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화 〉 또 너야?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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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크 킬리네어가 광증으로 인해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했다.
크라우저 공작이 내놓은 공식적인 항의가 도화선이 되어 터져 나온 이 소문은 왕국 전체를 강타했다.
그렇잖아도 썩 좋지 않은 인연으로 맺어진 킬리네어 측에서, 다시 한 번 크라우저의 심기를 건드린 것이다.
그것도 그 대공의 목숨을 암살하려 한다는 가히 최악의 상황으로.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그렇잖아도 그 남편 사랑이 지극하다 못해 광기라 일컬어질 만큼 깊은 공작의 최고 역린을 건드린 셈이다.
지금 수도원에 연금되어 있는 알버스 킬리네어 또한 그로 인한 문제가 원인이 되어 저 꼴이 나지 않았는가.
다른 일이라면 모를까 크라우저 대공을 건드린 이상 절대 곱게는 넘어가지 않으리라.
그들이 말한 대로, 헬레나가 보내 온 항의는 무척이나 격렬하고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루크는 은밀히 손을 잡고 벌이는 일임을 알고 있음에도, 그 서슬 퍼런 기세에 거래가 깨졌나 순간적으로 착각할 뻔했으니까.
“ 그래서, 어떻게 하실 겁니까? ”
언제든 관계가 깨질 여지를 남기고 있던 약혼자와는 예전과는 다르게, 지온이 정식적인 대공이 된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다.
그 무게감은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루크는 크라우저 공작이 보내 온 서한에 대한 물음으로 이하의 답을 제시했다.
진심 어린 사죄와 보상. 간단하지만 지극히 당연하기도 하며, 그 성의에 따라 상대의 기분이 달라질 수도 있을 정석이었다.
우선, 루크는 당연하다는 듯 형 로크의 처형을 결정했다.
겉오르는 도저히 베고 싶지 않다는 듯 고통스러워했으나, 속으로는 당장이라도 저 골칫덩이를 지워버리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
“ 그만, 그만두지 못할까! 내가, 내가 아니란 말이다! ”
로크 킬리네어는 밧줄에 묶여 끌려가면서도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실제로 자기가 저지른 일이 아니었으니 그 억울함은 이루 표현할 수가 없을 만도 했다.
하지만 이 조작의 원인이기도 한 루크 킬리네어의 암살 의뢰를 건넨 것부터 잘못이다.
만약 그가 얌전히 자기 운명을 받아들이고 죽을 때 가지 연금 생활을 했다면, 답답할지언정 공작가의 장남으로서 생을 마칠 수 있었겠지.
그저 그렇지 못했기에 루크가 그를 이용할 생각을 떠올리게 하는 원인을 마련한 셈이기에.
“ 루크… 이, 이노옴!! ”
킬리네어 공작령 내에 위치한 광장에 이르렀을 때도 노성을 거두지 못했다.
보란 듯이 세워둔 단두대와, 그 앞에서 침울한 척 가식을 떨며 기다리던 루크가 그를 더욱 자극한 탓이었다.
다른 사람은 루크를 그저 형재에가 지극한 남자로 알지만, 로크는 그 모든 행위가 다 연기임을 알고 있었다.
“ 형님……. 어찌하여 크라우저 공작을 건드리신 겁니까. 물론 우리 킬리네어 공작가로서는 아버지를 쫓아내고 동생을 죽여버린 원수와도 같지만, 그래도 이래서는 안 되었습니다. ”
“ 닥치거라! 내심 크게 웃음이라도 터뜨리고 싶은 주제에 아직까지 가식을 떨다니! ”
단두대에 오르기 전. 루크는 양 옆에 선 두 사내가 손에 쥔 밧줄에 잡힌 채 한껏 미간을 찌푸렸다.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대화를 하러 왔다던 루크의 가증스러움에 치를 떨었다.
그 때문에 지금 이 순간만큼은 목숨 구걸할 생각마저 잊을 수 있었다.
“ 네 말대로 크라우저 공작가는 원수다! 그런데 그런 원수와 손을 잡고 나를 모함해 제거하려 하다니! 네놈이 정녕 킬리네어 공작가의 피를 이어받은 것이 맞느냐! ”
“ 화를 내시는 것은 지당합니다. 하지만, 상대는 명실상부한 이 나라의 공작이었습니다. 더구나 지금은 쫓겨난 아버지와 정당한 합의를 통해 결투를 했기에 명분 또한 정당하지 않습니까? 복수를 하려 해도 다른 방법을 쓰셨어야 했습니다. ”
“ 네놈이 안타까운 척 훈계까지 지껄이다니…! 실로 가증스럽기 짝이 없구나! ”
자신의 평판은 최악을 달리고, 끝까지 형을 안타까워하는 루크의 평판은 하늘을 찌른다.
로크는 그를 알았기에 아무리 자신이 변명한다 한들 누구도 믿어주지 않을 것임을 깨달았다.
더해, 죽음이 목전에 놓였으니 더 이상 손을 쓸 수도 없었다.
명분, 평판, 시간.
그 모든 것이 그에게 부족했기에 일어난 일임을, 로크는 계단을 오르며 안타까워했다.
“ 다들 들어라! ”
납작 엎드린 로크의 목에 칼과 비슷한 나무판이 채워지고 사형 준비가 끝났을 무렵.
루크는 집행인에게 잠시 기다리라 손짓한 뒤, 단두대 옆에 서서 크게 목소리를 냈다.
“ 오늘, 나의 형님이시자 킬리네어의 장자이신 분을 이렇게 내 손으로 처형시켜야 한다는 현실에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다. 하지만 이대로 넘어가기엔 크라우저 공작의 분노가 너무도 크고 깊구나! ”
루크는 가슴이 아파 죽을 것 같은 연기를 펼쳤다.
심장 부근의 옷소매를 쥐어짜내듯 꽉 쥐며, 미간을 한껏 찌푸리는 것을 시작으로 표정을 의도적으로 구겼다.
연기자 시험을 보았다면 두말없이 합격을 받을 만큼 뛰어난 연기였다.
“ 크라우저 공작의 항의는 너희들도 들어 알고 있을 것이다! 공작이자 그 스스로가 대륙에서 손꼽히는 강자이기도 한 공작의 분노를 정면으로 마주하면, 우리 킬리네어 공작가라 한들 무사할 수가 없으리라! 그것은 몹시 슬프고 굴욕적일 수도 있지만, 도저히 뒤집을 수 없는 현실임을 그대들도 알 것이다! ”
그는 어쩔 수 없는 현실임을 몇 번이고 강조하며, 로크의 처형을 보기 위해 모인 군중들의 마음을 뒤흔들려 애썼다.
그는 오만했으나 백성의 조련의 필요성을 아는 귀족이었기에, 이참에 저들의 민심을 한층 더 공고히 할 생각이었다.
“ 그래, 맞아. ”
“ 크라우저 공작의 남자 사랑이 지극한 건 왕국민이 다 알지. ”
“ 지금은 죽은 아가씨도 당시 약혼자였던 크라우저 대공을 모르고 건드렸다 그렇게 골로 가버렸잖아. ”
백성들이 루크의 연설을 들으며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고,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며 각자의 의견을 가볍게 주고받았다.
같은 공작이라 한들 한 차례 진통을 겪은 킬리네어 공작가의 힘은 깎였고, 상대적으로 평화로웠던 크라우저 공작령의 힘은 더욱 올랐다.
그러한 현실을 백성들 또한 알고 있었다.
배울 기회가 없었을 뿐, 살기 위해 머리를 굴리며 하루하루를 사는 이들이기에 형세를 간단히 파악할 능력 정도는 있었다.
“ 그런 상황에서, 나는 선택을 해야만 했다! 그것이 비록 내 형님을 내 손으로 베어낸다는 가슴이 찢어지는 일이라 하더라도, 영지를 지키고, 너희들을 지키기 위해서! ”
그렇지 않으면 크라우저 공작의 분노가 어떻게 표출되어, 어떤 식으로 이 영지를 휩쓸지 모를 일이었다.
대공을 암살하려 했다는 것은 그 책임이 너무도 무거운 일이었다.
하물며 그 크라우저의 대공이라면 더욱 더.
“ 아…! 공작님……. ”
누군가 눈물까지 글썽대는 루크의 표정을 보고 깊이 감명을 받은 듯, 스스로의 입을 두 손으로 막으며 눈을 반짝였다.
모두의 안위를 위해 아픔을 곱씹고 혈육을 처형하는 남자의 모습이 사뭇 감동적으로 비친 탓이었다.
“ 안타깝고, 어찌 보면 또 굴욕적일지도 모르나… 나는 크라우저와 정면으로 맞설 수가 없었다. 전쟁이라도 벌어지는 날에는 그 누구도 우리의 안위를 보장할 수 없을 테니까! 무례할 지도 모르나 전하께서도 감히 확답을 주실 수 없는 일이니까! ”
후우.
루크는 거기에서 잠시 호흡을 고르려는 듯 말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나같이 자신의 말에 푹 빠져 시선을 향하는 백성들의 시선이 썩 나쁘지 않다 생각했다.
왜냐하면, 이곳에 모인 사람들 모두가 루크의 말이 일리가 있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크라우저 공작과 정면으로 맞서 이길 수 있는 인간은 이 왕국에도, 하물며 대륙에서도 그 적수를 찾기가 어려울 지경이다.
킬리네어의 세가 여전히 뛰어나다고는 하나 힘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크라우저에 밀리는 것도 현실이었고.
“ 그리고, 크게 보면 우리의 싸움은 곧 국가가 가진 힘의 손실이기도 하다! 비록 킬리네어와 크라우저가 가진바 생각이 달라 다른 길을 걷고 있어 대립하고는 했으나, 정말로 필요할 때 단결해야 한다는 것을 나는 안다! ”
대의를 위해.
루크는 그를 이유로 삼아 눈물을 곱씹으며 친형제를 처형시켜 분노를 잠재우고, 더 나아가 왕국의 평화가 깨지지 않도록 노력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평화. 이 얼마나 좋은 말인가.
그저 하루하루 먹고 살며, 평화롭기만을 바라는 백성들에게 있어선 너무도 반가운 울림이 아닐 수 없었다.
필요할 때 전쟁을 치르더라도, 피할 수 있다면 피하겠다는 루크를 존경했다.
“ 루크! 루크! 루크! ”
귀족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은 거대한 불경죄다.
사형에 처해도 할 말이 없을 정도로 무레하기 짝이 없는 행위다.
하물며 그것이 공작이라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누군가의 그 무례함을 기점으로 루크의 이름을 연호하는 소리가 더욱 커져갔다.
대기가 진동할 정도로, 땅이 미묘하게 흔들릴 정도로 큰 울림이었다.
너무 격해진 감정이 그러한 규칙조차 잊게 만들어, 이름을 외치지 않고서는 못 배길 만큼 등을 떠민 탓이었다.
무례한 놈들.
하지만 오늘만큼은 봐 주마.
루크는 미세하게 미간을 찌푸릴 뻔했으나, 민심이 이토록 자신을 향하는 것을 기뻐하며 그들의 무례함을 관대히 넘기기로 마음먹었다.
약간의 거슬림을 쉬이 넘길 수 있을 만큼 좋은 날이기에.
침묵.
한 남자의 손짓에 광장 전체가 거짓말처럼 침묵의 품에 안겨들자, 이 현상을 만들어 낸 사내, 루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 집행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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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하다.
나는 로크 킬리네어의 화려한 처형 소식을 들으며 고개를 저었다.
단지 그 뿐이었다면 이렇게까지 찝찝하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그가 사죄의 뜻이랍시고 보내 온 물품의 수와 질이 노골적으로 높았던 탓이다.
우리를 이용하여 뜻을 이뤘다고는 하나 넓게 보면 가문의 원수다.
그런 원수에게 이렇게까지 융숭한 대접이라. 참…….
“ 뭐라 표현하기가 어렵네. ”
“ 응? 뭐가? ”
넓은 창고에 따로 분류해 둔 물건들을 확인하던 헬레나가 고래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 루크 킬리네어 말이야. 내 목숨을 노렸다는 거짓 명분이 있기는 했지만, 그걸 고려해도 너무 지나쳐. 하나같이 곁에 두고 아낄 법한 사치품들이 너무 많아. ”
“ 그럴 지도 모르지만, 난 나쁘지 않다고 보는데? 특히 이거. ”
헬레나는 만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제법 뚱뚱한 유리병을 양 손에 들어올렸다.
마치 맑고 깨끗한 푸른 피와 같은 액체가 가득 들어있는 물건이었다. 아마 트롤의 피를 정제하여 만든 약이라 들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약의 효력은 다름 아닌 정력제다.
“ 이거만 있으면 지온이 지치지 않고 일주 연속 품에 안아주는 것도 꿈이 아니야……. ”
“ 옳으신 말씀이세요. 하지만 그렇잖아도 힘 좋은 대공이시니, 이 약을 드시면 일주일이 아니라 열흘도 가능할지 몰라요. ”
열흘?! 헬레나가 넉살 좋게 끼어든 엘렌의 목소리에 놀라, 나와 트롤의 피를 번갈아 쳐다보며 얼굴을 붉혔다.
날이 갈수록 색을 밝히는 정도가 점점 짙어지는 모습이 한숨 나올 지경이나, 한편으로는 이해도 되었다.
“ 크흠! 아무튼, 지온은 썩 내키지만은 않나 봐? ”
“ 노골적으로 환심을 사려는 수작이 보여서 그런지, 아니면 껄끄러운 킬리네어 측에서 준 물건이라 그런 걸까. ”
단순히 과거의 악연을 씻고 적당한 관계를 유지하고자 보낸 뇌물일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쉬이 넘길 만도 하건만, 그 방법이 너무 효과가 좋다는 것이 거슬렸다.
내가 조작된 피해자라고는 하나 정작 크라우저의 공작인 헬레나가 쓸 만한 물건의 비중이 너무 낮았다.
비율로 따져보면 나를 위한 물건들이 너무 높았다.
트롤의 피나 검은 비단 등등…….
나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너무도 오만하기 짝이 없으나, 나를 배려하고 치켜세우는 것이 헬레나의 기분을 맞추는 데 더 효과적임을 아는 눈치였다.
그 말은 즉, 오만한 귀족파의 중심이자 공작이면서도 눈치를 볼 줄 아는 인물이 고삐를 잡았다는 뜻이었다.
“ 후우. ”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나는 루크가 보내준 물건을 통해 그의 성향을 대략적으로나마 추측할 수 있었음에 감사하며, 되도록 엮이지 않고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남처럼 지내길 바랐다.
크게 보면 문제가 없을지 모르지만, 엮이면 귀찮아 질 것 하나만큼은 분명해 보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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