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화 〉 또 너야? #2
* * *
알버스 킬리네어의 아들이자 차기 공작이었던 로크 킬리네어.
그의 입장에서 보면 왕궁에서 벌어진 불행의 씨앗부터가 부조리하기 그지없었다.
지금쯤 살이 없어져 앙상한 백골이 되었을 아그네스의 멍청한 짓부터 헬레나의 광기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것이.
“ 으아아아!! ”
로크는 그의 눈앞에 놓인 테이블을 쾅 소리 나게 내려치며 고함을 질러댔다.
안중에도 없던 동생이 권력을 지고 흔드는 꼴을 용납할 수 없어 온갖 공작을 벌였으나 실패했다.
왕을 공증인으로 내세운 결투의 조건은 엄숙히 시행되어야 했고, 그러한 명분이 컸기에 헛된 저항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그럼에도, 명분과 감정적인 수용은 다른 문제였다. 이렇게 연금되어 있는 지금조차 패배로 인한 쓴맛을 온전히 삼키지 못했다.
“ 용서 못 한다…! 할 까보냐…! ”
영향력은 사라졌을지언정 여전히 킬리네어 공작가의 장남이었으며, 여느 귀족이 그러하듯 비자금 또한 갖추고 있었다.
주기적으로 수발을 드는 하인들이 드나들기도 했다.
즉, 아직도 완전히 꺾인 것은 아니라고 로크는 생각했다.
그는 이빨을 까드득 소리가 나도록 갈며, 한껏 성이 난 목소리로 외쳤다.
“ 거기 아무도 없느냐?! ”
◎◎◎
암살자 길드는 그 범위가 크고 넓어소테르 왕국을 포함한 대륙 전역에 세를 두고 있었다.
귀족이 권력을 잡고 날뛰는 시대이니만큼 암살에 대한 수요는 끊이지 않아, 이들의 입장에서는 사방에서 돈줄기가 끊이지 않고 있었다.
매일같이 일을 하지 않더라도드문드문 찾아오는 이들이 굵직한 일거리를 던져주기에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또한 그 명맥을 유지하기 위해 별도의 본진에서 암살자들의 훈련에 매진하기도 했다.
우스운 이야기지만, 그들은 나름대로 직업정신에 충실했다.
“ 거참……. ”
소테르 왕국에도 몇 개의 암살자 길드가 있었고, 지금 테이블에 늘어져 한숨 쉬는 남자 또한 그런 길드 지부의 지부장 중 한 사람이었다.
겉으로는 여관을 겸한 주점이었다.
남자는 골을 싸매며 괴로워했다.
사고사를 위장하여 죽여 달라는 의뢰 자체는 그리 놀랍지 않았으나, 하필 그 대상이 현 킬리네어 공작이라는 점이 문제였다.
악명 높은 어느 공작만큼 스스로의 힘이 뛰어난 인간은 아닐지라도 그를 지키는 면면들이 제법 만만찮았다.
그런 놈들을 전부 뚫고 사고사라. 솔직히 어이가 없었다.
“ 어쩌면 좋지…? ”
“ 뭐가요? ”
답을 찾지 못해 배배 꼬이는 지부장의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겉으로는 이 술집의 주인이자 길드와의 연락책을 담당하고 있는 남자였다.
그도 암살자였으나 끈을 잇는다는 역할을 하고 있어 직접 현장에 나서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 킬리네어 공작 암살 말이다. ”
“ 공작 암살? 그 집 장남이 연금되었다더니, 결국 암살까지 저지를 생각인가보네요. ”
남자는 한숨 쉬는 지부장의 맞은편에 앉아 피식 웃었다.
암살 대상을 통해 의뢰주가 누구인지 훤히 꿰뚫는 것이 다소 놀라워 보였으나, 암살자 길드에 속한 인간이라면 누구나 떠올릴 수 있을 결론이었다.
“ 아무튼 거절하면 되잖아요? 무조건 받는다가 우리 신조도 아니고. ”
불리하면 거절한다. 남자는 그 지극히 당연한 진리를 거론하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이미 답이 정해진 일을 가지고 끙끙 싸매는 지부장이 영 이상해보였다.
돈에 눈이 멀어 사는 것도 아니고, 결단력이 없는 것도 아니었기에.
“ 그렇지. 그렇잖아도 내부 소란이 있던 직후라 경비에 더 신경을 쓰는 기색이고, 그런 놈들을 뚫고 사고사로 위장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야지. 본부 근처에서 머무는 특급이라면 모를까. ”
“ 특급이라. 건수를 보면 특급을 움직여도 될 것 같긴 한데, 그러기엔 저쪽 돈이 모자라잖아요. ”
오러를 다루며 기사조차 암살할 수 있는 이들이 바로 특급이다.
더구나 그 수도 몇 없어 몸값 또한 몹시 비쌌다. 즉, 어지간해선 움직일 수도 없는 이들이었다.
공작의 암살. 그 한가지만을 바라보면 특급을 움직여도 될 만한 안건이기는 하나, 암살을 성공하면 주겠다는 대금이 턱없이 모자랐다.
듣기로는 킬리네어의 장남이 비자금을 사용해 의뢰를 넣었다고는 하는데… 그렇다 해서 없던 돈이 늘어나는 것도 아니지.
지부장은 그것을 알면서도 이 의뢰를 쉬이 뿌리치지 못했다.
뭔가 다르게 쓸 만한 건수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 그래. 이래저래 계산해 봐도 거절하는 게 맞지. 그런데 이걸 쉽게 버리기엔 뭔가 아깝단 말이야. 내가 대가리가 모자라서 잘은 말 못하겠는데, 어떻게 한 건 벌어볼 건수가 될 것 같거든. 근데 그 방법이 참……. ”
“ 미련 참 많으시네. 어디, 술 한 잔 하실래요? 머리가 좀 돌아가면 뭐라도 생각날 것 같은데. ”
“ 그건 머리가 돌아가는 게 아니라 혀가 돌아가는 거겠지. ”
그래도 한 잔 마시면서 기분이나 좀 풀어볼까 하는 유혹에 망설이던 중, 지부장의 뇌리에 번갯불이 튀었다.
“ 야. 이 의뢰를 공작 본인에게 알리는 건 어떻게 생각하냐? ”
“ 예…? 미쳤어요? 고객 정보는 비밀 엄수라는 걸 아는 사람이 무슨 개소리를……. ”
암살자 길드에게 의뢰를 넣은 이는 비밀에 둔다.
그런 신뢰가 있기에 흉흉하기 짝이 없는 길드라도 신뢰를 얻고, 지금껏 적당히 먹고 살며 명맥을 유지하고 있지 않았는가.
그런 비밀을 술술 불어낸다는 지부장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지부장은 테이블 위를 오른손 검지로 툭툭 두드리며 침착하게 말을 이어갔다.
“ 그래. 비밀이지. 하지만 의뢰인이 없어지면 고객 정보고 뭐고 아무런 의미가 없는 거 아니냐? ”
“ …미친. 상도덕이 없어도 너무 없는 거 아니오? ”
“ 사람 목 따고 다니는 놈들이 도덕은 무슨. 애초에 그 규율도 우리가 살기 위해 만든 거지, 진짜 도덕적으로 행동하라고 만들었겠냐? 더구나 이번 일이 잘 풀리면 제법 이득이 될 지도 몰라. ”
의뢰금은 의뢰금대로 꿀꺽 삼키고, 그야말로 이득이 따로 없는 상황.
너무 낙관적으로만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우려는 지부장 또한 갖고 있었으나, 그는 현 상황에서 희망을 보았다.
좀처럼 놓치기 싫은 희망이었다.
“ …이득이라. 이득도 좋긴 한데 안전이 최우선이라는 건 알죠? ”
말해도 듣지 않을 모양이군.
술집 주인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 쉰 뒤에, 사람을 죽일 때나 보일 법한 날카로운 안광을 띠며 물었다.
그 또한 사람을 땅에 묻으며 살아 온 암살자였기에.
잘 알지. 지부장은 피식 웃으며, 걱정 말라는 듯 남자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
정말 예상치도 못했다.
루크는 암살자 길드에 청부를 넣은 그의 혈육을 떠올리며 혈압이 오르는 것을 느꼈으나, 그로 인해 찾아온 결과가 너무 의외였던 나머지 눈을 끔뻑였다.
늦은 밤 그를 찾아온 남자가 로브로 전신을 칭칭 싸맨, 암살자 길드의 지부장이었으니까.
“ 한 잔 들겠나? ”
“ 주시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
모두가 행동을 삼가며 잠에 들 준비를 시작하는 시각.
루크는 쥐새끼마냥 몰래 담을 넘어 찾아 온 지부장을 제법 성의 있게 대접하며 차를 따랐다.
괜히 사람을 불러 눈에 띄는 것을 삼가기 위해 그의 손으로 직접 차를 우려냈다.
평소에는 사람을 시키는 일이었으나, 교양의 일환으로 익혀 둔 폼이 제법 그럴듯해 보였다.
어쨌든, 공작이 직접 따라주는 차다.
지부장은 차보다는 술이 더욱 좋지만, 내색조차 않은 채 쓴 찻물을 맛있다는 듯 삼켰다.
내심 이런 것을 자주 마시는 귀족들의 행태를 이해 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며.
“ 머리가 맑아지는 맛이로군요. ”
“ 사람을 죽이느라 자극적인 것에만 익숙할 줄 알았더니, 의외로 맛을 볼 줄 아는 놈이로군. ”
루크는 지부장의 말이 아부임을 알지만, 그런 표현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에 점수를 주었다.
나름대로 한 단체의 머리를 맡고 있을 정도는 되어 보였다.
“ 과찬이십니다. ”
“ 음. 그럼 쓸데없는 이야기는 그쯤 하기로 하고, 내게 형님의 암살 소식을 알리는 이유가 뭔가? ”
“ 킬리네어 공작가의 주인이신 공작님과 척을 지고 싶지 않음과 동시에, 잘 봐달라는 일종의 청탁이지요. ”
청탁이라. 이런 기묘한 청탁은 또 처음이로군.
루크가 피식 웃으며 말없이 차를 들이키자, 지부장 또한 약간 어색한 몸짓으로 차를 들어 남은 찻물을 단숨에 들이켰다.
쓰디 쓴 차를 몇 번에 나눠 마시기엔 혀가 너무도 고통스러웠던 탓이다.
“ 그런데 말이지, 이 사실을 내게 알리기만 하는 것이 자네의 목적인가? 그랬다간 신뢰를 저버린다는 인상을 주게 될 텐데. ”
“ 그 점은 부디 비밀로 해 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내부에 정보를 흘린 놈이 있다는 거짓 소문을 흘리고, 그에 따른 징계를 주는 척 하는 식으로 해결하려고요. ”
“ 하나부터 열까지 조작으로 승부를 보겠다, 그 말이로군. ”
그러니 입을 맞춰 달라는 것인가.
어찌 보면 자신을 다루려하는 태도에 루크의 기분이 언짢아 질 법도 했으나, 그 또한 공작.
최대한 대화를 질질 끌며 현 상황을 최대한 음미하려 애쓸 뿐이었다.
독살을 시도하려 했어도 봐 주었고, 암살을 시도하려 해도 봐 주어야 하는가.
루크는 자비심을 통한 평판의 상향과 위협의 배제라는 실익을 두고 고민에 잠겼다.
이대로 저 피냄새 짙은 남자와 입을 맞추는 것도 나쁘지 않을 법도 했으나, 무언가 더 이득을 볼 방법이 없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 성질은 눈앞에 앉은 지부장과 별반 다르지 않았고, 어찌 보면 조직을 운영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품어 볼 만한 고민이기도 했다.
어쩌면 좋지, 하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며 시간이 흘러갔다.
지부장은 그 지독한 침묵 속에서 내심 식은땀을 흘렸으나, 겉으로는 태연한 척 여유를 부리며 답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밤을 새서라도 확실한 답을 들어야만 안심하고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 음. ”
그러고도 조금의 시간이 더 지나고 나서야, 루크의 침음이 지독한 침묵을 깼다.
침묵 속에서 이래저래 굴린 머릿속에는 지부장의 것과는 다른 새로운 결론이 떠올라 있었다.
명분과 실리 양쪽을 모두 챙길, 그의 입장에서는 묘안과 다름없는 생각이었다.
“ 나쁘지는 않아. 하지만, 좀 더 바쁘게 일을 해 줘야겠어. ”
“ 예…? 뭔가 시키실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
“ 있고말고. 자네는 지금부터 크라우저 공작을 암살하러 가 주게. ”
뭐라고?!
지부장은 여태껏 잘 지켜오던 가면을 벗어던진 채 몸을 벌떡 일으켰다.
대륙에서도 손꼽히는 소드마스터이자 킬리네어의 내분을 제공한 원흉이며, 그 대공인 지온 크라우저에 대한 집착까지 남다른 광기를 갖춘 여인.
그리고 암살자 길드의 입장에서 보면 절대 얽혀서는 안 될 여자이기도 했다.
몇 년 전, 그녀가 어린 시절 크라우저 공작령에 있던 암살자 길드 지부를 습격해 쑥대밭을 만들었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았기 때문에.
─두 번 다시 이곳에 발을 들이지 마라.
지부장은 그 날 이후로 전설처럼 전해지는 격언을 떠올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킬리네어 공작도 공작이지만, 헬레나 크라우저와는 절대 얽혀서는 안 된다는 암살자 길드의 원칙은 생존과 직결된 문제였다.
“ 불가능합니다. 저희 수준으로 크라우저 공작을 어떻게 암살하겠습니까. ”
“ 그건 나도 잘 알고 있네. 애초에 정말로 공작을 죽이라는 명령을 할 정도로 내가 멍청해 보이는가? ”
네. 멍청해 보입니다. 이 씹새야.
지부장은 오만하게 턱을 치켜든 루크를 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다행히 펑퍼짐한 로브에 가려져 있기에 그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덕분에 거친 분노를 남몰래 표출하며 화를 삭힐 수도 있었다.
“ …실례했습니다. 너무 갑작스러운 이야기라 그만. ”
“ 이해는 하네. 아무리 자네가 길드의 지부장이라 하더라도 한 마디만 듣고 전부를 이해하기는 어렵지. 아무튼, 잘 듣게. ”
루크는 자신이 생각하던 바를 고스란히 털어놓았다.
마침 제가 알아서 굴러 들어온 말이니 유용하게 이용할 수도 있어 여러모로 좋을 것이라 생각했기에 낸 결론이었다.
그로서는 새삼 로크가 저지른 수많은 패악질이 참 고마울 따름이었다.
세상에. 지부장은 루크의 이야기를 다 들은 후, 무척 놀라워하며 물었다.
절로 떨리는 목소리를 최대한 가라앉히려 애쓰면서.
“ 그러면, 연락을 받은 즉시 움직이면 되겠습니까? ”
“ 음. 겉으로는 공작 살해의 용의자이니 그에 상응하는 처분을 받는 척 하겠지만, 걱정 말게. 나를 위해서도 원만하게 처리하도록 할 테니까. ”
“ …믿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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