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의 기둥서방이 되었다-85화 (85/192)

〈 85화 〉 깐프의 습격 #1

* * *

“ 그, 빌어먹을……. ”

오베론 마을의 문지기 중 하나, 알버트 오베론은 미간을 찌푸리며 든든한 나무에 등을 기댔다.

높은 나뭇가지에 앉아 아래를 내려다볼 뿐인 지루한 임무라고는 하나, 그의 머릿속에 지루하다는 생각은 없었다.

엘프들 모두가 숲의 공기를 마음껏 들이마시며 시간보내기를 즐긴 덕이었다.

“ 이봐, 알버트. 시간 됐네. 내려오게. ”

벌써 교대가 온 건가.

알버트는 분노를 곱씹다 보내버린 시간이 예상 이상으로 길었음에 내심 놀라며, 나무를 타고 미끄러지듯 내려왔다.

늘 하던 일이었기에 익숙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 벌써 교대라니 시간 참 빠르군. 수고하게. ”

“ 음. 그래야지. 참. 그보다 자네, 마을에 돌아가면 곧장 에일렌 님의 집으로 가 보게나. 자네를 부르더군. ”

교대로 온 실란이 피식 웃으며 예상치 못한 말을 꺼냈다.

촌장 에일렌의 집으로 곧장 가보라는 말이 영 마음에 걸렸지만 우선 가보는 수밖에.

알버트는 그리 생각하며 발걸음을 바삐 했다.

언제 보아도 아름다운 마을이며, 어느 마을보다 크고 웅장한, 그리고 단단한 나무야말로 알버트의 자긍심이었다.

엘프들의 마을 중에서도 가장 번성하고 있다는 점 또한 그 자긍심을 고취시켜 주었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그는 이곳 마을의 족장인 여성, 에일렌이 마치 엘프들의 왕처럼 느껴졌다.

각 마을의 우두머리가 수평적인 관계라고는 하나 그의 눈에는 달리 보였다.

아름다운 것이 평균인 엘프 중에서도 더욱 아름답고, 긴 연녹 빛깔의 머리칼을 가지런히 땋아 늘어뜨린 여성.

에릴렌 오베론은 가히 우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 어서 와요. 막 일이 끝나 피곤하실 텐데, 이렇게 부르게 되어 죄송하네요. ”

“ 아닙니다. 촌장님이 부르신다니 당연히 와야지요. 그보다, 무슨 일로…? ”

과하게 예를 갖춘 나머지 딱딱하기 그지없는 모습을 보이는 알버트.

에일렌은 그런 남자를 보며 입꼬리를 슬며시 들어 올리더니, 그를 이끌고 거실로 들어왔다.

엘프들이 공통적으로 즐기는 차는 덤이었다.

“ 감사합니다. ”

우선 한 모금 마시고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라는 것일까.

아니면 여유를 갖고 싶다는 것일까.

나로서는 알 수 없지만 대접한 것을 매정하게 뿌리칠 수 없다.

그것만은 확실하다며, 알버트는 차를 마시며 뜸 들이는 에일렌의 모습에 귀를 기울였다.

언제든 그녀가 꺼내는 말에 집중하기 위함이었다.

달그락.

찻잔이 반쯤 비고 뜨거운 김이 식어 미지근한 열을 내기 시작할 즈음, 에일렌이 겨우 목소리를 냈다.

“ 알버트. 몇 달 전, 다크엘프가 찾아온 일을 잘 알고 계시죠? ”

“ …네. ”

갑자기 그 때 일을 꺼내는 이유가 무엇일까.

알버트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며 영 내키지 않은 기색을 드러냈다.

모두가 꺼려한다고는 하나 다크엘프 또한 엘프.

아예 연이 먼 외적이 침입한 정도는 아니었기에 며칠 근신하는 선에서 마무리 되었던 것을 그는 기억하고 있었다.

설마 벌이 부족하다고 이제 와서 가중처벌을 하려는 건가.

알버트가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부풀어 오르기 시작한 망상에 사로잡히기 직전, 에일렌의 목소리가 그를 현실로 되돌렸다.

“ 그 일로 당신을 추궁하려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일이 제법 묘하게 흘러가고 있어요. ”

“ 묘하게 흘러간다 말씀하심은…? ”

“ 당신이 보내주었다던 그 다크엘프가 유산을 얻었다고 하더군요. ”

유산?! 알버트는 순간 이성을 잃고 탁자를 탁 소리 나게 내리쳤다.

촌장 앞에서 무례하지 않아야 함을 엄격하게 지키던 그가 절로 소란을 피운 셈이다.

유산을 얻었다는 이야기가 그만큼 충격적이라는 뜻이었다.

“ 그, 그게 정말이십니까?! ”

그럼에도 그를 눈치 채지 못한 알버트가 목소리까지 크게 높였으나, 에일렌은 개의치 않는 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아닌 그 누구라 하더라도 충분히 놀랄 만한 사항이었다.

“ 엘렌이라고 했던가요? 당신이 들여보낼 수밖에 없었던 그 다크엘프는 유산에 도전했다 무사히 나왔습니다. 처음 유산 쪽에서 걸어 나오는 로브 쓴 누군가를 봤다는 다른 분들은 관광이라도 갔다 온 줄 알았겠지요. 왜냐하면 유산에 도전했다 살아남은 사람은 길고 긴 엘프의 역사 중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니까요. ”

그렇기에 그 누구도 유적 쪽에서 태연히 걸어 나온 누군가가 유산을 얻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열이면 열 죽는다 여겨지는 것이 유산의 시련이었던 탓이다.

그런데 그 시련을 뚫고 힘을 얻은 엘프가 실제로 있었다니. 그것도 그 더러운 다크엘프가!

알버트의 머릿속은 혼란과 분노로 범벅이 되어 차분하게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에일렌 또한 그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참 놀랐던 경험이 있기에, 그가 멍하니 서있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다만 언제까지고 가만히 기다릴 수만도 없었던지라 천천히 다음 이야기를 꺼내기로 마음먹었다.

귀는 열려있는 눈치였으니 듣는 것은 가능하리라고, 에일렌이 결론 내렸다.

“ 처음에는 의심이었습니다. 유산의 시련에 도전한답시고 들어갔던 여자의 소식을 아무데서나 들을 수 없으니 알아서 죽었다고 생각했지요. 아시다시피, 유산에 도전하면 몇 초 안에 시체조차 남기지 못하고 사라지니까요. ”

불에 타올라 죽고, 바람에 쓸려 풍화되어 죽고, 물에 쓸려 녹아버리는 등등…….

현상은 다를지언정 시체도 남기지 못하고 죽는다는 결과 하나만큼은 같았다.

“ 그렇지요. 순간적으로 일어나, 순간적으로 사라지죠. ”

“ 예. 하지만 바깥에서 활동하는 가족께서 가져온 소식에 의하면, 당신이 말한 엘렌이 여전히 살아서 잘 활동하고 있는 모양이에요. 그것도 다름 아닌 크라우저 공작가에서. ”

“ 공작?! 인간의 호위를 자처하고 있다는 말씀입니까! 하긴, 더러운 피를 늘 뒤집어쓰고 살았으니 그럴 만도 하겠지요. ”

알버트는 엘렌의 생존 소식에 한 번 놀라고, 그 여자가 인간 공작의 곁에 붙어있다는 것이 한 번 더 놀랐다.

혐오감이 더욱 커지기도 했다.

엘프에게 인간을 깔보는 풍조는 없으나, 스스로를 낮추어 아양 떠는 듯한 상황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 그래서 저는 그 소식을 확인하기 위해 조용히 첩자를 보냈고, 얼마 전 그들이 소식을 들고 왔었습니다. 정보는 사실로 판명되었고, 다크엘프는 그녀와 함께하는 용병단과 함께 크라우저 영지에 머무르는 상태라더군요. ”

“ 그러셨습니까? 그런데 왜 그렇게까지……. ”

제아무리 핍박받는 다크엘프라 해도 유산을 가지고 엘프 전체를 흐트러뜨리지는 않을 터.

알버트는 엘프라면 누구나 가질 법한 오만함을 근거로 그리 생각했으나, 에일렌은 그리 생각하지 않는 눈치였다.

“ 그 힘이 저희 엘프에게 큰 해가 될 수도 있다 생각하기 때문이죠. ”

“ 해가? 정말로 그리 생각하십니까? ”

“ 네. 단순히 인간과 붙어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인간을 사랑하기 때문에 위험하다고 판단했습니다. ”

크라우저 공작의 남편이자 대공이기도 한 지온 크라우저가 그 대상이라며, 에일렌이 말했다.

엘렌의 광기까지는 꿰뚫지 못했으나 연모의 정을 품고 있다는 것은 확인할 수 있었다고.

“ 지온 크라우저는 제법 평판이 좋은 인간입니다. 어느 정도 강하기도 하다더군요. 하지만 인간이라는 건 언제 그 특유의 탐욕을 드러낼지 모르는 존재이며, 그렇기에 위험합니다. ”

“ 예. 옳으신 말씀입니다. ”

“ 만약 그 인간이 저희 엘프의 영토나 엘프 자체에 탐욕을 품는 순간, 분명 곁에 머무르는 유산의 힘을 거리낌 없이 휘두르겠지요. 그리 되면 저희의 안녕에 큰 위협이 될 겁니다. ”

“ 으음……. ”

설마 그런 뒷사정이 있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알버트에게 있어 다크엘프가 남자에게 반한다는 것은 그만큼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객관적으로 보면 엘프에게도, 인간에게도 핍박받고 살아 온 것이 바로 다크엘프다.

그러니 인간에 대한 사랑은커녕 미약한 호감조차 품기 힘든 환경이다.

그러나 그 말도 안 되는 일이 현실로 일어났다.

그 이면에는 아마도 지온 크라우저라는 인간이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리라.

그렇지 않다면 같은 다크엘프를 제외한 나머지 종족 모두와 거리를 둔 여자가 사랑을 할 리가 없겠지.

알버트는 나름대로 생각을 정리한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 그러시다면, 촌장께서는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

“ 글쎄요. 저로서도 판단이 잘 서질 않습니다. ”

무언가 생각이 있는 것처럼 말해놓고정작 결론이 없다.

그에 알버트가 허탈한 심정을 감추지 못했으나, 뒤이어 들려오는 말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 또는 다른 대부분의 엘프들도 인간들의 세상 물정에 어두웠으나, 소드마스터가 위협적이 그지없다는 것은 잘 안다. 더구나 그 소드마스터가 엘렌과 같은 남자를 싸고도는 공작이라 하니 골치가 아플 만했다.

소드마스터와 유산을 품은 엘프.

알버트는 악랄하기 그지없는 조합을 두고 머리가 새하얗게 물들어감을 느꼈다.

“ 하지만 세상은 저 혼자 사는 게 아니지요. 그러니 시간이 조금 걸리겠지만, 지금 당장 모든 엘프 마을에 전령을 파견하겠습니다. 촌장들을 전부 모아 대회의를 열어야겠어요. ”

종족 전체의 생존 등 중요하기 그지없는 사안을 논의할 때만 거행되는 대회의.

에일렌은 오베론 마을의 촌장이자 대회의의 의장으로서 서른 마을의 촌장 전부를 모을 생각을 굳혔다.

그에 알버트도 일리가 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에일렌이 말했던 만약이 실현된다면 엘프 전체가 위험할 테니까.

“ 알버트. 지금 당장 군영으로 가서 발이 빠른 분 서른을 추려 각 마을로 파견토록 해 주세요. 급합니다. ”

“ 예! 지금 당장 가겠습니다! ”

◎◎◎

오베론을 중심으로 한 나머지 스물아홉 마을의 촌장에게 소식을 전하는 데 며칠이 걸렸고, 또 그들이 오는 데 며칠이 걸렸다.

그 기간을 다 합해보면 족히 일주일 정도가 소요되었다.

그리고, 평소 사용하지 않는 대회의장에 모여 중론을 모으는 데 또 시간을 소비하고 있었다.

먹고 쉬는 때를 제외하면 새로이 올라온 안건에 대해 격렬하게 의견을 주고받았고, 또 갈라졌다.

사안이 사안이다보니 의견을 모으기가 좀처럼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었다.

엘프의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고, 그러기엔 엘프라는 종의 뿌리가 흔들릴 위험이 있다며 반대하는 이도 있었다.

조용한 벌집을 쑤시는 꼴이니 가만히 지켜보아야 한다는 생각을 내놓는 이도 있었다.

결론이 날 듯 말 듯 하면서도 나지 않았고,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것만 같은 시간이 계속 이어졌다.

화두에 오른 엘렌 자체의 무력만으로도 골치 아프기 짝이 없는데, 또 다른 거대한 난관 하나가 떡하니 버티는 상황이다.

그로 인해 의견이 갈라지는 것도 당연했다.

그 와중에도 에일렌의 의견에 동조하는 이들이 조금씩, 조금씩 늘어가고는 있었다.

엘프가 엘프의 힘을 가진 채 살아가면 모를까, 인간에게 흠뻑 빠져 있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그들 또한 공감하는 바였다.

─그러니까…….

─아니, 그렇게 되면 또…….

문제는 풀리지 않고, 좋지 않을 가능성이 계속 제기 될 뿐.

전례 없이 길어지는 대회의에 촌장들 모두가 지쳐갈 무렵, 한 엘프가 귀가 솔깃한 의견을 내놓았다.

모두가 지쳐있었기에 적당히 말이 되는 것이라면 좋다고 여기는 탓도 있었다.

지온을 납치하여 고삐를 쥔다.

소드마스터나 유산을 얻은 엘프나 모두 한 남자에게 목을 매고 있으니, 그 남자를 이용하자는 의견에 모두가 눈을 반짝였다.

협상보다는 납치와 마법, 그리고 아이템을 이용함으로써 그를 세뇌할 생각도 하고 있었다.

협상을 하기엔 인간의 욕심을 믿지 못하니, 확실한 수단으로 안정을 얻으려 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그곳에 모인 촌장 모두가 그에 동의했다.

어떻게든 틈을 봐, 상대적으로 만만한 지온을 납치하자는 생각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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