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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의 기둥서방이 되었다-73화 (73/192)

〈 73화 〉 또 너야? #3

* * *

이렇게 느긋해도 되는 건가…? 싶을 정도로, 지금의 나는 한가하기 짝이 없었다.

오전 업무는 진즉에 끝이 났고, 점심때 까지 남은 시간을 보내고자 저택 뒤편 연무장에서 돗자리를 깐 채 누워 있었다.

저택 그늘에 숨어 있으니 참 시원하기 그지없었다.

“ 아깝네. 호위 역할이라서 나란히 누울 수는 없으니까. ”

내 품에 안긴 채 옆에 누워 있던 여자, 헬레나가 피식 웃으며 돗자리 한 구석으로 시선을 던졌다.

내 호위를 맡은 여성이자 비공식적인 첩이기도 한 다크엘프 엘렌이었다.

“ 그렇… 지요. 호위 역할을 하는 제가 누워 있을 수는 없지요. ”

“ …그래. 어쩔 수 없는 일이지. ”

헬레나는 짐짓 안타깝다는 듯 착 가라앉은 목소리를 내었으나, 내 품에 안겨 히죽거리는 모습을 보니 한숨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를 보고 분한 듯이 입술을 살짝 깨무는 엘렌의 모습도 그러했다.

그로 인해 두 사람 사이에서 흐르는 미묘한 흐름에 휘말린 꼴이나 알아서 흘러가리라는 생각을 하며 눈을 감았다.

예전 같았으면 어떻게든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을 텐데, 나도 제법 담이 커지긴 한 모양이다.

“ …배라도 쓰다듬어줄까? ”

나는 헬레나의 허리를 끌어안은 오른팔을 의식하며 물었다.

아직 왼팔이 남았으니 품에 안아주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누워 있기에 자세가 다소 불안정하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에, 엘렌은 눈을 반짝이며 꼭 좀 부탁한다는 소리를 태연하게 내뱉었다.

여자의 배를 쓰다듬는 건 본인이 여러모로 꺼려한다고 어디서 들은 기억이 있는데, 여기에 있는 두 여자들은 전혀 그런 기색이 없었다.

어디든 만져주면 좋아하는 것이, 꼭 주인을 너무도 잘 따르는 강아지 같았다.

“ 그럼, 부탁드릴게요……. ”

엘렌이 수줍게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를 내자, 헬레나가 불만스럽다는 듯 눈을 흘겼다.

어찌보면 곤란한 상황일수도 있으나, 그래봤자 허리를 안은 팔에 조금만 힘을 주면 그만이었다.

“ 으응……. ”

그러면, 지금처럼 귀를 간질이는 듯한 달큼한 신음을 흘리며 내 품에 얼굴을 묻게 만들 수 있으니까.

“ 아! 따뜻해요……. ”

엘렌은 허리를 둘러 배를 매만지는 내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개며 황홀하다는 듯 미소 지었다.

배를 쓰다듬는 모습을 보면 아이라도 밴 것 같은 움직임이었다.

머릿속으로 나와 그녀 사이의 아이를 상상하고 있는 지도 모를 일이었다.

순간 내 자신이 난봉꾼이라도 된 것만 같은 기분이었으나, 이내 그것이 기분이 아니라 현실임을 인정하고 받아들였다.

아침부터 팔자 좋게 여자 둘을 끼고 누워있으니 그럴 수밖에.

더구나 그 중 한 명은 이 나라의 공작이고, 다른 한 사람은 흉악한 용병이자 지금은 더욱 강해진 다크엘프다.

“ 분명 잤는데도 잠이 오네……. ”

적당히 따뜻하면서도 시원한 날씨에 절로 눈이 감겨왔다. 분명 적당히 잠을 잤는데도 이러니 참 신기했다.

그야말로 서면 앉고싶고, 앉으면 눕고 십고, 누우면 자고 싶다는 말이 딱 들어맞는 상황이었다.

“ 어젯밤에도 그만큼 힘쓰셨으니… 졸리신 것도 당연해요. ”

엘렌이 눈을 흘기며 배시시 웃자, 내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있던 헬레나의 몸이 움찔댔다.

엘렌과 경쟁하듯 정을 짜내기 시작했던 주범이었으니 여러모로 찔리는 기색이었다.

거기서 끝냈다면 참 평화로웠겠지만, 엘렌은 은근한 눈빛을 띤 채 내 허벅지를 조심스레 쓸기 시작했다.

손가락 끝으로 간질이듯, 혹은 애를 태우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만약 내가 피곤하지 않았다면 부드럽다 느끼는 선에서 그치지 않았을 것 같았다.

헬레나도 그를 아는지 한쪽 눈을 슬쩍 내비치며 불만스러운 기색을 흘리다, 이곳을 향해 다가오는 인기척을 느꼈는지 곧장 자세를 바로 했다.

똑바로 앉아 흐트러진 머리칼을 다듬으며 마음을 가라앉히는 듯 했다.

“ 누구지? ”

나 또한 기척을 느꼈기에 누운 몸을 일으켜 옷매무새를 바로 했다.

휴식을 취한다는 말을 전하고 왔으니, 분명 무언가 다른 일을 들고 올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우리를 향해 걸어오는 집사 앤디는 그 예상이 맞았다는 듯 편지 한 장을 내밀며 고개를 숙였다.

“ 공작님. 킬리네어 공작가에서 편지를 보내 왔습니다. ”

“ 네…? ”

순간, 헬레나의 눈빛이 거친 살기로 번뜩였다.

여러모로 안 좋은 인연으로 시작해 안 좋은 인연으로 끝맺은 일가였으니, 그들이 가져 온 소식이라 한들 반가울 수가 없을 노릇이었다.

하지만, 정식으로 무언가 소식을 보내 온 이상 무시할 수도 없을 노릇이다.

듣자하니 헬레나가 임명한 루크가 내부 반발을 억누르고 안정시켰다고 들었는데, 대체 무슨 일일까.

“ 안 열어 볼 수는 없겠네. 고마워요, 앤디. ”

“ 아닙니다. 휴식 중에 큰 민폐를 끼친 것 같아 죄송합니다. 그럼, 저는 이만……. ”

앤디는 헬레나가 편지를 손에 쥐자 간단한 목례를 마친 뒤 자리를 떴다.

헬레나의 손에 들린 편지에 찍힌 인장의 모양을 보니 킬리네어 가문의 것이 분명해 보였다.

“ 귀찮은 것들. 지긋지긋해. ”

헬레나는 몹시 투덜대며 편지를 뜯었다. 나와 관련된 악연으로 묶였으니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당연했다.

엘렌도 그를 알았기에 얌전히 입을 다문 채 헬레나의 손끝을 가만히 바라볼 뿐이었다.

난폭하면서도 깔끔하게. 편지봉투의 겉을 찢고 내용물을 쏙 빼낸 헬레나의 미간이 곱게 찌푸려졌다.

봉투가 제법 두툼하기에 몇 장에 이르는 편지지가 딸려 나왔을 때도 그러려니 했으나, 헬레나의 반응을 보니 보통 내용이 아닌 듯싶었다.

“ 왜 그래? ”

“ 설명하기가 너무 길어. 일단 직접 읽어보는 게 나을 것 같아. ”

그래서 무슨 내용인가 싶어 물었더니, 헬레나가 대답 대신 편지지 몇 장을 내밀었다.

당연히 내용이 궁금했던 나는 편지지를 받아들기 무섭게 종이를 빼곡히 채우는 글자를 읽어 내려갔다.

내용은 이랬다.

킬리네어의 장남 로크 킬리네어가 현 킬리네어 공작인 자신, 루크 킬리네어를 암살하기 위해 암살자 길드에 의뢰를 넣었다.

본래라면 고객 기밀을 유지해 오던 길드로서는 승산이 희박한 의뢰를 거절하고 끝내려 했으나, 이를 이용하고자 자신에게 접근, 공작과 우호적인 관계를 쌓고자 했다.

그러나, 로크 킬리네어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다른 계획을 세웠다.

바로 로크가 킬리네어 공작가를 휘저은 원인, 헬레나에 대한 원망과 복수에 눈이 멀어 암살자를 보내려 한다는 것으로 꾸밀 생각이었다.

물론 헬레나는 소드마스터이기에 그들로서 암살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녀와 결혼한 나라면 성공 가능성이 제법 보이기에, 나를 죽여 분풀이라도 하고자 한다는 거짓말을 할 것이라고.

“ 즉, 함께 짜고 치자는 거로군. ”

“ 응. 맞아. ”

한 마디로 자신을 죽이려 한 로크에게 다른 누명을 씌워 이참에 제거를 하겠다는 속셈이다.

편지는 그에 대한 간단한 답을 달라는 것으로 끝맺었으나, 참 어이없는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 집안싸움으로도 모자라 다른 공작의 대공을 암살하려 하는 건 커다란 문제야. 특히 다른 공작의 가족을 건드린다는 면이. ”

“ 그러면 예전처럼 두 가문 사이에 불씨가 생길 테고, 한 번 데여본 입장인 킬리네어로서는 최대한 피하고 싶겠지. ”

전과 같이 자존심이 아니라 생명을 건드리려 했다면 그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내 입장에서는 헬레나의 급발진만큼 심각한 상황이 따로 없었지만, 이대로 일이 진행된다면 공작 간의 커다란 문제가 되었을 것이 분명했다.

군말 없이 영지전을 벌여도 할 말이 없을 만큼.

그러나, 루크는 그를 이용해 골칫덩이인 형을 제거하려 했다. 그것도 정당한 명분을 얻어서.

“ 귀족이 무섭긴 무섭구나. ”

“ 원래 최우선 계승 서열이 아닌 인간이 작위를 물려받으면 분란이 일거라 생각은 했지만… 그걸 이용해 어색했던 관계를 다시 봉합하려 할 줄은 몰랐어. ”

“ 더구나 도와준다면 부족하나마 사례를 하겠다고……. ”

권리를 줄 수도 있고, 돈을 줄 수도 있을 것 같다.

형제가 폭주했음을 막지 못한 자신의 죄가 크다며, 사죄를 표한다는 명분을 끼얹어 건네면 별 다른 의심을 살 일도 없으리라.

설령 보상을 필요 이상으로 크게 주더라도.

“ 이 루크라는 놈은 의외로 자기 평판에 신경을 쓰나 봐. 구석에 처박힌 늙은이는 안 그랬는데. ”

헬레나가 말하는 늙은이, 알버스는 그런 인물이기는 했다.

공작답게 오만했고, 그렇기에 아랫것들의 평판이 어떠하던 눈 하나 꿈쩍 않던 인간이었다.

적당히 교양 있어 보이는 태도를 갖고 있지만 그 뿐이었다.

“ 평판을 신경 쓸 수밖에 없겠지. 그는 차남이었고, 결투에 의한 결과라고는 하나 본래 작위 계승과는 연이 조금 멀었으니까. ”

귀족의 차남이란 장남이 잘못될 것을 대비한 예비용 건전지 같은 존재였으며, 오만한 귀족일수록 그 경향이 두드러졌다.

당사자들도 그것을 알기에 적당히 오만하고, 적당히 고개를 숙일 줄 아는 것이 보통이라고 하던데… 루크도 그런 부류가 아닐까.

“ 노골적으로 이용하겠다는 티가 나니까 어이없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네. ”

“ 귀여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나보네. ”

나는 입꼬리를 슬쩍 들어올리는 헬레나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나름대로 상황을 이용해 이득을 얻으려 하는 그 집념을 칭찬할 법 하지만, 귀엽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엘렌 또한 그게 동의하는 듯 슬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이무래도 두 여자는 루크의 행위가 썩 싫지만은 않은 모양이었다.

“ 으음. 아무튼 어떻게 할 거야? 받아들여? ”

“ 허울 좋은 화해 신청이라 하더라도 나쁠 건 없잖아. 오히려 약점 하나를 드러내면서까지 손을 뻗는 걸 보면, 어지간히 자기 형을 처리하고 싶은 모양이니까. 원한이 있던 놈들은 전부 처리했고. ”

“ 거기다, 공작님과는 이후에 엮이고 싶지 않은 모양이고요. ”

제법 크다고 할 수도 있을 약점 아닌 약점을 드러내기도 했으니 그럴 만도 하겠지.

그만큼 형인 로크가 거슬리는 모양이고.

헬레나는 결심을 굳힌 듯 자리를 털고 일어나, 킬리네어 전체에 원한이 없을 드러내는 답을 내놓았다. 자신이 거슬렸던 것은 그 아비와 딸 두 사람일 뿐, 나머지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 좋아. 당장 집무실로 돌아가서 답장부터 써야겠어. 훗날 어떤 보상을 할지 기대하면서. ”

◎◎◎

“ 후후. ”

답이 왔다.

루크는 며칠에 걸쳐 도착한 답장을 손에 쥔 채 웃었다.

받아들이겠다.

짤막하기 그지없는 답이었으나 무척이나 기다려왔던 답이었다.

“ 그래. 받아들일 결심을 해 줬다니, 참 고맙군. ”

크라우저 공작과 원한을 살 일을 또 만들 수는 없다.

그 미치광이 계집은 남자에 미쳐 있었기에, 그를 노린다는 소식을 들으면 그의 형을 죽이라 노발대발 날뛸 것이 분명하다.

겉으로는.

그리고 그 겉으로 날뛰는 것이야말로 루크가 바라 마지않던 행위였다.

“ 거기 누구 있느냐? ”

그는 일가의 충실한 집사를 불러 바깥으로 나갈 채비를 마친 뒤, 킬리네어 공작령의 외진 창고로 발걸음을 옮겼다.

결론이 나올 때 까지 그곳에서 머무르기로 한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 누군가는, 루크에게 접근했던 지부장이었다.

“ 이런 오후에 찾아오시다니. 어지간히 좋은 소식을 들고 오신 모양이군요. ”

지부장은 겉보기엔 무덤덤하기 짝이 없으나, 루크의 낯빛에서 안도의 빛을 읽어냈다.

크던 작던 스스로 정한 목표를 달성한 인간만이 내보이는 그런 낯빛을.

“ 음. 크라우저 공작이 내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네. ”

“ 제법 어려운 결정을 내린 것으로 아는데… 별로 걱정하는 기색이 없으시군요. ”

그래. 이 소식이 널리 퍼지기라도 하는 날에는 어떤 비난이 날아들지 알 수 없었다.

그 경우 크라우저 공작 측도 어느 정도의 비난을 감수해야겠지만, 그 강도는 지극히 미약한 수준에서 그치겠지.

하지만 헬레나라면 다르다.

크라우저가 아닌 헬레나는 약점을 잡고 흔드는 그런 인간이 아님을 믿었고, 그 믿음은 사실이었다.

헬레나 크라우저는 지온 알트람에 관한 일이 아닌 한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 여자였으니까.

루크, 혹은 그 날의 결투를 보았던 사람들은 헬레나의 광기를 통해 그것을 여지없이 깨닫게 되었다.

“ 걱정? 할 필요가 없지. 현 크라우저 공작은 전 공작처럼 왕실에 대한 충성도, 권력에 대한 욕심도 별로 없으니까. ”

“ 예…? 그것을 어찌 압니까? ”

헬레나의 결투는 유명한 사건이기에 지부장 또한 그 전말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저 남자에 대한 집착이 강한, 단지 그 정도일 뿐이라고 알고 있을 뿐이었다.

“ …으음. 공작으로서의 판단력이라고 해 두지. ”

그러나, 굳이 지부장에게 그런 시시콜콜한 이유와 판단의 근거를 전부 밝힐 필요는 없겠지.

루크는 그리 생각하며 당히 얼버무릴 뿐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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