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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의 기둥서방이 되었다-64화 (64/192)

〈 64화 〉 사랑과 전쟁 #1

* * *

“ 이제부터는 엘렌도 우리 저택에서 머무르게 될 거야. 정확히는 지온의 호위를 대신하는 셈이지만……. ”

헬레나의 부름을 받아 응접실에 갔더니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이야기 시간이 제법 길어진 것.

그리고 응접실의 공기가 심상치 않아 보인다는 소리를 생각해보면 제법 심각한 말들이 오고 간 듯 했다.

그 결론으로 인해 엘렌이 이 저택에 머무르게 되었다고는 하는데,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 제 호위요? 굳이 그러실 필요 까지는……. ”

“ 필요해. 여태까지는 우리 사이에 누군가 끼어드는 것이 싫어 가만히 있었지만 결혼을 하면 그럴 수도 없게 될 것 같아. 나는 둘째 치더라도, 공작의 남편이 호위 하나 없는 것도 이상하니까. ”

공작의 남편이라. 나는 그 말을 들으며 새삼 그 무게를 실감했다.

자작이 아닌 자작의 아들이기에, 그리고 파혼될 가능성도 있을 약혼자의 신분이었기에 가지는 자유가 사라지는 듯해 갑갑하기도 했다.

예전부터 이럴 가능성을 떠올리며 속으로 받아들였지만, 막상 때가 다가오니 묘하게 복잡한 기분이었다.

그나저나, 왜 엘렌이 있는데도 말을 편하게 하는 것일까.

“ 네. 그렇게 되었으니, 부족하지만 제가 지온 공의 호위를 하기로 했어요. 두 분이 꼭 붙어 계시니, 실상 공작님의 호위도 겸하는 셈이겠네요. ”

그리고, 왜 엘렌 또한 평소 힘주어 말하던 말투를 버리고 평소처럼 말하기는 것일까.

단순히 말투가 바뀌었다고 보기에는 어려운 변화다.

두 사람의 말투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고, 지금껏 장소를 가려가며 그 말투를 철저히 지켜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조금 전 내가 듣지 못한 대화를 기점으로 그 태도가 변해버렸다. 그것도 아주 크게.

나로서는 심히 의심스럽기 짝이 없는 상황이었으나당장 어떻게 알아 낼 방법이 없었다.

또, 내가 반대할 이유도 없고 하니 이런 결과가 바뀌지는 않겠지.

그저이 답답한 호기심을 풀기 위해서라도 무슨 말이 오고갔는지 물을 생각이었다.

“ 오늘은 집으로 돌아가서 자시고, 내일 아침에 짐을 챙겨서 오세요. 방을 정해 놓을 테니까요. ”

“ …알겠습니다. ”

해가 저물기 시작한 오후 무렵.

엘렌의 호위라는 역할 변경을 그녀의 가족들에게도 알릴 필요가, 또 본인의 짐을 챙겨 올 필요가 있었기에 본래 지내던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내일부터는 크라우저 저택에 함께 살며 호위 역할을 한다고 하는데, 굳이 불편한 호위를 자처했다는 것이 묘했다.

늘 날을 세워야 하니 피곤하기 짝이 없는 일인데도.

“ 어떻게 된 거야? ”

엘렌이 저택이 떠나는 것을 본 직후, 헬레나와 둘만 남기 무섭게 질문을 던졌다.

속에서 피어오르는 의문이 강하게 등을 떠민 탓이었다.

“ …일단 내 방으로 가자. 거기서 말해줄게. ”

후우. 헬레나의 입술에서는 한숨이 흘러나왔고, 내 손을 조심스레 잡으며 한 발 앞서는 낯빛은 어두웠다.

아무래도 좋은 이유에서 이루어진 일이 아님이 분명해 보였다. 착 가라앉은 헬레나의 눈빛이 그를 증명해주는 듯 했다.

철컥. 헬레나는 나를 방으로 데려오기 무섭게 문을 걸어잠근 뒤, 방에 들여놓은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충분히 마주볼 수 있는 상황에도 서로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앉은 것은 하루 이틀일이 아니니 크게 개의치 않았다.

오늘 할 일은 마무리 지어진 상황이기에 이처럼 여유를 부려도 크게 문제없어 보였다.

“ 어지간히 심각한 일이지? ”

“ …응. 심각해. 그것도 아주. ”

얼마나 심각한 것일까. 헬레나는 내 실수로 결투를 치르게 되었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침울한 기색을 보였다.

내 손을 포개듯 얹은 손이 떨리는 것도 그렇고, 고개를 돌리며 나를 바라보는 시선도 예사롭지가 않았다.

자신의 것을 빼앗길까 안절부절 못하는 아이를 보는 것만 같았다.

“ 자세히 말해줄 수 있어? ”

“ 응. 일단 전후사정부터 들을래, 아니면 결론부터 들을래? ”

“ 결론부터. ”

결국 전후사정을 듣긴 하겠지만, 지금의 내겐 왜 그랬냐는 이유를 알아내는 것이 더욱 중요했다.

결론에 목마른 정신을 축이려면 그 길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헬레나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답은 전혀 상상하지도 못한 내용이었다.

“ 네 첩이 되고 싶다고 했어. 그래서… 허락할 수밖에 없었어. ”

첩? 첩이라고?

나는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멍청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 몇 번이고 깜빡였다.

그 정도로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다크엘프의 생활환경 개선을 위해 여러모로 노력하기는 했지만, 그저 은인이라는 선에서 그칠 법도 했는데… 왜일까.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헬레나가 말한 전후사정을 들어야 할 것 같았다.

“ 이유는 뭐래? ”

“ 여태껏 자기들을 위해 노력한 너를 보고 반했대. 그래서……. ”

세상에.

요 며칠 자리를 비우고, 돌아왔더니 몸의 성장이 급격히 이루어진 것이 전부 유산에 의한 것이라.

나는 이 평화로운 세상에 굳이 목숨을 걸고 유산을 계승하러 간 엘렌의 변화에 혀를 내두를 것만 같았다

. 멘탈이 허락하는 한 가장 강한 정도의 충격을 느꼈기에.

나는 별 생각 없이, 혹은 내 의무라고 생각해 적당히 움직였을 뿐이었다.

그로 인해 호의를 품을 수도 있다 생각했지만 적당한 선에서 그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혹은 체스가 크라우저 공작가에 바치는 정도의 충성심에서 끝날 것이라고 선을 긋고 있었다.

그런데, 목숨을 걸 만큼의 집착을 보인 것이 참 놀라웠다.

“ 엘프의 유산은 얻어낸 자에게 거대한 힘을 준다고 하긴 해. 그 힘은 가히 자연이 휘두르는 분노라고 할 수 있다던데……. ”

나는 엘렌이 폭주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 지 대략적으로 알고 있었기에, 그 위험성 또한 잘 아는 편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은 그럴 일이 없어 보이나, 내가 헬레나를 막지 않았다면 그 연쇄 효과로 대륙 전체가 피의 화마에 휩싸이고 만다.

엘렌은 그 와중에 그녀를 제외한 용병단 전부를 잃었고, 복수에 집착하기 시작하며 유산을 얻었다.

그리고 그 이후 휘두르기 시작한 태풍과 홍수는 보통 군대를 범접조차 하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점점 감해져 그 분노조차 뚫을 수 있을 몇몇 강자를 제외하면.

“ 엘프의 유산이라는 게 어떤 건지 알고 있었어? ”

“ 오래전 책으로 봐서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대충은 알아. ”

헬레나는 유산의 존재를 진즉부터 알고 있었던 것이 신가하다는 듯 입을 살짝 벌렸다.

엘프 사이에서만 전해지는 정보인데다, 그를 얻은 이가 긴 역사상 손에 꼽을 정도라 하니… 인간이 모르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했다.

“ 안다면 굳이 더 말할 것도 없겠네. 그래서 엘렌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어. 만약 아니라면 너를 포함한 이 저택과, 이곳에 지내는 사람들마저 전부……. ”

엘렌의 광기를 보았다는 헬레나의 눈빛엔 분노와 씁쓸함이 서려 있었다.

일대 일로 붙으면 대적할 자가 거의 없다고 봐도 좋을 삶을 살던 와중, 이렇게나 위험하다 여겨지는 상대가 처음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결투를 치를 때조차 어떻게 죽이지 않을까 하는 고민을 했을 뿐, 자신이 이길 것을 당연하게 여겼으니까.

“ 알아. 너 혼자라면 모를까, 잃을게 너무 많았으니 어쩔 수 없었겠지. ”

“ 미안해. 지온의 뜻도 묻지 않고 이렇게 되어 버려서……. ”

“ 괜찮아. 신경 쓰지 마. 그보다, 엘렌이 나를 그렇게까지 생각할 줄은 몰랐어. ”

마치 부모에게 고자질하는 아이 같은 푸념을 들으며, 나는 헬레나의 등을 부드럽게 토닥였다.

졸지에 첩 하나를 들이게 생겼다는 것이 찝찝하고 미안했으나, 이미 일이 벌어진 뒤라 어쩔 수도 없었다.

상대가 상대인지라 번복을 할 수도 없었다.

틈을 노려 목숨을 끊으면 깔끔하게 처리할 수 있을 지도 모르지만, 그렇게까지 할 일도 아니었다.

불구대천의 원수가 된 것도 아니었기에.

무엇보다, 고작 이런 일로 가벼이 목숨을 끊으려 하는 행위 자체도 탐탁지 않았다.

나의 알량한 윤리부터 시작해서, 헬레나의 평판에 이르기까지 여러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이유가 아니라 해도 죽이지는 않았으리라.

“ 정말 괜찮아? 아무리 다크엘프에 대한 거부감이 없어도, 직접 품에 아는 건 다른 문제일 텐데……. ”

“ 오히려 나는 헬레나가 괜찮은지 묻고 싶은데? 내가 다른 여자를 안는 상황이 생겨도 괜찮은 거야? ”

“ …상상만 해도 구역질이 나. 내가 모르는 곳에서, 나만 볼 수 있었던 지온의 얼굴을 누가 본다는 사실이 너무 싫어. ”

나야 어쩔 수 없구나 싶은 마음에 넘겨버리면 그만일지라도, 헬레나는 아니다.

내게 집착하는 모습만 보아도, 그로 인해 어떤 결과가 나왔는지 안다면 헬레나가 더 문제였다.

“ 하지만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아. 첩이 되는 대신 여러 조건을 내밀었고, 엘렌은 그를 받아들였으니까. ”

“ 조건? 무슨 조건? ”

넘어져도 그냥은 안 넘어진다는 것일까.

나는 새삼스레 피어오르는 호기심을 억누르며 차분하게 물었다.

그에, 헬레나는 긴 한숨을 내뿜으며 또 다시 뒤통수를 후려치는 듯한 답을 주었다.

“ 엘렌이 지온에게 안기려 한다면, 반드시 내 눈앞에서 해야 한다는 조건이야. 더구나 첩으로 인정은 해 주겠지만,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겠다는 것도 그 중 하나고. ”

“ …와. ”

할 말이 없다. 공식적인 첩조차 되지 못하면 사실상… 노리개가 되어도 상관없다는 뜻이다.

내 곁에서 있을 수만 있다면 그런 굴욕조차 감수하겠다는 엘렌의 뜻이 참 놀라다 못해 소름이 끼칠 지경이었다.

다만, 내 입장에서는 헬레나의 눈앞에서 그런 행위를 해야 한다는 것이 더 문제였다.

누군가가 빤히 시선 아래 한다는 것 자체가 영 익숙해지지 않을 것 같았다.

“ 네가 고생이 많구나. ”

나는 헬레나를 꼭 끌어안으며 가라앉은 마음을 달래주려 애썼다.

일도이비삼첩사처. 정말 극단적으로 말하면 여자는 많을수록 좋다는 말인데, 나도 그런 범주에서 벗어나지는 못하는 인간인 모양이다.

엘렌이 내게 안기려 한다는 이야기를 곱씹을수록 희미한 기대감이 피어나기는 했다.

그저, 품에 안겨 우는 소리로 칭얼대는 헬레나에 대한 안타까움이 그를 덮을 정도로 컸을 뿐이다.

“ 흐윽! 미안해. 정말로 미안해……. ”

“ 헬레나가 미안해하지 않아도 된다니까. 내가 말하기엔 참 묘하지만, 주인으로서 옳은 선택을 한 거야. ”

내가 이 저택에 없었어도 당장 사단이 났을 테지만, 이 불길한 가정은 그저 마음속에 묻어두기로 했다.

희생자를 최대한 줄이고 그 당사자들에도 불행하지 않은 삶을 살았으면 싶은 마음에 이러고 있는데, 그 꼴이 나면 여러모로 참담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

“ 후후……. ”

내일. 내일이라.

엘렌은 자기 몫의 짐을 싸는 와중에도 끊임없이 히죽대고 있었다.

여러 가지 불편한 조건이 달리긴 했지만 그녀 자신 또한 바라는 바였으며, 여자로서 그의 곁에 안길 수 있다면 충분히 지불할 가치가 있는 대가였다.

그로 인해 자신의 무력이 저당 잡힌 것도, 귀찮은 호위 역할을 맡게 된 것도 상관없었다.

중요한 것은 조만간 여자로서 안길 수 있다는 사실 하나 뿐이었다.

즉, 그를 위한 투자라 생각하면 오히려 싼 편이라고 생각했다.

“ 나 참. 그렇게 좋아? ”

“ 응. 너무 좋아. ”

올리비아는 짐을 싼 뒤 쉴 새 없이 침대를 구르는 여자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생각지도 못한 면모를 발견한 것도 그렇지만, 엘렌의 안에 감춰진 것이 이토록 격정적인 것이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한 탓이기도 했다.

괜한 짐을 떠넘긴 것일지도 모르지만, 우울해서 죽어버리는 것보다는 낫겠지.올리비아는 자신이 저지른 행동을 합리화하려 애썼다.

당분간 크라우저 저택에 거친 바람이 불겠지만, 언젠간 해결되리라 믿었다.

왜냐하면 그녀를 비롯한 이들이 인정하고 믿는 남자가 실질적인 주인으로서 버티고 있었으니까.

그러면, 엘렌에게 고삐를 물린 뒤 그 등에 올라타는 걸까.

새삼 노골적이면서도 농밀한, 그리고 천박한 상상이 올리비아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구체적으로는 엘렌의 탄탄하고 매끈한 등을 바라보며 볼록 솟은 융기를 정복하는 밤의 이미지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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