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의 기둥서방이 되었다-63화 (63/192)

〈 63화 〉 자격의 증명 #5

* * *

엘렌이 돌아왔다.

그것 자체는 기쁜 일이 분명했음에도, 어쩐지 순순히 기뻐할 수만은 없다는 것이 내 솔직한 심정이다.

사람, 아니 엘프가 바뀌어도 너무 바뀌어서 돌아왔기 때문이다.

헬레나를 올려다보아야 했던 시선은 완전한 평행선을 이룰 정도가 되었고, 어딘가 가냘프게 보이던 몸집도 크게 불어났다.

이 대륙에서 가장 농염한 여자라 생각했던 헬레나에 뒤지지 않을 만큼 매력적이었다.

잘록한 허리에 크면서도 탄탄하게 부풀어 오른 여성 특유의 살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 저… 엘프는 갑자기 몸이 커지나요? ”

“ 그런 건 아니지만… 그만한 일이 있긴 했었어. ”

그만한 일이라. 나는 웨딩드레스에 놓던 자수를 멈추고 엘렌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빤히 쳐다보는 시선이 무례할 법도 했으나 손을 모아 꼼지락대며 몸을 배배 꼴 뿐이었다.

뺨까지 붉어진 것을 보니 부끄러운 것 같기도 한데, 묘하게도 몸의 곡선을 은근히 강조하는 것만 같았다.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착각이 아닐 수도 있었다.

눈이 맞을 때 마다 시선을 피하면서도 힐끔거리는, 심상치 않은 곁눈질 때문에.

“ …어쨌든, 오늘 돌아갈 때는 같이 가도 될까? ”

“ 헬레나에게 말씀드리려고요? 그렇게 해요.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지만……. ”

일단 같이 가자는데 굳이 거절할 것도 없어, 나는 손에 든 바늘을 내려놓은 뒤 몸을 일으켰다.

뒤늦게 나타나 사람 놀라게 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왠지 모르게 피곤한 하루가 될 것만 같았다.

◎◎◎

“ 엘렌? 어쩌다 그렇게 커진 거죠? ”

크라우저 저택의 응접실. 헬레나는 다른 사람처럼 성장한 엘렌을 보고 놀라기는 했으나 그녀가 누구인지를 정확히 꿰뚫어 보았다.

어딘가 예전 생김새의 그늘이 남아있기도 했으나, 그녀 특유의 성질을 잡아냈다는 점이 컸다.

“ 아… 그렇잖아도 그 일을 설명하려고 왔어요. ”

“ 다행이네요. 덕분에 호기심에 끙끙 앓을 일이 없어질 것 같으니까요. 우선 차라도 한 잔 들면서 천천히……. ”

“ 저, 그 전에… 공작님과 단 둘이서 이야기 할 수 있을까요? ”

“ 둘이서요? ”

헬레나가 지온과 떨어지기 싫어하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그의 시선이 미치는 곳에서 이야기 할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러니 최대한 고개 숙여 정중히 요청했다.

헬레나는 마주앉은 엘렌의 푹 숙인 고개를 보며 입맛을 다시다,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 알았어요. 지온, 미안하지만 잠시 자리를……. ”

“ 알겠습니다.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용건이 끝나시면 불러 주세요. ”

찝찝하지만 버티고 있을 수도 없을 노릇이겠지. 지온은 그리 결론을 내리며 순순히 방을 나갔다.

일이 터질 것이라면 차라리 지금 터지는 것이 낫다는, 체념에서 비롯된 생각을 품으며.

“ 지온까지 물려달라고 하는 걸 보니 제법 심각한 일이겠지만… 편하게 말씀하세요. ”

엘렌이 지온과 들러붙는 것이 불만스럽다 하더라도, 그 도움을 받은 것 까지 부정할 수는 없을 노릇이었다.

더구나 헬레나가 사랑해 마지않는 그가 공들여 키운 성과물이기도 했으니, 그것을 제 손으로 망가뜨려서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엘렌의 입에서, 한 마디가 튀어나오기 전 까지는.

“ 알트람 공… 아니, 지온 공의 곁에 안기도록 허락해 주세요. ”

지온. 감히 그 입으로 친근하게 지온의 이름을 불렀다.

그것도 모자라 여자로서 안기려는 가당찮은 제안을 하려 든 것도 용서하기 어려웠다.

하나부터 열까지, 무엇 하나 얌전히 넘어가 줄 수가 없을 말이었다.

꼬리를 치려다 지온을 건드린 아그네스도 죽였다.

엘렌 또한 그와 똑같은 꼴로 만들어 주리라 허리춤에 찬 검에 손을 얹었으나, 헬레나의 검은 끝내 응접실에서 빛을 내지 못했다.

“ 그러실 줄 알았어요. 공작님께서 그 남자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는 저도 잘 아니까요. ”

뭐가 어떻게 굴러가는 걸까.

헬레나는 전과 확연히 달라진 압박감에 섣불리 검을 뽑지 못했다.

몸이 커지기 전의 엘렌이었다면 수작을 부리기도 전에 목을 베어 떨어뜨릴 자신이 있었지만, 지금은 도저히 그 틈이 보이질 않았다.

활이 있는 것도 아니며, 그렇다 해서 손에 무언가 쥐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엘렌을 감싸는 마나의 흐름이 확연히 달라졌음을 헬레나는 느끼고 있었다.

무릎을 꿇을 정도는 아니라 하더라도, 쉽사리 꺾을 수 없음이 뚜렷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예상대로다.

엘렌은 이럴 때를 대비해 유산을 얻은 자신의 판단에 감사하며 허리를 꼿꼿이 폈다.

적어도 헬레나를 압박할 정도의 힘이 없었다면 협상 테이블조차 마련할 수 없었을 것을 새삼 확신했다.

“ 그 힘… 지금 네 수준으로는 도저히 닿을 수 없을 힘이야. 뭔가 꼼수라도 부렸나보지? ”

부드럽고 온화하던 태도는 온데간데없이, 적을 쓰러뜨릴 생각만이 가득한 눈이다.

전쟁에서 구른 엘렌은 다년간의 경험을 통해 그를 알았고, 헬레나의 무저갱 같은 눈빛에서 그 기색을 읽어낼 수 있었다.

다만, 사실 엘렌이 아니더라도 헬레나의 눈빛이 범상치 않다는 것 정도는 누구나 알 법 했다.

마주하는 순간 심연에, 혹은 바닥없는 늪에 가라앉는 듯한 압박감이 뱀처럼 몸을 죄여 올 테니까.

그래. 꼼수라면 꼼수일 수 있지. 엘렌은 헬레나의 눈치에 내심 감탄하며, 숨길 것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려진다고 해서 약점이 드러나는 힘도 아니거니와, 유산의 힘은 한 번 얻어낸 이상 물릴 수도 없는 종류니까.

“ 네. 엘프들에게 대대로 전해지는 유산의 시련을 통과하여 얻은 힘입니다. 대부분이 목숨을 잃을 만큼 위험하지요. 하지만 한 번 얻으면 그 스스로가 자연이 될 수 있다고 해요. ”

시련이라기보다는 선택이지만, 굳이 정정할 필요는 없으리라.

어찌 보면 선택받는 것 또한 시련일 테니.

“ 그래서 하루아침에 그런 몸이 되었다는 거로구나. ”

하필 지온의 취향에 꼭 들어맞는, 자신과 비슷한 몸을. 헬레나는 그 사실을 더욱 괘씸하게 느껴 이를 갈았다.

뿌드득, 하고 섬뜩한 소리가 듣는 사람의 간담을 서늘하게 할 정도였다.

크게 부딪힐 각오를 해 두었던 엘렌조차 그랬으니 더 말할 것도 없었다.

“ 네. 그러니 일단 칼을 거두시고, 제 이야기라도 들어주시지 않겠어요? 저와 부딪히면 공작께서는 무사하시겠지만, 이 저택과 주위가 무사하리라고는 장담할 수 없으니까요. ”

엘렌은 은근슬쩍 협박을 곁들인 권유를 던졌다.

나긋나긋한 목소리와 긴장한 듯한 낯빛을 보면 도저히 협박하는 사람의 태도라고 보기 어려웠으나, 굳건한 심지가 박힌 듯한 말투에서 물러날 기미를 전혀 느낄 수가 없었다.

어떻게든 목적을 이루겠다는 기색이었다.

“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공작님이 받을 애정을 빼앗겠다는 분에 넘치는 생각은 하지도 않아요. ”

“ …쯧. ”

일단 어쩔 수 없이 이야기를 들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난생 처음으로 힘으로 밀어붙이기 어려운 상대를 만났고, 하필 그 상대가 자신의 남자를 맛보려 하는 골칫덩이라 할지라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기분 내키는 대로 날뛰기 시작하면 저 까무잡잡한 년이 말한 대로 지온과 나의 보금자리가 사라질 지도 모르니까.

헬레나는 미쳐 있는 와중에도 냉정하게 결론을 내린 뒤 검에서 손을 뗐다.

일단 싸우지 않겠다는 의사를 드러낸 셈이다.

“ 감사합니다. ”

“ 감사할 것 없어. 네 처분은 이야기를 전부 들은 뒤에 할 테니까. ”

절벽과 절벽을 사이에 두고 외줄타기를 하듯 아슬아슬하기 짝이 없는 상황이나, 엘렌 또한 지금 상황을 온건하게 해결하고 싶어 했다.

일을 저지른 장본인으로서는 다소 모순된 생각일지라도, 그렇게 해야 원하는 결과를 얻어낼 가능성이 조금이나 열릴 테니.

“ 앞서 말한 대로, 감히 지온 공을 마음에 품고 말았습니다. 이유는……. ”

“ 그딴 시시콜콜한 사정부터 말 안 해도 돼. 알만 하니까. 감히 내 앞에서 지온의 품에 안기고 싶다고 말한 점부터 문제잖아. 뭔가 생각이 있어 던진 말 같긴 한데, 질질 끌지 말고 말 해. ”

쓸데없이 말에 군살을 더하지 말고, 정확히 요점만을 전하라 한다.

엘렌은 헬레나의 미간이 곱게 찌푸려진 것을 보고 몹시 짜증이 남과 동시에 초조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 저는 유산을 얻기 위해 정령계에 들렀고, 그곳에서 위대한 존재의 선택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예상치 못한 호의로 인해… 영혼으로 인연을 맺는 법을 배웠지요. ”

“ 영혼으로 인연을 맺어? ”

그것은 결혼과 다른 것일까.

맥락으로 봐서는 무언가 다른 것 같기도 한데, 우선 이야기를 들어봐야 알 수 있겠지.

헬레나는 엘렌이 정령계에 다녀왔다는 놀라운 소식 보다 영혼의 인연이라는 단어에 집중했다.

엘렌이 강해지든 말든 아무런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 그게 무슨 뜻이야? ”

“ 간단히 말하자면, 죽어도 다음 생에서 그와 반려의 연을 맺을 수 있다는 뜻이에요. ”

“ 뭐?! ”

지나치게 축약해 말한 감이 없잖아 있지만, 무언가 빠뜨린 것은 없었다.

오히려 핵심만을 딱 집어 말했으니 엄연한 진실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정령계의 그 존재들이 거짓을 말한 것이 아니라면.

“ 다음 생에서도… 함께? ”

“ 네. 그가 여자가 되던, 혹은 남자가 되었던… 그에 맞는 조정이 절로 이루어진다고 했어요. ”

새로운 생을 얻을 때 성별마저 조정된다는 것에 사기 같은 냄새가 풍겼으나, 엘렌은 명백한 진실을 말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거짓말로는 제대로 된 협상을 이루어 낼 수 없음을 그녀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거짓으로 이루어 낸 협상은 결국 제대로 된 결말을 맺지 못하며, 그로 인한 비극은 엘렌이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헬레나는 엘렌의 그런 속내를 몰랐으나 내심 몹시 놀라워했다.

다음 생에서도 그와 함께 있을 수 있다는 건 몹시 매력적인 소리였으며, 그것이 대를 이어진다는 생각만으로도 절정에 달할 것만 같았다.

무력에 기반한 협박성 협상보다는 훨씬 매력적이며, 또한 효과적이다.

엘렌은 몹시 흔들리기 시작하는 헬레나의 눈빛을 바라보며 반쯤 성공했음을 직감했다.

죽어서도 떨어지지 않는다는 그 사실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엘렌 본인 또한 뼈저리게 깨달았기 때문에.

“ 부탁드립니다. 부디, 제가 지온 공의 첩이 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세요. 공작께 쏟는 애정의 1할의 절반이라도 좋으니, 그 분의 사랑을 받을 수 있도록……. ”

전과 달리 자존심을 세우는 듯한 말투까지 버린 것으로 보아, 확실한 진심이 전해져왔다.

“ 감히 공작님께 드릴만한 말씀은 아니지만, 공작님이 제 입장이어도 쉽게 포기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지온 공과 같은 남자는 대륙에서도 쉬이 찾아보기 어려울 테니까요.. ”

엘렌은 절박함을 담음과 동시에 은근슬쩍 지온을 띄워주며 헬레나의 감정을 휘저으려 애썼다.

썩 효과가 없을 지도 모르나, 지금같이 심각한 상황이기에 빛을 발한다는 것을 엘렌은 알고 있었다.

더구나 공감을 끌어냄으로써 미약한 연민마저 끌어내려 노력했고, 그 노력은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

첩이 아니라 노리개가 되어도 좋다는 말.

스스로를 깎아 내려서라도 곁을 지키고 싶다는 절절함을 헬레나 또한 잘 알았다.

경우는 다르지만 직접 겪어본 적도 있었다.

그것은 몇 년 전, 어린 지온이 독을 먹었을 때였다.

하늘이,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은 아득한 절망감을 맛보았던 그 때였다.

“ 노리개여도 좋습니다. 아니면 공작님의 노예가 되어도 좋습니다. 그러니 제발……. ”

만약 그 때 지온이 저 멀리,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떠난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분명 정신이 무너져, 헬레나 크라우저는 완전히 다른 인물이 되었겠지.

자신이 가장 우선할 남자가 닿을 것 같으면서도 닿지 않는 곳에 있다는 절망은 그 정도로 괴롭기 짝이 없었다.

헬레나는 때 아닌 동병상련의 감정을 느꼈기에 차분히 가라앉은 눈빛을 보였다.

집착이 소용돌이치는 무저갱이 아니라 차갑지만 명백한 이성을 갖춘 눈이었다.

그렇기에 노예가 되겠다는 엘렌을 이용 할 생각마저 떠올릴 수 있었다.

자연을 대신할 수도 있을 능력.

그만한 능력을 이용할 수 있다면 지온의 안전은 더욱 탄탄해지는 셈이라고.

“ 후우……. ”

엘렌의 말이 전부 사실이라는 가정 하에,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이 이득이기는 하다.

다소 속이 쓰리나 저만큼 절절한 사연이라면 어느 정도 이해도 갔고, 무엇보다 실질적인 이득이 컸다.

반면,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어떤 일이 생길지 헬레나 본인이 가장 잘 알았다.

당장 자신조차 지온을 잃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저질렀던 폭주를 생각해 보면 답이 나왔다.

더구나 상대가 상대인지라, 그 때처럼 절대 잘 풀릴 리가 없을 거라 확신했다.

둘 중 한 사람은 사단이 나고, 주변을 둘러싼 평화는 쑥대밭이 되겠지.

또 첩이라는 형태가 없는 것도 아니고, 불륜 상대와는 달리 공식적으로 벌어지는 일이기는 하다.

그러므로, 짙은 한숨과 지독하고도 무거운 침묵의 문을 겨우 비집고 나온 헬레나의 대답은 이랬다.

“ 몇 가지 조건을 붙일 거야. 그걸 받아들이겠다면, 지온의 첩이 되는 것을 허락하겠어. ”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