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화 〉 사냥 #6
* * *
“ 생일이 지나면 열여섯이지? ”
늦은 밤. 한창 모닥불을 쐬던 중, 헬레나가 문득 내 나이를 물어왔다.
“ 그렇지. 그런데 그건 왜? ”
“ 결혼… 언제하나 싶어서. ”
나는 그에 답하듯 질문을 던졌고, 헬레나는 그 질문에 답했다.
결혼. 결혼이라. 언젠가 할 거라고 생각은 하고 있었고, 몇 번 정도 결혼 의사를 물어본 적도 있었다.
나는 그 때마다 나중에, 내 나이를 조금 더 채우면 하자며, 그렇게 답을 미루고 있었다.
열다섯, 혹은 그보다 어린 나이에 결혼에 이른다는 행위가 감각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생각과 현실의 괴리였다.
“ 그러고 보니, 헬레나도 곧 스물넷이었지? 미안. 너무 내 생각만 했나봐. ”
“ 아, 아냐! 지온이 미안해 할 건 하나도 없어! 그리고 내가 재촉한 거 같아서 더 미안해! 이를 어쩌지…! ”
어둡고 고요한 밤공기를 부수는 헬레나의 목소리가 숲을 타고 울렸다. 어두웠기에 땅을 울리듯 더욱 잘 들리는 소리, 안쓰러울 정도로 어수선한 몸짓이 환한 대낮같았다.
하늘을 어지러이 휘젓던 헬레나의 손이 나를 잡았다.
버려진, 혹은 막 버려지려는 것을 알아챈 강아지마냥 절절하기 짝이 없는 눈빛. 일자로 꾹 다문 채 파르르 떨리는 입술.
내 기분을 거스르게 하여 죄송스럽기 짝이 없다는 듯 푹 숙인 고개까지.
나는 삐친 여자를 달래주는 남자의 역할이 반대가 된 것 같아, 내심 코웃음이 나왔다.
어느 순간부터 TV를 잘 보지 않게 되었지만, 과거 내가 보았던 드라마의 여러 장면들이 떠올랐다.
다소 과장되었을 수도 있으나, 잿빛 화면 속에서 머무는 허상을 현실로 끌어올리는 그런 모습들 말이다.
“ 그러면, 내 열여섯 생일날에 결혼할래? ”
“ …어? ”
생각지도 못한 물음에 헬레나의 입이 헤 벌어졌다.
상상도 못한 사람에게 기습이라도 받은 것 마냥, 머리가 텅 비어버린 듯한 반응이었다.
힘이 탁 풀린 눈동자와 표정을 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어찌 보면 최면에라도 걸린 것 같았다.
“ 왜? 결혼하고 싶어 하는 것 아니었어? ”
나는 피식 웃으며 농담을 건네는 와중에도, 마음가짐을 새로이 가다듬었다.
일 뿐이 아니라 감정적으로도 자신 있게 소중하다 말할 수 있는 여자가 되었지만, 그래도 내가 해야 할 일이 변하는 것은 아니었다.
헬레나가 미치지 않도록 막고, 다른 요소들의 위험성 또한 잠재우는 것. 그것이 내가 할 일이었다.
그저 어린 나이에 결혼하는 것이 꺼림칙하다 생각하여 미루었으나, 생각해보면 헬레나의 나이가 벌써 스물셋이다.
현대라면 서른이 넘는다 한들 그래서 뭐? 라는 정도로 넘길 만큼 젊었으나, 이곳은 아니다.
평균 결혼연령이 18임을 생각해 보면, 혼기가 제법 많이 지나나버린 나이가 바로 스물 셋이었다.
그럼에도 주위에서 별 말이 없었던 건, 나와 헬레나가 약혼 관계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주위에서 보기엔 깨질 일이 없어, 거의 결혼과도 같아 보일 만큼 확실한 약혼 관계였다.
그래서 이스를 포함한 어른들도 별 말 없이 때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 하, 하고 싶어! 아니, 하게 해 주세요…! ”
헬레나는 주인으로서가 아닌 종속적인 입장으로서 내 팔을 붙잡고 매달렸다.
우리의 관계에서 평소 주도권을 행사하는 것이 누구라고 딱 잘라 말하기는 미묘하지만, 마음만 먹으면 내가 주도할 수 있다고는 생각했다.
지금 당장 내게 말을 높이며 매달리는 모습이 그 증거이기도 했다.
가죽 갑옷 너머로도 팔과 상체를 압박하는 따듯한 살결과 온기가 느껴지는 것 같은 착각을 느끼며, 나는 헬레나의 턱을 부드럽게 쓸었다.
모두가 잠들어, 단 둘만이 남은 상황이기에 가능한 행위였다.
만약 누군가가 깨어 있었다면 결코 이러지 않았을 것 같다.
“ 좋아. 그러면 올해 생일에는 헬레나를 선물로 받겠네. ”
“ 아, 지온…! ”
헬레나는 내 이름을 부르며 몽롱한 시선을 보였다.
어딘가 먼 곳을 보는 듯한, 혹은 꿈에 젖어 헤어 나오지 못하는 듯 했다.
그만큼 헬레나에게 있어 결혼이라는 단어가 감미로운 것이리라.
여자 하나 잘 낚아서 팔자 핀, 혹은 그를 기반으로 권력을 휘둘러보고 싶은 욕심 그득한 놈.
누군가 지금의 나를 본다면 그렇게 평가할 지도 모르겠으나, 그 평가를 완전히 부정할 수만은 없어 보였다.
“ 사랑해. 그 누구보다……. ”
헬레나는 부모가 들으면 섭섭함에 몸서리칠 말을 서슴없이 늘어놓으며 내 품에 안겼다.
진짜 질 나쁜 제비가 된 것 같아 양심이 아플 지경이었다.
지금까지 비슷한 행위를 해 왔다고는 해도, 뭐라 말하기가 참…….
◎◎◎
세상에.
나는 난생 처음으로 보는 몬스터에 입을 쩍 벌렸다.
멘탈이 흔들릴 정도는 아니더라도, 그에 한없이 가까울 만큼 놀라고 있었다.
매직 아이템을 보고도 적당히 놀랍다고 생각했었는데, 저 멀리서 어슬렁거리는 몬스터는 그 생동감이 남달랐다.
그야말로 판타지를 판타지답게 만드는 존재였다.
“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것이 오크라더니……. ”
돼지머리에 녹색 피부. 큰 체구. 그야말로 전형적인 오크라 할 수 있을 괴물이 무리를 이루어 서성이고 있었다.
무엇을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내 눈에는 마치 사냥을 하러 나서는 것처럼 보였다.
놈들의 손에 들린 조잡한 나무 몽둥이 등의 병장기나, 말이 통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흉흉함을 보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보면 엘프와 오크, 여기사와 오크도 나름대로 국룰 조합이었던 것 같은데.
“ 말씀하신 대로요. 번식력이 가장 좋아 쉽게 접할 수 있는 부류들이지. 주로 셋에서 다섯이 한 조를 이루는, 제법 골칫거리요. ”
“ 조를 이루고 있으니 보통 사냥 법으로는 어림도 없겠네요. ”
“ 그렇소. 규모가 큰 군이 들어온다면 보통 사냥을 하듯 여럿이서 한 놈을 칠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한 마리를 한 사람이 상대해야 할 경우가 많소. ”
엘렌은 눈이 소복히 쌓인 나무 그늘 아래 엎드린 채 활에 시위를 겨누었다.
날카롭게 다듬어진 눈빛은 오크를 꿰뚫어버릴 듯 강렬했고, 화살에 거센 바람이 깃들기 시작했다.
마치 먼 거리에서 오랜 시간을 잠복하는 저격수 같아 보였다.
또, 저격수는 비단 그녀 한 명만이 아니었다.
모든 다크엘프가 엘렌과 같이 엎드린 자세로 화살을 당기고 있었다.
활을 가로로 놓은 것도 그렇고 무척 불편해 보이는 자세였으나, 이들은 사격의 명수이기에 목표를 크게 헛돌 것 같지는 않았다.
나와 헬레나는 사냥의 주축인 용병단을 지키는, 일종의 호위 역할이다.
엘렌의 용병단 중에서 자기 몸 하나 건수 못할 정도로 어설픈 사람은 없으나, 그들은 지금 저격이라는 한 역할에 집중하고 있는 상태다.
그로 인해 평시보다 주의를 기울이는 방법이 달랐으니, 그 틈을 찔리지 않기 위한 조치였다.
무엇보다, 저격을 축으로 삼은 이상 굳이 근접전을 펼칠 이유가 없었다. 역할 배분이 이렇게 된 것도 그래서였고.
“ 자, 그럼… 쏴. ”
엘렌은 짧은 한 마디와 함께 시위를 놓았다.
그 모습은 현악기의 현을 튕기는 것 같이 경쾌했으나 확실한 힘이 깃들어 있었다.
활의 각도나 화살의 세기를 조정해 오크의 목줄기, 혹은 머리통을 확실히 꿰뚫기 위한 힘이었다.
다른 다크엘프 무리도 기다렸다는 듯 화살을 쏘았다.
그로 인해 총 여섯의 화살이 오크 세 마리를 꿰뚫기 위해 허공을 달렸다.
오크의 수는 총 다섯이나 세 마리를 확실히 처리하기 위해 둘이서 오크 하나를 노린 결과였다.
─쿠어어…!
콱, 하고 뼈와 근육이 뚫리는 소리에 이어 성대를 긁는 듯한 굵직한 비명이 울렸다.
사냥감을 향해 달리던 중, 난데없이 날아든 화살에 목과 머리가 꿰뚫려버려 절명한 탓이었다.
그것도 바람의 정령의 힘을 빌은 화살이었기에, 무척 시원스러운 구멍이 뚫린 채.
“ 눈치 챘나 보네요. 그래도 바로 들어오지 못하는 걸 보면……. ”
“ 화살이 어디서 날아왔는지를 곧장 알아채지 못하는 건 당연하오. 사람이라고 해도 그렇지 않소. ”
엘렌은 내 물음에 대수롭지 않게 답하며, 곧장 등에 멘 화살통에서 화살 하나를 꺼내 시위에 걸었다.
누운 자세이기에 몹시 불편해 보였으나, 동작 하나하나가 신속하기 짝이 없었다.
“ 쏴. ”
재빨리 다음 화살을 장전한 뒤 망설임 없이 쏘아냈다.
무리 중 셋이 죽었기에 오크들의 경계심이 극에 달한 듯 이빨을 갈며 주위를 두리번거렸으나, 유감스럽게도 화살이 닿는 속도가 훨씬 더 빨랐다.
조금 더 빨리 눈치 챘다면, 이라는 가정은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이미 허공을 찢으며 날아간 화살에 숨통이 끊어져 두 번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간 상태이기에.
“ 이제 진짜 일을 할 시간이네요. ”
헬레나는 곁눈질로 뒤를 돌아보며 한숨 쉬었다.
사냥은 쉽게 할 수 있지만, 그 소체를 옮기는 일이 문제였기 때문이다.
인벤토리나 아공간이라도 있으면 좋겠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런 편리한 기능은 없었다.
짐을 옮길 때 유용한 마법도 없었다. 오로지 육체로만 해결을 봐야 했다.
나와 헬레나는 주위를 둘러 본 뒤 곧장 오크들의 시체가 늘어진 땅으로 달려갔다.
그녀들이 사냥을 했으니 옮기는 것은 우리가 해야 했다. 또, 조금 전과 반대로 우리를 호위하기도 했다.
“ 짐마차의 힘으로 봐서는 기껏해야 두 마리 정도가 한계일 거요. ”
“ 그럴 것 같네요. 나머지는 어떻게 할까요? ”
“ 다른 몬스터가 잡아먹게 놔두는 수밖에 없겠소. 아, 피 정도는 받아갈 만 하겠군. 오크의 피는 고급 정력제의 재료가 된다니까. ”
정력제라.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낯이 화끈거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으나, 뺨을 만져보니 여전히 차가웠다.
추위 때문에 달아올랐을지언정 부끄러움으로 달아오른 것은 아니었다. 이미 그럴 때가 한참 지났으니까.
다만, 헬레나는 그렇지 않다는 듯 오크와 나를 번갈아보며 얼굴을 붉혔다.
커다란 덩치를 쌀가마니 대하듯 가볍게 짊어지고 가면서 보이는 모습이기에 심한 괴리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정력제라. 남자로서 정력에 욕심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굳이 필요한가 싶기도 했다.
나중에 필요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젊음이라는 무엇보다 좋은 정력제를 몸에 품고 있었기에.
“ 후우…! ”
털썩!
나는 오크의 시체를 짐마차에 옮겨 실은 뒤 한숨을 토해냈다.
통나무보다 묵직함이 덜해 옮기는 건 가능했지만, 그럼에도 큰 덩치에 맞는 무게 때문에 제법 힘이 들었다.
반대로, 헬레나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평온하기 짝이 없는 기색으로 시체를 사뿐히 내려놓았다.
소드마스터와 육체적인 능력을 견주는 것 자체가 바보 같은 짓임을 알지만 자존심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겉보기엔 가냘프기 짝이 없었으니까.
“ 추운 겨울이니 하루 이틀 정도로 시체가 썩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최대한 빨리 처분하는 것이 좋겠죠. ”
“ 음. 사냥을 끝낸 뒤엔 이곳의 장인에게 넘기는 것이 좋겠소. ”
몬스터를 통해 돈을 벌고자 하는 것이 아니니만큼 아깝다는 생각은 적었다.
다크엘프가 무척 쉽게 사냥하는 것처럼 보이는 탓에 오크가 만만한가 싶은 착각을 하기 쉽지만, 현실은 결코 그렇지 않았다.
오크는 덩치에 맞게 강했고, 앞서 말했듯 무리를 지어 다니는 만큼 까다롭다.
단지, 나를 제외한 이곳 여자들의 능력이 너무 비범했기에 평범한 들짐승 사냥처럼 보일 뿐이었다.
“ 아. 피를 뽑을 줄 알았다면 진즉 도구를 챙겨올 걸 그랬습니다. 죄송합니다. ”
나는 준비가 미흡했던 점을 사과하며 고개를 숙였다.
단순히 사냥으로 끝날 줄 알았으나 알뜰하게 피를 뽑는다는 생각을 떠올리지 못했기에 저지른 실수였다.
사소하다면 사소하고, 크다면 큰 실수였다.
“ 죄송할 게 뭐가 있나요. 어차피 오늘 떠날 일도 아니고, 돌아가면 적당히 도구를 사서 오면 그만인 것을요. ”
“ 그렇소. 너무 개의치 마시오. 몬스터를 접해보지 않은데다, 첫 사냥이지 않소. 안전하게 돌아가기만 해도 충분한 성공이오. ”
헬레나와 엘렌이 기다렸다는 듯 내 손을 잡으며 위로의 말을 건넸다.
거기까지는 충분히 예상할 법 했으나, 엘렌이 아쉽다는 기색을 보이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눈꼬리까지 축 쳐져 있어 제법 실망한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
─야! 뒤! 뒤 좀 지켜! 흥분해서 나서지 좀 말고!
어색한 분위기가 감돌기 시작할 즈음, 귓가에 떠들썩한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인근에서 몬스터 사냥에 몰두하고 있을 다른 인간들임이 분명했다.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마침 잘 되었다는 생각에 손뼉을 탁 치며 입을 열었다.
돈을 벌어들이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기에 가능한 생각이었다.
“ 이 오크의 사체 말입니다, 저쪽에 넘기는 건 어떨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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