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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의 기둥서방이 되었다-71화 (71/192)

〈 71화 〉 또 너야? #1

* * *

불과 며칠에 불과했지만 먹고 배설하는 데에만 온 신경을 쏟았던, 진하면서도 지능이 떡락한 시간을 보냈다.

그 동안 두 여자는 나를 조금이라도 더 갈취하기 위해 협력하기도 했고, 조금이라도 더 많은 몫을 받기 위해 눈을 부릅뜨고 다투기도 했다.

나는 짐승이 된 가운데 그녀들을 중재하느라 애썼고, 그로 인해 한층 더 깊은 관계가 되었다 자신할 수 있었다.

문제가 있다면 너무 깊은 관계가 되었기에 은근히 느껴지던 선이 무척이나 얇아진 기분이었다.

─다 지온 탓이야.

─대공님이 잘못이에요.

그로 인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르는 경우도 종종 있었지만, 일관성 있게 투정을 부릴 경우가 늘었다는 점이 나쁜 듯 하면서도 좋아 보이기도 했다.

둘이서 입을 모으며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 공작님께서는 비효율적이라는 것을 아시면서도 대공과 같이 다니시는데… 지금이라도 분업을 하실 생각이 있으신가요?

“ 안 돼. 그렇잖아도 지온과 떨어지기 싫은데, 네가 붙어 있으니 더 불안해. ”

사람들이 각자 일을 하느라 차분하면서도 다소 분주한 오전.

여느 때와 다름없이 집무실에서 일을 보고 있던 헬레나는 곱게 미간을 찌푸렸다.

집무실 소파에 앉아 가만히 자리를 지키고 있던 엘렌의 제안이 거슬렸던 모양이었다.

은근히 다른 뜻을 내포한 말이었으니 그럴 법도 했다.

“ 자만하는 것처럼 들리실 지도 모르겠지만… 대공님의 안전은 보증 드릴 수 있어요? ”

“ 그건 나도 알아. 문제는 네가 지온에게 던질 추파야. ”

“ 어머. 공작님과의 약속을 제가 어기기라도 한다는 말씀이세요? ”

엘렌이 잘 모르겠다는 듯 능청스럽게 웃자, 헬레나가 붉어진 얼굴로 소리를 빽 질렀다.

누군가 엿듣기라도 한다면 그 서슬 퍼런 기색에 무심코 겁에 질려 도망갈 정도였다.

“ 그 선을 교묘하게 이용할 생각이니까 열 받는단 말이야! 정을 나누진 않더라도 그에 준하는 행위는 마음껏 할 생각이잖아? 안 그래?! ”

“ 어… 알고 계셨어요? ”

그제야 엘렌의 표정에서 여유가 사라지고, 난처한 듯한 빛이 떠올랐다.

진심으로 들키지 않으리라 생각한 모양인데,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내게 집착하는 헬레나는 신경이 날카로우니까.

“ 당연히 알고 계시지. 키스부터 패팅까지 질펀하게 즐겨 볼 생각이었겠지만, 안 돼.. ”

“ 치이……, ”

“ 어디서 앙탈이야? ”

헬레나의 목소리와 표정을 통해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듯 틈이 없었다.

그녀의 옆에 앉아 서류 처리에 여념이 없던 나라도 알 수 있을 만큼 완고하기 짝이 없었다.

그에 실망한 엘렌은 잠시 아이처럼 투정을 부리다 활을 꺼내 정비를 시작했다.

거대한 힘을 얻었다 하더라도 손과 몸에 익은 전투 방식이나 습관이 하루아침에 바뀌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보냈다면 더더욱.

“ 그래. 다투는 건 나중에 해도 되지만, 서류가 밀리면 마음이 무거워지잖아. 얼른 일부터 하자. ”

“ …응. ”

헬레나는 떨떠름한 목소리를 내며 서류더미에 시선을 떨구었다.

엘렌도 무기 정비에 여념이 없기에 어딘가 김이 빠진 기색이었다.

대화가 어중간하게 끝난 탓에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헬레나가 부하였다면 간단한 포상을 베풀어 달래 줄 수도 있겠지만, 위치상으로는 여전히내가 아래다.

비록 대공이라는 거창한 신분이 되었다고는 하나 신분적인 갑은 헬레나였다.

헬레나가 내 말이라면 끔뻑 죽기에 균형을 이루고 있을 뿐이지.

“ 음……. ”

끔뻑 죽는다라.

나는 새삼스레 깜빡하고 있던 사실을 떠올리며 서류에 사신을 했다.

지온 크라우저. 대공이 되며 성씨가 새로이 바뀌었지만, 아직도 내가 알트람의 인간이라는 생각이 끊이질 않았다.

막상 대공이라 하더라도 하는 일이 비슷해서 그럴 지도 모른다.

“ 이건 보고서네? ”

나는 따로 결제 할 필요가 없는 서류를 집어 들어 내용을 읽어보았다.

제법 쓸모 있거나 중요해 보이는 정보가 있으면 이렇게 자료로 만들어 올려주기도 해서, 그렇게 신기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대부분은 다른 영지의 상태를 알리는 경우가 많았고, 뜬구름 잡는 소문도 일단은 올려본다는 식이었기에 읽는 재미가 제법 쏠쏠했다.

일을 하며 쉰다는 합리적인 명분을 만들어 준다는 점에서 고맙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에 적힌 내용은 그리 썩 반갑지만은 않았다.

“ 지온, 왜 그래? 무슨 안 좋은 내용이라도……. ”

갑작스레 안색이 변해버린 탓일까.

헬레나가 내 낯빛을 살피며 조심스레 물어오다, 내가 손에 쥔 종이로 시선을 떨구었다.

“ 킬리네어구나. ”

그래. 킬리네어다.

결투 이후 알버스 킬리네어를 자리에서 끌어내려, 그 집안의 차남이었던 루크 킬리네어를 임명했던 그 킬리네어의 관한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그 시작과 끝이 결투에 의한 결정이라고는 하나 장남인 로트 킬리네어의 입장에서는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것만 같았으리라.

실적도 배움도 나쁘지 않은데다 장남이었으니 흠 잡을 데가 없었고, 오만한 것은 킬리네어나 귀족들의 전형적 특성이다.

그러니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다음 공작이 확실시 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 순조롭던 흐름을 전혀 상관도 없었던 헬레나가 망쳤다.

그로 인한 상실감과 분노는 그 장본인만이 알겠지만, 가히 내전에 가까운 정치공작을 통해 순종할 생각이 없다는 것 하나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서류는 그런 킬리네어의 상황과 오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결국 본의 아니게 정당한 후계자가 된 루크가 킬리네어 공작가를 완벽히 장악하여, 장남 로트의 권리를 전부 빼앗고 가택에 연금시키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고.

“ 시끄럽던 집안이 드디어 조용해졌다는 거구나. ”

“ 쓸데없이 또 소란이 일지는 않을까? ”

“ 모르지. 사람은 합리적인 척 하는 동물이니까. 어떤 결론을 내려도 이상하진 않을 거야. ”

합리적인 척 하는 동물이라. 듣고 있으니 뼈가 시리는 말이지만, 제법 그럴 듯하다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

크라우저에 대하 우호적일 수도, 원한을 가질 수도, 혹은 아무런 생각이 없을 수도 있었다.

멀리 떨어진 사람의 생각을 읽는 재주도 없거니와, 어떤 행동을 통해 동기를 추측해 본다 하더라도 꼭 정답이 아닐 수도 있었다.

나는 다소 착잡해진 탓에 길게 한숨 쉬었으나, 막 활의 정비를 마친 엘렌이 입가에 호선을 그리며 말했다.

“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미리부터 걱정하진 마세요. 머리 아프잖아요. ”

일어나면 일어나는 대로.

내일을 장담하기 어려운 용병생활을 오랫동안 거쳐 그런지는 몰라도 참 후련하기 짝이 없다.

누군가는 남 일이라고 딱 잘라 말하지 말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내게 있어서는 충분한 깨달음을 주고도 남는 말이었다.

“ 그렇지. 그 말이 맞아. ”

나는 보고서를 한 쪽에 고이 내려놓은 뒤, 다른 처리가 필요한 서류를 집어 들었다.

일이 터지면 골치야 아프겠지만, 그 골치를 미리부터 당겨온다 한들 내 손해일 뿐이었다.

그 사실을 새삼 깨달으니 어이가 없으면서도, 또 후련하기도 했다.

◎◎◎

“ 하아……. ”

좋은 일이나 귀찮은 것은 어쩔 수 없다.

새로이 킬리네어 공작의 이름을 잇게 된 남자, 루크는 짧게 자라난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어깨에 힘을 주고 다니느라 쌓인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든 것만 같았다.

“ 드디어 끝났군. 길어도 너무 길었어. ”

“ 수고하셨습니다, 공작님. ”

루크의 푸념을 가만히 듣고 있던 킬리네어의 집사가 조용히 차 한 잔을 내밀었다.

차가운 것을 좋아하는 루크의 입에 맞춰 싸늘한 냉기가 감돌만큼 시원한 차였다.

찻잎은 물론 킬리네어 공작령에서 오로지 킬리네어의 인간만을 위해 재배하는 고급품을 사용했다.

“ 음. 정말 수고가 많았어. ”

살 것 같다.

루크는 앞에 놓인 차를 호쾌하게 들이키자 속이 뻥 뚫리는 것만 같은 청량감에 흠뻑 취했다.

그는 목구멍을 스치고 내부로 스며드는 냉기가 열을 식히는 감각을 무척 마음에 들어 했다.

찬 것이 몸에 좋지 않다는 소리는 들었으나, 본래 몸에 좋지 않은 것이 삼키기는 더욱 쉬운 법이었다.

예를 들면, 단 것이나 이와 같이 차갑기 그지 없는 것들 말이다.

“ 형님께서는? ”

“ 저항을 포기하시고 얌전히 연금되어 계십니다. 일단은요. ”

“ 그래야지. 본래 킬리네어를 이을 예정이었으니 화가 나는 것도 이해는 한다만, 이것이 현실임을 깨달으셔야지. ”

루크는 승자로서의 관용을 관대히 베푸는 것처럼 행동했다.

아니, 실제로도 제법 관대한 편이었다.

그 또한 킬리네어의 핏줄을 이은자답게 오만했으나, 차남이라는 위치 때문에 기세가 한 풀 꺾인 오만함을 가진 인간이다.

왜 자신이 후계자가 아니냐고 원망함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장남이 가로막고 있다는 현실을 수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그에게 전혀 예상치도 못한 기회가 찾아왔다.

바로 친분이라고는 없으며, 오히려 파벌로 따지만 적대한다고도 볼 수 있을 크라우저 측에서 손을 내민 것이다.

정확히는 손을 내민 것이 아니라 풍비박산이나 나라는 헬레나의 자그마한 복수이자 무책임함에 의한 결과였으나, 루크에게는 손을 내민 것과 진배없었다.

본래 공작이라는 이름과 연이 없던 자신이 이렇게 공작이 되었으니까.

그동안의 암투는 정말 엿 같았지.

루크는 몇 차례에 걸친 암살 시도, 독살 시도, 사냥 사고로 위장한 시도 등 위험하기 짝이 없던 순간을 떠올리며 미간을 구겼다.

모처럼 차갑기 그지없는 차로 식힌 속이 다시 끓어오르는 것만 같았다.

그의 형, 로트를 죽이지 않고 연금에 그친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형제애가 출중한 것도 아닌 그가 이런 결과를 내게 만든 것은 공작으로서의 도량과 가족으로서 정을 가졌음을 드러내, 지배자에게 필요한 자비와 독심이 있다 말하기 위함이었다.

실제로, 그런 결과를 내자마자 그 평이 상당히 좋았다는 것을 루크는 알고 있었다.

“ 잠깐. 그런데 일단은… 이라고 했는가? ”

화를 식히던 중, 루크는 집사가 지나가듯 말한 한 단어를 꼬집어 물었다.

워낙 마음에 걸리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 예, 공작님. 말씀하신 대로 일단은 얌전히 계시는 듯 했습니다. ”

“ 그 말은 즉 곧 무언가 꿍꿍이를 벌이겠다는 낌새가 보였다는 것 같은데, 맞는가? ”

“ 저 같이 늙은 인간이 무엇을 알겠습니까만… 적어도 그 눈에 포기의 빛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독심이라고 해도 좋겠지요. ”

겸손하기는. 루크는 노인의 낮은 태도에 내심 혀를 차면서도 그 말을 천천히 곱씹었다.

킬리네어에서 닳고 닳은 집사인 그가 사람의 눈빛 하나 잘못 볼 리가 없었으니, 독심이라는 말도 분명한 사실이리라.

그 말은 즉, 저택에 연금된 지금도 무언가 계획을 꾸미고 있다는 소리와도 같은 뜻이었다.

“ 독심이라 이거지? 집사. ”

“ 예, 공작님. 하명하십시오. ”

늙은 집사는 로크의 부름을 듣기 무섭게 가볍게 고개 숙여 명령을 기다렸다.

힘들게 얻은 공작자리이니만큼, 그것을 지키기 위해 무언가 조치를 취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루크의 입에서는 집사가 예상했던 범위 내의 명령이 떨어졌다.

“ 사람을 시켜 은밀히 형님의 동태를 살피게. 기왕이면 몸이 날랜 이들이 좋겠으니, 도둑 길드나 암살자 길드 등 행동이 날랜 이들 위주로 청부를 넣게나. 아니면 내부 사람을 써도 좋고. ”

“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

어느 쪽이든 좋지만, 기왕이면 다루기 쉬운 쪽이 더욱 좋겠지.

노인은 여전히 고개 숙인 채 어느 쪽으로 향하면 좋을지에 대한 계산을 간단히 마쳤다.

과거에는 공작가의 후계자로 점찍어둔 로크를 따랐으나, 어디까지나 과거.

그는 킬리네어의 후계자가 아니라 킬리네어 공작을 따르는 인간이기에, 로크를 감시하려 손을 쓰는 것에도 망설임이 없었다.

루크 또한 그것을 알기에 거침없이 노인에게 명령을 내렸고, 노인이 그 믿음에 보답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후계와는 거리가 먼 시절이라면 모를까, 지금의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진짜 공작이었기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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