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화 〉 모기 하나 없애자고... #1
* * *
후우.
나는 짙은 한숨을 내쉬며, 발밑에 쓰러진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몬스터가 아닌 짐승이며, 짐승 중에서도 제법 흉포하고 치안에 방해가 되는 멧돼지였다.
보통 성벽 밖에 위치한 멧돼지는 커다란 해가 될 정도는 아니나, 오고가는 보통 사람을 습격해 피해를 끼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로 인해 해를 끼치는 짐승으로 알려져 있었고.
“ 훌륭하십니다, 대공. ”
만면에 미소를 띤 채 힘차게 손뼉 치는 백인장을 보며나는 난처하다는 듯 웃었다.
기사들에 비해 곧게 달려드는 짐승 한 마리를 사냥하는 것은 무척 쉬웠다.
그러니 칭찬을 받을 만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더구나 별 것 아닌 행위를 그저 급이 높은 귀족이 했다는 이유로 칭찬하는 것만 같아 묘하게 찝찝하기도 했다.
백인장의 눈빛에서 그러한 기색은 없지만, 어찌 보면 노골적으로 아첨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이마에 흐르는 땀 한 방울을 소매로 훔치며 말했다.
“ 별 것 아닙니다. 해수 제거는 백인장이나 다른 병사들도 자주 하는 일이잖아요. ”
“ 영지의 수호를 명받은 인간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니까요. 하지만 대공께서 친히 나오셔서 치안 유지에 직접 손쓰시는 건 그 경우가 다르지 않습니까?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
“ 너무 칭찬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를 지경이네요. ”
짐승만의 세계를 벗어나 달려드는 짐승을 솎아내는 것 또한 영지의 책임자로서 할 일이다.
지금처럼 직접 사냥에 나서는 것은 지극히 드문 일이나, 넓게 보면 당연히 해야 할 일 중 하나였다.
보통은 병사를 시켜 처리하지만바람도 쐬고 몸을 움직일 겸 나섰다는 지극히 사적인 동기도 섞여 있었다.
“ 그나저나, 대공의 호위께서도 정말 대단하시군요. 저 멀리서 화살을 쏘는데 족족 명중하고 있지 않습니까. ”
“ 아. 엘렌 말이죠? 대단한 여자이지요. ”
백인장은 적당히 키 큰 나무 위에 올라 느긋하게 시위를 매기는 엘렌을 보며 감탄했다.
이전보다 더욱 크고 강해진 덕인지, 시력 또한 크게 강화된 듯싶었다.
마음만 먹으면 저격총의 스코프나 망원경처럼 멀리 있는 놈도 눈으로 포착할 수 있게 되었기에.
그리고, 그 시력보다 더욱 향상된 것이 엘렌 자체의 무력이다.
엘프족 고유의 유산을 얻어 왔으니 강해지는 것이 당연하겠지만눈으로 직접 보니 그 생생함이 사뭇 남달랐다.
전에 쏘았던 화살이 발리스타라면, 지금은 가히 미사일 수준으로 격이 오른 상태다.
아마 엘렌이 있는 힘을 다해 화살을 쏘면 가히 핵미사일이 부럽지 않을 지도 모른다.
홀로 자연재해도 일으킬 여자였으니까.
“ 조금 멀리 떨어져 있네요. 이쪽 방향으로 쭉 가셔서 끌고 와 주시겠어요? ”
“ 네, 알겠습니다. ”
엘렌이 멧돼지의 골통을 날려버리면뒤에 대기하고 있던 병사들이 지시한 곳으로 달려가 사체를 가져온다.
병사들의 입장에서는 잔심부름이나 하는 것이 귀찮거나 성가시리라 생각했지만, 그것은 내 착각이었다.
직접 사냥할 위험이나 수고로움을 덜 수 있어 그런지그들의 입가에 미소가 가득했다.
“ 어디, 슬슬 점심이나 먹어 볼까요. ”
크라우저 공작령은 넓기에 날짜에 따른 구역을 나눠 사냥했다.
하루 이틀에 끝날 일이 아니기에 여유를 두고 해야 하는 일이었다.
진도가 빠를수록 좋다고는 하나 그를 시행하는 병사들 또한 보통 사람이다.
휴식과 여유를 가지고, 또한 밥도 먹어야 했다.
“ 그러면, 취사병을 불러 조리를 시키겠습니다. ”
“ 저도 돕겠습니다. ”
“ 네?! 아니, 대공 전하께서 직접 칼을 잡고 멧돼지를 잡으실 필요까지는…! ”
내가 팔을 걷어붙이고 돕겠다고 나서자 백인장이 몹시 당황해했다.
대공까지 된 사람이 직접 야외에서 요리를 하겠다니 부담스럽기 짝이 없었으리라.
시종일적부터 지온 알트람이 어떤 인간이지는 나름대로 잘 알려져 있겠지만, 그 때와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으니까.
그러나, 내 입맛에 맞는 요리를 위해선 직접 움직이는 것이 좋았다.
많은 몫의 요리를 만드는 일이니만큼 효율성과 간편함 또한 무시할 수 없으나, 이곳 군인의 요리는 그 두 가지 요소를 너무 추구하는 기색이 짙었으니까.
“ 백인장께서도 제가 본래 시종이었던 것은 잘 아시죠? 어찌 보면 여러분보다 더 익숙한 일이니 믿고 맡겨 주세요. ”
“ 하지만 대공께 이러한 잡일까지 시키는 건 너무 죄송스러운 일이라……. ”
“ 죄송하긴요. 밥 먹는 데 신분 차이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기 수도에 계신 전하께서도, 여러분도 사람입니다. 사람은 먹고 살아야 하고, 그를 어떻게, 얼마나 깊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른 차이만 있을 뿐이겠지요. ”
나는 몸을 배배 꼬며 당황스러워하는 백인장을 달래고, 우리가 먹을 못의 멧돼지를 다듬기 시작했다.
물론 나 혼자만이 아니라 취사병들도 도와주었기에 일의 진도가 제법 빨랐다.
◎◎◎
“ 좋네요. ”
늦은 저녁. 모닥불 앞에서 불을 쬐고 있던 엘렌이 입꼬리를 슬쩍 들어올렸다.
병사들과 함께 있다고는 하나 헬레나가 없다는 것이 무척 만족스러운 모양이었다.
“ 헬레나와 떨어져 있는 게 그렇게 좋아? ”
“ 공작님과 붙어 있는 건 상관없어요. 하지만 공작님의 견제를 받지 않고 대공과 있다는 게 좋은 거예요. ”
엘렌은 자기 의견을 뚜렷하게 말하며 피식 웃었다.
이틀 전. 나는 헬레나가 영지 주위 청소를 해야 하겠다고 했을 때 직접 나서겠다고 말을 꺼냈다.
사무실, 아니 집무실에 콕 박혀 매일같이 서류 작업만 하니 지겨웠던 차였다.
물론 그 와중에도 헬레나와 함께 하는 훈련시간은 여전했으나, 그렇다 하더라도 지긋지긋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서류 작업은 지루하면서도 늘 끊이질 않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신분 상승으로 인해 콧대가 오른 탓인지는 몰라도 휴가를 보내고 싶다는 생각도 떠올랐다.
그러던 차 시원한 숲을 돌며 영지 주위를 다듬는다는 좋은 명분까지 준비된 사냥 문제가 떠오른 것이다.
나로서는 꼭 잡고 싶은 일이었다.
─그래? 그러면 나도 같이…….
그 때, 헬레나는 당연하다는 듯 자기도 끼어들겠다는 뜻을 전했었다.
내 의견은 존중하지만 떨어지기는 싫어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여태껏 헬레나가 보여 왔던 모습을 보면 당연히 벌어 질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그런 헬레나를 살살 달래 서류 작업에 몰두하도록 만들었다.
정확히는 어찌어찌 정신 차리지 못하도록 넋을 쏙 빼놓은 다음, 그 틈을 타 강제로 설득한 결과였다.
헬레나를 빼고 엘렌과 둘이서 다니는 것이 제법 위험요소였으나, 그 외에도 백에 이르는 병사들과 함께 하니 허락을 얻어내기도 쉬웠다.
“ 그래. 참 좋겠다. ”
“ 그럼요. 병사들이 붙어 있다고는 하나, 이것도 엄연히 대공과의 데이트니까요. ”
이곳 대륙의 여름은 낮에도 시원한 축에 속하기에, 밤이 되면 여지없이 쌀쌀해진다.
그러니 여름임에도 모닥불을 피우고 체온을 유지하기 위한 방안을 마련해야 했다.
겨울만큼은 아니더라도 모포 정도를 준비하는 등, 너무 덥지 않을 정도로.
“ 사냥 데이트라. 사치스럽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
“ 공작가 정도면 이 정도 사치는 당연히 누려도 되지 않을까요? 예를 들면……. ”
내가 무심코 중얼거리자, 엘렌이 요염한 미소를 띠며 내 허벅지를 은근히 쓸어왔다.
나름대로 귀족이기에 배려를 한답시고 병사들의 무리와 떨어져 있었기에 거침이 없었다.
보는 눈이 없다는 건 사람을 대범하게 만들 수도 있으니까.
“ 여기서 해 버려도… 아무도 몰라요? ”
“ 아무리 그대로 밖에서 하는 건 좀 그래. 씻을 곳도 없고. ”
“ 제가 씻겨드리면 되는걸요. 아시잖아요? 제 정령마법을 이용하면 언제 어디서나 깨끗한 몸을 유지할 수 있다는 걸. ”
타닥. 장작 타는 소리가 귀를 간질이는 가운데, 엘렌의 손길은 여전히 멈출 생각을 않았다.
사람의 눈길이 많기에 동행을 허락했던 헬레나가 보면 거품을 물고 뒤집어질 모습이었다.
“ 그리고… 해서는 안 될 일을 하면 무척 기분이 좋다고 해요. 특히 몸을 섞는 일이라면 더더욱……. ”
솔직히 흥미 없다고 말하면 가식이나 부리며 점잔 빼는 꼴밖에 안 될 것 같지만, 그래도 한 번 떨어 줘야했다.
나는 허벅지를 기어오르며 점점 은밀한 곳으로 다가오는 엘렌의 손을 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 관심 없다면 거짓말이지만, 그래도 안 돼. ”
“ 으으응…! 어째서요오…? ”
세상에. 나는 남자를 유혹하는데 도가 튼 독부를 보는 듯한 느낌에 오싹함을 느꼈다.
등줄기를 타고 전류와 한기가 동시에 흐르는 듯한, 정신을 번쩍 일깨우는 느낌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저 엘렌이 아이처럼 애교를 부린 탓이다.
그것도 내 앞에서, 전보다 확연히 성장한 몸을 하고서.
“ 보는 눈이 많잖아. ”
“ 그럼 사람이 없는 곳으로 가면 되잖아요. 네? 대공님은 저랑 둘이서 꼭 껴안고 정을 나누고 싶지 않으신 거에요? ”
엘렌은 당장이라도 내게 안기고 싶어 안달이 난 듯 보였다.
성적 행위로 인한 열락을 기대하는 눈빛도 그렇고, 점점 노골적으로 더듬는 손길이 그를 증명하고 있었다.
더구나, 여전히 사람의 눈길이 없음을 확인한 듯 귓가에 달콤한 숨을 불어넣기도 했다.
여태껏 보고 들은 기술을 십분 발휘하는 것만 같아 두렵기도 했고, 한 편으로는 기쁘기도 했다.
이토록 매력적인 여자가 이렇게까지 매달리는 모습이 보기 나쁘지 않았기에.
“ 안 된다니까. ”
“ 고자도 아니시면서… 몇 십번이고 하실 수 있는 분께서 너무 소심하신 것 아니에요? 여기… 대공님이 기분 내키는 대로 갖고 놀아도 되는 여자가 이렇게 유혹하는데도. ”
삶의 경험이 풍부한 엘렌에게 여러 도움을 받고 있지만, 지금만큼은 그 경험이 독니처럼 날아들고 있었다.
엘렌이 첩이라고는 하나 이렇게 단 둘이서 몰래 서로를 안고 뒹군다는 것이 영 찝찝했다.
유혹으로 인해 몸이 달아오르는 건 둘째 치더라도, 헬레나를 생각하면 그럴 생각이 잘 들지 않는 것도 내 현실이었다.
솔직히 두 여자를 끼고 즐기는 것을 좋아하지만, 본래 헬레나 한 사람과 사랑하며 살아도 충분하고도 넘칠 만큼 만족했었다.
그러니, 엘렌의 유혹을 밀어내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미안하지만무지성 야스는 다음에…….
“ 자, 그만. ”
“ 너무해요…! 제가 이렇게 열심히 유혹하는데도, 끝까지 거절하시고……. ”
내 몸을 기던 여자의 손을 억지로 떼어내자, 엘렌이 칭얼대며 풀이 죽은 기색을 보였다.
척 보기에도 모든 자신감을 잃고 좌절한 사람 같은 얼굴이 영 보기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 저를 안으시는 건… 순전히 공작님 때문인가요? 공작님이 없으시면 제게 쏟아주신 정이나 열도, 전부 거짓말처럼……. ”
“ 그럴 리가. ”
말 대신 행동이 낫겠지. 나는 엘렌을 품에 안으며 등을 가볍게 토닥여주었다.
다크엘프가 갖고 사는 자격지심이 이렇게 암울하게 겉으로 드러나는 것을 도저히 내버려 둘 수가 없을 노릇이었다.
“ 바깥에서 하는 건 영 내키지 않아서 그래. 그리고, 엘렌이 싫었다면……. ”
분명 싫지는 않다. 오히려 좋다.
그래도 이렇게 굴러갈 수밖에 없는 현실에 남몰래 한숨 쉬며, 나는 엘렌의 골반쪽으로 손을 미끄러뜨렸다.
그리곤 그 부근의 실하기 그지없는 살결을 꽉 쥐었다. 옷감 너머에서도 그 탄력과 부드러움이 느껴지는 살이었다.
“ 하으응…! ”
“ 이렇게 주무를 일도 없었겠지. 안 그래? ”
“ 네. 대공님이 옳아요. 전부, 전부 옳아요……. ”
그 먹기 좋은 살집을 가볍게 꽉 쥔 뒤에 토닥여주자, 언제 그랬냐는 듯 어두운 감정이 사르르 녹아내린 목소리를 냈다.
하지만, 내 손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엘렌의 골반선을 따라 아랫배로 올라갔다.
나는 그 아랫배를 달래듯 살살 문지르며 엘렌의 귀에 속삭이듯 말했다.
“ 그리고, 내가 길들인 암컷의 증거가 이 안에 버젓이 있는데… 수고를 생각해서라도 쉽게 버리진 못하지. ”
“ 마, 마자요…! 대공님이 있는 힘껏 짓누르시고 휘저어 주셨어요……. ”
“ 그래. 그러니까 그런 쓸데없는 걱정 말고, 돌아가면 어떻게 나를 기쁘게 할지만 생각해. 너도 엄연히 내 여자니까. 알았지? ”
“ 네, 네에……. ”
엘렌은 아이처럼 내 가슴팍에 안긴 채 연신 뺨을 비볐다.
어찌 보면 애완동물이 응석을 부리는 것과 비슷한 것처럼 보여 참 귀엽기도 했다.
내가 생각해도 강압적이고 쓰레기 같은 발언이었지만 효과는 참 좋았다. 그저 농락하는 것 같아 내싱 미안할 뿐이다.
나는 죄책감을 느낀 김에 엘렌이나,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헬레나를 좀 더 신경쓰리라 마음먹고 있는데…….
“ 윽?! ”
목 뒤에서 느껴지는 따끔한 감촉이 그런 생각을 단숨에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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