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화 〉 자격의 증명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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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이 계속하여 더해질 때면 어떻게 해야 좋을까.
엘렌은 과거 숲에서 핍박받았을 때 보다 더욱 지독한 아픔에 시달리고 있었다.
여태껏 네가 겪었던 고통은 전부 이것을 위한 시작에 불과했다는 듯 끝이 없을 것 같았다.
처음 자신을 끌어당겼을 때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감사를 느끼고 호감이 있기는 했어도 동료애와 별 다를 것이 없었다.
그러나, 그 감정은 언제 그랬냐는 듯 이를 드러내며 그녀를 집어 삼켰다.
이곳에서 지낸 평화로운 시간이 독이 된 셈이다.
그것도 거의 반 년에 이르는 시간을.
“ 하아……. ”
늦은 밤.지온이 여느 때와 다름없이 웨딩드레스의 제작을 마치고 돌아갔을 무렵.
엘렌은 침대에 누워 이불을 푹 뒤집어 쓴 채 오늘의 아픔을 곱씹고 있었다.
헌신.
그것도 지극한 헌신이라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을 행위는 한 여자의 마음을 흔들어놓기에 충분했고, 처음부터 서글서글했던 태도는 당연하게 마음을 샀다.
그의 제법 예쁘장하게 생긴 생김새도 한 몫 크게 거드는 요인 중 하나였다.
“ 엘렌, 자? ”
문득, 올리비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용병단 내에서도 분위기를 밝게 만드는 주역이자, 여러모로 가장 섬세한 여자이기에 엘렌의 변화를 누구보다 빨리 알아차렸다.
다른 다크엘프 무리도 올리비아와 같이 한 여자의 우울함을 알았으나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이들로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 아니. 왜 그래? ”
엘렌은 그것을 알면서도, 할 수 있는 한 평온하기 짝이 없는 말투와 표정을 만들어내며 이불을 걷어냈다.
올리비아는 그런 엘렌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 시선을 맞추기 위해 쪼그리고 앉는 자세를 취했다.
그 결과 허벅지에 힘이 들어가 탄탄한 근육이 유감없이 드러났다.
“ 이제 슬슬 날이 풀리잖아. 포도 농사도 슬슬 시작해야 할 텐데, 규모를 작년과 똑같이 할지도 고민도 해야 하고. ”
“ 그렇긴 한데… 당장 서두를 정도로 급하진 않지? ”
“ 응. 그건 나도 아는데,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농사가 아냐. ”
농사로 운을 띄워놓고서 농사가 아니라니.
수수께끼 같은 올리비아의 말에 엘렌이 눈을 몇 번 깜빡였으나, 진중하기 짝이 없는 눈빛을 보며 단순한 농담이 아님을 직감했다.
“ 엘렌. 진심으로 알트람의 아들을 마음에 품게 된 거지? ”
“ ……. ”
놀랐다. 놀랍기는 했으나, 아주 찰나뿐이다.
엘렌의 입장에서 보면 올리비아가 진즉 눈치 챘어도 이상하지 않을 변화임을, 변화를 보인 그녀 자신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놀라는 것보다 당연하다는 듯 침묵을 지켰다.
“ 그래. 생각했던 대로구나. 그럼, 다녀 와. ”
“ 다녀오라니…? 어딜? ”
맥락이 이어지지 않는 대화에 엘렌의 궁금증이 한층 더 크게 부풀어 올랐다.
잠시 아픔을 잊을 만큼 커다란 물음이었다. 덕분에 잠깐이나마 속이 편해졌다며, 내심 올리비아에게 감사했다.
하지만.
그것만이 끝이 아니라는 듯, 친구의 입에서 흘러나온 목소리가 엘렌을 더욱 놀라게 했다.
“ 예로부터 전해지는 엘프의 유산. 그걸 먹고 오라고. ”
“ 올리비아! ”
엘프의 유산.
그 위치는 엘프라면 누구나 알고 있지만, 역사상 손에 넣은 이가 한 손에 꼽는다는 지옥이기도 했다.
엘프라 하더라도 호전적인 경향이 있는 이들이 있으며, 그들 중 몇몇이 유산을 얻고자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적합한 존재가 아니었기에 모두 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얻은 것 하나 없이 허무하게 지고 말았다.
“ 나보고 지금 죽으라고? ”
“ 이대로 속앓이만 하다 죽는 것 보다는 나아. ”
“ 그, 그건……. ”
감히 욕심내지 않아야 할 것을 욕심내기 시작하여 이 꼴이 났다.
올리비아는 그 점을 지적하여 엘렌의 입술을 꾹 닫게 했다. 위험한 것은 자신도 잘 알지만, 지금의 엘렌도 충분히 위험하기 짝이 없는 상태였다.
속에서부터 썩어 문드러지고 있어, 언제 화병으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다는 것을 꿰뚫어 보았기에.
“ 다른 애들도 다 알고 있어. 지온을 쫓는 네 눈빛만 봐도 티가 났으니까. ”
“ …그렇게 티 났어? ”
엘렌은 부끄러운 듯 베개에 얼굴을 묻은 채, 한쪽 눈만을 빼꼼히 내밀며 물었다.
도저히 노련하기 짝이 없으며, 손속에 자비가 없다 소문난 레드후드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운 모습이었다.
“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우리가 같이 지낸 세월이 얼마야? 모르는 게 이상하지. ”
“ …그래. 그렇구나. ”
“ 그렇다고. 그러니까 어차피 속이 썩어 죽을 거, 유산을 손에 넣고 돌아와서 당당하게 공작과 협상을 해. 저쪽에서도 도저히 버릴 수 없을 만큼 가치 있는 존재가 되어서… 밀어붙이란 말이야. ”
헬레나는 은인이다.
그것도 발붙일 땅을 주고 주위 시선마저 바꾸도록 허락한 대은인이다.
그것이 비록 지온의 입김에 의한 행위라 할 지라도, 헬레나가 가진 자비심이 거짓이라는 말은 아니었다.
그런 은인의 심기를 거슬리게 하는 한이 있더라도 협상을 하라고, 올리비아는 말하고 있었다.
지금이야 적당히 쓸모는 있으나, 소드마스터에게 있어서는 언제든 털어버릴 수 있는 능력이라고 생각했으니까.
“ 물론 뺏어 오겠다는 멍청한 짓은 불가능하지. 애초에 우리가 그렇게까지 욕심을 부릴 처지도 아니잖아. ”
“ 그건 내가 가장 잘 알아. ”
지온은 헬레나와 함께 있기에 더욱 빛이 나는 존재다.
적어도 다크엘프 용병단이 보는 지온 알트람은 그런 남자였기에 그 주위를 망쳐서는 절대 안 되었다.
애초에 망칠 수 있을 지도 의문이지만 되도록 시도조차 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다.
온전하게, 또 평화롭게 그의 품에 안기기 위해서.
“ …그래. 애초에 첩이 될 생각이었겠지. 고작 첩이 되겠다고 유산에 목숨까지 거는 게 웃기긴 한데……. ”
“ 우리의 현실은 나도 잘 알아. 힘으로 휘어잡는다 한들 사랑이 오는 것도 아니라는 것도. 아무튼 고마워. ”
가슴을 옥죄던 사슬에서 풀려난 듯, 엘렌은 여느 때보다 후련하기 그지없는 느낌에 취했다.
올리비아가 말한 대로 첩 하나 하자고 목숨까지 거는 꼴이 우스웠지만, 상대가 소드마스터의 남자라면 충분히 그래야 했다.
최소한 동률이라는 인상을 주어야만, 자그맣게나마 곁에 있을 자리를 허락받을 수 있을 테니까.
그럼에도, 엘렌의 뇌리에는 힘이 아니라 절실함으로 승부를 볼 생각이 굳혀진 상태였다.
비참하게 구걸까지 할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다. 힘은 그를 돕기 위한 소소한 보조일 뿐이었다.
“ …고마워, 올리비아. 덕분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뭔지 알아낸 것 같아. ”
“ 미안해. 지옥으로 가라고 등을 떠밀어 버려서. ”
“ 미안할 것 없어. 네가 말한 대로, 이대로 시간이 흘렀다면 속절없이 흐름에 휩쓸리다 눈을 감았을 것 같으니까. ”
시간은 약이 되기도 하지만, 약으로 삼지 못하는 이에겐 무엇보다 치명적인 독이 될 수도 있었다.
적어도 엘렌에게 있어선 그러했기에, 무엇을 하리라는 결정을 내린 것에 감사했다.
그로 인해 가슴이 후련해지고, 끝이 없어 보였던 고민의 실마리가 보인 것 같아서.
“ 그러면, 언제 출발할 거야? ”
“ 내일 아침 먹고 바로. 오늘은 그냥 자고, 내일 간단히 짐을 꾸려 출발하려고. ”
“ 오베론의 마을에 가려면 여러모로 골치아플 텐데, 괜찮겠어? ”
“ …괜찮아. ”
그들은 크라우저 공작령의 사람이 아니라, 그냥 엘프일 뿐이니까.
엘렌은 동족 의식이라고는 조금도 없이, 내심 엘프를 거슬리는 방해물 정도로 취급할 뿐이었다.
방해하지 않는다면 다행이나, 길을 가로막는다면 몬스터보다 못한 족속들로 평가하고 있었다.
집착의 불이 엘렌의 눈에 타오르기 시작하는 것을 보며, 올리비아의 가슴엔 또 하나의 고민이 늘었다.
◎◎◎
“ 네? 고향으로 갔다고요? ”
여느 때처럼 드레스 제작에 마무리를 하고자 들렀더니, 엘렌 혼자 고향으로 갔다는 다소 황당한 소식을 접했다.
“ 고향에는 썩 정이 있는 편이 아니지 않았나요? 아니면 사실 부모님과는 친밀함을 유지하기라도 한 건가. ”
“ 그런 건 아냐. 숲에서 친하게 지낸 엘프는 없거든. 낳아 준 부모를 포함해서. ”
내 물음에 답해주는 올리비아의 목소리가 무척 가볍기는 했으나, 내용은 전혀 그렇지가 못했다.
알고는 있었으나 경험자를 통해 이야기를 들으니 그 느낌이 무척 생생했다.
“ 아… 죄송합니다. ”
“ 네가 죄송할 건 아냐. 사실이 그러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 ”
“ 그렇다면 어째서 고향까지 돌아간 건가요? 이제 와서 잊어버린 물건이 있는 것도 아닐 텐데. ”
“ 나도 몰라. 뭔가 할 일이 있기는 한 모양인데, 잘 모르겠다고 밖에 할 말이 없네. 우리끼리라도 속내를 전부 밝히며 사는 건 아니니까. 너도 그렇지 않아? ”
맞는 말이다. 그렇기에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헬레나와 더없이 가까운 사이라 하더라도 말하지 못하는 것이 한두개 정도는 있기 마련이며, 헬레나 또한 그러할 것이라 생각했다.
다만, 그와 동시에 헬레나가 내게 숨기는 것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도 했다.
우리의 관계는 보통 사람과 다르게 예외가 겹쳐져 생긴 경우인지라, 일반적인 기준으로 재단하기엔 미묘한 점이 있었다.
“ 네. 그렇긴 하지요. ”
“ 그렇지. 그러니까 그냥 말을 안 해도 보내줬어. 엘렌이 어디 가서 맞고 다닐 여자도 아니고. ”
올리비아가 자신있게 말한 대로, 엘렌은 강한 여자다. 그러니 엘프들이 득실대는 숲에 돌아간다 하더라도 별 문제는 없겠지.
나는 그 말을 들으며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뒤, 곧장 내 일에 착수했다.
남은 기간은 대략 세 달에 조금 못 미치는 정도였으니, 적어도 다음 달 초에는 끝을 보겠다는 생각을 했다.
처음 웨딩드레스를 만들기 시작한 며칠은 시행착오를 많이 겪었다.
원단을 쓸데없이 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보통 옷을 만들 때와 다른 요령을 필요로 했고, 압박감 또한 느낀 탓이었다.
그러던 것이 지금은 어느 정도 형태를 갖출 정도로 만들기는 했으나, 드레스의 꽃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를 장식이 문제였다.
지극히 까다로운 섬세함을 요구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기초공사를 마친 뒤 세부공사로 넘어 올 때, 일의 진전이 몹시 느린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 후우……. ”
한 땀 한 땀 꿰매는 것이 참 고역이지만, 그만큼 보람도 있었다.
더구나 작업에 점점 익숙해지는 듯 손이 빨라지고 있어, 주위를 돌아볼 여유도 생겼다.
그 덕분에, 곁눈질로 나를 바라보는 올리비아와, 다른 다크엘프들의 눈빛이 평소와 다름을 알 수 있었다.
올리비아는 엘렌이 단순히 고향으로 갔다고 말했지만, 기색을 보면 단지 그것 뿐만은 아닌 듯싶었다.
정말로 고향에 갔을 뿐이라면 한숨을 토해내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듯한 태도를 보였겠지.
다만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인 생각이라 정답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묘한 확신이 등을 떠밀고 있었다.
그러니 직접 꼬치꼬치 물어볼까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기도 했으나, 그것은 지나친 간섭이라고 결론 내렸다.
올리비아는 친한 사이라도 서로 말하지 않는 것이 있다고 말했다.
그것은 즉 속 깊은 사정을 물어본다 한들 대답해 주지 않을 것이라는 말과 똑같다고 봐야했다.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진짜 답을 피하는 것 같아 보였으니 답을 할 리도 없으리라.
나는 웨딩드레스에 자수를 놓으면서도 온갖 잡생각이 들었다. 용케 바늘에 찔리지 않고 무사한 것이 신기할 정도로.
“ 왜 그러세요?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
“ 응? 아. 아냐. 아무것도. ”
올리비아는 평소의 능글맞은 태도와 약간 다른, 찰나였지만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였다.
잡생각을 털고자, 혹은 속에서 맴돌기만 하는 의혹을 조금 풀어볼까 싶어 던진 질문에 저런 답이라니. 새삼 무언가 깊은 사정이 있음을 확신했다.
“ 엘렌의 고향은 먼 곳에 있지요? ”
“ 응…? 그… 야 그렇지. 애초에 엘프의 숲 자체가 전부 저 몬스터가 득실대는 숲 건너편에 있는걸. ”
“ 갔다 오는데 며칠 정도나 걸릴까요? ”
“ 글쎄. 혼자서 가니 빠르다고는 해도, 오고 가는데 며칠 정도 걸리니까… 나도 딱 언제 오리라고는 말 못하겠네. 용건을 모르니까. ”
모른다라.
말에 모순은 없는 것 같은데, 무언가 마음에 걸린다. 그것도 가슴에 가시가 박힌 것 같이 아주 찝찝했다.
그러나 답을 물어도 순순히 줄 것 같지도 않아 보이니, 결국 터지는 건 내 속일 뿐이겠지.
결국, 조금이라도 마음을 편히 가라앉히기 위해서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는 것이 현명했다.
땅을 두고, 친구를 두고 홀로 도망 갈 여자도 아니거니와, 따로 갈 곳도 없어 보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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