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화 〉 자격의 증명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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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보다 훨씬 재미있는 답을 들었다.
바람은 짐짓 근엄한 척 했던 태도를 무너뜨리며 주위가 떠나가라 웃어댔다.
웃음소리가 커지면 커질수록 조용한 냇물 같던 공기가 파도처럼 거세게 날뛰었다.
그에 따라 자연스레 몸집을 불려가더니, 이윽고 폭풍의 탑보단 모자랄지언정 충분히 거칠고 큰 소용돌이가 태어났다.
─하하하! 정말, 정말 재미있어! 정말 재미있구나!
대부분의 시간을 이 정령계에서 머무는 바람이나, 그렇다 해서 바깥 세상에 무지하지도 않았다.
여느 기둥이 그러하듯 기초적인 지식을 익히고 있었으며, 그로 인해 첩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첩이 되고자 목숨을 거는 이는 역사상 단 한 명도 없었다.
아득히 길고도 긴 엘프의 역사에서 한 명도.
─고작 첩 자리 하나에 목숨을 건다? 참으로 우습고도 흥미가 돋는구나.
지극히 사적인 동기다. 탐욕으로 힘을 원해 찾아왔던 이들에 비견될 만큼, 아니면 그들보다 훨씬 위험하고도 남았다.
바람은 그만한 광기를 엘렌의 눈빛에서 엿보았다.
그럼에도 바람은 웃었다.
승전 연회를 벌이는 이들처럼 즐거워하며, 기뻐했다.
─후우……. 거 참, 너무 웃어서 사방천지가 날뛰기 시작했구나. 이래서는 안 되겠지.
에잇. 하고 맥 빠지는 소리와 함께 바람이 손을 내젓자, 아가리를 쩍 벌린 채 날뛰던 용오름이 산들바람이 되어 흩어졌다.
가히 필연이라고 할 수 있을 만남을 망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결과였다.
“ …결정하셨습니까? ”
받을 것인가 말 것인가. 엘렌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그 생각뿐이었다.
그로 인한 짙은 광기가 눈을 가리고 있었기에 용오름이 날뛰는 것도, 그에 쓸려갈 뻔했으면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래. 결정을 내렸다. 나는 네게 내 숨결을 맡기도록 하마.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었다면 결코 엘렌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테지만, 바람은 자유로웠다.
자유로운 것이 비단 바람 뿐만은 아니라고는 해도, 흥미에 바탕을 둔 바람의 결정이 흔들림 없다는 것 하나만큼은 분명했다.
숨결을 맡긴다는 것은 곧 그녀의 힘을 언제든 끌어도 좋다는 뜻이었기에.
“ 감사합니다. ”
가장 친숙한 바람의 정령 중 그 꼭대기에 오른 존재가 허락하자, 엘렌은 고개 숙여 진심 어린 감사를 표했다.
뛸 뜻이 기뻐할 법도 했으나 한 고비를 넘겼다는, 혹은 목숨을 건졌다는 뒤늦은 안도감이 밀려왔기 때문이었다.
다행이다. 그리고 잘 됐다.
엘렌은 다른 정령보다 더욱 친숙하게 느끼는 바람이 손을 뻗어왔다는 것에 새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여러 정령마법 중에서도 가장 잘 다룰 자신이 있었기에, 그 힘이 얼마나 크던지 간에 금방 적응할 것이라는 기대를 할 수도 있었다.
─참. 모처럼 마음에 드는 아이가 찾아왔으니, 다른 이들의 의견도 한 번 들어봐야하지 않겠느냐?
바람은 모처럼 이곳을 살아 나갈 자격을 갖춘 다크엘프를 바라보며 다른 이들을 불렀다.
각자 자기의 영역을 지키며 가만히 잠들어 있었으나, 그들에게도 구경을 시켜 주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오락적 요소가 넘치는 여자였으니까.
◎◎◎
“ 물과 바람이라……. ”
자연을 나누며 유지하는 위대한 존재 중 둘이 힘을 빌려주었다.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은 성과가 아닐 수 없다며, 엘렌은 가늘게 눈을 뜬 채 만족스럽다는 듯 웃었다.
권능 뿐 아니라 혼을 연결하는 방법까지 배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느 힘보다 헬레나의 주의를 끌 수 있는 요소이기에 그 무엇보다 큰 수확이라고 할 수 있었다.
단순히 힘을 얻은 뒤의 설득력이 6할 정도였지만, 지금은 가히 9할을 바라볼 수 있을 정도로 승산이 있는 상태다. 그러니 기뻐하는 것이 당연했다.
나가자.
엘렌은 미련 없이 몸을 털며 수정계곡의 위로 올랐다. 빛을 등지고 어둠을 지나, 다시 빛이 쬐는 곳으로 나왔다.
그 과정이 마치 자신의 생애를 짧게 투영하는 것 같았는지, 엘렌의 눈빛이 두려움과 희망으로 떨리고 있었다.
“ 방금… 성역에서 나온 거 맞지? ”
“ 그렇긴 하네. 그냥 구경만 하고 나온 거 아냐? ”
“ 척 봐도 청소부가 아니니, 대충 관광한다는 생각으로 갔다 온 모양이군. ”
로브의 후드를 푹 눌러쓴 엘렌을 본 엘프들이 저마다 한두 마디씩 거들며 수군거리기 바빴다.
신기한 것은그들 중에서 엘렌이 유산을 얻었다 생각하는 소리가 단 하나도 없었다는 점이었다.
그 정도로 믿기 어렵고, 드문 일이었던 탓이리라.
하지만, 엘렌으로서는 참 다행이 아닐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저 관광객처럼 보였기에 쉬이 넘기는 듯 했으며, 만약 그녀가 유산을 얻고 살아왔음을 안다면 큰 난리가 날 것이 분명했기에.
“ 어…? ”
그러나. 엘렌이 급하면서도 여유 있게 마을을 빠져나오기 무섭게 기묘한 위화감이 피부를 타고 올랐다.
전보다 보폭이 더 넓어진 듯하면서도,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때 마다 전과 다른 무게감에 불편함을 느꼈다.
결정적으로, 키가 작아 말을 올려다보아야 했던 엘렌이 정면에서 말과 시선을 마주하고 있다.
위화감을 느끼지 않을 래야 느끼지 않을 수 없을 상황이었다.
“ 커졌…어? ”
그제야 그 위화감을 알아챈 듯엘렌의 표정에 경악이 번졌다.
로브 안에 가려진 옷이 커진 몸을 이기지 못해 찢어진 것도, 평소보다 걷기 어려웠던 이유가 커다란 고기 두 쌍에 의한 것이라 알게 되었다.
엘렌은 로브 안에 손을 넣어 자신의 온 몸을 더듬어 그 변화를 직접 확인했다.
물의 정령마법을 사용해 간단히 모습을 비춰볼 생각도 못할 만큼 급했던 탓이다.
묵직함과 탄력, 밀도는 똑같으나 그 덩치를 부풀린 탄탄한 근육들까지.
지금의 엘렌은 헬레나와 비견될 만큼 굴곡이 넘치는 몸을 갖게 되었다.
정령의 왕이라 할 수 있을 존재와 계약을 나눈 결과였다.
─히힝!
말은 지금 한가로이 넋 놓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듯, 가슴에 손을 얹은 채 굳은 엘렌의 머리를 툭툭 두드렸다.
덕분에 퍼뜩 정신을 차린 엘렌은 급히 말의 갈기를 쓰다듬으며 진정시킨 뒤, 등에 올라타 고삐를 쥐었다.
얼른 사람이 사는 도시로 건너가 옷을 사기 위함이었다.
엘프의 도시에서 직접 구하는 것이 훨씬 빨랐으나, 다시 저곳으로 들어가면 쓸데없는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을 지도 모른다.
그렇게 결론 내렸기에, 고삐를 내리치는 엘렌의 손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 그래, 가자! ”
◎◎◎
정말 괜찮은 걸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올리비아는 며칠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는 엘렌을 걱정하며 팔짱을 낀 채 고개를 푹 숙였다.
자신이 등을 민 탓에 나갔고, 돌아오는 데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때 늦은 걱정이 밀려왔다.
새삼 그런 말을 했던 과거를 후회하기도 했다.
“ 하아……. ”
“ 네가 등을 밀어놓고 그러면 어떻게 해? 진정하고 믿고 기다려. ”
“ …괜히 그랬나 싶어서 후회하고 있어. ”
다나의 따끔한 충고에 더욱 풀이 죽은 듯, 올리비아의 고개가 더욱 아래를 향했다.
처음 며칠은 닳고 구른 용병답게 담대함을 보이며 평소와 다름없이 생활했으나, 그 시간이 점점 길어질수록 걱정이 쌓여만 가고 있었다.
그것은 비단 올리비아 뿐만이 아닌 다른 다크엘프 무리도 마찬가지였으나, 올리비아만큼 안절부절 못 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등을 떠미는 행위에 손을 담그지 않았기에 그 죄책감이 다소 덜한 덕이었다.
“ 엘렌이 어디 가서 객사할 여자는 아니잖아. ”
“ 그건 그렇지만……. ”
“ 그렇지만, 이 아니라 그래. 엘렌 본인이 강하다 하더라도 재수 없으면 죽어나가는 게 전쟁터야. 엘렌은 그런 전쟁터에서 우리보다 오래 살았고, 결국 이렇게 안주할 땅까지 얻어냈잖아. 그건 실력 뿐 아니라 운도 좋다는 뜻이야. ”
운도 실력이라는 말에 비추어 판단해보면, 엘렌의 실력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만큼 뛰어난 것이 맞았다.
눈 먼 화살에, 혹은 의도치 않게 사각에서 날아드는 칼날에 밥이 되지 않고 살아남은 것만 해도 두 손으로 셀 수 없을 만큼 많았으니까.
올리비아를 비롯한 무리는 다나의 냉정한 한 마디에 옳다구나 고개를 끄덕이며, 조금이나마 무거웠던 마음이 가벼워짐을 느꼈다.
“ 그래. 맞는 말이지. 처 맞는 말이 아니라, 진짜 맞는 말이야. ”
“ 알았으면 얌전히 기다려. 이제 곧……. ”
히히힝!
양반은 못 된다는 어떤 말처럼, 다나가 채 말을 잇기도 전에 익숙한 말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대체로 그놈이 그놈 같아 보이는 소리를 구분하기는 지극히 어려운 일이었으나, 오랜 시간을 같이 해 온 엘프는 그 차이를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그들의 얼굴엔 시름 대신 웃음꽃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엘렌이 끌고 다니는 말의 소리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챘기에.
“ 왔어! ”
“ 나도 알아! ”
정작 냉정하게 무리의 진정제 역할을 하던 다나가 가장 먼저 호들갑스럽게 밖으로 튀어나갔다.
올리비아를 비롯한 무리는 그 뒷모습을 보며 기막혀하다, 곧 그 등을 따라 오두막 밖으로 나섰다.
아직 밤이 쌀쌀한 시기이기는 해도 겨울만큼 춥지 않았기에 얇은 옷차림을 하고 나섰더라도 문제없어 보였다.
“ 후우……. ”
한숨을 내쉬며 말에서 내리는 로브 차림의 여자가 무리의 눈에 들어왔다.
분명 엘렌의 말이 분명했음에도그 등에서 내리는 이는 그들이 알던 엘렌과 사뭇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키가 몹시 자랐으며, 로브 너머로 얼핏 보이는 농염함이 천지 차이였다.
“ 다녀왔어. ”
그러나, 익숙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를 듣는 순간 미약했던 의심이 눈 녹듯 녹아내렸다. 그 결과, 다크엘프 무리는 요란스레 기뻐하며 엘렌에게 다가가, 로브를 난폭하게 풀어헤친 뒤 온갖 질문을 폭탄처럼 터뜨려대기 시작했다.
“ 이 몸 뭐야?! 언제 이렇게 커다란 물건을 달았어! ”
“ 키는 또 언제 이만큼 큰 거야? 우리 중에서 제일 작았는데 비등할 정도로 커졌잖아?! ”
“ 와, 빵댕이 튼실한 것 좀 봐……. 진짜 그 소녀 같던 엘렌이 맞나? 할 말이 없을 정도다……. ”
참 어질어질하다. 엘렌은 사방에서 날아드는 질문세례에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난처하다는 듯 웃으며 그들을 달랬다. 정신없는 것과 별개로 자신을 반갑게 맞아주는 모습에 기뻐했다.
“ 자자, 다들 일단 들어가자. 들어가서 다 얘기해 줄 테니까. 응? ”
궁금함을 해결해 준다는 소리에 정신이 팔렸는지, 무리는 군말 없이 엘렌을 둘러 싼 채 통나무집 안으로 발을 들였다.
그 뒤 곧장 그녀를 가장 상석이라 할 수 있을 소파에 앉힌 채 주위를 둘러쌌다. 마치 겁박하는 것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 그래서, 일단 그 몸은 어떻게 된 거야? ”
다른 무엇보다 가장 우선해야 할 물음이 날아오자, 엘렌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당사자조차 몸이 바뀐 충격에 적응하느라 며칠이 걸렸으니 오죽할까.
“ 너희들에게 말한 대로 성역에 들어가 유산을 얻고 나왔어. 자세한 과정은 나도 잘 모르지만, 아마 유산을 얻는 과정에서 이렇게 된 것 같아. 그것 말고는 설명할 길이 없어. ”
“ 역시! 엘렌이라면 해낼 줄 알았어! ”
무리는 뒤늦은 축하와 격려를 건네며 엘렌을 위로했다.
농염하기 짝이 없는 몸과 마주한 충격에서 벗어났다는 증거였다.
개중에는 무사히 돌아온 것에 감사하며 눈물을 글썽이는 이도 있었다. 알게 모르게 마음고생이 심했음을 드러내는 모습이었다.
“ 다들 고마워. 내 고집을 믿고 기다려줘서. ”
“ 엘렌을 안 믿으면 누굴 믿어? 이곳 사람들에도 고맙긴 하지만, 여전히 엘렌이 최고인걸. ”
“ 그럼, 그럼. ”
무리는 각자 한 마디씩 거들며 엘렌의 소중함을 표현했다.
이곳의 사람들과 크라우저를 시작으로 하는 은인에 대한 감사함이 크기는 해도, 가장 우선해야 할 것을 잊지 않고 있었다.
“엘렌. 크라우저 공작에게는 내일 이야기 하러 갈 생각이야? ”
우뚝.
반가운 분위기에 젖어 잠시 잊었던 일을 떠올린 탓일까. 따뜻했던 엘렌의 눈빛에 시리면서도 날카로운 예기가 서렸다.
목적을 이루기 위한 집중이 엿보이기도 했으나, 그 이상으로 한층 더 깊어진 집착을 엿볼 수 있는 눈이었다.
그래. 약간 시간이 더 걸리더라도 몬스터의 숲에서 힘을 길들이고 온 것도 그 때문이었지.
엘렌은 신기루처럼 뇌리를 스치는 옛 일을 떠올리며, 더 말할 것도 없다는 듯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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