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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의 기둥서방이 되었다-88화 (88/192)

〈 88화 〉 깐프의 습격 #4

* * *

집착 성향이 강한 이를 조련하려면 당근과 채찍을 잘 써야했다.

그리고 그 당근과 채찍을 잘 활용하기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바로 멘탈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 세계에 날 때부터 지금까지 그 생각은 변함없었고, 여러 사건이 있었지만 극단적인 파멸에 이르지 않은 지금의 평화가 그를 증명하는 듯 했다.

일반적이지 않은 광기를 접하고 위축되지 않으며 두려움에 떨지 않는 것만으로도 반은 먹고 들어갔다.

위축되고 두려움을 품기 시작하면 저도 모르게 조금씩 거리를 두게 되고, 그렇게 되면 끝장이었다.

내 나름대로 세운 원칙이었다.

“ 아직 그 수상쩍은 누군가는 못 잡았지? ”

나는 그 원칙에 따라 오늘도 두 여자를 조련하는 중이었다.

처음 헬레나를 원하는 방향으로 다룰 때만 하더라도. 또 얼마 전 까지만 하더라도 이대로 좋나 싶을 때가 종종 있었다.

지금은 그러한 감정이 많이 희석되었기에 별 거리낌이 없어진 상황이었다.

“ 응. 몰래 병사들을 시켜 순찰을 좀 더 주의 깊게 하라곤 했는데 성과가 없어. 몰래 해서 그런가? ”

내 허벅지를 베고 있던 헬레나가 고개를 안쪽으로 돌린 채 한숨을 토해냈다.

왼쪽은 헬레나가, 오른쪽은 엘렌이 베고 있었기에 약간 저렸지만 견딜 만한 수준이었다.

침대가 엉덩이를 든든히 받쳐주어 무게가 많이 쏠리지도 않았고.

“ 이대로 꼬리기 잡히지 않으면 대대적인 수색을 하는 수밖에 없을까요? ”

“ 그럴 상황이 올 지도 모르지만, 그러다 괜히 겁먹고 도망칠까봐 이렇게 행동하고 있잖아. 더구나 대대적으로 수색해서 잡으려면 한 번에 총력을 기울이는 편이 더 확실하니까 큰 소란이 날 테고. ”

엘렌이 묻고 헬레나가 대답하는 상황이 이어졌다.

나는 그 가운데에 끼인 채 두 여자의 머리칼을 쓸어주며 가만히 침묵하고 있을 뿐이었다.

선을 넘는 결투가 벌어졌던 그날 밤, 두 사람의 입을 통해 상황 파악은 하고 있었다.

그저 끼어들기 미묘해 보였기도 하고,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싶어 지켜보고 있었다.

헬레나도 그렇고, 엘렌도 그렇고 충분히 능력 있는 여자들이다.

가끔 지능이 아이랑 비슷한 수준으로 떨어질 때가 있을 뿐, 그것이 무능하다는 뜻은 아니었다.

한껏 날이 선 유능함 또한 무능함 못지않게 위험할 지도 모르지만, 다행히도 제어 가능한 수준이었고.

“ 그런데… 그 간자들은 목적이 뭘까? 저택 내에 있는 고가의 귀중품이 목적일까? 아니면 사람? ”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중, 저도 모르게 궁금했던 것을 입 밖으로 꺼냈다.

이 저택에 중요한 인물은 참 많다.

영지를 다스리는 귀족의 저택 내에서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 있겠냐만, 그 중에서도 누굴 노리는 지에 따라 그들의 방침을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미안. 나도 잘 모르겠어. 행위의 근본부터 캐내려 하기에는 너무 머리가 복잡해. 단서도 없고. ”

“ 그렇지요. 누군가 감시했다는 건 알아도 그 동기까지 알 수는 없는 법이니까요. 누가 감시했는지 알아내기만 해도 일이 좀 더 쉽게 풀리겠지만, 그도 아니니까요. ”

지금 우리가 아는 것은 감시의 눈길이 있었다는 행위 하나뿐이다.

사실상 아무것도 모른다 해도 과언이 아닌 상황이었다.

헬레나와 엘렌도 그를 잘 알기에 한숨만 쉬는 것 같았다.

덕분에 나도 속이 답답할 지경이었지만, 아마 이 두 여자보다는 훨씬 덜할 것이 분명했다.

강철멘탈의 보정 덕분에 아주 약간 답답한 기운만 느낄 뿐이었으니까.

나는 이 답답한 상황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아무 이야기라도 하다보면 조금 나아질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고서.

“ …어쨌든 감시가 있었다는 건 사실이지? 착각은 아니고? ”

“ 착각? 그럴 가능성도 아예 없지는 않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적다고 생각해. 자만하는 것 같아서 쑥스럽지만 나도 일단 마스터고, 엘렌도 보통 엘프가 아니잖아? ”

처맞는 말이 아니라 진짜 맞는 말이다.

마스터와 감과 유산을 얻어 비약적인 도약을 이루어 낸 엘프의 감각이 얼마나 날카로운지는 나도 잘 안다.

“ 그렇지. 시선이 있었다는 건 확실하고, 그 시선이 무척 멀리서 느껴졌다는 거지? ”

“ 응. 보통 사람 수준은 아득히 넘었어. 아마 익스퍼트도 그럴 수는 없을 거야. 마스터에 오른 인간이라면 충분히 가능할지 모르지만, 우리는 마스터와 아무 은원관계도 없잖아. ”

애초에 은원을 논하기 전에 얼굴조차 본 적이 없는 이들이다.

개중에는 소문만 무성한 사람도 있고, 전면에 나서지 않는 사람도 있다.

헬레나와 같이 대놓고 활동하는 소드마스터는 기껏해야 두 사람 뿐이었다.

헬레나가 전쟁을 일으켜 대륙을 쓸고 다녔다면 모를까, 그것도 아니다.

난리를 치긴 했어도 왕국 내에서 일어난 일이다.

결국 마스터나 그에 준하는 강자가 이곳까지 와서, 굳이 정찰을 할 것 같지는 않았다.

“ 그러면 경지는 그리 높지 않지만 기척을 숨길 수는 있고, 멀리서 저택을 볼 수 있을 만한 눈을 가진 누군가가 범인이라는 뜻인가? ”

그렇게 딱 들어맞는 인간이 과연 있을까 싶고, 내가 말하고도 모순이 있어 보인다.

높지 않은 경지에 다다른 인간이 기척을 숨기거나 한계를 넘은 육체능력을 가진다는 것이 말이 될까.

스스로도 어처구니가 없던 나머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이 터져 나오는데, 두 여자의 표정이 묘하게 가라앉았다.

허탈함과 실망, 답답한 상황으로 인한 기색이 아니었다.

무언가에 깊이 빠져 든 기색이었다.

좀처럼 감이 안 오지만 그녀들은 무언가 짚이는 구석이 있는 것일까.

나는 곧 답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예감에 입을 다물고, 머리를 쓸어 넘기던 손짓도 잠시 멈췄다.

지독한 침묵이 가슴을 무겁게 짓누르는 것만 같았다.

벌떡. 헬레나와 엘렌은 마음이라도 통한 듯 동시에 몸을 일으키더니, 기다렸다는 듯 서로를 마주봤다.

“ 선천적으로 감각이 좋은 종이 뭐가 있지? 특히 눈. ”

“ 수인족. 그리고 엘프가 대표적이죠. ”

“ 그럼 그 둘을 각각 간자라 가정하고……. ”

헬레나가 먼저 포문을 열자 엘렌이 척 하고 받았다.

한 번 물꼬가 트이기 시작하자 말의 샘이 마를 줄을 몰랐다.

누군가 질문을 하면 이어받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수인족은 연합국가를 이루고 있다고는 하나 각 부족의 특성이 두드러진다.

미국을 상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정치 형태를 띠고 있다.

엘프도 그와 비슷하기는 하나 머리가 없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머리 대신 대략 서른 전후의 마을 촌장들이 모여 중요한 일을 결정하는 대회의라는 제도가 있다고 한다.

어찌 보면 공화정에 가까울 수도 있었다.

“ 수인은 각자의 개성이 너무 강하고, 무엇보다 접점이 없습니다. 때로 수인족 몇몇이 용병을 하러 인간 영역까지 발을 들이긴 합니다만, 그 수는 소수죠. ”

“ 그 말은 엘프 쪽이 더 가능성이 높다 그 말이네? ”

“ 네. 공작님의 의견은 어떠세요? ”

“ 나도 그렇게 생각해. 수인보다는 단합하기 쉬운 엘프가 척후를 보냈다는 가설이 훨씬 와 닿아. ”

둘의 의견은 엘프가 간자를 보냈다는 쪽으로 모이고 있었다.

나도 가만히 듣다보니 몹시 그럴 듯하여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뿐이었다.

반박할 거리도 없거니와 굳이 반박할 이유도 없었기 때문이다.

“ 원인은? ”

“ 아마 제가 유산을 얻었다는 걸 알아차리고 척후를 보낸 것이겠죠. 그냥 엘프도 아니고 인간의 세상에서 지내는 다크엘프가 그랬으니 안절부절 못하다 보내지 않았을까요. ”

엘렌은 오만하기 짝이 없는 그들답다 중얼거리며 실소를 머금었다.

유산이라.

그를 얻어낸 엘렌이 잠재적인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 하여 굳이 벌집을 쑤시듯 직접 움직였다는 것이 쉽사리 믿기질 않았다.

자연재해란 막을 수 있는 현상이 아니다.

찾아온다 하더라도 그 피해를 최대한 줄일 시도만이 사람에게, 또는 엘프에게 허락된 일이었다.

그저 다가오지 말기를 기도하는 것이 보통이라고 생각했다.

설령, 그 재해가 생각을 할 수 있다 하더라도.

“ 좋아. 여기까지 가설을 좁힐 수 있었으니, 나머지는 검증을 통해 확인을 해 봐야겠어. 하지만……. ”

“ 필요한 일이잖아. 내 걱정은 하지 마. 맞서 싸우지는 못하더라도 도주 정도는 할 수 있을 테고. ”

헬레나가 말한 검증이 어떤 행위일지는 대충 감이 온다.

아마 의도적으로, 적당히 티 나지 않을 만큼 틈을 보여 상대의 행동을 유도하려는 것이리라.

요컨대 떡밥을 뿌리고 낚시를 하는 셈이었다.

나는 그 생각이 무척 좋다 생각했기에 고개를 끄덕였고, 꼴사나우나 제 한 몸 건사할 수 있다고 말했다.

엘프라 하더라도 지금의 엘렌처럼 선을 넘은 정도는 아니고, 잘 쳐줘야 올리비아를 비롯한 나머지 다크엘프 용병 정도 수준이리라.

다만 이렇게 생각한다고 해서 그들을 얕본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그럴 수도 없었다.

일대 일로 붙어도 내가 질 것 같은 여자들인데, 하물며 그 수가 여럿이라면 절대 이길 수가 없을 노릇이다.

그러나 도망 칠 자신은 있었다. 하물며 공작령 내에서 하는 도주라면 더욱 자신 있었다.

간자, 혹은 척후병들이 이곳 지리를 철저히 조사했다 하더라도 결국 낯선 땅이다.

또, 잘 알더라도 추격전과 같이 다급함을 요하는 상황이라면 그 검증에 시간이 조금 더 걸릴 것이 분명했다.

똥개도 자기 구역에서 반은 먹고 간다는 소리가 괜히 나온 말이 아니다.

“ 죄송합니다. 유산을 얻은 직후, 곧장 마을을 쓸어버렸어야 했는데……. ”

엘렌이 희번덕거리는 눈빛을 띤 채 살벌하기 그지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엘렌 입장에서는 남보다 못한 사이일 테지만, 그렇다 해도 몰살하려는 생각은 정도가 지나쳤다.

“ 워워. 진정하고. ”

나는 엘렌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잔뜩 독이 오른 기세를 달랬다.

덕분에 무저갱 같은 눈에도 빛이 돌아왔고, 날 선 분위기도 부드럽게 바뀌었다.

“ 엘렌의 일은 우리 일이기도 해. 그러니 죄송하다는 생각 말고 차분히 해결해 보자. ”

“ 아, 대공님…! ”

충성을 넘어 광신의 빛이 깃든 눈빛과 황홀감에 잠긴 얼굴.

나는 여전히 부담스럽기 그지없는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하루이틀 일이 아닌지라 해탈한 것이 아닐까 싶었다.

◎◎◎

그리고 방침을 세운 다음 날부터, 소위 떡밥 작전이 실행됐다.

우선 첫 날은 늘 그렇듯 셋이서 영지 내부를 돌았고, 만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듣는 척이 아니라 정말로 성실하게 귀담아 들었고, 혹여나 있을 문제점을 기록해 두기도 했다. 간자를 낚을 겸 겸사겸사.

보통 귀족과, 하물며 왕을 제외한 가장 높은 귀족인 공작과 마주하고 있는 말 없는 말 전부를 쏟아내는 이는 드물다.

신분 차이에 의한 두려움, 그리고 그 힘에 짓눌리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하지만 헬레나는 자상하고 사람을 성실히 대했기에 평판이 좋았다.

그러니 마주하는 사람들도 제법 마음을 놓고 속내를 털어놓기도 했다.

그렇다 해도 귀족은 귀족이었기에 어느 정도 선은 지키는 눈치였다.

헬레나의 광기가 소문난 맛집이기도 했으니.

그렇게 첫 날은 당연하다는 듯 다가오는 기척을 느낄 수가 없었다. 셋이 한꺼번에 붙어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둘째 날. 헬레나가 홀로 저택을 나와 영지 안을 돌아다녔다.

전날과 다르게 말과 마차를 타서 요란스레 시선을 끌지도 않았고, 여기저기 불쑥불쑥 나타나 민심을 살폈다.

어제도 그랬듯이 살피는 척이 아니라, 진짜로.

당연하다는 듯 엘프로 추정되는 간자는 나타나지 않아, 둘째 날도 평화롭게 아무 일 없이 흘러갔다.

다음 날은 엘렌과 내가 영지 내를 돌아다녔다.

아마 헬레나보다는 더욱 먹음직스럽기에 무언가 반응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의외로 신중한 놈들인 듯 미동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나로서는 잘 모르겠으나 엘렌이 그렇게 말했으니 틀림없을 듯 했다.

넷째 날.

그들의 목적으로 추정되는 엘렌 혼자 저택 밖을 나왔다.

본래 그녀는 땅을 받는 조건으로 이 크라우저 공작령에 발 들였으니그 땅에 찾아가는 것도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 과정에서, 혹은 작전을 실행하기 전에 다크엘프를 이용하는 수도 생각해 보았던 적이 있었다.

그들이 움직이면 훨씬 쉽게 간자를 잡아낼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결국 생각이 바뀌었는데, 이유는 무척 간단했다.

가만히 농사짓던 다크엘프가 갑자기 평소와 다른 행동을 보인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수상쩍기 그지없어 보일 것 같아서다.

넷째 날에도 이렇다 할 만 한 수확은 없었고, 마침내 다섯째 날.

엘렌은 내 호위였기에 셋째 날처럼 함께 저택을 나섰으나 도중에 헤어져 제 갈 길로 갔다.

예정대로, 어색함 없이.

“ 어휴. 요즘 들어 자주 나오시는데, 무슨 일 있으십니까요? ”

“ 하하. 일은 무슨요. 곧 추수도 하고, 추수가 끝나면 날이 추워질 테니 미리미리 살펴보려는 거죠. 바깥이나 안이나 평화로우니까 크게 걱정하지 마세요. ”

나는 선거철 유세하러 재래시장을 찾는 정치인마냥 시장이나 농지를 돌며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서류 작업만 하느라 현장을 살피는 시기가 띄엄띄엄했지만, 그렇게라도 들렀기에 제법 민심을 얻고 있었다.

제 입으로 말하기엔 쑥스럽지만 자랑스러웠다.

농지는 기본적으로 한적한 곳에 있고, 주거지가 밀집한 구역과 떨어져 있는 경우도 있다.

그렇기에 너무 자연스럽게 인적 드문 곳으로 발을 들이게 되었다. 그 결과,

“ 왔구나. ”

전에 없이 공기가 들썩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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