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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의 기둥서방이 되었다-49화 (49/192)

〈 49화 〉 농업의 민족 엘프 #3

* * *

처음, 와인 양조자는 영광스럽다고 생각했다.

이름 높은 크라우저 공작가의 부름을 받았다는 것이 자랑스러웠고, 자신이 특기로 하는 와인 제조에 힘쓸 수 있다는 일이 의욕을 불러 일으켰다.

노예조차 제법 취급이 좋다고 소문이 날 정도로 용인술에 정평이 난 이들이었으니 안심도 됐다.

다음, 자신이 일을 해야 할 장소에 발을 들였을 때, 양조가는 실망했다.

하필 그가 일해야 할 존재가 사람도 아닌 대륙 단위로 꺼린다 정평이 난 다크엘프 무리였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전쟁에서 악명 높은 그 레드후드가 이끄는 용병단이었으니마음 놓고 혐오감을 드러낼 수도 없었다.

자칫 목이 잘릴 것 같았으니까.

허나, 마지막에 이르러 그 생각을 완전히 뒤집을 수밖에 없었다.

명줄 부지를 위해 울며 겨자 먹기로 입에 넣은 포도의 단맛과 감칠맛, 그리고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상쾌한 느낌에 흠뻑 빠져버린 탓이었다.

이렇게 훌륭한 포도는 생전 처음이었고, 그 포도를 자기 손으로 빚어낸다는 것에 큰 경의를 표했다.

생산자로서 찍 소리도 못할 만큼의 재료를 손에 쥐어 준 이들에게 감히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양조자는 그러한 생각으로 와인 제작에 심혈을 기울였고, 그 과정에서 다크엘프의 손을 빌리는 것도 꺼리지 않았다.

그들 하나하나의 노동력이 가히 일당 백, 아니 일기당천에 달할 만큼 뛰어났기에.

“ 새삼 느끼는 거지만, 정말 대단하군요. ”

그는 자신과 다크엘프의 합작으로 만들어 진 와인들, 정확히는 오크통에 든 와인들을 바라보며 감탄을 흘렸다.

도움을 받았다고는 하나 와인 보관을 위해 제법 깊은 지하 카브를 파낸 것도 그러했으며, 한 쪽에는 와인을 보관하기 위한 선반 등등… 모든 시설이 훌륭해서다.

“ 그런가? ”

“ 여러분은 잘 모르실 수도 있겠지만, 정말 대단하다고 밖에 할 말이 없습니다. 그렇잖아도 만나기 힘든 엘프를 끌어들여 포도 농사에 투입할 생각부터가 비범하지만……. ”

양조가는 엘렌이 툭 던진 물음에 한껏 열을 올리며 답했다.

그의 생애에서도 손에 꼽을 만한 작품의 완성을 두고 있으니 흥분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저, 엘렌은 그런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기에 적당히 비위를 맞출 뿐이었다.

“ 그렇군. ”

우리의 손으로 키워낸 포도로 만든 와인을 먹기는 할까.

엘렌은 제법 거창한 계획을 말하며 웃던 지온의 얼굴을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지금도 잘 풀리지만은 않을 것이라 생각하는 건 매한가지이나, 조금씩 군살처럼 붙어가는 자신감이 기분 좋았다.

적어도 다크엘프를 인정하는 이들에게 인정받고 있으니까.

그래서 꿈만 같다고, 그녀를 포함한 다크엘프들은 생각했다.

태어날 때부터 눈치만 보고 살았던 이들에게 있어 가장 평화로운 시간이 바로 지금이었기에.

◎◎◎

섹스의 계절이군.

나는 눈이 내리는 바깥 풍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옛 일을 떠올렸다.

크리스마스, 즉 지저스께서 태어난 날이 되면 자기들도 예수님 같은 아이를 만들겠다며 모텔로 달려가는 풍경이 눈에 선했다.

특히 모텔에서 청소 아르바이트를 했던 적이 있았기에 그 현장감을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

가끔은 문 밖에까지 교성소리가 들릴 정도로 요란한 이들도 몇몇 있었고, 나는 그 때마다 미간을 찌푸리며 복도 청소를 하곤 했다.

그런데, 그런 내가 이제는 그런 소리를 내게 만드는 쪽이 되었다는 게 참…….

“ 아… 피곤해. ”

오늘도 집무에 여념이 없던 헬라나가 앓는 소리를 냈다.

얼마 뒤에 이 크라우저 저택을 찾을 같은 파벌의 귀족들과, 중립을 표방하는 이들에게 보내는 초대장 작성, 그리고 그 파티의 준비 등등… 요즘 들어 참 바쁘긴 했다.

연말이 되어도 느긋한 이가 있는가 하면, 이처럼 바쁜 이들도 있기 마련이었던가.

나는 헬레나의 잡무를 도우며 한가롭기 짝이 없는 생각과 함께 시간을 때웠다.

내가 헬레나의 보좌라도 주요 결정은 오롯이 그녀가 내려야 했으니, 머리를 싸매는 것도 당연히 내가 아닌 헬레나 쪽이었다.

“ 수고했어. ”

그 대신이라고 하긴 뭣하지만, 나는 갓 내린 차 한 잔을 헬레나 앞에 내밀었다.

은은하게 김이 피어오를 만큼 따뜻함을 간직한 차였기에, 추운 겨울날에 더없이 잘 어울려 보였다.

“ 고마워……. 그래도 이걸로 급한 불은 다 껐으니, 느긋하게 상황을 보면 될 것 같아. ”

헬레나는 차를 한 모금 마시며 긴 한숨을 토해냈다.

내게는 그 모습이 겨우겨우 손에 쥘 수 있었던 여유로운 한 때를 깊이 만끽하는 것처럼 보였다.

“ 벌써 겨울이라니……. 시간 참 빠르다. 그치? ”

“ 특히 올해는 일이 많았으니 더 그런 것 같기도 해. 바쁘면 시간이 흘러가는 것도 모른다고 하니까. ”

나는 헬레나의 넋두리에 공감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연초에는 여느 해와 다름없이 그럭저럭 느긋했던 것 같은데, 헬레나의 공작위 계승을 시작으로 크고 시끄러운 일들을 몸으로 겪었기에.

왕궁에서 시비가 붙은 것부터 시작해 킬리네어 공작가와 결투를 하고, 이제는 막 잠에서 깨어나기 시작한 와인 판로를 알아보기도 해야 했다. 며칠 전 양조가가 전해 준 와인 때문이었다.

술을 즐기는 사람이 아닌데다 막 나오기 시작한 와인인지라 별 기대는 없었다.

그저 포도가 맛있으니 와인도 맛이 있겠거니, 하는 다소 막연한 생각을 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양조가가 가져 온 와인을 맛보고 나서야 그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작정하고 만든 포도로 만들어서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포도와는 또 다른 깊고 복잡한 맛을 느낄 수 있었으니까.

“ 더구나, 아직도 큰 일이 남았다는 게 문제야. 지온을 원망하는 건 아니지만… 연회라는 게 워낙 귀찮아서. ”

“ 알 만해. ”

헬레나는 사교계 첫 발을 내딛은 후부터, 사교라는 말만 들어도 거부감을 드러냈다.

그녀 자신이 필요에 의해 참석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음에도, 나와 특정 여자가 엮일 것을 몹시 염려하는 눈치였다.

물론 거부감을 느낀다 해서 아예 발을 들이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좋던 싫던 공작으로 살게 된 이상, 그러한 모임을 통해 인맥을 만들고 유지해야 할 필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고상하게 혼자 살아가는 것도 한 방법일지도 모르나, 그러기에는 크라우저가 지닌 영향력이 제법 커서 문제였다.

더구나, 이번 연회에서는 다크엘프가 손을 댄 포도로 만든 와인을 내놓을 예정이니, 그 파란이 얼마나 클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예상치 못하게 잘 풀릴 가능성도 기대해 볼 법 하나, 너무 희망적인 생각이겠지.

“ 연회가 어떻게 될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속이 쓰려. 이럴 줄 알았다면 지온의 말이라도 받아들이지 말걸 그랬나…? ”

헬레나는 새삼 후회가 된다는 듯 나를 향해 눈을 흘겼다.

일을 저지를 날이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심장이 두근거리고, 긴장감에 목이 빳빳해지는 것을 견디기 힘들어하는 눈치였다.

나도 약하게나마 늘 긴장하고 있으니 오죽할까.

그러니, 할 말 없는 입장에서는 그저 고개 숙이며 미안하다는 말만 할밖에.

“ 정말? 그러면 어깨 좀 주물러 줘. ”

“ 예에, 그러지요. ”

결국 말을 질질 끈 의도가 응석 한 번 부려보려는 생각에서였을까.

나는 내심 쓴웃음을 지으며 아무렇지 않은 척 헬레나의 등 뒤로 다가가 어깨에 손을 얹었다.

이미 구석구석 만져보지 않은 곳이 없는 몸이었으니 부담스럽지도 않았고, 지극히 자연스러울 뿐이었다.

“ 으응…! ”

근육이 뭉친 듯 묵직한 어깨를 주무르자 절로 손에 힘이 들어갔다.

헬레나는 어깨에서 느껴지는 아픔 때문에 눈을 감은 채 달뜬 숨소리를 토해냈다.

책상에 오래 앉아있느라 어깨가 굳은 탓도 있겠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따로 있어 보였다.

“ 아, 거기…! 좀 더 꾹 눌러줘……. ”

한껏 긴장이 풀어져서 그런지 목소리의 색이 점점 더 짙어진다.

다른 사람 앞에서는 절대 드러내지 않고, 하기 조차 싫어하는 소리를 잘도 내뱉고 있었다.

단지, 나와 둘만 있다는 이유 하나로.

“ 미안해. ”

나는 손을 꾸준히 움직이면서도 힘 빠진 소리를 냈다.

일이 잘 풀린다면 헬레나의 위상을 한층 더 높이는 일이 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여러모로 안 좋은 말을 듣게 될 거라는 미래가 떠오른 탓이다.

내가 책임을 지고 안 지고를 떠나, 그런 소리가 나올 가능성이 있어보였다.

“ 미안? 지온이 왜 미안해? 지온을 소중하게 여기는 건 맞아도 결정을 내린 건 나야. 물론 사적 감정이 아예 없다고는 입이 찢어져도 말 못하지만, 그렇다 해서 사적 감정만으로 정한 것도 아니니까. ”

헬레나는 고개를 들어 올린 채 똑 부러지게 답했다.

바늘 하나 들어갈 틈도 느껴지지 않을 만큼 단호하기 짝이 없는 답이었다.

“ …맞아. 내가 생각을 잘 못 했나봐. 너무 오만한 생각을 한 것 같아서 재수 없을 지경이야. ”

“ 나는 재수 없는 지온이라도 괜찮아. ”

“ 말은 고맙지만 내가 안 괜찮아. 어쨌든 위로해줘서 고마워. 종자가 주인에게 위로를 받으니까 정말 사치스럽긴 한데……. ”

서로가 서로에게 얼마나 특별한지에 대한 것을 떠나, 단순하게 보면 주인이 종자를 위로하는 꼴이다.

크라우저 저택 안에서는 썩 드문 일이 아니긴 해도다소 부담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내가 복도를 걸으며 마주치는 사람들도, 주방에서 마주하는 사람들도 그랬고, 나 또한 그랬다.

“ 나 참. 안 되겠네. ”

뭐가? 라는 질문을 던질 틈도 없었다.

어느새 헬레나가 내 앞에 벌떡 일어나, 은근슬쩍 벽 구석 쪽으로 몰아붙였기 때문이었다.

“ 갑자기 뭐가? ”

“ 지온이 그렇게 비 맞은 강아지마냥 축 늘어져 있으니까, 주인으로서 좀 닦아 주려고 해. 괜찮지? ”

“ 헬레나. 지금은 일과 시간……. ”

얘가 또 시작이네. 나는 한숨을 쉬며 헬레나의 어깨를 잡아 부드럽게 밀어내려 했으나, 오히려 내가 벽 구석에 밀리고 말았다.

애초에 소드마스터와 무력으로 싸운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으니이게 당연하기는 했다.

“ 쉬잇. 내가 크라우저고, 내가 쉰다고 정하면 쉬는 거야. 안 그래? ”

보통 사람처럼 남을 배려할 줄 알기에 자칫 잊기 쉽지만… 그녀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헬레나 크라우저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이 나라의 공작이었으며, 오만하고 착취하는 생을 보낸다 한들 불만의 목소리를 내기조차 어려운 인간이었다.

평범한 공작이라면 모를까, 공작위를 쥔 소드마스터라는 점에서 더욱 그랬다.

다행히 헬레나의 인품이 좋은 편이라 다행이지, 여느 귀족 정도의 오만함만 갖추었어도 수습하기가 몹시 곤란했으리라.

분명 더욱 거친 조교를 써야 할 테고, 그로 인해 내 피로가 배 이상으로 늘겠지.

“ 그렇긴 하지만……. ”

“ 그러면 됐어. 벗어. 아니, 벗길게. ”

헬레나는 눈꼬리를 가늘게 뜬 채 입술을 혀로 쓸었다.

그 날 이후로 쾌락에 눈을 떠버린 탓에 저도 모르게 자기가 가장 돋보일 수 있는 몸짓이나 표정을 드러내곤 했는데, 지금이 바로 그랬다.

포기하자. 나는 욕정에 불타는 짐승의 눈빛을 보며 마음을 편히 하고 있었는데, 내 앞에 쪼그려 앉으려던 헬레나의 움직임이 딱 하고 멎었다.

엉거주춤한 꼴이 참 보기 묘했다.

“ …설마 노리고 온 건 아니겠지? ”

문득, 헬레나의 시선이 문 앞을 향했다.

겨울바람보다 싸늘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를 내며, 문 너머의 누군가를 알아 본 듯 사납기 짝이 없는 눈빛을 띠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입술을 깨문 채 문으로 다가가는 헬레나의 등을 바라보며, 은근슬쩍 집무실 책상 옆에 자리 잡고 섰다.

밖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이 나를 살린 것 같아 내심 고맙기도 했다.

“ 누구시죠? ”

헬레나는 마지막 이성까지 날아가 버리지는 않은 듯, 냉랭한 목소리를 내며 거칠게 문을 열어젖혔다.

상대가 답할 틈도 없이 행동하는 것을 보니 어지간히 따지고 싶은 모양이었다.

“ 어, 그게… 나중에 다시 와야 할 것 같은데……. ”

그리고 그 목표이자 문 너머에서 느껴지던 인기척의 주인, 엘렌은 헬레나의 언짢음을 눈치 챈 듯 말을 더듬거렸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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