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화 〉 깐프의 습격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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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게 무슨……. ”
상대를 납치하기 위해서는 그 동선을 면밀히 짜 둘 필요가 있다.
그 결정에 따라 미리 뽑힌 엘프 선발대 몇몇이 크라우저 영지에 침투해 주변 지리를 살폈다.
침입로. 퇴로. 전체적 도시의 구조.
간자들은 그 모든 것을 차근차근 파악하며 신중을 기했다.
중대하다고는 하나 일분일초를 요할 만큼 조급하지는 않은 덕이었다.
그러니 신속함보다 성공률을 높이는 데 주의를 기울였다.
엘프의 용모는 눈에 띄기에 가벼운 변장을 했고, 의심을 최대한 피하기 위해 무난한 차림을 했다.
옷차림에 큰 차이가 없어 크게 괴리감을 느끼진 않아도적진 한 가운데에서 움직인다는 것 자체에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부담은 저 멀리서 벌어지는 광경에 더욱 커져만 가고 있었다.
“ 왜? 무슨 일인데? ”
“ 저쪽 방향으로 시력을 집중해 보게. ”
함께 높은 집의 지붕에 올라 있던 엘프가 어느 한 곳을 가리켰다.
그가 가리킨 손가락 끝에는 크라우저 저택의 뒷마당이 있었다.
본래 시력이 뛰어난데다 전문적 훈련을 받았기에 보통 사람이라면 멀어 보이지 않을 것도 볼 수 있었던 덕이다.
무슨 일일까.
한 엘프는 의구심을 품으며 남자가 가리킨 방향을 보다, 곧 남자와 같이 넋을 놓은 듯한 기색을 드러냈다.
“ 세상에, 바람으로 뜰 수 있다고? ”
“ 저것도 고작 편린에 지나지 않겠지만 정말 소름 끼치는군. ”
공중을 나는 비행 마법 자체는 그리 드문 것도 아니며, 어느 정도 연륜이 쌓인 마법사라면 누구나 쓸 수 있었다.
그러나 엘렌은 순전히 바람만을 이용하여 날고 있었으니 놀랄 만도 했다.
사람 같은 것을 자유롭게 띄우려면 그만한 힘이 필요했고, 그렇기에 요란스러워지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엘렌을 휘감은 바람은 미풍 정도였을 뿐 거세다는 기색이 없었다.
엘프들을 그를 보고 놀란 것이며, 또한 바닥이 없다는 듯 계속해서 공격을 가하는 모습에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 공격의 농도나 속도도 제법 차이가 심해. 정면에서는 절대 못 이기겠군. ”
“ 음. 마법을 흘려 발목이나 잡는 게 최선이겠어. ”
“ 그렇겠지. 유산을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차이가 크다는 건 알았지만……. ”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것 중 하나가 싸움 구경이라 했던가.
그 말에 예외가 없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엘렌과 헬레나의 싸움을 바라보는 엘프들의 눈이 몹시도 반짝거렸다.
단순한 상황파악을 넘어 몹시 집중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 허억! ”
“ 손 쓸 방법이 없을 줄 알았는데 저런 식으로 접근할 줄은 몰랐군. 저것이 소드마스터인가? ”
공중을 내달리듯 뛰어 올라 엘렌의 몸뚱이를 크게 베어냈을 때, 엘프들은 저도 모르게 헛바람을 삼켰다.
크라우저 공작가의 대공을 지킨다는 여자가 그 머리인 공작에게 죽일 듯 덤비는 것도 그러하며, 공작 또한 엘렌을 죽일 듯 검을 휘두르는 모습까지 소름 끼칠 지경이었던 탓이다.
“ 오오, 떨어졌군! 그런데 말일세, 두 여자 사이가 저렇게 나쁘던가? ”
한창 즐겁게 싸움을 관람하던 중, 뒤늦게 크라우저 저택 방향을 바라보던 남자가 물었다.
땅에 떨어진 두 여자가 급히 자세를 수습하는 와중이었기에 생긴 틈을 노린 질문이었다.
한창 재미있을 때 말을 걸면 짜증만 돌아 올 테니까.
“ 음? 글쎄. 나쁘다는 소리는 전혀 못 들어봤네. 그저 저 더러운 것이 인간 남자에게 홀딱 빠져 정신을 못 차린다는 소리만 들었을 뿐이지. ”
“ 혹시 저 공작 입장에서 보면… 저 깜둥이가 그저 방해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이야기도 되지 않겠는가? ”
“ 아무리 그래도 그 정도는 아니겠지. 유산을 가진 자가 알아서 굴러들어왔는데 그걸 놓친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보고에 의하면 저 공작도 검둥이가 유산을 얻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는 눈치니, 괜한 생각은 접어 두게. ”
“ 흐음……. ”
물론 그의 말이 옳다. 유산을 가진 자의 전략적, 혹은 전술적 가치가 얼마나 대단한지 정도는 잘 알 것이 분명했다.
엘렌의 입장에서 보아도 구태여 거짓을 말할 이유도 없었을 터.
그러니 공작 또한 유산에 관한 지식을 조금이나마 알고 있겠지.
다만 땅에 내려와서도 끝없이 다투는 낌새가 영 심상치 않다며, 한 엘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
“ 그만! ”
싸우다 보면 여러 가지 요인에 의해 분위기가 과열될 수도 있다.
나도 약하다고는 하나 직접 몸으로 겪어본 적이 있었기에 그 기분이 어떤지 충분히 이해가 갔다.
죽기 전에 있었던 일들을 예외로 치자면 그랬다.
하지만 두 여자의 행동은 이미 도가 지나쳤다.
오러 블레이드에 뚫린 엘렌의 어깨에 칼자국이 나 있는 것도 그러했으며, 헬레나의 전신을 어루만지듯 그어진 수많은 실선들도 그랬다.
엘렌은 두터운 바람의 막을 쳐서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고, 함께 바닥으로 추락하던 헬레나는 엘렌의 바람을 맞아 저 꼴이 되었다.
하늘에서 자유롭지 못하기에 꼼짝없이 당할 뻔 했던 피해를 최대한 줄인 결과였다.
“ 하아… 하아…! ”
“ 후우──. ”
거리를 두고 으르렁대던 둘은 언제 그랬냐는 듯 날카로운 시선을 거두고 차분하게 호흡을 가다듬었다.
여전히 서로의 틈을 노리듯 팽팽하게 긴장된 분위기가 흘렀으나 흉흉하지는 않았다.
나는 엉덩이를 털고 자리에서 일어난 뒤, 얼른 두 사람을 데리고 저택 안으로 발을 들였다.
“ 허, 허억?! 공작님! 이게 무슨…! ”
“ 자, 진정하시고 약이랑 소독할 거리를 챙겨서 집무실로 와 주세요. 대련이 조금 격해져서 이렇게 됐지만 생명에 지장은 없습니다. 그러니 침착하게 행동해 주세요. ”
도중에 헬레나의 꼴을 보고 당연히 놀라 자빠진 이들 또한 있었지만, 어찌어찌 그들을 잘 달래가며 필요한 것을 가져오도록 했다.
예전 같았으면 내가 직접 움직여 가져왔을 텐데, 참 권력이라는 것이 좋긴 좋았다.
“ 네, 네! 알겠습니다! 얼른 가져오겠습니다! ”
“ 고마워요. 그럼 먼저 올라가 있겠습니다. ”
두 여자를 데리고 집무실에 발을 들이기 무섭게 아래층에서 쿵쿵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본래 저런 소리를 내며 다니면 집사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에게 주의를 받을 터. 다만상황이 상황인지라 묵인하는 모양새였다.
오히려 권장하는 것 같기도 했다.
어쨌든, 그 덕분에 치료에 필요한 물품이 든 꾸러미를 빨리 받아 볼 수 있었다.
“ 자. 먼저 엘렌부터. ”
부상이 심한 것은 엘렌이다.
마법으로 헬레나의 칼끝을 어찌어찌 막았다고는 하나 어깨에 제법 깊게 베이고 말았다.
그러니 엘렌의 상처를 소독하고 상처 부위를 꿰매는 것부터 끝마쳐야 했다.
“ 둘 다, 오늘은 잘한 것 없으니까 얌전히 있어. ”
“ 윽…! ”
엘렌의 상처를 소독하기 전, 먼저 쓸데없이 목소리를 높이지 말라고 못 박아두었다.
둘이서 우선순위를 가르자고 대결하는 것 까지는 귀엽게 보이기도 하고, 기분도 썩 나쁘지 않았다.
사치스럽다고 느껴질 지경이었다.
그러나 이 지경이 되도록 싸우는 것은 명백히 잘못이었기에, 그 점을 꼬집어 불만을 드러내지 못하도록 했다.
그쯤에서 말리지 않았다면 정말로 누구 하나가 죽을 지경에 이를지도 모를 일이었으니까.
“ 자, 아플 테니까 꼭 참아. ”
“ 네. 알겠… 으으음! ”
이래저래 전쟁터를 돌며 상처 입은 적도 많은 여자라 그런지 제법 잘 참는 눈치였다.
상처 부위를 소독하고 약을 바르는 과정 하나하나가 쓰라릴 텐데도 그랬다.
마취제라도 있었다면 좀 나았을 지도 몰랐을 텐데. 참 아쉽다.
“ 자, 다 끝났어. ”
다행히 무언가를 꿰매는 데에 익숙해진 덕인지 제법 깔끔하게 봉합할 수 있었다.
붕대도 깔끔하게 감았으니 엘렌의 회복력을 믿고 상처가 아물기를 기다리면 그만이었다.
“ 다음은 헬레나지? 상처 부위는 그리 깊지 않으니 꿰맬 필요는 없겠어. ”
얼핏 살갗이 군데군데 베여 심각한 부상처럼 보이나 그 깊이가 얕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생채기가 군데군데 난 수준이었다. 소독을 하고 약을 바르면 문제없어 보였다.
대신 몸 곳곳을 다쳤기에 제법 붕대를 많이 감아야 할 것 같았다.
◎◎◎
“ 죄송해요. 제가 너무 지나쳤어요. 상에 눈이 멀어서……. ”
치료가 끝난 뒤. 지온이 저녁을 만들러 가겠다며 집무실을 뜨자 엘렌이 기다렸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지온이 떠나기 전 오늘, 그리고 상처가 다 나을 때 까지 얌전히 있으라는 엄포 때문이었다.
헬레나는 이 와중에도 지온이 감아 준 붕대를 사랑스럽기 그지없다는 듯 어루만지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마음을 가라앉혔다.
“ 신경 쓰지 마. 나도 반성하고 있어. ”
엘렌을 원망할 만도 하건만, 헬레나의 입술에서는 자신을 탓하는 소리만이 흘러나왔다.
좀 더 자극적인 밤을 즐겨보려다 자극 자체가 없어진 상황이 전부 제 탓이라 여긴 결과였다.
“ 괜히 그런 내기만 안했어도 행복한 마무리가 되었을 텐데. 참… 면목 없어. ”
“ 정말… 죄송합니다. ”
“ 너 혼자 만의 잘못도 아니고… 누굴 원망할 것도 아니야. ”
보통 사람이라면, 더구나 한 남자에게 미쳐버린 두 여자 같은 경우라면 진즉 저주를 쏟아내도 시원치 않았을 터.
그런데도 사과를 하고 고개를 숙이기까지 했다.
두 여자의 인품이 되는 바탕이 썩 나쁘지 않음을 드러내는 모습이었다.
소위 발작버튼이라 불리는 것이 눌리지 않는 한 제법 정상적이라 증명하는 셈이기도 했다.
“ 지온… 많이 화냈지. ”
“ 네. 허락이 있었다고는 하나 공작님께 상처를 입힌 대죄인에겐 너무 관대할 정도였지만, 많이 화가 나셨죠. ”
엘렌은 머리에 열이 오른 나머지 정말로 죽일 각오로 덤벼들었던 과거를 반성하듯 고개를 푹 떨구었다.
그 와중에도 사방을 초토화시키지 않는다는 선을 지켰기에 망정이지,그것마저 어겼다면 무슨 꼴에 처했을지…….
정말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엘렌이 자괴감에 몸서리치는 동안, 헬레나는 차갑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바닥은 그만 보고 자신을 보라는 뜻이었다.
엘렌이 그 뜻을 알아들은 듯 의아해하며 고개를 들자, 헬레나가 진중하기 그지없는 표정으로 입술을 뗐다.
“ 그나저나, 왜 시선이 느껴진 거지? 누구에게 빚진 건 없었던 것 같은데. ”
서로를 죽일 듯 노려볼 때는 몰랐으나, 한 남자의 고함을 듣고 정신을 차렸을 때 느껴졌던 시선.
착각일지도 모르나 저택에서 상당히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엿본 것으로 추정되는 시선이었다.
초인적인 감을 가진 헬레나였기에 느낄 수 있었다.
또한, 엘렌도 헬레나 못지않은 예민한 감각을 가지고 있어 헬레나가 입에 담은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 그렇죠. 제 생각에도 공작님을 감시해야 할 사람은 없는 것으로 알아요. 더구나 위험부담도 너무 크고요. ”
“ 그렇지? 그러면 네 쪽인가? ”
“ …차라리 그럴 가능성이 훨씬 높겠네요. 용병일이 업이 많다보니 원망을 받을 수도, 기습을 받을 수도, 뒤통수를 맞을 수도 있으니까요. ”
엘렌은 충분히 그럴 수 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헬레나를 목표로 삼는 것보다 자신을 목표로 삼는 이들이 더 많다는 것이 훨씬 설득력도 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 두 여자는 그렇게 의견을 모으고 있었다.
“ 그런데 너무 멀찍이 떨어져 있었어. 시선은 느꼈지만 감으로는 못 잡아낼 거리에 있었으니까. ”
“ 먼 거리를 보는 아이템을 쓴 게 아닐까요? ”
“ 아. 망원경이라고 하는 게 있긴 했지. 그래도 그건 너무 비싸. 그걸 써서 우리를 감시했다 가정하면 어지간히 돈이 많아야 할 텐데, 용병 중에서 그럴 만한 인간이 있어? 아니. 있을 수도 있겠지만 너랑 은원관계야? ”
“ …아마도 아닐 거에요. ”
적어도 감시를 해야 할 만큼 지독한 은원관계로 엮인 인간도 없고,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헬레나가 말한 대로 재력이 풍부한 사람은 드물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족속들이 그만큼 돈을 모은다? 사실상 불가능했다.
또, 설령 그렇다 쳐도 자신도 모르는 새 어딘가에서 일이 꼬였을 가능성을 무시할 수도 없겠지만… 그래서는 답이 나오질 않았다.
더욱 꼬여만 가능 생각에 엘렌이 팔짱을 끼며 침음을 흘리자, 헬레나가 한숨을 쉬며 이야기했다.
“ 너도 답이 안 나오는 걸 보니, 일단 흘러가는 상황을 좀 지켜봐야 할 것 같아. 우선 몰래 사람을 풀어 자연스럽게 영지를 살펴 볼 테니 긴장만 풀지 말고 있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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