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화 〉 이번에는 무사히... #1
* * *
“ 저… 많이 생각해 봤는데, 공작님의 말씀대로 따르고 싶어요. 괜찮을까요? ”
며칠 동안 손님방에 가만히 틀어박혀 있기를 며칠.
별 다른 설득 없이 스스로 행동하도록 두었기에 돌아갈 것이라 생각했으나, 집무실에서 들려준 이브의 대답이 참 의외였다.
공작님의 말씀이라는 대목을 보니 헬레나가 따로 설득했다는 것은 알았다.
“ 물론이죠. 저로서는 무척 환영할 만한 일이군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릴게요. ”
그러나, 왜 헬레나가 직접 나서서 설득에 나선 것일까.
그 이유를 알고 싶었던 나는 이브가 자리를 뜨기 무섭게 옆에 앉은 헬레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 어떻게 된 거야? ”
“ 아, 이브? 마탑에서도 괴짜라 불리며 여러모로 쓴 소리를 듣는 모양이지만 여기서 성과를 냈잖아. 게다가 그 성과를 보니 욕심이 났거든. 그래서 우리 쪽에 머물게 하면 좋을 것 같았어. 또, 우리도 공작가니까 전속 마법사 하나 정도는 둬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있었고. ”
전속 마법사라.
마법사를 손님으로 초대하여 능력을 빌리려는 사람은 잘 없지만아예 일어나지 못할 일도 아니다.
충분히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라는 느낌이 강하게 뇌리를 스쳤다.
“ 그것 뿐만은 아니지? 다른 이유는 또 뭐가 있어? ”
“ 다른 곳에서 능력을 발휘하게 두기엔 너무 위험할 것 같아서. ”
위험이라.
나는 헬레나의 예측이 제법 정확했음에 내심 놀라며, 겉으로는 태연한 척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 어떤 점에서? ”
“ 모기만을 죽이는 안개. 그건 바꿔 말하면 사람만을 죽일 수 있는 안개가 될 수도 있다는 뜻이야. 복잡한 식이 필요한 모양이기는 한 모양인데, 넓은 범위에 걸쳐 빠르게 처리할 수 있다는 장점에 비하면 단점도 아니고. ”
“ 그래. 그렇긴 하겠다. ”
“ 더구나 지금이야 뿌연 안개가 피어 그 범위라도 알 수 있지만, 나중에 개량을 거치면 아예 투명하게 만들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게 되면 마나의 흐름으로 수상쩍은 기색을 눈치 채야 할 텐데, 막상 시야가 막힘없이 깔끔하니까 독이 떠도는 구역이라 생각도 못하고 발을 들일 가능성도 높아. ”
그랬다간 끝이지.
헬레나는 거기서 말을 끊으며, 그렇기에 공작령 아래에 두어 관리하려는 생각을 굳혔다고 전했다.
“ 그래서 은근슬쩍 언질을 주긴 했는데… 혹시 화났어? ”
갑작스레 헬레나가 풀이 죽은 기색으로 눈꼬리를 내렸다.
실수를 저지른 탓에 곧 들이닥칠 부모의 호통을 기다리는 어린아이 같았다.
어느 정도 각오는 했지만 어쩔 수 없이 두려워하는 그런 느낌이다.
나로서는 전혀 화낼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헬레나의 눈썰미가 여전했음에 놀랐다.
어쩌면 누구나 헬레나와 같은 생각을 할지도 모르지만, 이브의 힘을 미리 아는 내 입장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세상 일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는 법이지.
나는 의도치 않게 가장 위험한 세 여자가 같은 자리에 있음에 안도하며 헬레나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 전혀. 말없이 인재 하나를 끌어들인 건 놀랍지만, 그저 놀라웠을 뿐이야. 전혀 화 안 났어. ”
“ 정말…? ”
“ 그럼. 정말이지. 오히려 사람 욕심이 죽지 않은 것 같아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근래에 헬레나가 날뛰던 일이 많아서 더 그런 것 같기도 하고. ”
“ 크, 크흠. 그에 관해서는 할 말이 없지만……. ”
안도에서 당황, 다시 안도하며 내게 몸을 기대는 헬레나.
나는 부드럽기 그지없는 그 몸을 단단히 받히며 서류 작업에 몰두하려 했다.
손님맞이용 나무 소파에 앉아 부럽다는 듯, 또 안타까운 듯 나를 바라보는 엘렌의 눈빛이 없었다면.
“ 엘렌. 엘렌도 이리로 와. ”
“ …네! ”
엘렌은 내 부름이 떨어지기 무섭게 나의 오른편에 의자를 들고 와 앉았다.
헬레나와 나란히 쌍벽을 이루는 부드러운 몸이 품에 가득 차는 느낌이 만족감을 불러 일으켰다.
헬레나는 졸지에 사이에 끼어든 엘렌을 보며 잠시 눈을 흘리다 짧은 한숨을 쉬며 책상 위로 시선을 두었다.
오늘만은 어쩔 수 없이 넘어간다는 듯한 몸짓이었다.
양팔에 여자를 끌어안은 채 집무실에서 일을 한다.
나나 다른 사람이 보더라도 일은커녕 노닥거리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풍경이었다.
더구나 불반도의 인간들이 본다면 온갖 말이란 말이 튀어나왔겠지.
그런 점에서 볼 때 판타지 세계는 참 좋았다.
소문이 퍼질지언정 그 속도가 상대적으로 느리기도 했기에.
“ 아… 그러고 보니 다음 달이 벌써 국왕전하의 생신이시구나. ”
그렇게 말없이 문득, 엘렌이 국왕 알현을 준비해야 한다는 보고서를 보며 혼잣말을 했다.
국왕의 생일이라.
벌써 그럴 시기가 다가왔다는 것이 놀랍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미안하기도 했다.
형식적인 측면이 강하다고는 하나 본인이 주역으로, 누구보다 즐겁게 보내야 할 시간에 골치 아픈 일을 겪게 되었다.
물론 고의가 있었던 것도 아니며 상황이 이상하게 꼬인 결과였을 뿐이지만, 그 원인의 축으로서 양심에 찔리는 구석이 있었다.
“ 왕의 생일이라… 벌써 그럴 때가 되었구나. ”
“ …그러게. ”
헬레나가 생일이라는 말에 한 차례 움찔거렸다.
머리칼과 각도 때문에 표정이 잘 보이지는 않더라도 어떤 표정을 하고,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것만 같았다.
그녀도 좋을 시기에 찬물을 끼얹은 사람 중 한 사람이었으니까.
“ 작년에 있었던 불미스러운 일에 대한 사죄를 담아 선물 규모를 좀 더 키우고 싶은데… 괜찮을까? ”
“ 응. 나도 그게 좋을 것 같아. 후회는 안 하지만, 전하께 폐를 끼친 건 사실이니까. ”
“ 아… 그러고 보니 작년에 결투를 했었죠. ”
공교롭게도 이곳에 있는 모든 이가 그 일과 관련이 있었다.
벌써 결투를 치르고 일 년이 다되었다는 것이 참 놀랍기도 했고, 시간이 생각 외로 빨리 흐르는 것이 씁쓸하기도 했다.
워낙 정신이 없을 일이 많았던지라 더욱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 올해는 무난하게 넘길 수 있겠죠? ”
“ 아마 그렇지 않을까. 나도 그 때와 다르게 분에 넘치지만 대공이 되었으니까. ”
“ 그렇지. 대공에게 시비를 걸 만한 인간이 과연 그 자리에 있을까 싶기도 해. ”
나와 헬레나가 엘렌의 물음에 적당히 한 마디씩 번갈아가며 답했다.
약혼자였으나 시종이자 자작의 아들이었던 전과 다르게 헬레나와 명백한 부부관계이며, 그 덕에 대공이라는 거창한 신분이 되었다.
대공은 곧 공작을 대신할 수 있으며신분상으로 따져보면 공작과 후작 사이에 위치해 있다.
공작이 자리를 비우거나 예외적인 재난이 생기면 그 권한을 대행하는 진짜 공작이 된다. 그것이 이 대륙의 귀족법 중 하나였다.
어쨌든 확신은 없으나 제발 무난히 넘어가기를 기도했다.
일이 터지는 것보다는 지루하더라도 무난한 편이 좋았다.
“ 어디, 다음은……. ”
적당히 지시사항을 적은 종이를 함께 붙이며 서류를 처리하던 중 새로운 안건이 눈에 들어왔다.
공작령 외부를 둘러 싼 성벽을 지키는 군사들로부터방어력 강화를 위한 예산을 편성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 우리 영지가 방어가 부족하던가? ”
“ 응? 그럴 리가. 자만은 아니지만 성벽 상태도 좋고, 병사들도 전부 다 정예병인걸. 지온도 알잖아. ”
헬레나의 말은 엄연한 사실이었다.
기사단 훈련까지 도맡아 하는 그녀가 관리하는 병사들은 모두 정예병이었고, 그렇기에 그 수준은 왕국 제일이라고 자부할 수도 있었다.
“ 잘 알지. 그러면 미리부터 대비하려는 걸까? ”
“ 아무래도 그것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해. 달리 소식이 들어온 것도 없으니까. ”
“ 정말 부지런한 사람들이야. ”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는 전쟁을 준비하라는 말을 그대로 실현하는 이들이었다.
참 존경스럽기 그지없었고, 단순히 제 의무만 하려는 행동에서 나올 수 없는 생각이기도 했다.
나는 헬레나와 함께 나머지 서류를 마무리 한 뒤, 영지 방어를 위한 서류를 손에 쥔 채 팔랑거리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헬레나가 무슨 일인가 싶어 바라보기를 잠시. 곧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 좋아. 그 전에 점심시간이 다 되었으니까 밥부터 먹고 나서자. 응? ”
◎◎◎
밥을 먹고 적당히 여유를 둔 뒤, 우리는 곧장 성벽 쪽에 설치한 군사 구역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곳에는 현대와는 다른 분위기의 벽돌로 지은 막사가 여럿 있었고, 병기고나 식량창고 등의 건물도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우리가 방문한 곳은 성벽의 동서남북으로 분산된 구역 중에서 남쪽이었다.
“ 아, 공작님! 어쩐 일로 기별도 없이……. ”
그 중에서도 행정반과 비슷한, 일종의 사무실을 지키고 있던 기사 롤랜드가 우리를 반갑게 맞아들였다.
그는 공작령의 기사임과 동시에 행정보급관 역할도 담당하는 남자였다.
“ 방어 강화를 요청하는 서류를 보고 왔어요. ”
“ 아…! 그 서류를 보셨군요. 저희 대장이 이쯤에서 미리 보충하는 게 좋다며 보고를 올리셨습니다. 성벽을 보수한지 그리 오래된 것은 아니지만……. ”
롤랜드가 난처하다는 듯 말꼬리를 흐렸다.
그가 말한 대로 성벽 보수를 끝낸 지 그리 오래된 것도 아니니 아직까지 걱정할 것은 없으나, 그럼에도 한 번 확인하고자 하는 생각엔 동의하고 있었다.
다만 그 수장이라 할 수 있을 공작이 직접 움직였으니 다소 꺼림칙하게 느끼는 눈치였을 뿐.
“ 너무 곤란해 할 것 없어요. 마침 산책도 할 겸 성벽을 돌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네요. ”
헬레나가 대수롭지 않게 웃으며 대꾸하자롤랜드가 기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헬레나의 진심이 느껴지자 안심한 눈치였다.
“ 아, 감사합니다! 그럼 지금이라도 당장 말을 구해 오겠습니다! ”
“ 부탁드려요. ”
롤랜드가 마구간으로 부리나케 뛰어나는 동안우리는 사무실을 나와 주위를 둘러보았다.
대뜸 높으신 분이 찾아왔으니 눈을 마주치는 병사 하나하나가 당황했다.
4성장군이 말도 없이 찾아온 것과 비슷했으니 긴장할 만도 했지.
위로가 될지는 모르나, 나는 그들을 둘러보며 적당히 농담을 던지며 편히 할 일을 하라는 말을 했다.
헬레나도 내 말을 거들어주며 긴장을 풀어주도록 최대한 노력했고, 환경이 어떻다느니 하는 말은 한 마디고 꺼내지 않았다.
예를 들어,
─이곳은 참 깨끗하네요. 관리도 잘 하고 있어서 참 보기가 좋아요.
이렇게 말하면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 안심할 수도 있겠지만, 반대로 무언가 속뜻이 있는 게 아닐까 싶어 부대가 난리 나는 경우도 있었다.
사단장의 방문이 그 좋은 일화겠지.
물론, 이와 반대로 청소 상태를 있는 그대로 지적하면 분위기가 참 안 좋아진다.
그 뒤에 일어날 일은 구태여 말할 것도 없으니, 이렇게 말을 아끼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했다.
평상시나 다른 때라면 모를까, 오늘은 상급자의 신분으로 부대를 찾아왔으니까.
“ 말을 끌고 왔습니다. 가시죠. ”
롤랜드가 병사들의 도움을 받아 말을 끌고 왔다.
우리는 기다렸다는 듯 말을 타고 밖으로 나섰고, 남쪽 관문을 통과하기 무섭게 헬레나가 먼저 말을 달리게 했다.
히히힝! 말은 우렁차게 소리 지르며 거친 말발굽소리를 내며 뛰었고, 우리 또한 자연스럽게 그 뒤를 따르게 되었다.
무작정 빨리 달리는 것만은 아닌 것으로 보아, 우선 대략적으로 성벽의 상태를 훑어보려는 심산이리라.
“ 음……. 성벽은 눈에 띄는 할 만 한 문제가 안 보이네요. 굳이 흠을 잡으려 하면 잡을 수는 있겠지만, 도구가 새것에 비해 조금 빛이 바랬다하여 버리는 것과 다를 바 없을 것 같아요. ”
“ 예,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
그 후 몇 시간에 걸친 정찰 끝에 성벽을 새로이 보수할 필요가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롤랜드 또한 그에 심히 공감하는 눈치였고, 나 또한 그렇게 생각했다.
무엇보다 내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는 헬레나가 내린 결론이니 믿는 것이 당연했다.
“ 그렇다면 성벽에 새로운 무기를… 아니지. 그렇게 되면 관리가 너무 어려울 수도 있을 테니 녹만 슬 수도 있겠네요. ”
“ 예. 배려해 주신 덕분에 보급에 문제는 없습니다. 오히려 말씀하신 대로 양을 늘리면 그것대로 곤란하겠죠. ”
“ 음… 그럼 어떻게 한다. 모처럼 이렇게 나왔으니 그럴 듯한 방안 하나 정도는……. ”
헬레나가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에 잠겼다.
어느 새 해가 짙게 내려앉아 새빨간 노을이 점점 죽어가는 와중이었기에, 곧 있으면 밤이 짙게 깔리는 시간이 될 것 같았다.
남문 바로 앞에 위치해 있기에 위험할 것은 없더라도 슬슬 돌아가야 할 시간임에는 분명했다.
더구나 한 시 바삐 처리를 요할 만큼 급박한 상황도 아니니, 좀 더 여유를 두고 생각하는 것도 좋을 듯싶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내가 헬레나의 어깨에 손을 얹으려는 순간,
“ 참. 마침 우리 영지에 새로이 마법사를 들였어요. 그 분의 도움을 받아보죠. ”
헬레나가 이브를 알뜰하게 써먹을 뜻을 입에 담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