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화 〉 깐프의 습격 #2
* * *
“ 촌장님. 괜찮으십니까? ”
지온 크라우저를 납치하기로 결정한 그날 밤.
소식을 들으러 온 알버트가 걱정스러운 눈길로 물었다.
몇날며칠에 걸친 긴 회의 끝에 결정이 내려진 것은 좋으나, 그것을 주장한 에일렌의 낯빛이 제법 어두웠다.
“ …네. 괜찮습니다. ”
“ 그러시다면 다행이지만… 많이 피곤해 보이십니다. ”
“ 그런가요? 생각해보면 몸도 조금 나른하네요. ”
후우. 에일렌이 한숨을 쉬며 호흡을 가다듬는 동안, 알버트의 표정에 의문이 떠올랐다.
에일렌의 말에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고는 하나, 본래 차분한 성품이었던 여자로서는 보이기 힘든 태도들이 엿보였다.
“ 저, 그런데 하나만 여쭤보아도 괜찮겠습니까? ”
“ 네. 말씀하세요. ”
“ 유산을 가진 것이 하필 다크엘프라는 것, 그리고 그 더러운 것이 인간에게 홀려 위험하다는 것도 이해는 갑니다.하지만… 그를 거론하시는 에일렌님의 모습이 평소와는 달랐습니다. 뭔가 다른 일이라도 있으셨던 겁니까? ”
알버트로서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으니 부디 답을 가지고 있을 본인이 답을 해 달라.
에일렌은 가만히 알버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눈꼬리를 가늘게 뜨며 천천히 입술을 뗐다.
구태여 숨길만한 일도, 그럴 이유도 없었기에 말을 꺼내는 데 망설임이 없었다.
“ 꿈을 꾸었습니다. 너무도 생생한 꿈이었지요. ”
“ 꿈… 말씀이십니까? ”
“ 네. 간혹 수도원 연맹의 성녀가 꾼다고 전해지는 것만 같았습니다. 제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너무 생생히 느낄 수 있었고, 그렇기에 그 꿈을 똑똑히 지켜보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
꿈을 꾸고 있다 깨달은 순간 자신이 그를 통제할 수 있어야 정상이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손을 뻗어도 닿지를 않고, 남의 일을 눈으로 보는 듯한 감각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고, 에일렌은 말했다.
“ 처음에는 제 걱정이 만들어 낸 환상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아님을 깨달았지요. 또, 그와 동시에 언젠가 일어날 가능성이 높은 일이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
“ 그런 일이 있으셨군요. 촌장님은 그 때문에……. ”
“ 네. 꿈은 재앙을 묘사하고 있었습니다. 크라우저 공작, 유산을 얻은 다크엘프가 일으킬 재앙이었지요. ”
에일렌이 꾸었다는 꿈은 다름이 아니라, 헬레나와 엘렌이 광기에 사로잡혀 세상을 휩쓰는 광경이었다.
그것은 한 남자가 개입하지 않았다면 일어났을 것이 분명한 미래였다.
또한 이쯤에서 전란의 불길이 크게, 크게 덩치를 부풀려가는 때이기도 했다.
어째서 에일렌이 그러한 것을 보았느냐.
그에 대한 답은 지온이 쥐고 있겠지만이들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왜 이 시기에 꿈을 꾸었는지, 왜 그것을 철석같이 믿게 되었는지도.
“ 그래도 제 의견이 확실치 않은지, 또 다른 동족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을 지도 의문이었기에 대회의를 열었습니다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다른 촌장들의 의견도 저와 같더군요. ”
그러니 가슴 한 구석에 웅크리고 있던 의심과 불안을 떨쳐내고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알버트는 그 말을 들으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
“ 후우……. ”
두 여자가 거리를 두고 서로를 잡아먹을 듯 바라보고 있다.
하나는 검을 든 경장 차림의 헬레나였으며, 또 하나도 헬레나처럼 경장 차림을 한 다크엘프, 엘렌이었다.
공백 사이로 오고가는 눈빛에서 번갯불이 튀는 듯 했고, 연무장을 포함해 주위 일대가 투기로 인해 흔들렸다.
살기가 아니라는 점이 천만 다행이지만 위협적이기 짝이 없었다. 살기와 별 차이가 느껴지지 않을 만큼.
“ 오늘은 이 특제 정력제를 쓸 거야. ”
척. 헬레나가 연무장과 멀찍이 떨어진 나무에 기대고 있던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정확히는 내가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들고 있는 유리병 하나를 가리키고 있었다.
유리병은 1.5리터 페트병 정도의 굵기와 길이를 가졌으며, 새빨간 피와 꼭 닮은 색의 액체로 가득했다.
사정 모르는 사람이 보면 정말로 피를 채워 놓은 것이라 착각할 만큼 붉었다.
그러나 이 액체는 피가 아니라 정력제였다.
루크 킬리네어가 보상 겸 우호의 표시로 넘겨 준 물품들 중 하나로, 헬레나가 언제 쓸 까 고대하며 눈을 반짝이게 하던 물건이었다.
“ 그렇지요. ”
“ 듣자하니 이걸 한 모금 마시면 정력이 몇 배로 강해진다고 해. 그 말은 곧 그만큼 농도도 진해진다는 뜻이지. ”
꿀꺽…! 엘렌의 침 넘기는 소리가 얼마나 큰지 목울대가 쓰나미처럼 출렁였다.
그 탓에 멀리 있는 내 눈에도 훤히 들어올 정도였다.
고작 이런 대화를 진지하게 주고받는 것이 황당하지만, 두 여자 입장에서는 중요한 일이 될 테니 적당히 납득하기로 했다.
솔직히 내 입장에서는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면 그만이었다.
여자 둘을 끼고 사는 것이 너무 익숙해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지만, 고마움과는 별도로 앞으로 더 익숙해져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여태껏 이랬던 시간보다 앞으로 이래야 할 날이 훨씬 길고 또 길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내가 갑자기 죽지 않는 한.
“ 그러니 오늘은 그 처음을 두고 대련을 할 거야. 이기는 쪽이… 알지? ”
“ 네. 아주 잘 알 것 같아요. 본래 공작님께 먼저 양보해드려야 옳겠지만 모처럼 판을 마련해주셨으니 뺄 수도 없겠죠. 거기다, 욕심도 나고요. ”
두 여자 사이의 상하관계가 명확함에도 공정하게 대련으로 결판을 낸다.
본래 가지고 있던 공정함 때문인지, 아니면 엘렌을 직접 때려눕힐 명분을 마련하고 싶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 자, 시작하죠. 먼저 오세요. ”
“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
별 다른 신호도 없이, 엘렌이 마나를 끌어올리기 무섭게 거리를 벌렸다.
뛰어난 용병이자 격이 다른 정령마법을 사용하는 엘렌이라도 헬레나와 정면으로 붙을 수는 없을 노릇이기 때문이리라.
그렇기에 그 판단이 틀리지 않았음을 이해할 수 있지만, 아무리 그래도 저건 좀 선을 세게 넘은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바람을 타고 공중에 올라, 검이 전혀 닿지 않는 곳에 자리를 잡았으니까.
“ 엘렌…! ”
헬레나가 황당하다는 듯, 혹은 분하다는 듯 이를 갈며 소리쳤다.
설마 승부를 가리는 대련에서 저토록 효과적인 수단을 들고 나오리라 생각지 못한 탓이 아닐까 싶었다.
얼핏 전쟁터에서는 자기 위치를 노출하기에 어리석게 비칠지 모르나사거리가 닿지 않을 만큼 높게 날아오르면 그만이었다.
더구나, 엘렌은 단순히 나는 것에서 그치는 여자가 아니었다.
마음먹기에 따라 천재지변을 일으켜 군대를 쓸어버릴 수도 있는, 그야말로 폭격기와도 다름없었다.
그러니 치사하게 보일 수밖에.
“ 공작님. 저는 진심이에요. 제가 겪었던 그 어느 전쟁보다 더 필사적이니까요. ”
“ 아무리 그래도 정도가 있어야지! ”
“ 사랑 앞에 정도??가 없다 말씀하신 건 공작님이세요! ”
언제 그런 말을 나누었는지는 잘 모르지만 헬레나가 입 다무는 것을 보니 사실인 것 같기는 하다.
분한 듯 입술을 꽉 깨문 채 발을 동동 구르는 것을 보니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그래도 결투는 결투. 제법 얍삽하기는 하지만 순전히 본인의 힘이었으니 트집 잡을 일이 아니었다.
엘렌은 저택 높이만큼 높게 떠오른 채 입꼬리를 살며시 들어올렸다.
본격적인 공세에 나서려는 듯 손가락 하나하나에 바람이 휘감기기 시작했고, 그 파장이 작으면서도 강했기에 뚜렷하게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손가락에 맺힌 바람은 믹서기의 칼날처럼 매섭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순간 칼날이 부딪히며 끼이익 거리는 마찰음이 들린다 착각할 만큼 강렬한 기세였다.
그리고 그 바람은 손가락에서 뛰쳐나오듯 헬레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 쯧…! ”
뱀처럼 하늘을 휘감으며 그 궤도가 시시각각 바뀐다.
불규칙적이어도 너무 뷸규칙적이며, 단지 몸 어딘가를 향해 목을 조이듯 날아온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헬레나는 혀를 차며 검을 뽑아든 뒤, 곧장 오러 블레이드를 일으켰다.
이전보다 더욱 굵고 묵직한 검은 선이었다. 검의 심지처럼 박힌 것은 여전하나 응축된 힘이 조금 더 커져 있었다.
매일 헬레나와 대련을 했기에 확신을 갖고 이야기할 수 있었다.
오러 블레이드를 박은 검이 어지러이 흩날렸다.
마치 나비의 날개를 하늘에 그리려 하는 듯 화려하면서도 복잡했다.
그리고 사람 목 하나는 우습게 베어버릴 만큼 빠르고 날카로웠다.
더구나 그를 뒷받침하는 효율적이기 그지없는 몸짓까지 더해져, 엘렌이 날린 바람 다섯을 쉽게 토막 냈다.
한 번의 칼질에 정확히 하나씩, 총 다섯.
눈에 보이진 않아도 흉흉하던 바람이 느껴지지 않는 것을 보아 제대로 베어낸 것이 분명했다.
아마 눈으로 볼 수 있었다면 복잡한 실타래가 토막이 나 사르르 풀어지는 것처럼 보였겠지.
“ 어디, 그러면……. ”
바람을 베어낸 엘렌의 눈매가 가늘게 좁혀졌다.
썩 놀라지 않는 것을 보니 먹히지 않으리라고 예상한 것처럼 보였다.
표정에 깃든 한 줄기 아쉬움을 보니 약간 실망한 눈치였다.
아쉬움은 잠시. 엘렌은 공중에서 몇 줄기의 바람을 일으켜 무차별로 쏘아대기 시작했다.
조금 전 뚫고 들어오는 느낌과 다르게 찢거나 베면서 다가오는 느낌에 가까웠다.
간단히 말하면 칼바람과 꼭 닮았다고 볼 수 있었다.
오러 블레이드보다 훨씬 얇고, 날카로움은 그와 비견되는 칼바람이 수없이 날아들었다.
공기를 찢는 날카로운 소리와 흔들림을 통해 현 상황이 얼마나 위험한지 짐작할 수 있었다.
자칫하면 공작살인 시도로 볼 수 있을 만큼 위험했다.
“ 후우──. ”
헬레나는 빗줄기 같이 쏟아지는 칼바람을 가만히 바라보며 호흡을 가다듬더니, 곧장 땅을 박차고 내달렸다.
실전에서는 자존심이 하등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듯 거침없이 바닥을 구르기도 했다.
그에 따라 목표 잃은 칼바람이 연무장 바닥, 주위의 나무, 그리고 흙바닥에 내리 꽂히며 한바탕 난리가 났다.
소리 없이 바닥만이 베여 보는 사람이 오싹할 때도 있었다.
정말로 대련 맞나? 라고 의심이 들기 시작할 무렵,
나는 두 여자의 눈빛이 심상치 않게 가라앉아 있음을 볼 수 있었다.
집착을 노골적으로 드러낼 때나 내보이던 무저갱 같은 눈빛이었다.
물론 그 때 보다 농도는 훨씬 덜했으나, 분위기가 비슷한 눈빛이 나왔다는 것만으로 상황이 제법 심각하게 흘러감을 알 수 있었다.
공중에 뜬 채 바람을 일으키고, 대포알 같은 물방울을 쏘아대며 주위를 초토화시키는 엘렌.
그 전부를 검으로 베거나 피하며 차분하게 때를 엿보고 있는 헬레나의 모습은 정말이지 소름 끼쳤다.
본래 이런 난리가 나면 하인들이 놀라 달려오기 마련이지만, 내가 곁을 지키고 있음을 알기에 다가오는 기척이 없었다.
그만큼 믿음을 받고 있기에 기분이 좋았고, 한편으로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 광기의 현장을 목격한 그들이 화들짝 놀라 말린다 한들 들을 여자들도 아니었고, 오히려 목숨만 위험할 수도 있었다.
거의 눈이 뒤집혀가는 상황이었으니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또 평상시라면 모를까, 일반적인 시선에서 너무도 하찮기 그지없는 이유로 이러는 것을 안다면… 참 한숨 나올 노릇이다.
“ 얼른 좀 쓰러지세요! 지온 님께서 제가 다가와주시기를 기다리고 계시니까요! ”
헬레네가 바람과 물의 산탄세례에 사방이 망가지는 와중에도 멀쩡한 탓인지, 엘렌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소리쳤다.
“ 누가 할 소리를! 내가 이를 악물고 첩 자리를 양보해 줬더니 이런 식으로 통수를 쳐?! ”
“ 통수가 아니라 정정당당한 싸움이죠! 아니면, 설마 공작께서는 배려를 받아야 할 만큼 스스로에 대한 매력이 없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그건 제 입장에서 기만이에요! ”
“ 기만이라고?! 정말로 오러 블레이드에 반쪽이 나고 싶은 거야! ”
“ 이곳까지 당도하실 수 있다면 해 보세요! ”
공격과 방어가 빨라지고 뜨겁게 달아오르는 중에도 두 여자의 입은 쉴 줄을 몰랐다.
평소에 묵은 감정을 토해내듯 짜릿하기 그지없는 눈초리와 공방이 오가는 풍경을 보니, 참 가슴이 웅장해질 지경이다.
연무장은 이미 원형을 찾아보기 힘들었고, 제각각 높이와 폭이 다른 구덩이가 바닥에 패였다.
마치 군대가 휩쓸고 간 것 마냥 황폐하기 짝이 없는 풍경이었다.
헬레나는 그 난리 속에서도 여전히 차분했고, 마침내 돌파구를 찾은 듯 눈을 번뜩이며 숲으로 내달렸다.
당연하다는 듯 엘렌이 쏜 바람과 물의 칼날이 뒤를 이었으나, 헬레나가 앞선 만큼 뒤를 잡기는 어려워 보였다.
“ 끝을 내자! ”
아, 그렇지!
나는 헬레나가 나무를 박차고 오르는 모습을 보며 무심코 손뼉을 탁 쳤다.
지켜보는 입장에선 진즉 나무를 통해 도움닫기 하려는 생각을 했지만, 난리통에 적응하느라 바빴던 헬레나였기에 나무로 다가가는 시기가 좀 늦어진 것 같았다.
높은 나무를 타고 올라 다리에 온 힘을 모으더니, 용수철처럼 튀어 오른다.
그렇게 헬레나는 바람을 찢듯 하늘을 박차고 올라, 몹시 당황해하는 엘렌의 코앞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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