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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의 기둥서방이 되었다-67화 (67/192)

〈 67화 〉 사랑과 전쟁 #4

* * *

조금씩, 여유롭게.

나와 헬레나의 결혼식 준비는 이 말에 따라 기간을 넉넉히 두고 천천히 진행해 왔다.

어떤 옷으로 할지, 어떤 요리를 내놓을지, 앞에서 인사말은 어떻게 할지 등등… 중요한 것부터 시작하여 나중에 해도 될 잡다한 일들도 처리했다.

그리하여, 나는 결혼식을 하루 앞두기에 이르렀다.

전역 전날에도 시간이 더럽게 안 가는 것 같았는데, 결혼식 전날도 그랬다. 말로 표현하기 힘든 모호한 희열과 두려움이 뒤섞여 약간 초조해지기는 했어도.

“ 많이 걱정돼? ”

샛노란 등이 불을 밝히는 저녁. 함께 방 안에서 차를 마시던 헬레나가 넌지시 물어왔다.

그에, 나는 고개를 저으며 그렇지 않다는 뜻을 전했다. 그저 마음만이 평소 같지 않았을 뿐이다.

그래도 걱정거리를 하나 꼽아본다면, 앞으로 내게 향할 호칭과 시선들이었다.

생전에는 연도 없던 대공이라는 소리를 듣게 생겼으니 좋아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종잡을 수가 없을 노릇이었다.

“ 모두가 열심히 했고, 그만큼 철저히 준비했으니 걱정은 안 해. 그저 내일부터 대공소리를 들을 생각을 하니 마음이 뒤숭숭하네. ”

“ 아……. 지온은 신분 상승을 그리 반기는 사람이 아니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 지온은 원래부터 내 것이었지만, 공식 절차를 거치면 그 무게가 사뭇 다른걸. ”

자작의 아들에서 대공으로. 헬레나가 말한 대로 무척이나 커다란 차이다.

신분상승도 이런 신분상승이 없으며, 평화로운 시대에서는 거의 불가능할 정도라고 봐야했다.

이 대륙에서 이 정도의 신분상승을 이루려면 나라 하나가 기우는 난세에 칼과 창을 들고 나서야만 가능할 수준이었다.

적어도 내 생각은 그랬다.

경우에 따라서는 속이 뒤집어질 만큼 불편하고, 또 부담스럽기 짝이 없기도 하다.

막연하게 머릿속으로 그릴 때와 새삼 그 무게를 실감할 때와는 그 체감에서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였다.

아마 강철멘탈이 아니었다면 이렇게까지 일이 잘 풀리지도 않았겠지.

나는 새삼스레 화려하거나 대단하지도 않은 이 특성을 요구하길 정말 잘했다고 생각했다.

호랑이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일화를 증명하는 듯한 능력이 참 고마웠다.

“ 다르지. 그래서 겁도 나고. ”

“ 겁이나? 정말? 그렇게 부담스러우면 지금이라도 결혼식을 취소할까? 시간이야 많으니까 좀 더 마음을 가라앉힌 뒤에……. ”

헬레나는 내 소심한 모습이 걱정되었는지 결혼식을 취소하겠다는 말까지 꺼내들었다.

본래라면 약한 소리를 내지 말라, 이미 다 준비가 끝난 상황에서 어쩔 수 없다 등 격려나 질책을 보냈을 텐데…….

나는 때 아닌 감격에 사로잡혀 헬레나의 손을 꼭 잡았다.

갑자기 손을 잡았으니 뜬금없을 만도 했지만, 헬레나는 얼굴을 붉힌 채 배시시 웃을 뿐이었다.

무엇보다 청첩장 비슷한 것을 이미 돌린 지 오래라 취소할 수도 없을 노릇이다.

“ 괜찮아. 헬레나가 퀭한 눈을 할 때 보다 무섭진 않거든. ”

“ 윽! 내가… 그렇게 무서워? ”

“ 무섭지. 소드마스터가 살기등등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데 무섭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어. ”

살기가 아니라 바닥없는 심연에 머리를 박는 듯한 두려움이지만, 그 점을 애써 설명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그저 진심으로 스스로를 자책하는 헬레나를 위로하고, 속았다는 말을 내뱉으며 뾰로통한 표정을 짓는 여자를 놀리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그 와중에도 꼭 잡은 손을 놓을 기색이 없으니, 진심으로 화가 난 기색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 진짜 너무해! 여태껏 한 번도 놀린 적 없었으면서……. ”

“ 내일부터 부부가 된다고 생각하니까 좀 더 편하게 느낀 탓일지도 몰라. 미안해. ”

“ …그럼 어쩔 수 없지. ”

헬레나가 몹시 관대함을 보여주려는 듯 손을 놓고는, 어깨를 쭉 편 채 턱을 살짝 위로 올렸다.

귀족 특유의 오만함이 버무려진 자비가 무엇인지 보이려는 듯 했으나, 아이가 어른 흉내를 내는 것만큼 어색해 보였다.

대신, 그만큼 귀엽게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

결혼식 당일.

크라우저 저택은 편지를 받고 몰려든 하객들로 아우성이었다.

한 영지를 다스리는 귀족 본인이 찾은 경우도 있었고, 그들의 아이 등 대리인을 보낸 경우도 많았다.

오지 않아도 좋다고 부드러운 문맥으로 강조한 덕인지 어깨에 힘을 빼고 여유롭게 대화에 임하는 이들이 많았다.

“ 차분하시네요. ”

2층 난간에서 그러한 풍경을 내려다보던 내게 엘렌이 말을 걸어왔다.

기사들이나 입을 법한 검은 예복을 입은 모습이 어색해 보일만도 했건만, 전혀 그러한 기색이 보이질 않았다.

늠름하면서도 아름답고, 엘렌의 매력을 충분히 드러내주는 모습이었다.

“ 예전에도 비슷한 적이 있었어. 중요한 시험을 앞둔 전 날은 몹시 긴장했었는데, 막상 그 당일이 되니까 마음이 차분해지더라. ”

“ 대공님께 있어 결혼식이란 시험과 비슷하다는 뜻인가요? ”

대공님이라. 나는 그 호칭에 낯간지러움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 비슷하지. 결혼식 자체는 좋다고 생각하지만… 이곳까지 발걸음을 옮긴 하객들이 감독관처럼 보여. 같은 국왕파에 속한 귀족들조차 같은 편처럼 느껴지지 않을 정도인데, 다른 이들은 구태여 말할 것도 없고. ”

“ 아…! 그러고 보니 중립을 표하시는 몇몇 분들이나 귀족파의 몇 사람도 얼굴을 내비쳤다고 하던가요? ”

“ 그렇지. ”

귀족파, 국왕파의 사이를 오가며 균형 잡힌 친분을 쌓아 나가는 중립파의 면면들.

그리고 지금도 내부에서 차가운 공기가 흐르며, 언제 내분이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킬리네어 공작가 아래에 속한 이들까지.

특히 귀족파는 청첩장을 보내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소문을 듣고 찾아온 이들도 있다고 하는데… 이 참에 파벌을 갈아치울 작정으로 온 것일지도 모르겠다.

단순하게 행복해야 할 결혼식 당일이지만, 귀족의 결혼은 그것마저 하나의 정치적인 장소인 셈이었다.

“ 새삼스럽지만, 결혼식이라 해도 거창한 순서는 없네요. 급이 높은 귀족의 결혼식은 성대하고 좀 더 화려할 줄 알았는데. ”

“ 우리가 그렇게 하자고 정해서 그래. ”

현대로 따져보면 스몰 웨딩에 가깝지만, 엘렌은 그 개념을 모를 테니 적당히 소박하게 하자는 답을 주었다.

연회에 쓰인 식재료나 로비를 꾸미는 데 쓴 장식의 비용을 생각해보면 소박과는 거리가 머나, 귀족의 입장에서는 소박할 만도 했다.

“ 부럽네요. ”

“ 부러워도 어쩔 수 없지요. 그러니 그만 거리를 두고 떨어져 주시겠어요? ”

엘렌이 넋두리처럼 중얼거리는 가운데, 익숙한 목소리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목소리의 주인은 두말할 것도 없이 헬레나로, 뒤를 돌아본 끝에 위치한 그녀는 예상했던 대로 하녀들의 부축을 받으며 천천히 다가왔다.

몸이 불편한 것은 아니지만 웨딩드레스나 발에 걸친 새하얀 구두를 어색해했기 때문이었다.

“ 네… 실례했습니다. ”

순간적으로 엘렌의 눈에서 스파크가 튀는 듯 했으나, 곧 고개를 숙인 채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금세 표정을 수습하고 숨을 고르는 모습을 보니, 잠깐 저도 모르게 감정이 격해진 것이 아닐까.

“ 저 왔어요. 아니, 왔어. ”

이제부터 부부라는 듯, 헬레나는 평소처럼 말을 놓으며 환하게 웃었다.

복잡한 자수가 아름답게 새겨진, 몸의 윤곽을 강조하는 새하얀 웨딩드레스.

생각해보면 현대의 결혼과 다르게 정면에서 이야기를 할 시간이 길어 뒤를 가리는 것이 의미가 없었지만, 좋은 게 좋다고 생각할 만한 디자인이었다.

지금의 헬레나는 신계의 여신들 못지않게 아름다웠고, 이런 여자가 맺어진다고 생각하니 때늦은 우월감이 싹텄다.

“ 그 때는 잠깐 입어보고 벗었을 뿐이라 잘 모를 수도 있었을 텐데… 움직일 만해? ”

“ 응. 괜찮아. 이대로 검을 쥐고 싸워도 어색하지 않을 것 같아. ”

“ 오늘따라 과장도 잘 하네. ”

“ 정말이야. ”

헬레나는 진심을 알아주지 않는 것이 불만이라는 듯 입술을 삐죽였다.

보는 이가 저택의 식구들뿐이었기에, 그리고 내 앞이기에 맨얼굴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것처럼 보였다.

말을 놓는다 해도 여태껏 해왔듯 차분하면서도 여유 있는 태도를 고수할지 고민하다 내놓은 변화였다.

다만 그 변화도 저택 안에서나 한정한 것으로, 저 아래로 걸어 나가는 순간 언제 그랬냐는 듯 대외적인 가면을 쓰겠지.

이것은 말을 놓는 것과는 다른 문제였다.

“ 아무튼, 정말 잘 어울려. 어디에 내놓아도 최고야. ”

“ …고마워. ”

직설적인 칭찬이 부끄러웠는지 얼굴을 붉히며 몸을 꼬는 헬레나.

나는 그를 보며 피식 웃은 뒤 손을 내밀었다. 손님들의 배도 슬슬 고파질 테니, 얼른 내려가 짧고 간결하게 이야기를 끝마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헬레나도 그 뜻을 알았는지, 그녀의 단단하면서도 부드러운 손이 내 손에 겹쳐졌다.

수없이 검을 잡으며 굳은살이 생긴 손을 원망스러워하던 때가 엊그제 같았는데, 시간 참 빠르다.

“ 자, 가자. ”

“ 응. ”

우리는 손을 마주잡은 채 천천히 복도를 걸어, 아래로 이어지는 대계단을 내려갔다.

또각또각. 구두굽이 땅에 부딪히는 소리가 저택을 울리자 대화에 여념이 없던 이들의 시선이 모두 우리에게 꽂혀들었다.

그들 개개의 의도는 둘째 치더라도, 오늘이 어떤 행사인지는 명확히 인지하는 기색이었다.

─출세했군. 대체 어떻게 해야 공작을 꼬실 수 있는 거지? 유리한 위치에 있다고는 해도 참 놀랍네.

─여러모로 구혼이 끊이지 않을 만도 해. 그 사건 이후로 완전히 뚝 끊어졌지만…….

─정인을 공표한 셈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그보다, 저 드레스는 본 적 없는데… 어느 재봉사의 작품이야?

과거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 옷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 그리고 나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 등. 발밑에서 온갖 잡소리의 안개가 피어나고 있었다.

“ 반갑습니다. 저희의 결혼식에 이렇게 직접 걸음을 옮겨주셔서 영광입니다. ”

그러나.

헬레나의 무난하면서도 상투적인 인사가 시작되기 무섭게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분명 반갑게 웃는 얼굴임에도 특유의 압박감을 유감없이 흩뿌린 탓인지, 귀족들이 한껏 군기가 든 모습을 보였다.

등을 꼿꼿이 펴고, 긴장한 듯 어깨를 떠는 것이 그 증거였다.

“ 살아오며 즐거운 일도 있었지만, 불미스러운 일도 있었습니다. 행복이 있으면 고난 또한 그 뒤를 따르게 되더군요. 예를 들면……. ”

오래 산 것은 아니나적게 살았다고도 말할 수 없을 인생.

인생의 굴곡으로 따져보면 참 역동적이기 짝이 없는 헬레나의 삶은 듣는 이의 고개를 절로 주억거리게 만들었다.

어릴 때부터 시작된 검술이나 교양의 훈련, 남동생의 독살 시도 등등. 즐거운 날에는 피해야 할 법한 주제들도 서슴없이 내뱉으며 좌중을 압도했다.

내게는 그 모습이 마치 행복만을 바라는 결혼이 정말 옳은 결혼인지에 대한 물음을 던지는 행위처럼 보였다.

“ 그러니, 결혼 또한 반드시 행복하리라고는 장담할 수 없겠지요. 힘과 힘의 결합을 위해 정략적인 선택을 하신 분들도, 그 속에서 우연찮게 행복을 찾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반대로 무미건조하거나 행복하지 않을 때도 있겠지요. ”

─중요한 것은, 그 관계를 어떻게 만들 것이냐는 각오와 의지다.

헬레나는 그렇게 말을 마무리하며, 내게 곁눈질을 보냈다.

할 말이 있으면 하고, 최소한 한 마디 정도는 해야 한다는 속삭임 같은 경고와 함께.

나는 저도 모르게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한숨을 억누르며, 헬레나의 손을 꽉 쥐었다.

으스러져라 쥐는 것이 아니라 단단하게 엮어 있음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만.

“ 반갑습니다. 오늘, 저는 헬레나로부터 과분한 사랑을 받아 이렇게 부부의 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본래 공작가와 연이라고는 없을 자작가의 사람입니다만, 그렇기에 과분하기 짝이 없다는 것을 스스로가 잘 알고 있습니다. 허나, 그 과분함에 짓눌리거나 위축될 생각은 없습니다. “

부담은 부담이고, 어차피 내가 결혼하여 대공이 된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헬레나가 갑자기 마음이 바뀌어 취소라도 하면 모를까, 그렇지 않은 이상 죽을 때 까지 짊어지고 갈 칭호였다.

그러니 새삼 기죽을 것 없다는 생각으로 질러보기로 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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