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화 〉 사냥 #5
* * *
“ 그렇군요. 주 목적은 사냥이고, 제게 인사를 하러 들렀을 뿐이다……. ”
구태여 격식을 갖춰 얼굴을 마주할 것도 아니거니와, 백작의 신세를 질 생각도 없었다.
그저 예의상 얼굴 한 번 정도는 비추어 무시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주려는 것뿐이었다.
변경백은 헬레나의 그 의도를 아는지 모르는 지, 여전히 앞마당에 선 채로 턱을 쓰다듬었다.
“ 하긴, 내가 공작의 의중을 헤아린다 한들 무슨 소용이겠소. 어쨌든 이름 높은 마스터께서 힘을 빌려 주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환영할 만한 일이지. 얼마나 오랜 시간 머무르실지 모르겠지만, 잘 부탁드립니다. ”
“ 네, 감사합니다. ”
두 귀족은 가볍게 손을 잡아 인사를 끝낸 뒤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백작은 저택으로, 우리는 전선기지가 마련되어 있을 서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몬스터는 사람과 비슷하게 따뜻한 날씨에 활발하게 움직이나, 그 때는 사람이 바쁜 시기다.
기초중의 기초인 농사일을 시작으로 참 분주한 것이다.
그러니 사람이 비교적 한가로운 시기인 이런 겨울날에 적극적으로 사냥을 나서게 되었다고.
“ 요즘 들어 신기한 일이 참 많은 것 같소. 우리를 보고 인상 하나 찌푸리지 않는 인간을 또 보게 될 줄이야. ”
엘렌은 백작의 얼굴을 떠올리듯 시선을 하늘로 두며 입을 열었다.
그녀의 입장에서 보면 신기할 만도 했다.
혐오감을 대놓고 드러내지 않는 것만으로도 진귀했을 테니.
“ 땅 자체의 조건은 나쁘지 않지만, 이곳은 몬스터와 늘 경계를 마주한다는 의미에서 척박한 땅입니다. 그런 곳이니 쓸모가 있다면 무엇이라도 쓴다는, 그런 풍조가 떠돌게 된 것이겠지요. ”
“ 음. 확실히 듣고 보니 그런 것 같소. 다른 영지보다 시선의 농도가 낮은 것을 보아도……. ”
엘렌이 말하는 시선의 농도는 곧 혐오의 농도다.
물론 혐오 자체가 아예 없다고는 입이 찢어져도 말 못하지만, 그 정도가 다른 영지에 비해 훨씬 낫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말 그대로 척박한 땅에서 살아남고, 또 살아가는 이들이기에 갖는 실용주의적 사상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다.
내 생각이지만, 아마 이들이 궁지에 몰리면 변소의 똥이라도 퍼서 던져대지 않을까 생각했다. 눈이나 코를 가리거나, 고약한 냄새로 괴롭게 만들 수도 있을 테니까.
“ 아 참. 공작께서는 전선기지에 도착하면 어찌하실 생각이시오? 그들에게 돈을 주고 울타리 안에 자리를 잡으실 요량이시오? ”
“ 아뇨. 다소 불편하더라도 울타리에서 떨어져 있을 생각입니다. 현 상황의 개선을 위해 명성이 필요하기는 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굳이 가시밭과 같은 시선 속에 머무르는 게 내키질 않네요. ”
다크엘프에게 쏟아지는 시선의 방향을 바꾸고자 온 것은 맞으나,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일은 아니다.
또한 성과를 거둘 수 있을 지도 알 수 없다.
그저, 안전한 울타리 속에서 머무르게 되면 따가운 시선을 받아야 할지도 모른다.
헬레나가 말한 대로 굳이 스트레스를 받아야 할 필요는 없다.
되면 좋고 안 되면 할 수 없으니, 그 과정에서 피할 수 있는 것은 피하는 것이 좋았다.
아무리 익숙한 시선이라 하더라도 거슬리는 것은 어쩔 수 없을 테니.
“ 배려해 줘서 고맙소. ”
“ 성질은 다르지만, 저곳도 전쟁터입니다. 전쟁터에서는 어쩔 수 없이 신경이 곤두설 테니, 하다못해 그런 면에서 피곤할 일은 없었으면 해요. ”
엘렌은 무언가를 털어버리듯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피식 웃었다.
공작의 몸이면서 제법 배려가 깊은 헬레나의 말에 감동한 눈치였다.
그것은 비단 다른 다크엘프도 다르지 않다는 듯 존경스러운 시선을 보냈다.
“ 헬레나 크라우저입니다. 사냥을 위해 나가려고 왔어요. ”
성벽 위에서 보초를 서는 병사들. 그리고 굳게 걸린 성문을 지키는 위병까지.
문을 나가면 바로 숲이 보이는 최전선이라 그런지 여느 곳보다 그 군기가 남달라 보였다.
우리가 처음 발 들인 동문 또한 군기가 잘 잡혀 있기는 했으나, 이곳 서문과 확연히 비견될 정도였다.
“ 소식은 이미 전해 들었습니다. 환영합니다. ”
위병은 절도 있게 군례를 올린 뒤, 곧장 옆에 있던 책상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헬레나 앞으로 내밀었다.
무언가 싶어 살짝 시선을 돌려보니, 간단한 내용이 적혀 있는 일종의 계약서였다.
“ 혹여나 모르실 것을 위해 한 번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이곳 서문을 나서면 얼마 지나지 않아 저희 영주님께서 마련하신 전선기지가 있습니다. 소정의 돈을 지불하시면 그곳에 별도로 마련된 터에서 머무르실 수 있으시지만, 저희 측에서 물자를 지원하지는 않습니다. 천막을 비롯한 야영 장비는 전부 본인의 손으로 준비하셔야 하며, 저희가 해 드릴 수 있는 건 위급상황의 전달이나 보초뿐입니다. ”
영지 군사들의 입장에서는 어차피 보초를 번갈아 설 수 밖에 없는 상황이나, 영지병이 아닌 이들이 끼어들면 상황이 다소 달라진다.
순서를 정해 당연히 서야 할 불침번이 필요가 없어지며, 모두가 안전하게 쉴 수 있을 환경이 마련되는 셈이다.
난리가 나도 가장 외측에서 난리가 나기 시작하고, 안쪽에 위치한 이들은 그 소란을 듣고 상황을 파악할 수 있다.
다소 나쁘게 말한다면 이곳 변경백령의 군사들을 고기방패로 삼아 탈출이나 반격의 발판을 마련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돈을 지불하고 그곳에서 머무르는 이들도 있었다.
번을 대신 서 주는 누군가가 있는 것만으로도 정신적 피로도가 훨씬 줄어들기에, 제법 애용하는 비율이 높다고.
그러고 보면이런 식으로 벌어들이는 돈이 제법 짭짤하다고 하던데…….
변경백도 의외로 장사 수완이 제법 있나보다.
“ 그리고, 저희 쪽에서 머무르지 않고 독자적으로 행동하시는 것도 괜찮습니다. 다만, 그 경우에는 저희가 그 어떤 책임도 지지 않습니다. 공작님을 포함해, 그 누구라도 예외는 없습니다. 그러기 위해 이러한 계약서를 발부하고 있습니다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
“ 물론, 저희는 따로 행동하겠습니다. ”
“ 알겠습니다. 그러시다면 여기에 서명을……. ”
헬레나는 위병이 내미는 계약서에 거침없이 서명을 마쳤다.
사인 정도는 위조할 수도 있을 법 했으나 바늘 같은 것으로 손가락을 찔러, 피가 한 방울 새어나오는 손가락을 사인 옆에 찍도록 했다.
일종의 지장인 셈이었다.
어찌 보면 귀족에게 상처를 내는 행위가 다소 무례할 법도 했으나, 귀족이 직접 몬스터 사냥을 하러 계약서를 작성하는 일 자체가 거의 없다고 봐야했다.
그러니 계약 절차에 변화를 줄 필요도 없었겠지.
“ 이것으로 계약서 작성은 끝났습니다. 협력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 경비에 힘쓰느라 수고가 많으시네요. 그럼, 저도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
문을 열어주는 위병의 인사를 받으며, 우리는 곧장 밖으로 나섰다.
눈앞에 펼쳐지는 광활한 숲이 압도적이었으며, 그것을 마주하고 선 진지도 제법 규모가 컸다.
진지는 숲의 일부를 개간하여 만든 듯한 평지에 세워져 있었다.
구멍이 뻥 뚫린 것 같은 느낌도 그렇고, 후방을 제외한 전방과 옆면이 나무로 휩싸인 풍경이 그런 생각을 갖게 했다.
“ 우리도 텐트를 세워야겠죠. 어디쯤에 세워 둘까요? ”
“ 너무 깊어도 안 좋지만, 너무 얕아도 별로겠지요. 엘렌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무를 베며 적당히 들어가도록 할까요? ”
“ 알겠소. 그리고, 우리는 나무를 벤다 하여도 크게 개의치 않소. 살아온 환경이 환경이다 보니,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말씀을 주시오. ”
“ 감사합니다. ”
엘렌은 헬레나의 배려에 감사함을 드러내려는 듯, 가장 먼저 솔선하여 정령마법을 펼쳤다.
마법의 종류는 바람을 이용한 것으로, 날카로운 바람의 칼날을 날려 나무를 베며 전진하려는 생각이었다.
쿵! 하고 요란한 소리를 내며 몇몇 나무들이 쓰러져갔다.
마치 대규모 개간이라도 하는 것 마냥 요란하기 짝이 없는 작업처럼 보였으나, 서로가 역할을 분담하여 움직이는 모습이 참 인상적이었다.
적당한 곳을 찾고 그 주위의 나무만 베어도 괜찮을 것이라 착각한 적도 있었다.
물론 몬스터의 사체를 운반하기 위한 길 닦기이자 퇴로를 넓게 확보하려는 것을 몰랐다면앞으로도 계속 착각했을 지도 모른다.
“ 하아…! ”
나는 다크엘프들과 함께 베어낸 나무를 한쪽에 밀어두며 달뜬 숨을 토해냈다.
마나를 알기 전의 나였다면 하나조차 제대로 옮기지 못해 끙끙댔을 테지만, 참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 이쪽 공간은 제법 넓군. 텐트 몇 개 정도는 충분히 치고도 남겠어. ”
“ 알겠습니다. ”
나는 야영 장비를 들고 곧장 그들이 봐 둔 터로 달려갔다.
미리 마법으로 청소를 끝내 둔 곳이었기에 걸리적거리는 것도 없었고, 텐트를 치기에도 최적의 장소가 아닐 수 없었다.
근처의 나무 밑동은 테이블 대신으로 써도 될 것 같았고, 나무를 베어내며 얻은 땔감도 충분했다.
“ 일단 터는 마련한 셈이로군. 곧바로 사냥하러 나갈 텐가? ”
텐트에 짐을 내려놓기 무섭게 엘렌의 질문이 날아들었다.
약간 지친 기색이 엿보이지만 활동에 지장이 있을 정도는 아닌 듯 싶었다.
무엇보다, 본인을 포함한 다크엘프 전체가 의욕에 넘치고 있었다.
“ 아니요. 날도 슬슬 저물어 가니, 오늘은 이쯤에서 쉬도록 하죠. ”
“ 아. 그러고 보니 벌써 노을이 저렇게……. ”
일을 하다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는 듯, 하늘을 올려다 본 엘렌이 멍한 소리를 냈다.
어느 새 새빨간 석양이 선 너머로 점점 사라지기 시작하며, 하늘에 뜬 달이 안개 같은 하늘에서 벗어나 윤곽을 드러내는 시간이었다.
그러다, 고개를 끄덕이며 헬레나의 의견에 손을 들어 주었다.
“ 공작께서 말씀하신 대로요. 오늘은 쉬는 게 좋겠군. ”
◎◎◎
해가 저물었기에 느껴지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공기가 무척 부산스럽다.
저 멀리서 어렴풋이 들려오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무척 작게 들려왔음에도 그랬다.
아마 사람들의 목소리 때문이 아니라, 이 숲의 분위기가 확연히 바뀌었음을 알 수 있었다.
단순히 날이 춥기 때문만은 아니다.
밤이 되어서 그런지 몬스터의 흉흉한 시선이 우리를 핥고 지나는 것만 같았다.
분명 깊이로 따지면 입구 근처의 초입에 지나지 않을 텐데, 벌써부터 짐승의 아가리 안에 들어온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것은 나뿐만이 아니라는 듯, 다른 여자들도 충분히 주위를 경계하는 기색이었다.
나와 어깨를 나란히 붙이고 있는 헬레나도 당장 검을 쥘 수 있을 자세를 취했고, 겉으로 보기엔 평범하게 수다나 떠는 다크엘프들 마저도 예리한 안광으로 주변을 살피기 바빴다.
“ 여느 전장 못지않은 살벌한 분위기로군. 이런 곳에서 넋 놓고 잠들었다간 단숨에 송장이 되기 쉽겠어. ”
엘렌은 정령마법으로 만들어 낸 물방울을 꿀꺽 삼키며 착 가라앉은 목소리를 냈다.
한쪽 구석에 모아 둔 땔감에 불을 피우는 것도 그렇고, 전투 뿐 아니라 생활면에서도 여러모로 참 유용했다.
“ 그렇지요. 마침 말이 나왔으니, 지금 불침번을 정해보는 건 어떨까요? 물론 저와 지온은 한 사람으로 취급해 주세요. ”
“ …아, 으음. 그렇게 하겠소. 그러면 순서를……. ”
헬레나는 이 와중에도 사리사욕을 적극적으로 들이대며 불침번에 영향을 미쳤다.
그로 인해 우리는 불침번 중에서도 가장 꿀이라고 할 수 있는 초번이 되었다.
아무래도 귀족의 특권이 힘을 발휘한 듯싶지만, 이 순간만큼은 순순히 기뻐할 수밖에 없었다.
“ 정말 괜찮으시겠소? 아무리 그래도 불침번까지 부담하게 하는 건 미안하니, 지금이라도 편히 쉬시는 것이……. ”
“ 괜찮습니다. 거기다 가장 부담이 적은 초번이잖아요. 또, 이런 살벌한 곳에서 신분 여부를 따지기도 답답하고요. ”
당연하다는 듯 웃으며 말하는 헬레나의 의견엔 일리가 있었다.
괜히 귀족이랍시고 고개를 뻣뻣이 하고 다닐 만큼 어수룩한 환경도 아닌데다, 그랬다간 칼빵 맞고 골로 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권위는 어깨를 무겁게 짓누를 정도로 무게가 있는 것 같으면서도, 때에 따라 깃털마냥 가벼운 것처럼 보였으니까.
“ 그렇구려. 공작의 호의와 생각에는 참으로 감탄을 금치 못하겠소. ”
“ 부끄럽습니다. 감탄하실 것 까지는 아니니까요. 아무튼, 때가 되면 들어가서 주무세요. 때가 되면 깨워 드릴 테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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