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화 〉 사랑과 전쟁 #2
* * *
“ 이제부터 이 방을 쓰시면 됩니다. ”
햇살이 제법 힘을 내기 시작하는 아침.
헬레나로부터 사전에 지시를 받아 두었던 앤디는 한 방의 문을 열어젖히며 익숙한 손님에게 고개를 숙였다.
손님은 두말할 것도 없이 엘렌이었으며, 오늘부터 이 저택에 살며 호위 역할을 할 예정이기에 무시할 수 없을 위치이기도 했다.
어찌 보면 단순한 농부에서 출세한 듯 보이기도 했다.
“ 감사합니다. ”
“ 오히려 제가 더 감사하지요. 참, 짐을 풀고 나시면 곧장 방으로 찾아오시라는 공작님의 명이 있으셨습니다. 기다리시겠다고요. ”
오늘은 휴일이다.
그러니 헬레나 또한 평소 사무를 보는 집무실이나 응접실이 아닌 자기 방에서 쉬는 중이었으며, 식사를 마친 후였기에 가만히 침대에 앉아 시간을 곱씹고 있는 상황이었다.
방에 들인 것도 그렇고, 첩으로서 인정하는 것도 그렇고… 정말로 싫었다면 보일 수 없는 태도들이다.
엘렌은 그리 생각하며 홀로 남은 방에서 자기 몫의 짐을 풀었다.
2층은 공작의 직계 가족이나 찾아 올 귀족들을 위한 방이 있는 곳으로, 본래 엘렌으로서 발붙이고 살 수 없는 곳이었다.
헬레나는 그중 하나를 신속한 대처라는 명목 하에 허락했고, 저택 내의 사람들 또한 자연스레 그를 받아들였다.
헬레나의 결정에 군말을 달 처지도 아니었으나 제법 일리 있는 명분이라고도 생각했다.
아래에서 위로 오르는 것보다 같은 층에서 움직이는 것이 훨씬 빠른 것도 사실이었으니까.
다만,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엘렌은 안다.
“ 후우……. ”
엘렌의 입술에서 짙고 긴 숨이 흘러나왔다.
강제로 이곳에 들이닥쳤으니 헬레나의 기분이 언짢은 것은 당연하겠고, 지온 또한 아직 거부감을 심하게 느낄 상황이다.
물론 목적을 위해 저지른 일이니 크게 후회는 없으나 다소 날 선 분위기를 수습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를 위해서 곧바로 권리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며 제법 차분한 결론을 내렸다.
“ 공작님. 부르신다는 말씀을 듣고 왔습니다. ”
“ …네. 들어와요. ”
똑똑. 엘렌은 짐을 풀기 무섭게 헬레나의 방문을 두드렸고, 허락을 받아 그 안으로 발을 들였다.
방 안에는 헬레나가 늘 붙어 있으려 애쓰는 지온이 없었다.
그렇다는 건, 그에게 들려주기 싫은 이야기를 할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헬레나는 엘렌이 속으로 내린 그 결론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것 마냥, 방문을 닫기 무섭게 입술을 열었다.
“ 방은 마음에 들어? ”
“ 네. 정말 좋은 방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
망할 년.
절절함을 생각해보면 공감이 돼서 함부로 내치질 못하겠고, 그렇다 해서 순순히 받아들이기엔 심장 부근을 옥죄이는 질투심이 몹시 걸린다.
덕분에 헬레나의 심사는 전례 없이 복잡하기 짝이 없었다.
“ …그래. 행위는 언제 할 생각이지? ”
복잡한 심사는 복잡한대로 내버려두고, 할 일은 해야 했다.
헬레나는 두 사람 사이에서, 어쩌면 그녀의 생에서 가장 중요하기 짝이 없는 문제를 거론했다.
오롯이 독점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뒤집혀 속이 쓰려도 그래야만 했다.
그러나, 엘렌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 최소한 공작님의 결혼식 전 까지는 미뤄 둘 생각이에요. ”
“ 최소한… 이라는 말은, 더 미룰 수도 있다는 뜻이야? ”
“ 네. 물론이죠. 지온 공에게 안겨도 좋도록 허락한 분이 공작님이시니까요. 그러니 공작님이 저를 진정으로 받아들여 주실 때, 제 욕심을 이루려 해요. ”
급할 것도 없고, 그가 어딘가로 사라지는 것 또한 아니다.
이미 허락을 받고 호위라는 역할까지 맡게 된 이상, 우선 공작의 마음을 달래 온화한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 우선이다.
그래야만 진정한 행복 아래 교감을 할 수 있다며, 엘렌은 달아오르는 몸을 식히고 있었다.
그에 헬레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자신을 몰아붙이던 때와 다르게 너무 여유롭기 짝이 없는, 또 급격한 태도의 변화 탓이다.
“ 공작님을 감히 협박하려 했을 때만 해도 몹시 급했었어요. 하지만 이렇게 허락을 받고 저택에서 살도록 허락을 해 주셨으니, 급하게 시작하며 생긴 부작용을 해결하려고요. ”
“ 부작용이라면…? ”
“ 당황, 초조함. 혹은 저에 대한 분노…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결국 서로 마주보고 웃을 수 있을 때를 맞이하기 위한 노력이겠죠. ”
그저 곁에 있는 것만으로 만족하는 것은 아니라도, 지금은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그것이 거짓말일 지도 모르나, 헬레나는 엘렌의 눈빛에서 진실을 말하는 자 특유의 눈빛을 읽었다.
아마 여러모로 시달리며, 받지 못하며 살아 왔기에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본래 얻은 것 없는 삶을 살았던 생명이 무언가를 얻게 되면 그것에 더욱 집착하고,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 애쓴다.
헬레나가 그 대표적인 예였고, 엘렌 또한 그와 비슷한 성향을 보였다.
은인에게 압박을 가한 것만 보아도 그 점은 명백했다.
그러나, 엘렌은 이 가장 단순하면서도 가장 두려운 약탈을 처음부터 삼갈 생각이었다.
그녀의 삶이 그렇게 만든 것인지, 혹은 1차적이자 가장 중요한 관문을 넘으며 생긴 여유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저 헬레나가 지금의 대화를 통해 새삼 확신한 점이 있다면, 엘렌이 여유와 인내력을 갖춘 여자라는 것이다.
◎◎◎
“ 완성했다. ”
대략 4월 중순에 이르렀을 즈음, 나는 드디어 완성된 웨딩드레스를 마차에 실으며 감격하고 있었다.
소위 뽕이 찼다고도 할 수 있을 상태였는데, 이 정도면 충분히 자랑스러워 할 만 했다.
보통 품이 큰 것이 많은 웨딩드레스가 아니라 몸에 딱 붙어 굴곡을 강조하는 롱 드레스 형태에, 뒤에는 그 굴곡을 제대로 감상할 수 없도록 별도로 얇은 커튼같이 길고 큰 깃을 달았다.
크라우저 가문의 문장도 새겨진 깃이었다.
“ 귀족이 아니셨으면 재봉사를 해도 됐겠는데? ”
내가 싣는 웨딩드레스을 바라보며 엘렌이 놀란 듯 중얼거렸다.
정식으로 호위가 된 직후에 사석에서도 말을 높이려 했지만, 새삼 거리감이 느껴지는 것 같아 내가 만류했다.
헬레나와 셋이서 있을 때에는 말을 높이지만, 이렇게 둘이나 다크엘프들 사이에 끼여 있을 때에는 예전과 다를 바 없었다.
“ 귀족이라서 할 수 있었던 거야. 평민이나 노예로 태어났으면 재봉을 익힐 생각도, 그럴 기회도 없었겠지. ”
“ 그래? 나는 좀 다르게 생각하는데……. ”
“ 너는 그럴 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그래. ”
나는 뒤늦게 마차에 올라 마주앉는 엘렌을 보며 확신에 찬 투로 답했다.
만약 알트람이 아닌 다른 곳에서 태어났다면 헬레나에게 접근하기 위해 온갖 기예를 익혀야 했을 지도 모른다.
무력 수준은 전문적인 교육을 받는 것 보다 약한데다 그 성취도 한없이 더딜 것이 분명했기에.
─이… 이게 대체 무슨 요리지?! 한 번도 맛 본 적이 없는 맛이야!
─아아… 그건 김치볶음밥이라는 것이오. 당신네들이 한 번도 먹어본 적 없는 요리지.
그랬다면 노가다의 산물이자 특기이기도 한 요리로 어떻게든 비벼 봤을 것 같고, 이런 대화가 오고갔을 지도 모르지.
이렇게 생각해 보면 참 어이가 없지만, 가장 설득력 있는 진로가 아닌가 싶다.
그렇게 멍청한 상상을 하며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문득 엘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그러고 보니 공작님과는 언제 결혼해? ”
본래 사적인 질문을 하지 않으며, 서로 친밀한 관계가 되었다고는 하나 결혼은 지극히 사적인 영역이었다.
그런데도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다는 건, 서로의 관계가 그만큼 바뀌었다는 증거처럼 느껴졌다.
그래. 눈앞의 매력적인 엘프가 지금은 조력자나 적당히 친밀한 관계가 아니라 내 첩이었다.
공식적으로는 호위역이랍시고 데리고 다니지만 첩이었다.
그것도 내가 원하면 기쁘게 두 팔 벌려몸을 바칠.
“ 아마 내 생일에 하지 않을까? 헬레나도 그렇게 알고 있는 눈치고. ”
“ 생일이라면… 앞으로 두 달 정도 남았네. ”
두 달. 앞으로 두 달이라. 새삼 남의 입으로 들으니 현실감과 생생함이 남달랐다.
분명 내용은 같은데도 더 객관적인 사실을 코앞에 들이미는 느낌이었다.
“ 그러면 슬슬 결혼 준비도 해야 하는 거 아냐? ”
말발굽 내달리는 소리를 짊어진 채 엘렌이 물었고, 나는 잠시 고민하는 기색을 띠다 그 물음에 답했다.
“ 필요하기는 하지. 그래도 연회 준비만 마치면 될 뿐이라 크게 서두를 것도 없어. ”
“ 왜…? 귀족의, 하물며 공작의 생일이라면 화려하게 치르는 게 당연하지 않아? ”
“ 내가 굳이 그러고 싶지 않다고 말했어. 헬레나도 그에 따라주는 눈치였고. ”
내 의견이라서 따르는 것이 아니라, 헬레나 또한 그것이 괜찮다 생각했기에 내린 결론이었다.
본래 부담스러운 시선이 쏠리는 것을 싫어하기에 귀족들의 사교장에도 참석하지 않았을 정도니, 결혼이라고 해서 그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거기에 나 또한 너무 화려한 것은 거부감이 느껴지는데다 낭비라고 생각하지만, 체면치례 정도는 해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적당한 규모로 치르기로 결론을 내린 상황이었다.
“ 정말 보통 귀족들이랑은 생각이 다르구나. ”
헬레나는 소드마스터. 나는 파견직. 그러니 보통 귀족답지 않다는 말도 충분히 이해가 갔다.
◎◎◎
“ 세, 세상에……. ”
헬레나는 무척 놀란 듯 눈썹을 파르르 떨며 내게, 정확히는 내가 옆에 놓아 둔 웨딩드레스를 향해 한 걸음씩 거리를 좁혔다.
심드렁한 반응이 아닌 것을 보니 무척 마음에 드는 기색이라 내심 안도감을 느꼈다.
정작 입어야 할 당사자가 별로라고 말한다면 내가 한 고생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여태껏 계속 그 집에 갔던 게… 이걸 위해서였어? ”
엘렌은 바깥에 대기시켜 놓았기에 이 방에는 둘 뿐이다.
그렇게 헬레나의 얼굴에 드러나는 감정이 무척이나 생생했다.
약간의 물기가 섞이기 시작하는 달뜬 목소리도 그런 심리를 드러내는 것 같았다.
“ 그렇지. 한 번 뿐인 결혼식이기도 하고, 내가 받기만 한 것도 많으니… 드레스만이라도 선물해 주고 싶어서. 마음에 들어? ”
“ 그야… 당연하잖아. ”
여태껏 생일선물이랍시고 간단한 물건을 챙겨주기도 했지만, 진정으로 뜻깊은 선물 하나 정도는 안겨주고 싶은 마음에 애를 썼다.
그것이 인정받는 것 같아 기쁘기는 한데, 이렇게 격하게 기뻐하는 것을 보니 낯이 뜨거워질 지경이었다.
“ 너무… 너무 좋아. 마음 같아서는 매일같이 입고 다니고 싶을 정도로. ”
“ 매일 입으면 웨딩드레스라고 할 수가 없을 텐데……. ”
“ 그럼 매일매일 결혼식이면 되잖아. ”
매일이 결혼식이라. 어찌 보면 참 낭만적인 말이 아닐 수 없었다. 매일을 결혼식처럼 산다면 제법 행복하겠지.
“ 이거… 입어 봐도 돼? ”
헬레나는 드레스의 옷깃을 매만지며 내게 물었다.
그녀도 한 사람의 여자라는 듯, 자신만의 드레스가 눈앞에 있으니 한 번 입어보고 싶다는 충동을 강하게 느끼는 눈치였다.
파티드레스도 늘 번거로워하던 여자가 맞나 싶을 정도로 적극적이었다.
“ 음… 마음 같아서는 결혼식 때까지 기다리게 하고 싶은데. ”
웨딩드레스를 입은 헬레나를 격하게 보고 싶기는 하다.
다만 결혼식 당일에 느낄지 모를 감동이 떨어질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썩 내키질 않았다.
익숙해지면 충격이 훨씬 덜해지니까.
그래도, 합리적인 측면에서 보면 지금 입어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라 생각했다.
사이즈에 엄격했다고는 해도 본인에게 비밀로 한 것도 있으며, 그 동안 미묘한 몸의 변화가 있었을 지도 몰랐기에.
“ 그래. 한 번 입어 봐. 도와줄게. ”
“ 도와준다고? 정말? ”
나는 몹시 반짝이는 헬레나의 눈빛을 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옷 하나 입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웨딩드레스는 보통 옷과 조금 달라 입혀주는 것이 나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헬레나가 기대 넘치는 기색을 보인 이유는 정작 따로 있었다.
“ 그럼… 벗기는 것부터 도와 줘. 매일 벗기는 옷이니까… 맡겨도 괜찮지? ”
매일은 아니지만 자주 벗기는 것은 맞다.
그럼에도 나는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순순히 헬레나의 옷깃으로 손을 뻗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