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화 〉 자격의 증명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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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물이라 취급받는 다크엘프. 정녕 그들은 오물인가?
최근, 우리 공작령 내에는 짧지만 사람의 반발심을 자극하는 화두가 떠오르고 있었다.
몬스터를 사냥하며 얻어낸 평판, 또 그 이후에 곤경에 처한 영지민들을 도우며 얻은 성과였다.
얻는 것 없는 자선봉사에 가까운 일이었으나, 그렇기에 진심이 느껴진다고 전하는 이들이 점점 늘기 시작했다.
영지를 지키는 병사들에게 활쏘기를 기초로 하는 여러 실전 기술들을 가르쳤고, 나무를 베는 것이 힘에 겨운 이들을 돕기도 했다.
다크엘프와 정면에서 마주한다는 것은 사람과 그 장본인 둘 다 불쾌감을 초래할 수 있는 일이다.
오랜 세월에 걸친 간극이 그리 쉽게 좁혀질 리 없다는 것도 잘 알지만, 가만히 내버려 둔다고 한들 저절로 꿰매질 상처도 아니었다.
결국 누군가는 나서야만 했다.
나는 그 누군가로서 고개를 숙여가며 그 간극을 메우려 애썼다.
어쨌든 몸소 다가가지 않으면 죽도 밥도 안 되었기 때문에 해탈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임했다.
처음 나와 접했던 이들은 두려워하면서도 놀라워했다.
공작의 남자로 소문이 난 어린놈이 일일이 고개를 숙이고 다녔으니 무언가 꿍꿍이가 있는 것이 아닐까 싶었으리라.
혹은 귀족을 욕보였다고 꼬투리를 잡으려는, 단순하면서도 음습한 괴롭힘이었을 지도 모른다고도 했다.
제법 마음의 거리가 좁힌 뒤에 들을 수 있었던 말이다.
지금은 그들이 나를 존중하고, 또 진심으로 따르는 것이 느껴졌다.
본의 아니게 내 평판이 오르는 계기를 마련한 셈이나, 솔직히 내 평가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내 능력의 정도를 떠나 헬레나의 기둥서방이라는 말이 옳았기 때문이다.
어쨌든, 나는 다크엘프 용병을 끌어들인 당사자로서 제법 큰 책임을 다한 것 같아 내심 뿌듯해했다.
덕분에 그녀들이 만든 와인도 영지 곳곳에서 호평의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 아. 얼른 따뜻한 날씨가 되었으면……. ”
헬레나는 겨울의 새하얀 바람이 녹음 가득한 때로 바뀌기를 기대하듯 중얼거렸다.
6월이 되면 내 생일이고, 그 때에 맞춰 결혼을 할 생각에 몹시 들뜨는 듯 했다.
“ 그렇게 좋아? ”
“ 응. 좋아! 정식으로 내 남자라고 세상에 공표하는 일이잖아. 물론 지금도 그렇긴 한데, 결혼으로 맺어지는 건 경우가 다르니까. ”
“ 맞는 말이긴 해. ”
나는 따뜻하게 데운 허브티를 헬레나 앞으로 내밀며 고개를 끄덕였다.
결혼을 해도 문란하기 짝이 없는 생활이 계속되는 경우가 많아도, 엄연히 공식적인 과정을 거친 정식 부부가 되는 것이다.
그리 되면 신경 써야 할 일도 많고, 비록 속 빈 강정과 같은 꼴이라 해도 지켜야 될 선도 생긴다.
부부관계가 잘못되어 파탄난다 하더라도 상대가 잘못해야만 했다.
자신이 약점을 잡혀 빌미를 제공해서는 안 되었다.
우리는 인연이 인연인지라 별 탈은 없어 보였다.
그저 흔히 집안과 집안의 결합이라는 측면에서 독특한 결론을 냈을 뿐이다.
내가 알트람 자작의 아들이 아닌 단순한 지온으로서 이 공작가에 시집을 온다는 생각이었다.
그로 인해 나는 사실상 외인 취급을 받게 되었고, 체스는 알트람의 뒤를 잇기 위한 아이 만들기에 열을 올렸다.
그 탓에 나를 낳은 리나가 여러모로 고생하는 듯 했으나, 내 착각이었다.
그들은 애초부터 후계자 문제와 상관없이 사랑을 나누었고, 이번에는 피임을 하지 않는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그이? 오히려 더 열을 올리면서 좋아하더라.
알트람 저택에 들러 귀에 담은 리나의 그 짧은 증언에, 내 고개는 저절로 아래를 향할 수밖에 없었다.
알 것 다 아는 나이라며 그 노골적인 행위의 전말을 듣는 것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무엇보다, 나와 헬레나가 이미 관계를 가졌든지 아닌지를 두고 갑론을박을 나누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모를 때가 많았다고.
알트람의 아이를 낳아라!
나는 체스가 침대에 위에서 외쳤을 지도 모를 말을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나이가 지긋한 정도는 아니라 하더라도, 뭐라 표현하기 어려운 복잡한 감정이 고개를 삐죽 내밀었다.
좋은 게 좋다고는 하는데…….
“ 결혼식 준비는 미리미리 하는 게 좋겠지? ”
“ 아직 몇 달이나 남았는데, 걱정이 너무 빠른 거 아냐? ”
“ 으으응. 전혀. 전혀 안 빨라. 지금부터 반지는 어떻게 해야 할지, 아이는 몇 명이나 낳을지, 그 뒤에는 또 어떻게 할지도 생각해야 하고……. ”
헬레나는 몽롱한 눈빛으로 천장을 응시하며 아직 갈 길이 한참이나 먼 일을 떠올리고 있었다.
예식장이나 교회 같은 곳이 없어 연이 깊은 사람들에게 초대장이나 소식을 전해 집에서 치르는 것이 이곳의 결혼 풍습이나, 그걸 고려해 봐도 너무 빨랐다.
그래도 지금부터 차근히 준비해야 한다는 점에는 공감하는 바였다. 기둥서방으로서 할 일이 있었으니까.
“ 그럼, 나는 포도밭 쪽에 갔다 올게. ”
“ 또? ”
좋은 기분이 엉망이 되었다고 말하려는 듯, 헬레나의 뺨이 먹이를 쑤셔 넣은 햄스터마냥 빵빵하게 부풀었다.
하루에 한 번 정도는 건강을 확인할 겸 들르는 것이 내 일과이지만, 여전히 불만스러운 눈치였다.
나는 그럴 때 마다 헬레나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를 해 주어 기분을 풀어주고는 했다.
가볍게 입술을 쪼는 듯한… 아마도 버드 키스라고 불리는 종류의 행위였다.
“ 다녀올게. ”
“ 응……. 다녀오세요. ”
사람들은 헬레나를 존경하나 어려운 사람이기에 조심스럽게 접한다고는 하는데, 내게 있어서는 이만큼 쉬운 사람이 없었다.
몇 년에 걸친 조련의 성과가 빛을 발하는 덕일지도 모르겠다.
◎◎◎
“ 어서 와. ”
말을 몰아 포도밭에 이르자, 엘렌이 기다렸다는 듯 집에서 나와 반갑게 맞아주었다.
아마 멀리서부터 울려 퍼지는 말발굽 소리를 듣고 미리 알아챘음이 분명했다.
“ 네. 오늘도 별 일 없죠? ”
“ 덕분에. 그나저나, 옷 원단이나 실은 왜 사달라고 한 거야? 무슨 일 있어? ”
엘렌은 말에서 내린 나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제 그녀에게 따로 부탁해 실과 비단 등을 포함한 여러 원단을 이유 없이 사달라고 했으니 궁금할 만도 했으리라.
마침 오랫동안 신세도 져야 하기도 했으니, 지금이 말을 꺼내기에 딱 좋은 시기겠지.
“ 네, 드레스를 만들려고요. ”
“ 드레스…? 드레스도 만들 줄 알아? 귀족인데? ”
“ 저희 집안이 좀 독특해요. 아마 헬레나 님이 남성이었다면 드레스 대신 남성용 예복 만들기를 연습했겠죠. ”
애초에 헬레나가 남성이었다면 내가 이 대륙에 태어날 이유 자체가 없었겠지만, 그 점은 굳이 따지지 않고 넘어가기로 했다.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으며, 그럴 이유도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말을 꺼냈다 곤란하기만 할 것 같았다.
분명 귀족이 옷을 만든다는 것은 분명 이례적인 일이다.
온갖 수발을 들기 위해 귀족과는 연이 먼 교육을 하는 집안이 아니었다면, 드레스는커녕 구멍 난 양말조차 꿰매지 못했으리라.
그래도 뭐 어쩌겠는가.
그 이례적인 집안에서 태어나 인연에도 없던 가사를 전문직 수준으로 익히느라 긴 시간을 보내야 했고, 지금도 배우는 중인 것을.
“ 그래도… 네가 굳이 직접 만들 필요는 없지 않아? ”
우뚝. 나는 통나무집 안에 마련된 원단을 보러 가기 전, 엘렌의 질문에 발이 묶여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정말로 이해하지 못하겠는 듯한 목소리와, 왠지 모르겠지만 몹시 떨리는 눈동자를 외면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 없죠. 원하는 형태를 전문점에서 주문해 사들이면 그만이니까요. ”
“ 그런데 왜…? ”
“ 그냥 그러고 싶어서요. ”
거창한 이유도 없고, 단순히 내 취향대로 만든 옷을 헬레나가 입은 모습을 보고 싶을 뿐이었다.
청초함과 함께 색을 드러내며, 지금 당장이라도 욕구를 자극하여 먹어보고 싶게 만드는 그런 포장지를 만들고 싶었다.
예전이라면 못하겠지만 지금은 가능하다.
그럴 만한 능력이 있었기에, 마침 잘 되었다는 생각으로 가볍게 해 보는 일이었다.
현재 일이 바쁘지 않기에 가능한 취미 생활이었지만, 점점 일거리가 늘기 시작할 때를 대비해 지금부터 작업에 들어 갈 생각이었다.
“ 그래. 그렇구나. ”
엘렌은 어딘가 떨떠름한 그늘이 짙은 표정을 지으면서도 순순히 문을 열어주었다.
무언가 묻고 싶은 듯 입술을 달싹거렸으나, 끝내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그 탓에 나는 묘한 찝찝함을 느껴야 했으나, 그것도 잠시 뿐.
곧 나를 맞아주는 다른 다크엘프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며, 가벼운 분위기 속에서 몇 마디 주고받은 뒤 곧장 천을 쌓아 둔 구석자리로 향했다.
재단을 위한 네모난 테이블 하나와 옷을 걸어 둘 간소한 스탠드형 옷걸이 하나.
그리고 테이블에 놓인 천과 바느질 등, 재봉에 필요한 도구들이 각을 이루며 자리하는 것을 보았다.
나는 새삼 그들의 일처리에 감사를 표하며, 나중에 간소하게나마 보답하겠다는 생각과 함께 베이스가 될 천을 들어올렸다.
헬레나의 신체 사이즈는 매일같이 안아보기에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 큰 문제는 없을 듯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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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쟤 하나만 있으면 어디 가서도 굶어 죽지는 않겠다. 안 그래? ”
“ …응. 그러네. ”
깜짝 놀라게 만들어 주고 싶다는 이유로 굳이 다크엘프의 오두막에 들러 웨딩드레스 제작에 몰두한 지 며칠.
올리비아는 서서히 윤곽을 드러내는 드레스를 보며 부럽기 짝이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드레스를 자기 손으로 직접 만든다는 인간을 생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대륙에서 여성용의 드레스를 만드는 이는 필연적으로 여성이고, 그렇기에 남자가 드레스를 만들어 건네주는 경우는 거의 없다.
애초에 재봉사 자체가 대부분 섬세한 손재주를 가진 여성의 영역이기도 했지만, 어느 정도 신체 접촉도 필요한 일이었던 탓이다.
엘렌은 올리비아의 감탄에 적당히 맞장구를 쳐 주었지만, 저 기특한 광경마저 자신에게는 우울하기 짝이 없을 뿐이다.
이미 가혹한 현실에 고개 숙이고 살아온 지가 얼만데, 새삼스레 아이 때와 같은 감정을 느끼는 것 자체가 한심하기 짝이 없다고 생각했다.
다소 놀랍기는 하지만 거기서 그쳤어야 할 감정이 어두컴컴한 것으로 탈바꿈하기 시작한 탓이었다.
“ 왜 그래? 어디 안 좋은 데라도 있어? ”
“ 아니. 그런 거 아냐. 그냥 겨울이라서 그런가봐. ”
“ …진짜? ”
올리비아도, 그 외의 다크엘프도 누구보다 가까이서 엘렌을 지켜봐 온 여자들이다.
가족보다 더 가족 같은 연을 맺고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 이들이었다.
그렇기에 엘렌의 착 가라앉은 감정을 읽고 걱정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 진짜야. 별 일 없어. 너무 동화 같은 광경을 너무 많이 봐서 그런지 이게 현실인가 싶었을 뿐이야. ”
“ 하긴. 이야기가 아니고서야 누가 저런 짓을 하겠어? 그런데 그게 현실로 일어났네? 어이없을 만도 하지. ”
올리비아를 포함한 다크엘프 무리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으며 지온의 옆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귀족답지 않게 지지하는 교육을 주로 받는다는 이야기가 과장이 아니었음을 새삼 느끼고 있었다.
쑤신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심장이 쑤셨다.
엘렌은 여느 때보다 묵직해지고, 안개가 낀 듯 답답해진 가슴팍에 손을 얹으며 남자의 손끝을 지긋이 응시했다.
여느 재봉사들 못지않게 섬세함이 느껴지는 바느질과, 형태에서 느껴지는 애정은 보기만 해도 괴로울 지경이었다.
정말로 괜찮은 것일까.
올리비아는 엘렌을 몰래 곁눈질로 살피며 착 가라앉은 눈빛을 보였으나,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며 남은 무리들과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얼마 전 엘렌에게는 반쯤 장난으로 들이대보라니 뭐니 말은 꺼냈지만, 그것이 무척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그녀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주위의 환경이 좋아졌다고는 해도, 이미 닳을 대로 닳았기에 지레 포기하며 산 삶이니까.
그렇다면, 자격을 얻어 최소한 도전해 보기라도 할 기회를 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올리비아는 즐겁게 대화를 나누는 도중에도 오로지 그것만을 생각했다.
은인이자 머리가 풀죽어 있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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