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화 〉 사냥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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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테르 왕국은, 아니 소테르 왕국이 아니더라도 국경을 지키는 이들이 존재한다.
때로는 같은 인간으로부터, 때로는 다른 괴물로부터 각자 할 일을 충실히 수행하는 것이 현 상황이다.
그 중에서도 몬스터들이 득실대는 거대한 숲과 산은 늘 위협적이었다.
상시 전쟁을 준비하며 창칼을 세우고, 군율을 정비하며 신경을 날카롭게 다듬는 군세를 마주하는 것과 같았다.
몬스터들은 각자만의 생태계를 이루고 산다고 하나 언제 엉뚱한 곳으로 튀어 위협이 될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러니 필연적으로 경계의 끈을 조이는 수밖에.
괴물은 인간을 기다리지 않는다. 또한 그 생각을 읽을 수도 없다.
생각이라는 것이 있기는 하겠으나 반쯤 짐승 같은 존재이기에 본능에 따르는 측면이 더욱 컸다.
“ 엘렌은 리슬링 변경백령에 가 본 적이 있나요? ”
“ 음. 없는 것은 아니나, 사실상 안 가보았다고 해도 될지 모르오. 몬스터 사냥을 주 과제로 삼으며 스스로 해결하는 이들이니, 굳이 용병을 불러 의뢰를 맡기진 않았으니까. 다만, 그렇다고 해서 용병 자체가 없는 것은 아니오. 용병이 가는 곳은 비단 인간만의 전쟁터가 아니며, 오히려 몬스터 사냥만을 업으로 삼는 이들도 있으니까. ”
헬레나는 짐마차 옆에서 말을 모는 엘렌과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나는 가만히 귀를 기울일 뿐 한 마디도 거들지 않았다.
굳이 대화에 끼어들 필요도 없었거니와, 분위기 또한 충분히 온화했기 때문이었다.
전투 용병이라.
내 입장에서 보면 용병이란 주로 전쟁터에서 뛰는 이들을 의미했으나, 생각해보면 몬스터 사냥만을 업으로 삼는 이들도 제법 많았다.
장비와 실력이 받쳐주어야 처음으로 가능하다는 점에서 그 시작선 무척 멀어 보이나, 한 번 성과를 거두기 시작하면 맛 들린다는 말도 충분히 이해가 갔다.
모든 몬스터의 소재가 비싸지는 않더라도, 돈이 된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러니 몬스터를 사냥하고 실력과 장비를 키워, 더 강한 몬스터를 잡으려 애쓰는 이들이 많았다.
그 과정에서 죽어나가거나 불구가 되는 경우도 빈번했다.
“ 사냥만을 업으로 삼으면 대인전 기술은 어떤가요? ”
“ 제법 오래 몸 담은 이들이라면 당연히 좋은 기술을 갖고 있지. 시비가 붙을 것을 염려하는 것 같소만, 결론만을 말하자면 크게 문제 될 것은 없다고 보오. 이쪽 업계는 체계적인 육성 과정도 없어, 오로지 본인의 경험과 재주로만 강해져야 하는 곳이기 때문이오. ”
“ 하긴,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기술 전수나 육성 등에는 무척 빡빡한 곳이라고요. ”
그럴 수도 있지. 나는 내심 고개를 끄덕이며 용병 생태계의 냉랭함을 이해했다.
그들에게 있어서 실력이란 곧 돈줄이자 명줄이오, 더 나아가서는 이름의 값어치를 올리는 홍보탑의 효과도 있었다.
그런 기술을 남에게 가르쳐 준다? 아까워서라도 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특히 거칠고 자기중심적인 이들이 많은 용병업계이니 두말할 것도 없을 정도겠지.
“ 그렇소. 그러니 자기가 목숨 걸어가며 배운 기술을 함부로 전하지 않는 것이 당연하오. 개중에는 사장하기 아까운 기술도 몇몇 있어 보였는데, 자기가 쓸 수 없다면 그냥 묻어가는 것이 훨씬 낫다고 했을 정도니까. ”
“ 그것이 용병의 욕심이라는 건가요. ”
“ 욕심일 수도 있겠지만, 당연하다고도 볼 수 있지 않겠소? 자기가 아닌 누군가가 잘되는 꼴을 못 보는 건 인간의 생태니까. ”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물론 이 세계에 그런 속담은 없으나, 그와 비슷한 뉘앙스의 구절은 대륙 곳곳에 널리 알려져 있을 정도였다.
헬레나 또한 그러한 세태를 상징하는 격언을 듣고 자랐으니, 반발하는 기색 하나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을 표했다.
공작의 딸로 태어나 질투에 번뜩이는 시선 속에서 커 왔으니까.
그저 보통 사람과의 격차가 너무 커 구름 위의 존재가 되었기에 많이 줄었을 뿐, 지금도 질투 어린 시선을 받곤 했다.
동화에나 나올 법한 완벽한 환경에, 인간 자체로도 거의 완벽에 가까운 탓이다.
내게 집착하는 점이 그 모든 장점을 깎아먹을 정도였을 뿐이지.
“ 헬레나 님. 오늘은 이쯤에서 숙소를 잡는 것이 좋겠습니다. ”
나는 서서히 붉은 빛으로 물드는 오후의 해를 바라보며 소리를 냈다.
눈앞에 보이는 영지를 두고 굳이 야영을 하는 수고를 들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 그럴까요?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
“ 저희도 좋습니다. 어차피 하루아침에 갈 길도 아니니, 벌써부터 서둘러 몸을 축낼 필요도 없겠지요. ”
“ 그럼 오늘은 여기서 쉬기로 하고… 지온. ”
헬레나는 대뜸 내 이름을 부르며 귓가에 입술을 가져다댔다.
짐마차의 좌석에 나란히 앉아 있어 고개를 살짝 기울이는 것만으로도 거리를 좁힐 수 있었다.
“ 예. 무슨 일이십니까? ”
“ 내가 공작이라는 게 알려지면 괜히 시끄러워 질 것 같으니까, 지온이 대신 신분증명을 해 줬으면 좋겠어. ”
“ 괜찮습니다만… 검문을 하는 위병에겐 뭐라고 하실 생각입니까? ”
나는 굳이 귓속말로 이야기할 필요가 있나 싶어 내심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직 성문과의 거리도 있어 목소리를 낮출 필요가 없기도 했다. 그러니 의문을 품는 것이 당연했다.
“ 지온의 호위기사라고 하지 뭐. 솔직히 엘렌의 용병단 하나만으로도 무난하게 지나갈 것 같은데, 혹시 모르니까. ”
“ 알겠습니다. ”
“ 참. 그리고 이건 내 개인적인 부탁인데… 좀 거칠고 오만해 보이는 척 연기하면 안 될까? ”
거칠고 오만하게라. 적당히 귀족이나 그에 상응하는 신분을 가진, 혹은 재력을 가진 인간처럼 행동하라는 뜻이겠지.
그 점은 충분히 이해가 갔지만, 왜 그래야 하는지가 문제였다.
그래서 그 이유에 관해 물었더니, 헬레나가 얼굴을 붉히며 낸 대답이 참 가관이었다.
“ 그냥… 밖에서도 지온에게 지배되고 싶어서 그래. 안 될까? ”
혹여 피학적 취미라도 갖게 된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어처구니없는 답이었다.
알기 쉽게 나쁜 남자에게 이리저리 휘둘리고 싶다는 이야기인데, 대체 언제부터일까.
그 시작이 감도 오지 않을 만큼 깊은 어둠을 맛본 기분이었다.
“ …그러죠. ”
그래. 내 입장에서도 아예 못 받아들일 제안은 아니었고, 내가 정말 싫다고 하면 당장이라도 내뱉은 말을 취소할 수도 있었다. 그러니 내가 헬레나의 부탁을 받아들인 이유가 압박감에 눌려서가 아니라, 단순히 괜찮을지도 모른다는 낙관적인 생각과 약간의 호기심 때문이었다.
“ 엘렌. 변경백령에 도착하기 전 까지, 헬레나 님에게 예의를 갖추지 말아주십시오. ”
헬레나의 부탁을 받아들인 이상 엘렌 또한 알아야 할 터.
그렇기에 헬레나를 떼어낸 뒤, 곧장 엘렌에게 말을 걸어 간단하게 부탁을 했다.
헬레나를 그들과 같은 용병이나 자유기사처럼 취급해 달라고.
“ 저…? 대뜸 그게 무슨 소리요? 도저히 이해가 안 가오만……. ”
“ 저도 이해가 안 가지만, 헬레나 님께서 부탁하신 일입니다. 아마 공작이라는 신분으로 지나치게 눈에 띄는 걸 삼가고 싶으신 듯합니다. 당혹스러운 기분은 저도 충분히 이해합니다만……. ”
“ 아하. 요컨대 신분의 족쇄를 벗고 어깨에 힘을 빼고 싶다는 말이로군. 알겠소. 일종의 유희를 즐기고 싶은 것 같으니, 내 그 마음을 충분히 헤아리겠소. ”
“ 감사합니다. ”
다행히, 엘렌은 내가 붙인 어설픈 이유에 살을 부풀려 납득하는 기색을 보였다.
제법 눈치가 빨라서 그런지, 아니면 상상력이 풍부한 탓인지는 잘 모르나… 무난하게 넘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참 다행이었다.
공작님의 은밀한 취미를 까발리려 하면 가슴이 답답해지려 했으니까.
“ 자, 다음! ”
잠시 후. 미리 입을 맞춘 뒤 대열에 서서 순서를 기다리던 우리는, 차례가 오자 천천히 짐마차를 몰아 위병 앞으로 다가갔다.
“ 진짜 다크엘프로군. ”
위병은 짐마차 뒤에 쪼르르 서있는 여자들을 보며 굳은 낯빛을 드러냈다.
시야에 들어왔을 때부터 이쪽을 보고 놀라더니, 이제는 조금 적응이 된 모양이었다.
“ 그래. 엘렌 레드후드의 용병단이지. ”
“ 레드후드…! 그 악명 높은 계집들을 데리고 이곳까지 온 이유가 뭐요?! 여기엔 전쟁도 없는데! ”
그렇다 해도 레드후드의 악명을 듣는 순간 굳은 낯빛이 우르르 무너졌다.
자신을 붙들고 평정심을 유지하려 한 것은 좋았으나, 레드후드의 악명 앞에 부질없이 사라지는 것이 안타깝게 보였다.
“ 몬스터 사냥에 데려가려고 왔다. 리슬링 변경백령이 최종 목적이거든. ”
나는 제법 괜찮은 집안에서 하늘 모르고 자라난 애송이마냥 턱을 한껏 치켜든 채 비릿한 웃음을 그렸다.
안 해 본데다 어색하기 짝이 없는 일을 하려니 안면근육이 당기고 식은땀이 흐를 지경이었다.
“ 그, 그럼 용병단을 고용했다는 말… 말씀이십니까? ”
“ 그래. 네놈도 알다시피 내 연줄을 이용해 크라우저 공작령에 머무는 이들을 끌어들였다. 그러니 얼른 통과시켜. 귀찮게 하지 말고. ”
“ 하, 하지만 그… 도련님과 옆에 계신 분의 신분을 확인해야……. ”
도련님이라. 틀린 말은 아닌데, 이렇게 나쁜 인상으로 도련님 소리를 들으니 속이 쓰렸다.
헬레나의 요구라고는 해도 꼭 이래야 하나 싶을 정도로 자괴감이 들었다.
시종일관 오만함을 유지한 결과, 위병이 알아서 기는 모습이 안쓰러워 보이기도 했고.
자괴감은 곧 화가 되었고, 내가 왜 쓸데없이 이런 짓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이 떠올랐다.
물론 답이야 말할 것도 없이 헬레나 때문이지만, 속편하게 앉아있는 모습을 보니 가슴이 답답했다.
그 정도가 미약할지언정 화풀이 정도는 하고 싶었다. 그래야 속이 풀릴 것 같았다.
“ 아응…! ”
나는 보란 듯이 헬레나의 허리를 한 팔에 끌어안으며, 탄탄한 아랫배를 원을 그리듯 살살 쓰다듬었다.
정말 쓰레기 같이 행동하려면 가슴 정도는 주물러줘야겠으나, 과장이 너무 심한 것 같아 그만두기로 했다. 헬레나 본인에게도 너무 수치스러울 테니까.
하지만 강제로 끌어안긴 것도 모자라 내 손에 주물러지며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참 어이가 없었다.
“ 이 계집 말이냐? 내 노리개다. 우연히 주워 날 지키라고 검을 들리긴 했는데 별 재주는 없어, ”
“ 죄송… 합니다…! 아읏…! ”
나는 허리와 골반이 이어지는 곳으로 손을 옮겨 슬슬 문지름과 동시에 양아치들이나 할 법한 말을 쏟아냈다.
양아치 연기를 하고 있으니 양아치 같은 말을 쓸 수밖에 없더라도, 손을 아래로 미끄러뜨리지 않는 것은 내 마지막 양심이었다.
대놓고 주무르는 것은 골반 위쪽이 한계라는 뜻이다.
그래도, 노리개라는 말에 기뻐하는 걸 보니… 참 착잡하다. 즐거워서 더 착잡했다.
“ 그, 하지만……. ”
“ 이봐, 이곳 영주를 불러 와 일을 내야만 속이 후련하겠어? 진짜 그래? ”
“ 히익?! 그, 그건 안 됩니다! ”
이런 일로 영주를 부르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거기다 헬레나의 얼굴을 깎아먹을 뿐이므로, 하등 도움 될 것이 없는 행위였다.
즉, 눈앞의 남자를 겁먹게 하여 물러나게 하려는 일종의 허세였다.
그것도 적당히 통할만한 거짓 신분이 떠오르지도 않아, 단순하게 권위로 찍어 눌러 해결을 볼 생각으로 지른.
“ 그럼 길이나 터. 애초에 레드후드 만으로도 신분증명은 충분하지 않나? 안 그래? ”
채찍 다음은 당근이지. 나는 그럴 생각으로 품에서 은화 몇 개를 꺼내 위병의 눈앞에서 흔들었다.
여기서 뇌물을 주면 반대로 의심을 살 법도 같았으나, 겁에 질린 꼴을 보니 허세에 눌린 지 오래였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나는 내 나름대로 그럴 듯한 변명을 붙였다.
“ 이 돈은 내 호의다. 내 권위에 도전하는 것 같아 잠시 흥분했다만, 위병이라면 그럴 수 있지. 안 그런가? ”
“ 예, 예에…! 물론입니다! ”
“ 그래. 그러니 이 돈이나 받아 둬. 우리는 레드후드에 딸린 짐꾼 정도로 기록하면 그만 아니겠어? 응? ”
나는 쩔쩔 매는 위병을 향해 마지막 경고라는 듯한 뉘앙스를 짙게 깔았다.
이 이상 시간을 지체하면 크게 화를 내어, 그의 위병 생활을 아주 고달프게 만들어 줄 것을 암시하듯 눈을 가늘게 치떴다.
그에, 위병은 돈과 내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다 내 손에 든 은화를 낚아챘다.
얼핏 위병의 눈을 스친 탐욕도 그렇고, 지금 겁에 질린 것도 그렇고… 돈이나 받고 우리를 보내는 것이 여러모로 낫다고 판단한 듯싶었다.
“ 그, 그럼 부디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
위병은 짤막한 인사와 함께 몸을 옆으로 비켜 길을 열어주었다.
“ 진즉에 이랬다면 얼마나 좋았겠냐. 그래. 수고해라. ”
나는 앞으로 조심하라는 가벼운 충고를 남기며 짐마차를 몰았다.
귀족 같은 놈이 직접 짐마차를 몬다는 의심을 받을 만도 했으나, 그러지 않은 것이 참 다행이었다.
물론 그렇게 묻는다면 우리 집 가풍이 이렇고, 그에 대해 불만스러운 척 신경질을 낼 생각이었다.
집이 너무 엿 같아서, 너도 엿 같아 보인다는 말도 해 주고.
아무튼, 엘렌의 얼굴을 팔아 무사히 통과한 것은 좋은데…….
“ 으응……. ”
허벅지를 비비며 내 손을 만지작대는 것도 모자라, 달콤한 목소리를 흘리는 헬레나가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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