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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의 기둥서방이 되었다-84화 (84/192)

〈 84화 〉 이번에는 무사히... #3

* * *

국왕의 생일은 필연적으로 모든 귀족이 모여들기 마련이다. 즉,

“ 이렇게 얼굴을 뵙게 된 건 처음이지요? 반갑습니다. 루크 킬리네어입니다. ”

킬리네어의 새로운 공작이 된 젊은 남자, 루크 킬리네어와 마주치는 것도 이미 정해진 일이었다.

하물며 이번에 새로이 자기 직위를 공고히 한 만큼 더욱 참석하지 않을 수가 없었으리라.

그저 문제가 하나 있다면 루크 쪽에서 먼저 인사를 하러 찾아왔다는 것에 있었다. 참 반응하기 묘하게도.

“ 그렇지요. 이름만 듣고 서면으로 보냈을 뿐이었는데, 이렇게 뵙게 되네요. 헬레나 크라우저입니다. ”

헬레나는 지극히 무덤덤하게 악수를 나누었다.

대뜸 인사를 하고 싶다며 찾아온 것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사소한 거래를 나눈 사이라고는 하나 고작 그 뿐인 것처럼 보였다.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은 딱 그 정도.

다만 루크는 그와 다르게 헬레나를, 더 나아가 크라우저 공작가를 제법 반기는 눈치였다.

“ 한 번 직접 얼굴을 마주하고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었습니다. 마침 전하의 생신이 그 좋은 기회를 마련해 준 셈이군요. ”

“ 감사요? 킬리네어 공작께서 제게 감사할 일이 있나요? ”

헬레나가 고래를 갸웃거리며 묻자, 루크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 물론이지요. 과거의 인연이 어찌 되었던, 공작님이 저를 다음 공작으로 임명해 주셨기에 제가 이 자리에 올 수 있을 기회를 잡게 되었고, 그 결과 공작이 되었습니다. 아시다시피 그로 인해 부끄러운 일도 있었지만……. ”

부끄러운 일이란 그의 형, 로크와 암투를 벌이고 처형에 이르게 된 일을 이야기하는 것이겠지.

루크는 그를 위해 벌였던 거래를 은근슬쩍 언급하려 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액면 그대로 판단할 수도 있는 말이었다.

본래 차남이었던 그가 다음 공작으로 임명된 탓에 불필요한 집안싸움을 벌이게 되었다는 뜻으로.

“ …네. 그랬었지요. 그러니 공작께서 쓸데없는 일에 휘말렸다며 저를 원망하셨으리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보네요. ”

“ 쓸데없는 일? 당치도 않습니다. 오히려 작위 계승권이 없어 답답해하던 제게 예기치 않은 행운이었지요. 달리 말하면 기왕이면 높은 곳을 노리고 싶은 게 사내의 본성에 길을 열어주신 셈이기도 하고요. ”

길이라.

작위 욕심이 있는 남자가 차남의 위치에 있으면 답답할 만도 하다.

또불미스러운 일이 원인이었으나. 어쨌든 길이 뚫린 셈이니 그럴 만도 하다.

“ 길이라… 말씀을 참 잘하시네요. ”

“ 어이쿠. 아부 같은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드리는 말씀입니다. 물론, 대공께도요. ”

대뜸 루크가 장식마냥 가만히 자리만 지키고 있던 내게 시선을 두며 말을 걸어왔다.

사람 좋은 미소를 띠며 말하는 것이 참 좋은 인상처럼 보였다.

꾸며낸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나쁘게 보이질 않을 정도였다.

“ 제게요? 저는 공작께 도움을 드린 기억이 없는데……. ”

“ 예. 저 또한 킬리네어 공작가의 일원으로서 좋지 않은 감정을 가져야 정상이겠지만, 전혀 그렇지가 않습니다. 공적인 자리에서는 도저히 말하기 어려운 내용이겠으나……. ”

나로서는 너무도 반응하기 곤란한 이야기들을 잘도 내뱉으며 여유롭게 웃기까지 했다.

얼핏 보면 공작이 된 것이 그렇게 좋을까,

줏대도 없다라는 평가가 나올 지도 모를 만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듣기로는 어느 정도 머리를 굴릴 줄 알고 로크와의 암투에서도 이긴 남자다.

공식적인 후계자라는 큰 명분을 등에 업은 덕도 없다고 말 못할지라도, 단지 그것만으로 현 직위를 안정시킨 것은 아닐 것 같았다.

“ 아무튼, 서로가 다소 다른 길을 걷고는 있지만… 이 나라를 위한 마음은 다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사소하게 충돌할 수는 있을지 모르나, 앞으로 좋은 관계를 다져가고 싶다는 것이 제 심정입니다. 그럼,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

좋은 관계라. 나는 그 말을 끝으로 자리를 뜨는 루크의 등을 바라보며 낮게 한숨 쉬었다.

결과적으로 큰 도움을 받았다고는 하나 가문의 입장에서는 원수와 다름없는 우리에게 보인 정중한 태도.

더해,그의 입장에서 몹시 성가신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은밀하게 거래 한 독심까지.

나는 루크라는 남자가 새삼 거북하다고 느끼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얽히지 않고 먼 나라의 남 마냥 거리를 두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라 생각하며.

◎◎◎

대공은 공작의 역린이다.

그러니 되도록 관망하는 것이 옳다.

연회 자리에 참석한 귀족들 대다수가 그렇게 생각했고, 또 그 생각을 잘 실천하고 있었다.

크라우저와 같은 국왕파의 귀족들만이 그에게 살갑게 인사를 건넬 뿐이었다.

헬레나의 광기와 전 킬리네어 공작이었던 알버스 킬리네어의 오만.

그 두 가지가 섞여 터져버린 작년의 결투를 한 단어로 표현해보면, 대환장이라는 말이 이렇게 잘 어울릴 수가 없었다.

공작과 공작끼리 서로 얼굴을 붉히는 것도 모자라 영지전까지 치르려 했던 후문을 들었을 때, 그 놀람이 얼마나 컸는지는 귀족들 모두가 알고 있었다.

소드마스터라고는 하나 얌전하기 그지없던 헬레나의 광기와 집착이 그토록 깊다는 것도.

지온 알트람은 역린이다. 현대적인 말로 표현하자면 발작버튼이다.

고로 데릴사위라고는 하나 대공의 지위를 가진 그에게 여자를 이용해 줄을 대 보려는 시도들이 시작부터 막혀버린 일도 있었다.

그러니 그를 내버려 두거나 형식적인 인사만 건넬 뿐, 좀처럼 거리를 좁히지 못할 수밖에

…라고, 발코니에 대기하던 엘렌이 말했다.

그 모두가 엘프의 귀로 주워 담은 이야기들이었다.

“ 저 무례하기 짝이 없는 족속들에게 그들의 실수를 깨닫게 해 주어도 될까요? ”

“ 워, 워. 진정해. ”

나는 사나운 소를 달래듯 엘렌의 턱을 쓰다듬었다.

어찌 보면 강아지를 귀여워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손짓이었다.

그러니 당하는 입장에서는 다소 기분이 나쁠 법도 했으나, 내 손길을 무척 즐기는 눈치였다.

“ 아… 좀 더 아래쪽으로도 쓰다듬어 주실 수 있으신가요? ”

엘렌이 눈꼬리를 늘어뜨린 채 욕정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내 손과 큰 곡선을 그리는 가슴 쪽을 번갈아 쳐다보는 것이, 언제 이렇게 밝히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들게 했다.

“ 엘렌. 여기 연회장이야. ”

“ 하지만… 저기 숲 쪽이나 다른 방에서도 교성 소리가 들려오는걸요? ”

나는 깜짝 놀라 엘렌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최대한 시력을 강화해 숲 쪽을 뚫어져라 쳐다봤더니 참 노골적이기 그지 없는 행위가 은밀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저러라고 만든 인조 숲이 아닐 텐데.

“ 진짜네. ”

“ 그렇죠? 그러니 귀족의 꼭대기라 하실 수 있을 대공께서 저러신다 한들 누가 불평하겠어요? ”

“ 내가 불평하지. ”

딱!

나는 엘렌의 이마에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제법 아프게 때렸기에 엘렌이 저도 모르게 이마를 싸매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서로간의 정이 깊어진 덕인지 이렇게 해도 거리낌이 없었다.

“ 아얏?! ”

“ 요즘 들어 너무 거리낌이 없어졌어. 사람이 많을 때는 조금 진정해. ”

“ 네. 죄송합니다……. ”

엘렌이 풀이 죽어 사과하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다소 무거웠다.

억지로 기를 꺾은 것 같아 영 편치 못했기 때문이다.

필요한 일이었기에 사과하거나 잘못했다는 생각은 안 하지만, 그와는 별개였다.

더구나, 안전을 위해서라도 엘렌의 기를 꺾는 편이 더욱 옳았다.

헬레나의 차갑기 그지없는 시선이 엘렌을 향하고 있었으니까.

“ 참. 국왕에게 줄 선물은 이미 전달하신 건가요? ”

엘렌은 약간 부어오른 이마를 살살 쓰다듬으며 물었다.

국왕과 만나는 자리에 함께하지 않았으니 모르는 것도 당연했다.

결투를 할 때는 당사자였기에 어쩔 수 없었더라도, 국왕 또한 다크엘프를 꺼려하는 보통 사람이었기에.

“ 그래. 왕의 침실에 놓아두기로 했어. ”

독을 타기 가장 좋은 식당, 그리고 침실. 둘 중 어느 곳에 놓을지 고민하다 침실로 정했다.

왕의 침실이나 밥을 먹는 식당은 항상 기사 몇몇이 호위를 서고 있으니 안전하다 치고, 어느 장소가 독에 대처하기 쉬운지를, 또 어느 장소가 더 곤란한지 고민하여 내린 결정이었다.

“ 침실도 좋은 선택이네요. 밤중에는 아무래도 틈이 많이 생기니까요. ”

“ 그렇지. 더구나 침실에 놓아두면 만에 하나 일이 터져도 안정을 취하기에 좋을 것 같았거든. ”

제법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한가로이 이야기를 나누니 참 편했다.

귀족들이 알아서 눈치를 봐주는 덕에 나 또한 편했고, 이렇게 자리를 비켜 줄 명분도 만들 수 있어서 좋았다.

정치적으로 사람을 대하기가 어렵고 거북하기도 했으니 더욱 그랬다.

더해, 엘렌이 온갖 이야기를 주워들은 덕에 정보 수집이라는 예상치 못한 성과도 얻을 수 있었다.

“ 대부분은 비자금을 어디에 숨겼니, 보석이 얼마니 하는 염문에 관련된 이야기뿐이네요. 그 사람 개인을 협박하는 데 쓸 수 있을지는 몰라도, 썩 유익하지 못한 말들이 많아요. ”

“ 연회장 쪽도 영양가 없긴 마찬가지겠네? ”

“ 네. 굳이 안 들어도 될 내용이 많네요. 각자의 사업 계획 등을 이야기하는데, 제가 봐도 공작님과 대공님의 흥미를 끌지는 못할 것 같아요. ”

귀족이 연을 맺어 개인 사업을 하겠다는데 끼어들 수도 없을 노릇이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엘렌은 그와 같은 우리의 성향을 잘 알았기에 지금과 같이 말한 것 같았다.

“ 별로 특별한 건 없었네. ”

특별한 것은 없었지만 대강 돌아가는 사정을 앉은 자리에서 파악할 수 있었다.

오늘은 그것만으로도 제법 성과가 있었다 생각하며, 나는 서서히 열이 식어가는 연회장을 힐끗 보았다.

◎◎◎

“ 드디어 끝났다……. ”

볼 필요 없는 눈치를 괜히 보던 시간이 다 끝나니 어깨가 가뿐했다.

물론 내 행동거지를 조심한다는 의미에서 아예 의미가 없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대공치고는 너무 소극적이지 않았나 싶기도 했다.

적당히 인사하고, 적당히 물러나 연회의 분위기를 흐리지 않게 했던 행동들.

그로 인해 전체적인 분위기도 나쁘지 않았다.

본래라면 광기를 직접 드러냈던 헬레나를 피해야 하는 것이 맞겠지만, 귀족들은 다른 생각을 하고 움직였다.

발작버튼인 나만 건드리지 않는다면 헬레나를 그리 무서워할 필요가 없다는 결론이 바로 그랬다.

실제로 그 결론은 잘 맞아떨어졌고, 그 결과 헬레나가 귀족들을 응대하며 분위기를 맞추어 나갔다.

곁에서 지켜보며 위로만 했던 나는 상대적으로 참 편안했다.

국왕도 값비싼 아티팩트를 얻어 기뻐했다.

아직 그 날 벌어졌던 결투의 여운이 가시질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좀 더 괜찮아지지 않을까 생각했다.

“ 고생했어. 원래 옆에서 계속 붙어 있어야 했는데……. ”

“ 괜찮아. 서로 합의해서 정한 일이잖아. 국왕의 경계심도 어느 정도 풀었으니 좋고. ”

헬레나가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피식 웃었다.

그녀가 말했던 대로 가장 중요한 국왕의 호감을 샀으니 그것으로 만족할 만 했다.

더해 같은 파벌에 속한 귀족들끼리 은근히 콧대가 선 것을 확인할 수도 있었다.

이유야 어찌되었던 간에, 국왕파가 귀족파를 크게 찍어 눌렀다는 것은 변함없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현실이 그러했고, 귀족파의 힘이 상대적으로 약해진 것 또한 사실이었다.

이 상황을 개선해야 할 루크 킬리네어로서는 썩 반기기 힘든 상황일 터.

그럼에도 그를 해결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엿보이는 듯 했다.

만약 아니라면 단순히 본인이 권력을 쥔 것이 기쁠 뿐이겠지.

“ 참. 그런데… 이건 왜 만들어 두라고 하신 거에요? 명령하셨으니 따르기는 했는데……. ”

헬레나가 마부석에 앉아 꾸벅꾸벅 졸던 중, 엘렌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품에서 종이 뭉치를 꺼내 흔들었다.

무언가 글자가 빼곡히 써진 꼴이 척 보기에도 내가 자주 처리하던 서류와 꼭 닮아 있었다.

“ 전쟁은 미리 대비하라고 하는 말이 갑자기 생각나서. 별 도움은 안 되겠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기도 했어. ”

“ 이… 불륜 리스트가요? ”

불륜 리스트.

편의상 그렇게 이름 붙이기는 했지만, 엘렌이 귀담아 들은 각 귀족의 은밀한 사생활이 자세히 적힌 물건이었다.

제목대로 단순한 불륜관계부터 시작하여 합법과 불법을 오가는 일들도 간간히 적혀 있어, 그야말로 귀족들의 역린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물론 구체적이고 결정적인 정보가 없어 평판이 깎이거나 가정불화로 인한 곤란에 그칠 정도뿐이겠지만, 이를 바탕으로 더 많은 정보를 캐낼 구멍을 마련한 셈이었다.

또, 당장 이용하지는 않더라도 언젠가 도움이 될 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생각을 바꾸어 말만이라도 기록 해 두었다.

“ 나는 그렇게 생각해. 일단 만들어 놓으면 소소하게나마 도움이 될 지도 모르잖아. ”

“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

정말 도움이 될까 고개를 갸웃거리던 엘렌이, 언제 그랬냐는 듯 내 말이 다 옳다며 고개를 힘껏 끄덕였다.

처음 보았을 때와 다르게 점점 강아지처럼 변해가는 모습이 참 귀여워, 나는 저도 모르게 엘렌의 뺨을 쓰다듬으며 웃었다.

“ 그래. 그러니까 고생 많았어. 저택에 돌아가면 상을 줘야겠네.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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