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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의 기둥서방이 되었다-81화 (81/192)

〈 81화 〉 아내의 유혹

* * *

“ 으으응……. ”

한 남자와 두 여자가 나란히 침대에 누워 늘어져 있던 중, 한 여자가 먼저 다른 여자를 깨워 몸을 씻어냈다.

여자는 헬레나와 엘렌이었으며, 희미한 햇살이 점점 밝아질 무렵이었다.

몸을 단정히 한 헬레나는 지쳐 잠든 남자, 지온을 부드러운 눈으로 바라보다 발코니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평소라면 쾌락에 허우적대며 신음했어야 할 시간에 너무 진지하다고, 엘렌은 내심 긴장하고 있었다.

“ 대공을 깨우지 않으시고 굳이 자리까지 옮기신 이유가 있으신가요…? ”

엘렌이 자리에 앉기 무섭게 나지막한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창문 너머의 발코니이기에 별 다른 방음시설이 없어 목소리를 낮추는 수밖에 없었다.

지치지 않은 지온이라면 엿들을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의 그는 지쳐 잠든 상태였다.

그러니 목소리를 낮춰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 제 일을 마친 마법사에 관해서야. 내 뜻은 반쯤 정해졌지만, 네 의견도 들어보려고. ”

“ 아… 그 마법사 말씀이신가요? 그런데 제 의견은 굳이 들어 볼 필요도 없지 않으신가요? 이 영지의 주인은 공작님이시고, 그 뜻에 따라 처리하셔도 될 것 같은데……. ”

헬레나의 역린이자 나사 빠진 모습이 무엇인지같은 남자를 좋아하는 입장으로서 잘 안다.

또한 그 이외엔 공작으로서 흠 잡을 데가 없으니 구태여 남의 의견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없었다.

첩과 같은 처지의 자신이라면 더더욱.

엘렌은 그리 생각하며 고개를 갸웃거렸으나헬레나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같은 남자의 품에 안기는 여자로서의 동질감.

또한 엘렌이 스스로의 한계를 알고 그은 첩이라는 선에 위치한 여자의 의견을 듣고 싶어 했다.

“ 나는 마법에 관해서는 비전문가야. 눈이 어둡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그러니 계통은 다를지언정 마법을 사용하는 사람… 아니, 엘프의 의견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 ”

“ 그러셨군요. ”

“ 또, 이유야 어찌되었던 지금의 너와 나는 그의 여자야. 같은 공통점을 가진 사람으로서 적당히 의지할 만하거든. ”

성생활을 한층 더 즐겁고 진하게 만들어 주는 약의 제조부터본인에게는 숨겼으나 영혼을 잇는 의식의 처리까지.

엘렌이 사적으로 해 주었고, 지금도 계속하는 일은 무척 고맙기 그지없었다.

특히 영혼으로 이어진 이후 한층 더 끈적한 인연을 느꼈으니 좋지 않을 수가 없었다.

더구나, 그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같은 처지에 놓인 엘렌에게는 다소 관대해진 경향도 있었다.

누가 더 많은 애정을 얻느냐로 사소하게 질투할 때도 있으나, 단지 그 뿐이었다.

칼을 뽑으면 모두가 공멸하는 상황이기에 참을 수밖에 없었으나예기치 않게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헬레나는 온전한 상태의 지온과 지내기 위해 이를 악물었던 자신을 새삼 자랑스럽게 여겼다.

아무튼, 지금은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

헬레나는 과거의 늪에서 벗어나 현실로 눈을 돌린 뒤천천히 입을 열었다.

“ 우선, 나는 그 여자를 마탑에 보내지 않고 내 영지에 잡아 둘 생각이야. ”

“ 감금을 하실 요랑은 아니실 테고… 정식으로 받아들이실 모양이네요. ”

“ 그렇지. 너도 알다시피 그 여자… 이브 그린우드가 가진 마법 능력은 독특해. 더구나 너무 위험하지. ”

위험하다.

엘렌 또한 그 말이 무척 와 닿는지 제법 힘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 위험하죠. 이번에야 모기만을 죽이는 선에서 끝났지만, 달리 말하면 다른 것들도 언제든지 죽일 수 있다는 거겠죠. 그것도 설치형 마법진을 사용했으니 주기적인, 또 훼손만 피한다면 반영구적으로 가능한 일일 테고요. ”

“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영지 전체를 감쌌던 그 안개가 사람을 죽이려 들었다면 꼼짝 없이 당하고 말았을 거야. 너나 나는 죽지 않고 괜찮을지 모르겠지만……. ”

헬레나가 말꼬리를 흐리며 창문 너머를 응시하듯 고개를 돌렸다.

창에 가려 보이지는 않지만지금 그녀의 눈에는 침대에서 고이 누워 자고 있을 지온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었다.

알 만하다.

엘렌은 다시 자신을 향해 시선을 두는 헬레나의 뜻에 공감한다는 듯 입술을 떨었다.

“ 대공께서 무사하실지 장담할 수는 없겠죠. ”

“ 응. 괜찮을 지도 모르지만, 괜찮지 않을 수도 있어. 그래서 위험하고, 그래서 곁에 두고 우리 사람으로 만들어야 할 필요성을 느꼈어. 위험성을 빼고 보더라도 꽤 매력적이니까. ”

“ 그런데도 반쯤 결심하셨다는 건… 저처럼 될 가능성을 엿보신 건가요? ”

엘렌은 과거 자신이 저지른 저돌적인 행동을 입에 담으며 물었다.

사랑에 미쳐 목숨을 걸었고, 은인을 협박하여 여기까지 왔다.

지금에야 원하는 것을 얻고 눈앞의 당사자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지만… 지금 생각해도 참 신기할 지경이었다.

“ 어떻게 안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별로 안 중요해. 중요한 건 지온이 직접 그 여자에게 손을 뻗었고, 가치를 인정해서 성과를 거두게 만들었다는 점이야. 너랑 경우가 비슷해. ”

그리고, 나와도 비슷하지.

헬레나는 그 말을 속으로 삼키며 과거부터 지금에 이르는 역사의 책을 펼쳤다,

역사.

거창하다면 거창하기 그지없는 표현이지만 사람은 누구나 자기만의 역사가 있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특히, 갓난 아기시절부터 다 안다는 듯 위로를 건넨 그녀의 반려와 만난 순간은… 정말 역사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적어도 헬레나 본인의 생각은 그랬다.

“ 거기다, 지온은 곱상하게 생겼으면서 제법 탄탄하니까… 여자들이 좋아할 만한 조건도 풍부하잖아. 그래서 걱정이야. ”

누가 보면 단단히 콩깍지가 쓰였다며 한탄할 상황이었으나, 엘렌 또한 그 당사자중 하나였기에 힘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야성미를 매일 밤마다 맛보는 입장에서 감히 부정할 이유도, 근거도 없었다.

“ 그러니 걱정되신다는 거네요. ”

“ 지온 본인이야 여러 여자를 밝히는 남자가 아니니까 괜찮아. 거기다… 부끄럽지만 너나 나처럼 큰 쪽을 선호하는 모양이고. ”

슬쩍 얼굴을 붉힌 헬레나가 크게 부풀어 오른 가슴이나 엉덩이 부근을 손가락으로 찔러댔다.

공작으로서는 보이기 어려운, 또 보여서는 안 될 천박함이 묻어나오는 손짓이었다.

그러나 그를 바라보는 엘렌의 뇌리엔 천박하거나 교양이 없어 보인다는 생각 따위는 없었다.

오히려 지극히 당연한 것을 거론하는 헬레나의 목소리에 공감할 뿐이었다.

“ 그렇지요. 대공께서는 그… 큰 쪽을 좋아하시니까요. ”

밤에 어떻게 나오는 지, 어디에 집착하는 지, 또 후희를 즐길 겸 쉬는 동안에 나누던 대화가 그 증거였다.

형태는 없으나 당사자의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 확실한 증거.

“ 으, 으흠! 아무튼. ”

무안하다. 헬레나는 작게 헛기침을 하며 크게 달아오르기 시작한 몸을 식히려 애썼다.

이대로 열에 삼켜지면 결론도 내리지 못한 채 곧장 그가 기다리는 침대로 달려갈 것만 같았다.

“ 그 여자가 반하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어. 그래도 갖고 싶은 재능이야. 가져야 할 재능이기도 하고. ”

“ 이유야 어찌되었던 다른 쪽의 편을 드는 순간 크게 위험할 수 있을 테니까요. ”

상대가 크라우저 공작가에 원한을 품던, 혹은 욕심을 품고 손을 대려 하던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입자를 응용한 이브의 마법이 누군가의 손에 이용된다는 것 자체가 잠재적인 위협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헬레나는 그를 미연에 방지할 생각이었고, 엘렌 또한 그 의견에 찬성하는 바였다.

문제는 지온에게 미약한 호감을 드러내기 시작한 이브의 본능 그 자체였다.

그렇기에 마지막 결정을 망설이며, 엘렌의 답을 듣고자 했다.

지온 알트람에게 다른 여자가 또 생긴다는 것은 두 여자에게 있어 위험요소보다 더 큰 문제였으니까.

“ 그래서… 너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저쪽에서 받아들일지는 모르겠지만… 꼬셔? 말아? ”

“ 음……. ”

어려운 일이다. 엘렌은 계륵과도 같은 존재를 두고 침음을 흘리며, 속으로 차분하게 위험과 위험의 정도를 재기 시작했다.

더 이상 여자가 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그녀 또한 마찬가지이나 현실적인 문제가 더욱 컸다.

그렇다고 당장 죽여 버리기에는 명분도 없었고, 무엇보다 그럴 만한 명분을 억지로 얻으려 하는 과정에서 더 위험하고도 골치 아픈 일을 부를 수도 있었다.

예를 들면 마법사를 핍박한다는 명분 아래 마탑이 집결한다는 그런 것 말이다.

그리고 그 모든 반발을 짓누르고, 싹을 태워 초토화시킬 수는 있을지언정 지금처럼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엘렌은 그 물음에 단호하게 아니라는 답을 던질 자신이 있었다.

물론 지온이 직접 위험에 처하거나 그를 건드리는 이가 있다면 눈이 뒤집혀 덤벼들 것이다.

상상만으로도 속이 뒤집힐 정도였으니 직접 마주하는 순간 그 충격이 덜하지는 않겠지.

엘렌은 조급한 기색이 점점 드러나기 시작하는 헬레나의 눈빛을 바라보다, 답답한 기운을 토해내듯 한숨 쉬며 말했다.

“ 받아들이는 게 좋겠어요. 대신, 저택이 아니라 제 친구들이 머무르는 땅에 거주지를 마련하는 게 어떨까요? ”

“ 정을 둘 여지를 줄이자는 거지…? 하긴, 요즘 지온이 그쪽에 잘 안가기는 해. ”

지온은 거의 매일같이 엘프의 오두막에 들렀던 때가 있으나, 요즘 들어서는 아니었다. 그렇다 해도 주에 한 번은 직접 얼굴을 마주하고 안부를 묻는 등 제법 섬세하게 신경을 썼다.

그런 곳에 이브를 보내 머무르도록 한다.

나름대로 괜찮은 생각이라며, 헬레나가 제법 만족스러운 기색을 띠었다.

“ 더구나 그들도 너 정도는 아니더라도 정령마법을 제법 능란하게 사용하는 숙련자들이니, 더 괜찮겠어. 물론 다크엘프에 별 감흥이 없어 보이기에 가능한 일이지만……. ”

“ 어찌 되었든, 그분이 마법에 미친 괴짜시니 잘 통하겠네요. ”

“ 좋아. 이걸로 정리는 끝났어. ”

헬레나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단호히 몸을 일으키더니, 대문 같은 창문을 열어젖히기 무섭게 옷가지에 손을 올렸다.

헬레나를 가만히 바라보던 엘렌 또한 그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잘 알기에, 옷을 벗기 쉽도록 느슨하게 풀어헤친 채 침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직 식사까지 시간이 남아 있었으니까.

◎◎◎

“ 네…? 제가 남아주셨으면 좋겠다고요? ”

“ 그래요. 연구에 필요한 재료나 필요하신 다른 것도 제공해 드릴게요. 물론 거주할 집도 따로 지어드리죠. ”

이게 무슨 난리지.

아침식사 후 약간의 아쉬움을 품은 채 마탑으로 돌아가고자 짐을 싸려는데, 문득 자신을 부른 공작이 남으라고 말한다.

그에 이브가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 하다, 겨우 한 마디 짜내어 물었다.

“ 어, 어째서 제가 남아주셨으면 하시는 건지……. ”

“ 저는 능력 있는 사람을 보면 욕심이 나거든요. 그래서 부족하나마 제 영지에서 품고 싶은 거고요. ”

욕심이 난다. 이브는 자신의 가치를 높게 쳐 주는 공작에 내심 감동했다.

더구나 그 공작이 보통 공작이 아니라 소드마스터를 겸하는 여자라 더욱 그랬다.

다만, 여태껏 제대로 된 인정을 받아오지 못했던 이브였기에 저도 모르게 움츠리며 거절의 뜻을 드러냈다.

“ 저를 높이 평가해 주시는 건 감사하지만… 공작님이 기대하시는 것만큼 훌륭한 성과를 내지는 못 할 것 같아요. 이번에 성공한 것도 대공의 조언과 우연이 겹쳤을 뿐인……. ”

“ 정말 그렇게 생각하시는 건 아니죠? 적어도 저는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 ”

헬레나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약하게 떨고 있던 이브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워낙 갑작스러운 일이었던지라 이브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는 가운데, 헬레나가 말했다.

“ 저는 제 눈을 믿고, 당신의 잠재력을 믿어요. 설령 당신이 말한 대로 지금 당장 능력이 없다 하더라도, 그 편린을 저는 똑똑히 보았습니다. ”

“ 공작님……. ”

“ 당장 자신감을 갖추고 당당히 행동하라는 말은 안 할게요. 그렇게 하기도 어려울 테고요. 대신… 제 영지에 남아서, 당신이 자신감을 찾아가는 모습을 제게 보여주실 수 있을까요? ”

훌륭한 공작이 자신을 믿어주니 없던 자신감마저 생길 것 같다.

이브는 순간적으로 내가 그렇게 잘났구나 싶은 마음이 들었으나, 곧 그런 오만함을 속에서 지웠다.

어쨌든 이토록 인정받은 것이 처음이었고, 또 소박하지만 그럴 듯한 성과를 낸 것도 이 영지에서 처음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인연을 만나 발전하게 된 것은 그녀로서도 큰 행운이었다.

그리고, 그런 행운이 깃든 땅에서 연구를 하다보면 더 큰 행운이 찾아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 또, 계통은 다르지만 정령마법을 사용하는 다크엘프들 근처에서 지내게 하고 싶어요. 그러면 마법 발전에 도움도 될 것 같은데……. ”

“ 정말… 인가요? ”

“ 네. 정말이죠. 이브 양이 싫지만 않다면요. ”

좀처럼 접하기 힘든 엘프의 마법을 가까이서, 또 빈번하게 접할 수 있을 기회까지.

마탑처럼 적극적이고 신속한 의견 교류는 불가능할지 몰라도, 제법 매력적인 환경임에는 분명했다.

더해, 이브에게 있어 사실상 의견 교류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고.

자신을 인정해주고, 환경을 마련해 주겠다고 하는 아름다운 여성.

마치 자신을 유혹하는 듯한 달콤한 목소리에 이브가 몽롱한 눈빛을 띠는 가운데,

“ 자,어떻게 하시겠어요? 저로서는 부디 좋은 답을 들려주었으면 좋겠는데……. ”

마치 애원하는 듯한 헬레나의 목소리가 이브의 등을 떠밀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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