못하면 앞으로 있을 일도, 여태까지 해왔던 일도 전부 꼬여버리는 셈이었기에.

고로, 무의식적으로 시체를 쳐낸 엘프의 머리통에 더크를 쑤셔 박는 일도 개의치 않았다.

“ ……. ”

칼날을 머리에 쑤셔 박고 한 바퀴 돌리자, 놈은 이렇다 할 비명조차 남기지 못한 채 절명하고 말았다.

제법 난전이었기에 숲에서 날아오는 탄막이 잠시 그쳐 다행이었으나, 비가 다시 내릴 것은 불 보듯 뻔했다.

하지만, 조금 전 까지 혼자서 비를 피했던 것보다는 훨씬 나을지도 모른다 생각했다.

나는 그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널브러진 시체들 중 가장 상태가 깨끗한 놈을 양 어깨에 짊어지듯 들어 올렸다.

상처 입은 탓에 호흡이 제법 거칠어지고 오른팔도 후들거렸으나 엘렌과 만나기로 한 곳까지는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든든한 우산을 손에 쥐고 있으니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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