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화 〉 자격의 증명 #3
* * *
“ 하아……. ”
오베론의 숲이라.
며칠에 걸쳐 숲을 가로지르고, 몬스터를 찢으며 효율적인 길만을 골라 질주하기를 며칠.
엘렌은 여러 엘프의 마을 중 가장 강성하고 번성한 마을을 앞두고 숨을 골랐다.
처음 대륙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닐 때처럼 간소하다 못해 초라하기 짝이 없을 봇짐만을 싸매고 나선 길.
말을 지키면서 전진해야 했기에 몬스터를 죽이고, 흙먼지가 피어오르는 땅을 돌아다니느라 제법 초췌한 몰골이었다.
정령마법으로 어느 환경에서도 깨끗할 수 있다 하더라도 타고난 피로를 숨길 수는 없는 법이었다.
다 왔다.
비록 한 번도 들러본 적 없는 곳이라 하나 대략적인 위치를 알고 있으며, 엘프의 숲은 특유의 향이 난다.
더구나 가장 강성한 오베론의 숲이라면 그 향이 무엇보다 진해 알기가 쉬워진다.
정령과 계약하는 이들만이 맡을 수 있다는 정령의 향기가.
“ 여기서 기다려 줘. ”
엘렌은 말이 가볍게 투레질하는 소리를 들으며 웃었다.
수명의 문제 때문에 몇 번이고 갈아왔던 말이지만 늘 자신과 함께 하는 또 다른 친구였다.
그러니 슬플 때도 많았고, 애정도 남달랐다.
말도 그것을 아는지 걱정 말라는 듯 거친 콧김을 뿜더니 얼른 가보라는 듯 고개를 꺾었다.
그것도 오베론의 마을 입구를 정확히 가리키고 있었다. 보통 말과는 다르게 높은 지능이 엿보이는 모습이었다.
“ 그래. 갈게. ”
엘렌은 마지막으로 말의 갈기를 쓰다듬은 뒤 자리를 떴다.
입가에 걸린 미소는 딱딱하기 그지없는 것으로 바뀌었으며, 따뜻한 빛이 감돌던 눈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여태껏 그녀가 마주했던 적을 대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더러운 다크엘프가 여기엔 무슨 낯짝으로 왔는가?
나무를 깎아 터널 같은 입구에 다다르기 무섭게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는 특정 지점이 아닌 사방에서 울려 위치를 특정할 수 없도록 방해하고 있었다.
바람의 정령이 가진 힘을 빌려 낸 결과였다.
“ 유산의 시험에 응하러 왔다. 비켜. ”
더러운 엘프라.
간혹 태어나는 다크엘프가 난폭한 성향을 가지고 화를 불러일으킨다는 과거의 기록 때문에 오물 취급까지 한 놈들 주제에, 참 어처구니가 없다.
엘렌은 그리 생각하면서도 겉으로는 냉랭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풋! 유산을 얻으러 왔다고? 어이가 없군. 당장 꺼…….
“ 꺼지는 건 네 목이겠지. ”
어차피 유산이 있을 성역에 들어서면 저들도 막을 방법이 없다.
그러니 방해하는 것이 있다면 전부 망가뜨려서라도 전진하겠다는 생각을 품었다.
엘렌의 주위를 감싸는 공기가 그러한 생각을 여실히 드러내주고 있었다.
바람의 정령은 엘렌 또한 사용할 수 있다. 그로 인해 공기의 흐름을 맛보아 모습을 감춘 상대가 있는 곳을 알 수도 있었다.
고로 모습을 감춘 것 하며,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시작점을 흩트리는 것 또한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기척으로 읽어낼 수는 없을지언정 흐름을 알면 그만이었다.
─네년…! 진심으로 싸… 크윽?!
남자의 목소리가 고통을 호소했다.
엘렌이 쏜 화살이 정확히 허공을 가르듯 근처의 나무 위를 향해, 그곳 가지에 앉아있던 남자의 어깨를 꿰뚫어버렸기 때문이었다.
화살로 인해 바람은 흐트러졌으며, 남자의 모습과 목소리를 감추던 은폐가 사라졌다.
“ 으, 으윽…! ”
하필 오른 어깨를 꿰뚫린 탓에 제대로 활을 잡을 수가 없다.
오베론 마을의 입구를 지키던 경비병 엘프는 분노를 곱씹으며 엘렌을 죽일 듯 노려보았다.
활을 제대로 쏠 수 없을지언정 마법은 사용할 수 있었고, 아직 움직일 수도 있었다.
그러니 완전히 포기하기엔 이르다고 생각했다.
엘프라면 누구나 별 탈 없이 통과할 수 있는 곳이 마을이라고는 하나, 다크엘프만큼은 그 예외다.
엘프는 차별을 시행하는 원점이자 가장 강한 중심지였기에.
하지만, 정작 그 정도로 꺼리면서도 최소한의 성장을 이룰 때 까지는 키웠다.
낳자마자 버려진 다크엘프가 더욱 큰 재앙을 몰고 왔다는 전승과, 선을 지키며 키우면 손을 대기 꺼림칙하게 느낄 수도 있다는 계산에 의한 행위였다.
“ 정말로 해보자는… 허업! ”
더 이상은 못 참겠다.
경비병은 가능한 한 정령의 힘을 최대한 끌어내어 공격하려다, 엘렌의 서슬 퍼런 눈빛을 접하기 무섭게 헛바람을 삼켰다.
말로만 듣던 심연, 바닥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계곡을 떠올리게 하는 눈빛이었다.
두렵다. 그저 두려울 뿐이었다.
그 더러운 잿빛 피부와는 비견도 되지 않을 만큼 검고, 정녕 엘프에게서 볼 수 있는 눈빛이 맞나 싶을 정도로 질척한 감정이 소용돌이이치는 눈이었다.
더구나 살기같이 곁들어져 있어 위압감이 사뭇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 네 가족까지 전부 죽기 싫다면… 헛짓거리 집어 치워. ”
경비병에게 있어 더없이 굴욕적인 처사였으나, 그럼에도 손 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다.
훈련을 받았다고는 하나 온화한 숲에서 순탄하게 살아 왔던 경비병과, 오랜 세월을 실전에서 닳고 구른 엘렌은 분위기부터가 달랐다.
물론 그들 또한 다른 아인종과 마찰을 빚거나 몬스터를 사냥 할 때가 되면 힘을 쓰기는 했어도, 그것은 그리 자주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러니 기세에서 밀릴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지금 엘렌의 상태가 예전과 몹시 다르다는 점이 컸다.
생전 처음으로 곁에 있고 싶은 사람이 생겼으며, 그것이 남자였기에 그로 인한 감정이 더욱 격해지고 말았다.
본인조차 모르고 있었던 질척한 집착의 발현인 셈이었다.
피를 쏟을 것인가. 그냥 보내줄 것인가.
경비병은 찰나의 순간 영원과도 같은 고민을 거쳐, 결국 마나를 거두고 엘렌을 향했던 시선을 하늘로 돌렸다.
이대로 죽는다 한들 한낱 개죽음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달리 말하면 격의 차이를 뼈저리게 체험한 탓이기도 했다.
“ 잘 생각했네. ”
엘렌은 비꼬는 듯한 한 마디를 툭 던진 뒤, 후드를 뒤집어 쓴 채 동굴 같은 입구를 지나 오베른 마을에 다다랐다.
보통 정령마법에 의한 장벽이 향시 둘러지고 있는 것이 엘프의 마을이었으며, 그렇기에 같은 엘프나 정령마법에 능통한 일부를 제외하면 위치를 알아내기가 어려웠다.
다만 정확한 지도가 있다면 어느 정도 편히 찾아낼 수는 있었다.
저기구나.
엘렌은 장벽에 가려져 있던 화려한 숲의 마을, 그 가운데에 하늘을 받치는 기둥처럼 우뚝 서 있는 나무 한 그루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온이 저것을 봤다면 세계수가 아니냐고 착각할 만큼 대단한 위용을 자랑했다.
“ ……. ”
걸었다.
그저 걷고 또 걸어, 금방 닿을 것 같으면서도 제법 멀리 떨어져 있는 나무를 향해 다가갔다.
어느 마을에나 큰 신목이 굳게 뿌리내리고 있으나, 이처럼 큰 나무는 처음이었기에 압도될 법도 했다.
하지만, 엘렌에게 있어 나무의 크기는 둘째 문제였다.
위엄과 역사에 고개를 숙이는 일도 없이, 그저 뿌리 아래에 있다고 전해지는 성역을 향해 성큼성큼 걸을 뿐이었다.
얼굴을 가리고 있어 어딘가 수상쩍기는 하지만, 짙은 정령의 향기가 나는 것을 보면 엘프가 맞다.
거리를 걷거나 장사를 하는 이들이 한 번씩 곁눈질로 엘렌을 바라보면서도 붙잡지 않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정작 불길하다며 꺼리는 주제에 모습을 가린 것만으로도 쉽게 넘어가는 점이 참 우스울 따름이었다.
그래도, 그 덕분에 성역의 코앞까지 무척 쉽게 다다를 수 있었다.
─숲의 아이만이 문을 열 자격이 있으며, 그 중에서도 자격 있는 자만이 명맥의 끈을 손에 쥘 수 있으리라.
엘렌은 예부터 각 마을에 전해지는 구절을 떠올리며, 어두컴컴한 천연동굴을 떠올리게 하는 뿌리 아래로 모습을 감췄다.
유산이 있는 성역이라며 거창한 명칭을 붙인 것 치고는 그 관리가 너무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엘프들이 성역을 가만히 내버려 두거나, 그곳에 다가가는 존재를 보며 고개를 저을 뿐인 것도 다 이유가 있었다.
어차피 유산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엘프 뿐이며, 여태껏 도전한 이들은 역사적으로도 한 손에 꼽을 만큼 극소수다.
그에 비해 죽어나간 수는 가히 산을 쌓을 만큼 많았으니, 알아서 자살을 하러 가는구나 싶을 뿐이었다.
“ 하아……. ”
아래로 내려갈수록 어둠 속에서도 푸른빛을 내며 별처럼 반짝이는 수정계곡을 지나, 커다란 마법진이 새겨진 원판 위에 이르렀다.
이곳에 누워 마나를 흘리면 새겨진 마법식이 절로 가동하도록 만든 물건이었다.
마법진은 시련 그 자체였으며, 그 시간은 가히 찰나에 가깝다.
시련을 겪는 당사자는 무척 긴 시간을 보낼 수도 있으나, 겉으로는 눈 몇 번 깜빡할 시간밖에 흐르지 않는다. 그 정도로 간극차이가 컸다.
고로 그 짧은 시간에 눈을 뜨지 못하면 죽었다는 뜻과 같아, 주기적으로 성역을 관리하는 이가 시체를 수거해가는 것이 관행이었다.
엘렌은 짧은 한숨을 토해낸 뒤, 마법진에 누워 마나를 흘렸다.
엘렌의 마나를 먹은 마법진은 수정보다 더욱 화려한 빛을 내뿜어, 이윽고 중앙에 누운 한 여자를 완전히 집어삼켰다.
◎◎◎
─또 왔구나.
하늘에서 폭포수가 쏟아지고, 은하수가 땅을 흐르는 세계.
밤과 낮이 동시에 공존하며, 거대한 산과 같은 불씨와 거센 폭풍의 탑이 거리를 두고 떨어져 존재하는, 환상이라고밖에 존재할 수 없는 세계.
그 세계를 분할하여 한 축을 지배하는 희미한 형체의 여자이자오늘의 당번이기도 한 기둥 중 하나, 바람은 한숨과 함께 손을 들었다.
아래부터 차근히 단계를 밟으며 키워나가야 ‘교감‘을 짓밟고 손을 뻗는 침입자를 벌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손을 들어 영혼을 찢으려던 바람의 손길이 멎었다.
바닥에 깔린 호수 바닥에서 나와 앞을 향해 걷는 여자, 엘렌의 모습이 여태껏 죽어나간 엘프들과 달라 보인 탓이다.
단순히 반칙을 저지르려는 이들과 다르게 어둡기 짝이 없는 눈빛이 그랬고, 엘렌이 피부가 검은 다크엘프라는 점이 그랬다.
바람의 입장에서는 다크엘프라는 것이 크게 감흥을 줄 수는 없는 요소였으나, 어두운 감정을 있는 대로 쑤셔 박은 듯한 눈빛이 호기심을 느끼게 했다.
─힘을 원해서 왔느냐?
그 이유가 어찌되었던 힘을 원해서 온 것은 틀림없었다.
그러니 그 이유를 묻기 위해 우호적인 척 말을 걸었다.
“ …네. 원합니다. ”
당장이라도 뛸 듯이 기뻐할 것이라 생각했던 모습과 다르게 엘렌의 태도는 시종일관 차분했다.
냉랭하기 짝이 없다 느껴질 정도로 가라앉아 있었다.
허리를 숙여야 하는 입장에서는 잘못되었다 할 수도 있을 법도 했으나, 바람은 오히려 더욱 마음에 드는 기색을 보였다.
─이곳에 함부로 발을 들인 이는 대부분이 목숨을 잃었다. 아니, 전부라고 봐도 좋겠지. 그런데도?
“ 그래야 할 이유가 있으니까요. ”
엘렌은 자신보다 월등히 격이 높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기에 정중하게 답했다.
부탁하는 입장에서 콧대를 높게 세워 좋을 것 하나 없다는 생각도 있었으나, 그 이상의 압박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바람은 여전히 가시지 않는 흥미를 품은 채, 엘렌에게 물었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
“ 버려지지 않기 위해서요. ”
버려지지 않기 위함이라. 참 재미있는 답이 아닐 수 없다며, 바람은 속으로 웃었다.
욕망에 눈이 먼 채 강해지기 위해서라는 상투적인 답안과는 전혀 다른, 바람에게 있어 너무도 신선한 말이었기에.
─버려지지 않고자 여기까지 왔다면, 너를 버리려는 이, 혹은 너를 버릴 지도 모르는 이가 그 정도로 강하다는 뜻이냐?
“ 그녀가 작정하고 덤빈다면 반드시 죽게 되겠지요. 그 정도로 강한 사람입니다. ”
더욱 흥미가 간다.
고작 버림받음을 피하기 위해서 목숨을 건다.
그 정도로 그녀라는 인간에게 집착하는 것일까. 알면 알수록 입맛 다시는 이야기가 잘도 흘러나오는 것 같아 즐겁다.
바람은 그런 속내를 감춘 채 근엄하기 짝이 없는 투로 목소리를 냈다.
─버림받지 않으려 하는 존재라는 건, 네가 말하는 그녀라는 존재인가? 그것은 인간인가?
“ 그렇습니다. ”
─그렇다면, 그 여자의 호감을 사기 위해 목숨을 걸려 하는가?
여자와 여자끼리의 사랑이라.
동성애에 큰 편견이 없는 바람으로서는 얼른 답을 듣고 싶었다.
이미 엘렌을 죽이려는 생각은 날아가 버린 지 오래이며, 원하는 답을 듣지 못했더라도 살려서 보내줄 생각 정도는 하고 있었다.
그러나, 엘렌의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온 답은 바람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 아뇨. 그녀의 옆에 서 있는, 한 남자의 품에 안기기 위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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