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화 〉 또 너야? #4
* * *
본래 해가 저물고 난 뒤의 밤은 지극히 개인적인 시간이다.
개인적이라고는 해도 사실상 헬레나와 엘렌의 응석을 받아주며 서로의 욕망을 있는 그대로 풀어대기 위함인지라온전한 휴식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는 두 여자를 중재하기도 했으니까.
그러나, 오늘 밤만큼은 여느 때와 다름없는 시간을 보낼 수가 없었다.
킬리네어 측에서 보낸 편지의 내용 때문이었다.
“ 오늘이던가? ”
“ 오늘이지. ”
“ 네. 오늘이에요. ”
우리는 맥락 없이 오늘이라는 말을 주고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전한 암살자 길드가 나를 암살하는 척 찾아오는 것이 바로 오늘이었기 때문이다.
본래 암살이라 함은 사람이 갖고 있을 경계심이 가장 허물어지는 시간,
다시 말해 무방비하기 짝이 없는 때를 노리는 것이 정석이었다.
그렇기에 보통 암살은 인간이 자연스레 눈을 감고 잠드는 늦은 밤에 이뤄지고는 했다.
하지만, 이번 암살은 달랐다.
짜고 치는 조작이기에 빡빡하게 시간을 지킬 필요도 없었다.
오히려 시간을 끌면 끌수록 기다리는 사람만 피곤해져 그 심기를 거스를 수가 있었다.
“ 양반은 못 된다더니. ”
문득, 헬레나의 한숨 섞인 목소리가 귀에 울렸다.
나는 느끼지 못하지만 아마도 암살자 길드의 인간들이 저택에 침입해 이쪽으로 다가오는 듯 했다.
엘렌도 그를 알았기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듯 했고.
아직도 멀었다.
꼭 대륙에서 손에 꼽을 만큼 강해져야 할 필요는 없지만, 이렇게 한 발 늦게 기척을 느끼는 순간이 오면 허탈감이 들었다.
두 여자의 직감적인 능력 등이 뛰어나도 너무 뛰어나기 때문이었다.
다만, 그래서인지 독 한 방울과 같은 우월감이 가끔 고개를 들 때도 있었다.
이런 여자들이 내 말에 일희일비하고, 시키는 대로 온전히 따르는 모습을 보면 꼭 신이라도 된 것 같은 착각 때문에.
나는 그럴 때 마다 스스로가 병신이 따로 없다며 나무라며, 그 오만하기 짝이 없는 생각을 지웠다.
“ …크흠. 실례하겠습니다. ”
끼이익, 하고 넓은 유리창이 열리며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칙칙하기 그지없는 검은 로브를 몸에 걸친 사내가 셋이었다.
목소리를 낸 것은 그들 중에서도 대장으로 추측되는 남자였다.
“ 그래. 거기 가만히 있어. 너희들의 흙발로 방에 들어오면 너무 기분이 나빠지니까. ”
짜고 친다 한들 반가운 손님이 아님에는 변함없었다.
헬레나는 그를 다시 한 번 깨닫게 하려는 듯 미간을 곱게 찌푸린 채, 난간에서 발을 딛고 들어오려는 남자들의 발길을 가로막았다.
“ 아, 예에! 죄송합니다. ”
그에 남자들은 급히 난간 테라스에 무릎을 꿇고 앉아 사죄했다.
소드마스터의 심기를 건드렸다간 가장 먼저 그들의 목이 날아갈 것임을 직감한 것일지도 모른다.
좋지 않은 이유로 시작한 거래이니만큼 그 줄이 언제 끊어질지 알 수 없게 때문일까.
아무튼, 헬레나가 가장 먼저 자리를 털고 일어나 놈들의 곁으로 움직였다. 나와 엘렌은 당연하다는 듯 그 뒤를 따랐고.
“ 그래. 이렇게 다시 낯짝을 보니 참 반갑지가 않네. 다 받아들인 일인데도 말이야. ”
“ …죄송합니다. ”
그들은 헬레나를 건드리지 않았으나, 그들의 길드라면 사정이 달랐다.
과거 암살자 길드는 옛적에 비명횡사한 케인 크라우저와 엮어 헬레나를 암살하려 했다.
심히 거북하기 짝이 없는 관계임을 그들이 가장 잘 알았다.
훗날 어린 헬레나가 직접 암살자 길드의 지부로 직접 쳐들어갔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정말 놀랐다.
케인을 죽일 때부터 그 독기가 예사롭지 않음을 피부로 느꼈지만, 길드 지부 하나를 홀로 박살내는 것은 다른 문제였기에.
헬레나는 한껏 기가 죽어 몸을 부르르 떠는 암살자들을 내려다보며, 짧게 한숨 쉰 뒤에야 말을 걸었다.
“ 후우…! 그때 생각만 하면 절로 열이 오르지만 넘어갈 수밖에 없겠지. 아무튼, 너희들이 가진 증패나 칼부터 내놔. ”
“ 예, 에엣! ”
암살자는 죽이지 않겠지만 그들이 헬레나를 죽이려 왔음을, 또 그들의 죽음을 위장하기 위한 증거가 필요하다.
길드원임을 증명하는 달과 칼이 그려진 패와 단검이 바로 그랬다.
“ 엘렌. 적당히 주워서 책상 위에 올려놔 줘. ”
“ 네, 공작님. ”
지극히 은밀하다고는 하나 엄연히 다른 인간과 마주하는 자리다.
엘렌도 그것을 알기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암살자 셋이 내미는 패와 단검을 회수해 책상이 있는 쪽으로 향했다.
“ 음. 증거는 회수했으니… 일어서. ”
“ 예, 예에! ”
“ 작게 말해. 한 번 더 시끄럽게 목소리를 높이면 정말로 목을 베어버릴 테니. ”
암살자들은 조곤조곤하면서도 서슬 퍼렇기 짝이 없는 말에 겁을 집어먹으며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마치 갓 훈련소에 입대해 잔뜩 긴장하고 있을 훈련병들을 보는 기분이었다.
개중에는 처음부터 여유로운 사람도 있지만, 보통은 저런 모습이겠지.
“ 지금부터 너희들을 벨 거야. 내가 암살자를 죽였음을 증명하기 위한 혈흔을 그릴 생각이니까. ”
“ …예, 알겠습니다. ”
암살자를 죽였는데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는 것은 너무 이상하다.
헬레나는 그렇게 결론 내렸기에 여전히 떨고 있을 암살자들을 향해 검을 뽑아들었다.
그들이 겁을 먹던 말든 해야 할 일이었다.
헬레나는 아주 잠깐 날카로운 눈빛으로 암살자들을 슥 훑더니, 가장 앞에 서 있던 남자의 몸을 베었다.
사선으로 그어지는 칼끝은 흔들림 하나 없이 정확하기 그지없었다.
“ 윽?! ”
겉보기엔 아무렇게나 휘두른 듯이 보이겠으나, 헬레나의 칼날은 암살자의 얇은 거죽 몇 장만을 정확히 베어냈다.
가슴팍에서 피가 배어나오고 있음에도 눈을 휘둥그레 뜨며 이게 되네? 라는 말을 중얼거리는 남자의 반응을 보면 알 수 있는 일이었다.
헬레나의 검은 그 이후에도 두 명의 남자를 추가로 베었고, 그로 인해 칼끝에는 그들의 검붉은 피가 묻었다.
난간 테라스 바닥에도 헬레나가 일부러 흩뿌려놓은 피로 인한 얼룩이 생겼다.
“ 거죽만 베었으니까 죽지는 않겠지. 아무튼 피가 너무 흐르면 사방에 묻을 테니까, 여기서 싸매고 꺼져. ”
“ 아, 알겠습니다. ”
난간에서 죽은 놈이 사방에 피를 흩뿌리고 다니면 그것만으로도 이상하다.
크라우저 저택에 머무는 사람들이 그를 눈치 챌 가능성이 낮고, 설령 눈치 챘다 하더라도 조용히 묻어갈 가능성이 높겠지만… 기왕이면 흔적이 없는 편이 좋으리라.
아마 그렇게 생각했기에 헬레나도,그 명령을 따르는 암살자들도 명령에 순순히 따르는 듯싶었다.
품에서 붕대를 꺼내 피가 흐르지 않도록 상처 부위를 지혈하고 막은 뒤, 재빨리 물러났으니까.
“ 역시 공작님이시네요. ”
“ 다 알면서 왜 그래? 이 정도 검은 소드 익스퍼트 중급만 되어도 휘두를 수 있어. ”
헬레나는 어느 새 곁으로 다가온 엘렌의 칭찬이 썩 기쁘지 않다는 듯 심드렁하게 반응했다.
아니, 칭찬을 하며 미소 짓는 엘렌의 얼굴을 향해 시선을 돌리며 미간을 곱게 찌푸리기도 했다.
“ 나를 칭찬해서 자비심을 유도한 다음, 가장 먼저 맛을 보겠다는 속셈이지? ”
“ …칫. 모르셨으면 좋으셨을 텐데. ”
이 짧은 순간에, 그것도 썩 좋지만은 않은 일이 일어난 직후에 저런 모습이라니.
나는 은근슬쩍 심리전을 걸어오는 엘렌과, 그 속내를 알아차리고 고개를 젓는 헬레나를 보며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 둘 다 그만. 다 짜고 치는 일이라고는 해도 칼에 피를 묻힌 날이야. 그러니 오늘은 조용히 잤으면 좋겠어. ”
“ 네에?! 그럴 수가! 대공님의 정을 받는 것이 제 하루의 낙인데…! ”
“ 지온! 저런 버러지들의 피를 묻혔다고 신경 쓸 것 없어! 그리고 죽인 것도 아닌데 너무 엄숙한 것 같기도 해……. ”
아니. 방금 전 까지 서로 째려보며 다투더니왜 갑자기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내 팔에 안겨드는 것일까.
그야말로 짜고 치지 않는 이상에야 불가능할 정도로 호흡이 딱 들어맞는 모습이었다.
나는 두 여자가 평소에 이랬다면 참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한결같이 서로를 견제하고 질투하는 모습도 어찌 보면 서로의 호흡이 잘 들어맞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 아닐까 생각했다.
정말로 균열이 난 관계라면 틈을 봐서 사단을 냈겠지.
“ 오늘만큼은 안 돼. 계속 떼쓰면 오늘 밤은 아예 따로 자 버린다? ”
내가 짐짓 엄격한 표정을 지으며 목소리를 가라앉히자, 두 여자는 더욱 당황해하여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특히 엘렌은 나와 동침한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그 아쉬움이 헬레나보다 더한 듯 했다.
물론, 헬레나도 당장 죽을 만큼 허둥대고 있었다. 얼마나 급했는지 침대 위에서나 속삭이던 존댓말을 쓸 정도였다.
“ 아, 안 돼요! 제발 그것만은! 제, 제가 잘못했으니까……. ”
“ 알았어. 따로 안 잘 테니 진정하고… 엘렌. ”
나는 극도로 불안해하는 헬레나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진정시킨 뒤, 옆에서 어쩔줄 몰라 몸을 배배꼬는 엘렌의 이름을 불렀다.
“ 지온 님! 저도 잘못했으니까 부디 용서를…! ”
“ 용서 할 테니까 제발 진정해. ”
“ 아… 감사합니다! ”
엘렌은 무릎이라도 꿇고 고개라도 조아리려는 듯 몸을 숙였지만, 내가 급히 일으켜 세웠기에 부담스럽기 짝이 없는 모습을 피할 수 있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할 정도로 내가 좋다는 것이 부담스러우면서도 기쁘고, 한편으로는 우습기도 했다.
나는 헛기침을 하며 분위기를 환기시킬 겸 엘렌의 의식을 내 목소리에 쏠리게 한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 크흠! 엘렌은 물 마법을 이용해서 시체를 갈아버릴 수도 있다고 했었지? ”
“ 네. 시체 처리를 어떻게 했느냐는 의문에 답하기 위해 의논하던 중 그런 말을 했었죠. 적당히 시늉만 내면 될까요? ”
“ 부탁할게. ”
엘렌은 그녀의 어깨를 잡은 내 손에 자신의 손을 포개며 고개를 끄덕인 뒤 정령마법을 펼쳤다.
마법의 사용으로 인한 마나의 파동이 이곳을 기점으로 넓게 퍼져나갔고, 엘렌의 머리 위엔 사람 몇 정도는 너끈히 들어갈 만한 커다란 물방울이 생겨났다.
물방울은 바람의 힘을 받아, 그리고 물 자체의 힘으로 인해 믹서기처럼 맹렬한 회전을 반복하고 있었다.
저곳에 들어가면 정말로 뼛조각 하나 남기지 않고 갈려나갈 것이 분명했다. 실수로라도 손을 대서는 안 될 것이었다.
“ 이쯤하면 처리되었을 것 같으니, 슬슬 거둘게요. ”
나로서는 알 수 없지만, 엘렌이 그렇다고 하니 그런 거겠지.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엘렌이 만들어냈던 물방울이 안개와도 같이 흩어져 버렸다.
곁에 닿는 전부를 흔적도 없이 씹어 삼킬 듯한 것치고는 그 마지막이 우아할 정도로 조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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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 수고했다. ”
며칠 뒤, 밤.
루크는 바라 마지않았던 보고를 받자 기분이 무척 좋아짐을 느꼈다.
공식적으로는 헬레나의 손에 사망으로 처리 된 길드원들은 범죄 길드를 통해 은밀하게 세탁된다고는 하는데, 거기까지는 알 바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이로 인해 명분을 확보할 마지막 단계에 다다랐다는 점 하나 뿐이었다.
크라우저 측에서 정식으로 항의를 표하는 순간 움직인다.
그 때가 되면 자신의 형인 로크가 누명이라며 노발대발 날뛰겠으나, 그를 믿어 줄 사람은 없었다.
가장 큰 정적이었던 남자가 한 때의 위기를 모면하려는 변명을 아무도 믿지 않을 테니까.
거기에 더해 가짜로 만들어 둔 증거가 있음을 떠올리며, 루크가 입꼬리를 들어올렸다.
“ 크크. 크크큭……. ”
귀족파와 왕실파. 파벌로 보아도 적이며, 그 행동 양식만 보아도 서로 맞지 않음을 직감할 수 있었던 공작 일가와 손을 잡았다.
그 사실이 심히 우습기도 했고, 쓸데없는 혼란을 겪어야 했기에 이유 없이 원망하기도 했으나, 결국 모든 일이 잘 풀려가고 있었다.
루크로서는 헬레나가 그를 좋아하기에 이런 일을 꾸민 것이 아닐까 착각할 정도였다.
실제로 순간이나마 그런 생각을 떠올린 적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생각이 터무니없는 착각이었음을 숨 한 번 쉴 찰나에 깨달았다.
헬레나의 지극한 대공사랑은 너무도 유명했고, 그 사랑으로 인해 킬리네어 공작가 난리가 나지 않았는가.
아무튼, 앞으로도 우호적이지는 않더라도 적대적인 긴장감이 흐를 일은 줄어들겠지.
루크는 실성한 사람마냥 소리 죽여 큭큭대며, 그의 형 로크를 제거한 후에 어떤 일을 할지 생각했다.
권력의 기반을 완벽히 제 것으로 만들었으니 이제는 그를 쓸 차례다. 그것이 루크를 기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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