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화 〉 사랑과 전쟁 #3
* * *
“ 음. 맛있네요. ”
얼핏 불편하게 느껴지면서도 불편하지 않은 이 어색함.
나는 집무실에 오순도순 모여 숟가락을 뜨는 두 여자를 바라보며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숟가락을 뜬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비유일 뿐 진짜로 숟가락을 뜨는 것은 아니었다. 점심이 샌드위치였기 때문이다.
“ 맛있다니 다행이긴 한데… 먹기 싫은 데 억지로 먹는 건 아니지? ”
“ 전혀요. 아시다시피 저희는 보통 엘프가 아니잖아요. 게다가 공께서 만들어주시는 요리라면 뭐든 좋아요. ”
어젯밤. 첩에게 말을 높이는 것이 이상하다는 앨렌의 말을 들은 이후부터, 서로의 사정을 잘 아는 셋이 모일 때엔 말을 편히 하기로 했다.
헬레나도 그에 동의했기에 불만스러운 기색은 아니었다.
결국, 셋이 모일 때 높임말을 쓰는 것은 엘렌 혼자라는 뜻이다.
“ 지온. ”
점심 식사가 끝난 직후. 헬레나는 빈 접시를 가지고 주방으로 내려가는 내게 말을 걸어왔다.
“ 응? 왜 그래? ”
“ 나는 잠시 엘렌과 뒤편 연무장에 가 있을게. 할 얘기만 마치면 돌아올 테니까, 굳이 그쪽으로 오지 말고 여기에서 기다려 줘. ”
“ …그래, 그럴게. ”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요즘 들어 부쩍 둘이서 이야기하는 시간이 늘어났다.
처음 엘렌을 첩으로 받아들일 때만 해도 한껏 날이 선 태도를 보이더니, 그 날도 제법 녹이 슨 것처럼 보였다.
내게는 나쁠 것 하나 없이, 오히려 안심이라는 감정을 느끼게 해 주는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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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이 가고, 5월이 왔다. 그리고 곧 식을 치르는 6월 또한 다가오게 된다는 뜻이었다.
헬레나는 지온이 손수 만든 웨딩드레스를 처음 보았던 그 날 이후부터, 그가 만든 드레스를 입을 날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몸에 맞는지 시험적으로 입어보는 것과 다른, 제대로 된 식에서 제대로 된 신부로서 설 생각에 행복하기 그지없었다.
그 때문일까. 꽉 차다 못해 지나칠 정도로 넘쳐흐르는 행복이 엘렌을 대하는 태도마저 부드럽게 만들고 있었다.
엘렌이 스스로의 상황을 잘 알고 현명하게 대처하며, 지온을 칭찬하고 겸손한 태도를 보였기에 이룬 성과이기도 했다.
그런 5월의 계절이 입힌 저택 뒤편에서, 두 여자는 은밀한 것을 주고받기라도 하듯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 …완성했어요. ”
“ 정말로?! ”
완성되었다. 헬레나가 그 말에 뛸 듯이 기뻐하는 것을 보며, 엘렌은 그를 가라앉히듯 차분한 태도를 고수했다.
아직 서로가 기쁨을 나눌 만큼 가까운 거리감이 아니며, 주제 넘는다고 판단한 결과였다.
“ 네. 결과물은 따로 제 방에서 보관하고 있어요, 효력도 괜찮은 것 같고… 성공적이에요. ”
여태껏 그러한 행위를 해 오기는 했으나, 결혼 직후의 그것은 평소보다 더욱 특별하다.
그리고 헬레나는 특별한 밤을 더 특별하기 만들기 위해 엘렌을 시켜 그 준비를 마치도록 했다.
그녀가 말한 결과물, 비약이 그 결과물이었고.
엘렌은 늦은 밤 공작령 내의 창관 중 하나, 그 중에서도 방 하나를 실험대로 삼아 약의 효력을 시험했었다.
그러니 확신을 가지고 성공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었다.
지금 엘렌의 방에 고이 보관되어 있는 것들 또한 그 성공작을 나눠 담았을 뿐이었기에.
“ 고마워. 덕분에 큰 도움이 되겠어. ”
“ 감사합니다. 공작님의 도움이 되어 정말 기뻐요. ”
지온이 싫어하는 기색이 없는 이상, 공작을 떨어뜨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것을 아는 엘렌이기에 지금처럼 비약을 만드는 수고로움도 주저하지 않았다.
공작의 행복이 곧 자신의 행복으로 이어질 길을 만드는, 일종의 낙수효과를 노리고 있으니까.
“ 농사는 어때? 잘 되어가고 있어? ”
“ 다들 한 번 해 본 일이라 그런지 조금 덜 망설이고, 조금 더 익숙해져서 그런지 잘 진행되고 있어요. ”
“ 참 다행이네. ”
지온이 생각하고 만든 결과물이 올해도 잘 흘러간다는 것은 좋은 일이지.
헬레나는 오싹할 정도로 순조로이 흘러가는 상황에 만족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새삼 평화로운 시대에 감사하기도 했다.
“ 그러고 보니, 신혼 여행지는 어디로 가실지 정하셨어요? ”
본래 신혼여행이라는 개념이 없는 곳이지만, 헬레나는 지온에게서 결혼을 기념한 여행을 떠나자는 말을 듣고 결심을 굳혔다.
요 며칠간 여러 영지의 조건을 고려해가며 어디로 갈지 고민한 것도 그를 위해서였다.
그리고, 어제 막 그 결론을 내린 상태였다.
“ 정했지. 세르반 남작의 영지로 가려고 해. 술과 온천이 유명한 곳이니까 휴식에도 좋을 것 같아서. ”
“ 훌륭한 선택이세요. ”
중립을 견지하는 것으로 유명한 칼리우드 공작을 시작으로, 명확한 끈으로 묶이지는 않을지언정 함께 중립을 지키는 세력으로 여겨지는 이들 중 하나, 세르반 남작의 영지는 청결함과 술로 유명하다.
청결함은 영지 곳곳에 자리하고 있는 온천 목욕탕에 의한 것이며, 그곳에서 만드는 술은 입 안에서 거품이 터지는 독특함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왕국 내에서 휴양을 위한 영지로도 유명했고, 덕분에 돈 있는 이들이 주기적으로 모이는 곳이기도 했다.
“ 그곳에서는 며칠 정도 머무르실 예정인가요? ”
자기 일처럼 기뻐하며 묻는 엘렌을 보며, 헬레나는 내심 속이 보이는 행위라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기분이 나쁘거나 우습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날이 갈수록 강해지는 절실함에 동정을 금치 못할 지경이었다.
처음 담판을 지었을 때의 저돌적인 측면은 애초부터 거짓이었다는 것 마냥 선을 지키는 것은 물론, 조심스럽기 짝이 없는 태도까지.
마치 노예가 난폭한 주인의 눈치를 보며 소극적으로 변해가듯, 엘렌의 변화 또한 그와 제법 비슷해 보였다.
그러니, 이쯤에서 허락을 해 주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 오고가는 시간을 빼고… 느긋하게 일주일 정도 생각하고 있어. 아버지가 공작령을 지키고 계시니 걱정 할 것도 없고. ”
“ 그렇지요. 어르신이 계시니……. ”
헬레나가 공작임에도 공작령을 자주 비울 수 있었던 것은 이스의 존재가 크기 때문이다.
엘렌 또한 그것을 알기에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공작이라는 거창한 신분을 걸고 있을 때 보다야 일이 훨씬 줄었다고는 해도 그 존재감은 여전했다.
섭정처럼 뒤로 물러나 은근히 권력만을 휘두르길 원한 것도 아니었으며, 오로지 헬레나를 지지하며 일만을 나눠 가졌다.
그 모습이 묘한 압박감을 느끼게 한 요인 중 하나라고, 영지민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 도착하면 나흘 정도는 여유롭게 즐길 거야. 물론 할 일도 하겠지. 그래도 대략 사흘이 남을 거고. ”
“ 예… 그렇긴 하죠. ”
“ 그러면 그 사흘의 시간은… 너도 함께 즐길 수 있도록 해 줄게. ”
그녀가 가진바 능력에 비해 너무도 하찮기 그지없는 대접을 받아왔고, 그렇게 한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이다.
질투와 분노로 짜인 눈가리개가 걷히자, 헬레나는 본래 가지고 있던 사고방식과 판단력을 바탕으로 이런 결론을 내렸다.
그에, 엘렌은 생각지도 못했다는 듯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적어도 헬레나가 뱃속에 아이를 품고 어느 시기가 되었을 때 이루어지리라 생각했던 행위가 예상보다 훨씬 빨리 다가왔기에.
그래서인지, 순간 자신을 시험하는 것이 아닐까 싶은 의심마저 할 지경이었다.
“ 그게… 정말이신가요? ”
“ 그만한 정성을 들였으니, 나 또한 상을 줘야지. ”
상이라 말하기에는 너무도 우습기 짝이 없을지 몰라도, 엘렌에게 있어서는 확실한 상이 맞았다.
그것도 평생에서 한 번 얻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커다란 상이었다.
가장 달콤한 시간을 보내고 싶을 시기를 이렇게 공유하게 해 주는 것이 놀랍기도 했다.
“ 정말… 정말로 감사합니다. ”
생각했던 것보다 때가 더욱 가까워짐을 느낀 듯, 엘렌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옆에서 보면 그 내막에 기가 찰 광경처럼 보일지라도, 당사자에게는 값진 일이었다.
가치의 상대성이라고 말할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헬레나는 기뻐하는 기색이 역력한 엘렌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 그 대신이라고 하긴 뭣하지만, 전에 네가 이야기했던 걸… 그 자리에서 해 줘야겠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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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디어 결혼이라……. ”
약혼 관계로만 몇 년을 끌다 겨우 결혼이라.
이스는 고이 보관해 두었던 와인 한 병을 따, 방에 별도로 마련한 장소로 나왔다.
넓은 창문을 등진 이곳은 흔히 베란다라 부를 만한 곳으로, 허리춤까지 오는 낮고 새하얀 울타리에 둘러싸여 있었다.
이스는 그곳의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아 홀로 와인 한 모금을 들이켰다.
와인 잔도 없이 병째로 들이키는 모습이 거리의 술주정꾼 같아 보였으나, 그 행위가 사뭇 멋들어져 보였다.
같은 행위라도 누가 하느냐에 따라 그림이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모습이었다.
그는 침대에 누워 새근새근 숨소리를 내며 잠든 부인을 힐끗 바라 보다, 다시 넓은 하늘로 시선을 옮겼다.
저 높이 걸린 달과 그 곁을 지키는 수많은 별무리가 숨 쉬는 하늘이었다.
“ 길었군. 그리고 또 길겠군. ”
길고도 또 길다.
이스는 여태까지의, 그리고 앞으로 있을 일들을 흘려보내려는 듯 입에 머금은 와인을 호쾌하게 삼켰다.
그는 이미 크라우저의 주인이 아니었으나, 크라우저의 한 사람으로서 간단한 미래를 그려 보았다.
대륙의 상황은 전례 없이 평온하다.
전쟁이 일어날 기미는 따로 없어 보이며, 블루네일 왕국 내전도 여전하다.
전쟁이 여전하다는 것은 그 나라 사람에게 있어서는 지극히 불행한 일이나, 그를 가지고 이권 개입을 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천만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외부 세력이 개입하기 시작하면 더없는 진흙탕 싸움이 될 것이고, 그 불길이 어디로 튈지도 알 수 없기에.
고로, 지금 가장 걱정해야 할 것은 바로 집안 문제다.
헬레나는 어리지만 역대 공작들조차 갖추지 못했던 소드마스터라는 능력이 있었고, 그 외에도 사람을 다루는 용인술 또한 제법이다.
문제가 있다면 딸아이의 남편이 될 남자, 지온 알트람에게 있었다.
그렇다 해서 지온 자체가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알트람의 인간들 치고는 충성심이 옅어 보이긴 하나 어디까지나 그들의 광신적인 충성에 비해서일 뿐, 객관적으로 보면 그 충성심이 여전히 높음을 알 수 있었다.
무엇보다, 충성심과는 비교하기 어려울 인연으로 맺어질 인간이다.
그러니 그 점에서 대해서는 걱정할 것이 없었고, 태도나 인성을 보아도 썩 문제가 없으리라 판단했다.
아직 거친 부분이 없잖아 있지만, 그 또한 어리기 때문에 겪는 자연스러운 일이고.
헬레나다. 지온에게 집착하는 헬레나가 문제였다.
그 범상치 않은 집착이 지온조차 문제가 있어 보인다고 착각하게 하고 있었다.
“ 흐음……. ”
이스는 낮은 침음을 흘리며 다시 한 번 병에 든 와인을 들이켰다.
고작 두 모금만으로 병의 반을 비워냈다.
갑작스레 많은 알코올이 스며들어 취할 법도 했으나, 낯빛이나 태도에 흔들림이 하나도 없었다.
미약한 열조차 느껴지지 않는, 이스 크라우저다운 모습이다.
헬레나를 미치게 하는 것이 지온이나, 역설적이기도 그 광기를 억누르는 것 또한 지온이다.
그와 함께 있으면 헬레나는 제 역할과 능력을 차분하게 발휘할 수 있었다.
그러니 실용적인 측면에서 보아도, 지온은 꼭 필요했다.
다른 능력이 없다 하더라도 헬레나를 살린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 가치가 차고 넘쳤다.
하지만, 지온 본인도 능력이 제법 있는 편이었다.
헬레나 덕분이라고는 하나 그 본인도 소드 익스퍼트 중급에서 상급 정도의 실력이며,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발전하는 중이다.
인재를 끌어들이는 솜씨도 있다.
대륙이 혐오해 마지않는 다크엘프를 끌어들인다는 판단도 그랬으나, 그들을 위해 인식을 포함한 환경을 개선하는 것도, 그 결과물도 마음에 들었다.
덕분에 영지 내의 치안이 훨씬 안정되었음을 그는 안다.
물론 이대로 계속 안정세를 탄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도 있겠지.
그를 위해서는 지온을 인정하고, 또 받아들여야 했다.
이미 가족이라 인정하고 받아들였으나 더욱 그래야 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의 안전에도 더욱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공작인 헬레나보다 더.
새삼 다행이라 느끼는 점이 있다면, 지온이 그러한 처지를 알고 패악질을 부리지 않는다는 것에 있었다.
혈기 넘치는 나이임에도 크게 야망을 드러내는 성격이 아닌 것도 다행이고, 머리를 굴리지 못하는 것은 아니나 교활하지 않다는 점도 축복이었다.
마치 저 위에서 지켜보고 있을 신들이 공작가를 배려하여 내려 보낸 존재와도 같이, 난처했던 상황에 딱 맞아 떨어지는 인재다.
그렇다면 신이 우리 공작가를 살피는 것일까.
이스는 진지하게 그리 생각하면서도, 곧 술기운에 취한 망상이라며 딱 잘라냈다.
크라우저 공작가가 떳떳하게 살아왔다고는 하나, 지나친 편애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중얼거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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